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습작 1
이번 역은, 신촌, 신촌 역입니다.
전철 내에 안내 방송이 울렸다. 전철 안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다들 바쁘게 몸을 움직였다. 위안은 좌석에서 몸을 일으켰다. 서 있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출입문 앞으로 향했다. 손에 쥔 핸드폰이 계속해서 울렸다. 분명 줄리안의 메세지일 것이다. 위안은 주머니에 핸드폰을 쑤셔 넣었다. 출입문이 열렸다.
출근 시간이라 하기엔 늦은 시간이었으나 역 안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위안은 사람들에게 휩쓸려 걸었다. 사람들을 따라 자신이 가야 하는 방향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걸 깨달았을 때, 위안은 핸드폰을 꺼냈다. 역시나 줄리안에게 메세지가 도착해 있었다.
[ 신촌역 4번 출구로 나가면 전화해 ]
국제전화라 요금 많이 나갈 텐데. 위안이 고개를 들어 안내 표지판을 바라보았다. 4번 출구는 자신이 걸어온 곳과는 완전히 반대편이었다. 위안은 몸을 돌려 다시 길을 걸었다. 바쁘게 걸어다니는 사람들 속에 파묻혀, 위안은 걷고 또 걸었다.
“여보세요? 나 지금 출구 나왔어.”
- 바로 앞에 버스정류장 하나 있지? 거기서 302번을 타고 우체국에서 내려. 우체국 맞은 편에 보면 농협 앞에 큰 골목이 있거든? 그 골목 따라서 걷다 보면 보일 거야! 우체국에서 그 회사까지 10분도 안 걸려! 그럼 끊는다!
정말 그대로 끊긴 전화에 대고 위안은 허, 짧게 웃었다. 줄리안이 한두 번 이러는 것도 아닌데 적응이 왜 이리 안 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위안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고개를 돌려 앞을 확인했다. 정말 가까이에 정류장이 있었다.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검은 코트 속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위안을 간지럽혔다. 정말 겨울이 맞구나. 위안은 주머니에 양 손을 넣은 채로 길을 걸었다.
버스를 타고 내리는 사이에 줄리안에게 문자가 두 통이나 도착했다. 그렇게 끊어 놓고 양심은 있나 봐? 위안이 생각했다. 하나는 어디쯤이냐는 문자였고 나머지 하나는 미리 얘기를 해 놓았으니 가서 줄리안 퀸타르트의 소개로 왔다고 하면 된다는 내용이었다. 위안은 답장을 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가는 길은 좁고 답답했다. 나름 한국에서 두 번째로 큰 엔터테인먼트 사라고 하길래 번화가에 위치하고 있을 줄 알았으나 잘못된 판단이었다. 위안은 줄리안이 말한 10분이라는 시간보다 훨씬 긴 시간을 걸은 후에야 목적지를 찾을 수 있었다. 누가 봐도 ‘나 엔터테인먼트 사옥이에요’ 라고 외치고 있는 듯한 건물 앞에 서서 위안은 심호흡을 했다. 매서운 바람이 위안의 옆을 지나쳤다. 위안은 몸을 짧게 떨었다.
거대한 유리문 옆에는 지문 인식기와 작은 창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위안은 당황한 채 주변을 둘러 보았다. 그러자 작은 창문에서 누군가 고개를 내밀었다. 위안이 가만히 그를 보았다. 사옥의 경비원으로 보였다.
“누구세요.”
그가 위안에게 말을 걸었다. 위안은 우물쭈물, 말을 삼키다 겨우 입을 열었다.
“저…… 줄리안 퀸타르트 소개로 왔는데…….”
“줄리안이면, 그 스타일리스트?”
“아, 네, 네.”
위안이 강한 긍정을 표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굳세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위안은 조심스럽게 한 발을 내딛었다.
사옥 안의 풍경은 위안에게 정갈하고 깨끗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살면서 한 번도 이런 곳에는 와 볼 일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위안은 입구에 있는 데스크 앞으로 갔다. 데스크에 있던 여성 직원이 위안을 보며 고개를 갸웃, 했다. 위안은 민망한 마음에 뒷목을 매만졌다.
“줄리안 퀸타르트의 소개로 왔는데요.”
“아, 5층 A2실에서 지금 기다리고 계세요.”
위안은 고개를 숙였다. 몸을 돌려 데스크 옆에 있는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이상하다. 설레는 마음보다는 께름칙했다. 뭔가 걸리는 것이 있는 것만 같았다. 묘한 기분에 둘러싸인 채로 위안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숫자 5를 눌렀다. 위안은 무의식적으로 으, 하는 소리를 냈다. 엘리베이터 밖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이었다. 위안은 눈을 감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숨이 트였다. 위안은 눈을 떠 밖으로 나왔다. 깔끔한 디자인의 벽면에는 아티스트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다. 위안은 눈으로 대충 훑으며 지나갔다. A2라고 크게 쓰여 있는 방 문을 열었다.
“아, 마침 여기 오시네.”
위안은 자신을 지칭하는 말에 순간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을 때,
“……어?”
그와 눈이 마주쳤다. 익숙한 얼굴, 놀란 표정. 타쿠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