"얘야, 그쪽으로는 가지 말아라."
"왜요?"
"거긴 인간은 들어갈 수 없는 곳이란다."
민석의 할머니는 주름잡힌 두 눈을 지긋이 감으며 민석을 향해 말했다. 어린 민석은 그녀의 말에 덜컥 겁이나 울창한 숲 속 그 어딘가에서 시선을 떼어 제 할미의 푸르누런 손을 잡고 언덕을 내려갔다. 그리고 그 후로는 단 한번도 그곳을 찾지않았다.
벌써 오뉴월의 더운 기운이 민석의 웃깃을 적셨다. 어엿한 성인이 된 민석이 근 15여년 만에 찾은 외갓집이었다. 할머니는 더 이상 언덕을 오를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졌고 유약한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기분이 몹시 이상해진 민석이 쓴웃음을 짓더니 잠시 밖으로 나왔다. 변한 것은 없었다. 삐그덕 거리는 녹슨 대문과 대여섯의 장독대들, 어린 민석이 세수를 했던 하늘색 대야도 색만 바랬지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저 그녀만, 민석의 할머니만 내뱉는 호흡이 너무도 거칠어져 있었다. 민석이 문득 늙은 제 어미를 보고 눈물을 참던 엄마의 얼굴이 떠올라 제 머리를 헝클였다. 짧은 순간이였지만 민석은 할머니께 무척이나 죄송스러웠다. 매일을 홀로 잠자리에 누워 그저 동이 뜨기를 바라는 그녀의 쓸쓸함과 고독함의 향기가 민석의 코끝을 후비는 듯 했다. 민석이 대문을 열고나왔다. 그리고는 경사진 쪽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우연이였을지도, 아니였을지도 모른다.
약간 숨이 찬 민석이 옷깃으로 땀을 닦고는 언덕의 정상에서 누웠다. 매미가 우는 소리, 나뭇잎이 흔들거리며 바스락대는 소리, 눈을 감아도 눈부신 햇살은 지난 날의 추억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민석이 갑자기 눈을 뜨고는 나무로 빽빽이 자리한 숲 속을 바라보았다. 기억이 상기되는 순간이었다. 민석이 끊임없이 그 숲 속을 주시하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더 이상 민석은 여덟살의 소년이 아니였다. 숲 속으로 완전히 걸어들어갔을 때에는 아까와는 다르게 아주 고요했다. 꼭 아무도 살지 않는 것처럼. 혹은, 낯선자를 경계하는 것처럼. 민석은 미처 15년 전 할머니의 말의 까맣게 잊은 것이었다. 인간은 들어가선 안되는 금기된 장소. 그곳에 그는 점점 깊이 들어가고 있었다. 어쩌면, 빨려들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를일이었다.
'여기서 나가.'
"누구있어요?"
'당장 나가.'
방향도 알 수 없고, 정체도 알 수 없는 음성이 민석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민석이 놀라 걸음을 멈추고는 음성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드디어 할머니의 말이 떠올랐다. 겁이 많던 어린 민석이 성인이 되어서라고 담력이 세지란 법은 없었다. 방향을 완전히 틀어 돌아가려 했을 때 그만, 민석의 낯빛은 사색이 되었다. 그의 앞에는 나무들이 그득히 들어차 길이 사라지고는 없었다.
분명 다음 날이 되면 모두들 나를 찾을거야, 민석이 스스로를 위안삼으며 어둑해진 숲 속에서 머물 곳을 찾고 있었다. 완전히 해가 사라져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기 전에 무엇이라도 찾아야만 했다. 다급해진 민석이 달리기 시작했고, 그는 동굴을 발견했다. 민석이 갈등했다. 동술 속에는 뭐가 있을지도 몰랐고 어쩌면 다시 동굴에서 나오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에 그는 한참을 망설였다. 그가 생각에 잠겼을 때, 해는 완전히 고개를 숙였다. 마침내 민석이 동굴로 들어가려고 했을 때, 그는 자신의 손목을 잡아채는 무엇인가에 의해 좀 더 빨리 동굴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누구세,"
"쉿."
영문모를 큼지막하고 뜨거운 손이 민석의 입을 틀어막았다. 곧 밖에서는 요란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샅샅이 뒤져서 찾아내."
"네."
"아직 인간의 체취가 남아있어. 얼마 못갔을 거다."
