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 년 동안 흑룡포을 입느라 재회가 조금 늦어졌다. 먼 날에 그 곳을 찾은 그는 이전의 일을 회상하며 잠시 추억에 젖고 있었다. 그립다. 울고 싶다. 그래서 아팠다. 사랑하므로. 그는 뜨거워지기 시작하는 눈을 애써 참아가며 절벽의 끝으로 다다랐다. 변한 것이 없었다. 여전히 황폐하고 몹쓸 것들이 많은 곳이었다. 그는 무심코 다리를 굽히고 앉았다. 곤룡포가 흙 살에 뒤덮여 더러워졌다. 무엇도 아닌 오조룡이었다. 그는 그 때처럼 신경 쓰지 않고 어디론가 손을 뻗었다.
그 날 여기에 있던 것이 정말로 우리였을까? 한빈은 아직도 믿지 못하였다. 그녀가 사라진 이 곳, 마지막이자 전부인 곳이었다.
꽃이 하나 피었다. 그 메마르고 날카로운 낭떠러지에. 그는 그것을 아주 소중하게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그대……. 듣고 있습니까."
반지를 돌려주려고, 왔습니다. 말하던 그가 녹이 난 반지를 느리게 꺼내었다. 너무 오랜 시간 함께 해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불분명했다.
"믿으라니 믿고 있었습니다. 계속 믿고 있었습니다. 사랑해주신다는 그 말을."
한참 전 소년의 것을 벗은 그의 뺨 위로 눈물 몇 가닥이 흘렀다. 그녀를 위해 쏟으라고 만들어진 것 같은 이 눈물은 언제나 그리운 것을 담고 있었다. 다 닳아버린 반지를 꽃 옆으로 두는 손이 잘게 떨렸다. 그 손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대도 나를…. 믿고 있습니까……."
언젠가 찾아올 날을 그리면서 그는 한참 울었다. 언젠가는 직접 손을 잡고 물을 날이 왔으면 좋겠다. 한빈이 소원했다. 이 위태로운 마음을 전해줄 수 없음이 그저 슬펐다. 잃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 그의 옆으로 문득 나비가 날아왔다. 나비는 나풀거리면서 꽃 위에 내려앉았다. 동시에 어딘가가 왈칵 시들어버린 냄새가 났다. 열렬히 사무치게 사모합니다, 뒤늦은 고백에 나비는 또 다시 날았다. 태양은 그 때보다 밝았다. 그렇게나 밝은 빛이 몇 번이고 꽃을 향해 다가갔다. 그의 꽃은 시들 이유가 없었고 영원했다. 곧 그 위로 그리운 향기가 고요하게 스미기 시작했다.
우리가 어느 별에서 그리워하였기에
이토록 서로 사랑하고 있느냐
우리가 어느 별에서, 정호승
남겨진 태양
김한빈
입 속에 모래 몇 줌이 들어와 씹히는 기분이 들었다. 한빈은 그녀가 사라진 그 곳에서 자신의 세계가 멸망되는 처참한 신경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봄의 기운이 따스한 어느 날이었다. 한빈은 꽤나 부루퉁한 얼굴로 두 눈을 아래에 박고 있었다. 어린 그의 얼굴 위로 떠오르는 성난 빛이 심상치 않았다.
"한빈아, 내가 얼마나 더 기다려야 네 고운 표정을 볼 수 있는 것이냐?"
"……."
"동생아. 그러지 말고 못마땅한 것을 좀 삭혀보아라."
진환은 잔뜩 신경을 써서 어린 동생을 달래고 있었다. 반상 위에는 서로의 기호를 잘 반영한 주전부리가 가득 올라와 있었으나, 한참 시간이 지나도 모두 새 것이었다. 한빈은 어쩐지 조금 슬픈 모양을 하고 있는 형의 말을 귀에 담아 듣지 않았다. 그저 자존심이 상했다. 그건 한빈이 가장 싫어하는 일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검을 잡는 일로는 패한 적이 없었다. 그 재능으로 아버지로부터 자잘한 칭찬을 받는 게 한빈의 낙이었다. 그런데 조금 전의 겨루기에서 그만 사소한 실책을 해 검을 놓치고 말았다. 누구도 아닌 반 쪼가리 동생에게서.
한빈은 그가 싫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완전한 동생도 아니었다. 그는 불완전했다. 늘 눈치를 보고, 나약해서 홀로 울음을 훔치는 일이 많은 동혁은 어느 틈엔가 한빈한테서 미운 털이 박혀 있는 상태였다. 몇 해 전부터 궁 안에서 검을 익힌다는 그를, 한빈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나 가냘픈 태도로 검을 제대로 쥘 수나 있을지 의문이었다. 한빈은 그가 분명 검의 명성에 해를 끼칠 것이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당연한 예상과는 반대로, 언제부턴가 그는 뛰어난 검술을 가진 존재로 항간에 떠돌게 됐다. 그래도 한빈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누구보다 검을 잘 다루어도 어차피 그는 미천한 존재였다. 그렇게 마음 먹을 뿐이었다.
한빈이 생각하기에, 진환은 넘칠 정도로 이해심이 많고 배려하는 쪽의 사람이었다. 한빈은 형을 도통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았다. 그를 감싸고 아끼는 것 역시 이해할 수 없었다. 동혁은 궁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나중에 진환이 자신에게 소홀해지기라도 하면 그걸 배신으로 여겨 한동안 우울에 빠져 있을 법한 천성이었다. 한빈은 지금조차 동혁의 편을 들고 있는 형이 미웠다. 괜히 그와 검술을 겨루게 한 진환이 밉고 자존심 상했다. 이러다가 형이 주는 사랑을 그에게 모두 뺏길 것만 같았다. 한빈은 잠시 아까의 그 눈을 떠올려냈다. 어려울 것 없이 자연스럽게 진환에게로 향하던 두 눈을. 쉽게는 용서할 수 없는 눈이었다.
"…그래, 다 내 잘못이다. 모두 내 과실이었다. 너희에게 그런 걸 시키는 것이 아니었는데……."
실조에 빠진 사람처럼 힘이 없는 말투였다. 한빈은 자책하고 있는 형에게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왜인지 입은 잘 떨어지지 않았다. 이미 충분히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지만 부족했다. 한빈은 형한테서 진심 어린 사과나 듣자고 이렇게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냥, 더 낫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원망스러워 보이는 눈과 마주쳤다. 한빈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보통 관복을 입고 있는 그는 멀지 않은 날에 곤룡포를 걸치게 될 것이었다. 한빈은 조금 적막하게 변한 공간 속에서 매작과를 한 입 깨물었다. 그 둘은 전혀 다른 생김새를 지니고 있었고, 식성 또한 마찬가지였다. 달콤한 것이 눈 앞에 있으면 일단 인상부터 구기고 보는 한빈이 형 덕에 상 위로 함께 올라온 과편이며 유밀과를 잠시 시선했다. 거기서는 조금 심하게 단 냄새가 나서 금방이라도 헛기침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형의 앞이니 내색할 수 없었다. 그저 좋다고 최면을 걸고 있는 게 최선이었다. 이런 한빈의 고충은 진환이 알기가 어려웠다.
진환은 동생이 쌉쌀한 과자를 입에 넣는 것을 보고 이윽고 천천히 손을 들었다. 혀가 녹아버릴 정도의 달콤한 것을 대수롭지 않게 입으로 가져가는 형이 문득 대단하게 보였다. 진환은 그 빤한 눈빛을 그만 탐내고 있다는 것으로 착각하고, 한 번 뜯은 자국이 남은 약과를 동생에게 건네며 먹을 것을 권유했다. 한빈은 그가 내밀고 있는 것에 질색할 뻔한 것을 겨우 참아내고 여전히 토라진 것처럼 고개를 내저었다. 진환은 자신의 손을 거부하는 동생의 화를 속으로 가늠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또 자책했다. 또 원망했다. 동혁을 좋게 돌보지 않으려는 동생에게 진환은 여러 감정이 생겼다. 그는 마저 약과를 씹다가 물었다.
"아직 어리고 애정이 필요한 아이다. 부디 잘 챙겨줄 수는 없는 것이냐?"
"……형님!"
더는 못 참겠다는 식으로 한빈이 큰 소리를 냈다. 이글거리고 있는 동생의 눈 속에서, 진환은 언뜻 서운한 감정을 보았다.
"그 못난 아이만 어린 줄 아십니까? 저도 어리고 저도 애정이 고프단 말입니다!"
"……."
"이제는 저를 내팽개치시려는 겁니까? 줄곧, 제가 조선의 명검이라고 예찬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오늘은……."