웅성대는 소리를 들은 민석은 설마 나를 찾는 것인가, 하고 추측했다. 동굴 바깥의 소리는 뿔뿔이 흩어져 곧 완전히 사라졌다. 그제서야 민석의 입을 막던 손은 사라졌고 민석은 가빠른 호흡을 내쉬었다.
"누구세요?"
"그러는 넌 누구고, 여긴 어떻게 들어왔지?"
"제가 먼저 물었어요."
민석이 꽤나 앙칼지게 말했다. 어두워서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으나 대면하기도 전에 둘은 아웅다웅댔다. 민석은 어쩌다가 이곳에 들어오게 됐는지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그는 민석의 말을 이해하려는 듯 침묵했다. 아, 내이름은 민석이예요, 김민석. 민석이 말했다. 민석이 상대방의 응답을 기다렸으나 그는 아무말도 없었다.
"그쪽은요?"
"..."
"저기요."
"어,어. 나는, 루한, 루한이야."
우리나라에 루씨도 있나, 민석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평범하지 않았던 첫만남이 끝났고 루한은 그 후 간간히 민석의 물음에만 답했고, 민석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내일되면 우리 부모님이 날 찾을거에요."
"그래, 꼭 돌아가라."
루한의 대답은 어쩐지 비꼬는 듯한 말투로 비춰졌으나, 그것은 순수한 진심일 수도 있었다. 어둠의 밤은 길었다.
-
민석이 눈을 떴을 때에는 곁에 아무도 없었다. 매정한 사람, 하고 민석이 말하자마자 아, 사람이 아닌가? 하고 자문했다. 역시 혼자있으면 혼잣말이 훨씬 늘게됨을 새삼 깨달았고, 더불어 할머니도 이러했을까, 하고 생각했다. 이곳이 어딘지 정말 인간은 들어와선 안되는지 궁금한게 너무도 많았지만 정작 그 궁금증을 풀어줄 이는 없었으므로 아무 소용없었다. 민석이 동굴 밖에 나무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보여 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누군가가 민석을 밀쳐 그만 고꾸라졌다. 문득 겁이난 민석이 몸을 잔뜩 움크렸지만 곧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민석을 밀친 그는 어제 들었던 음성과 동일한 자였다. 그래, 그는 루한이였다.
"난 아예 떠난줄 알았는데."
"그럴리가, 여기가 내 집인데. 떠나야 되는 건 너 아니야?"
듣고보니 맞는 말이였다. 민석이 괜히 민망해져 고개를 숙였다. 숙인 고개 사이로 루한의 흰 다리가 들어왔다. 그간 목소리만 들어왔던 탓에 처음보는 그의 모습을 민석은 찬찬히 시선을 옯기며 바라보았다. 그는 한눈에 봐도 훌륭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다 그가 상의를 완전히 탈의하고 하의도 거의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 민석이 당황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니, 오,옷은요? 왜 그런 것만 걸치고."
"신경꺼. 부끄럽냐?"
"참나, 무, 무슨."
민석의 버벅거림에 루한이 살풋이 웃었다. 민석의 볼귀짝이 붉게 물들었고, 빠르게 손부채질을 했다. 계절은 완연한 여름이 왔음을 알리는 듯이 그렇게 푸르르고 활기찬 내음이 났다.
"그나저나, 진짜 여기는 어디예요?"
"알면 다쳐."
"장난치지 말고요."
"농담아냐, 여긴 인간이 알아선 안되는 곳이야."
루한의 진지함에 민석은 더 이상 물음하지 않았다. 루한이 조금은 미안한 표정을 짓다가 바깥에서 갓잡은 생선을 가져왔다. 민석은 완전히 구석기시대라며 입을 비죽 내밀었다. 루한은 이내 뗄감을 가져와 단숨에 불을 지폈다. 민석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박수를 연신 쳐댔다. 생선들이 꼬챙이에 꽂혀 지글지글 익어갔고, 루한의 생선의 하얀 속살을 발라 민석에게 건냈고, 민석은 단숨에 입 속에 집어넣었다. 루한이 민석이 먹는 모습을 바라본 후 물을 가져오겠다며 동굴 밖으로 나섰다. 그 때였다. 민석은 루한의 검고 날카로운 발톱을 보았다. 그것은, 확실히 사람의 것은 아니였다. 그는 도데체 무엇일까.
도데체 알 수 없는 곳이였다, 이곳은. 어쩌면 이곳은 2013년이 아닐수도 있었고, 어쩌면 현실이 아닐 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