한빈은 거기까지 말한 뒤에 입을 다물었다. 진환은 동생의 말을 해석하고 있느라 잠깐 약과를 맛 보던 입을 멈췄다. 형을 빼앗길 느낌에 불안했던 것인지 한빈은 조금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진환은 그 빨간 눈을 바라보다가 기어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형은 웃고 있고, 동생은 귀까지 발갛게 변한 채로 눈물을 참고 있었다. 모순적인 광경에 그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궁녀들이 분주하게 눈짓을 주고 받았다.
동생은 형이 웃고 있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저 끝까지 숨기고 싶었던 속을 모두 털어버린 것이 살짝 창피했다. 진환은 한참 후에야 웃음을 그쳤다. 한빈의 머리통 위로, 따뜻한 손길이 내려앉았다. 진환은 사랑스러운 동생의 머리칼을 몇 번 쓰다듬었다.
"동생아."
"……."
"내가 제일 사랑하는 동생아."
"…예, 형님."
"이제 그만 네 화를 녹일 수는 없겠느냐?"
"……."
"나는 너처럼 용감하지 못해서, 칼을 쥐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구나."
"……."
"…네가 칼을 쥘 때마다 나는 다만 속으로 빌고 있단다. 부디 다치지만 않기를."
한빈을 바라보는 진환의 눈이 문득 환하게 접혔다.
"그리고 또 빌고 있단다. 그 애가 숨 쉴 때마다…. 부디 다치지만 않기를."
형을 바라보는 눈에서 별이 움직였다. 유성이 흘렀다. 가슴 깊숙하게 잇닿는 말에 한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환은 이내 동생에게서 손길을 거두었다. 찬란한 태양의 앞에서, 울분은 이미 녹은 채로 발견되는 중이었다. 한빈은 천천히 호선이 되는 진환의 입 모양을 쳐다봤다. 닮고 싶은 미소였다. 한빈은 몸을 일으키는 형을 따라서 무릎을 세웠다.
"네가 그 아이를 소중히 응하면 좋겠구나."
그 말을 남기고 방을 떠나는 진환을 한빈은 오랜 시간 쳐다보았다. 형의 부탁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몸 곳곳에 박혀버렸다.
봄이 조금 지나갈 때 형의 책봉식이 있었다. 중국의 인준을 받아 그는 조선의 세자가 되었다. 한빈은 마침내 곤룡포를 몸에 두를 수 있게 된 형이 기쁘면서도 부러웠다. 형은 분명 좋은 왕이 될 것이다. 그는 무작정 생각했다. 항상 백성들을 우선으로 생각하며 착한 마음을 가진 그런 좋은 왕이 될 것이었다.
며칠이 지났다. 한빈은 활을 쏘고 있었다.
"명중이오!"
활은 빠짐 없이 모두 명중을 기록했다. 멈출 틈 없이 궁현을 잡아 끝까지 당기고 있는 그를, 동혁은 옆에서 멀거니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불러낸 어려운 형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한빈은 동혁에게 아무 말하지 않았다. 그저 옆에 세워 두고 계속해서 활을 쏘고 있을 뿐이었다. 과녁의 중심에 꽂히는 활엔 조금의 오차도 없었다. 동혁은 손뼉을 쳐야 할지, 아니면 계속 이렇게 멀뚱히 서 있기만 해야 할지 심각하게 갈등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다섯 발의 화살이 연속으로 날아가며 명중했다.
한빈은 조금 뻑뻑해진 어깨를 돌리면서 무심하게 동혁을 쳐다봤다. 키가 작고 몸도 마른, 좀처럼 닮은 구석이 없는 동생은 겁 먹은 얼굴로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한빈은 그에게 자신이 쓰던 시위를 넘겼다. 얼떨결에 형의 것에 손을 대게 된 동혁은 긴장한 채 몸을 떨고 있는 중이었다. 그걸 바라보며 한빈이 말했다. 여전히 각별하지 않은 목소리였다.
"누가 너한테 과녁이 되라고 시켰더냐?"
"…아, 아닙니다."
"아닌 걸 알면서도 이렇게 떨고 있는 것이냐?"
"……."
"난 너한테 활을 가르치려는 것뿐이야."
"……예…."
"…참, 누굴 닮았는지."
그 말에 동혁은 기가 죽은 눈이 되었다. 한빈은 그에게서 느껴지는 답답함에 잠시 주변의 숨을 모조리 빨아들였다. 이윽고 그는 그 작은 어깨에 손을 올리고 최대한 상냥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째서 활을 일깨우게 하려는 것인지는 알려주지도 않았다.
"…활을 당길 때는 숨을 조금 더 마셔야 한다. 그리고 줄을 당기면서는 내쉬고, 과녁과의 선을 맞출 때에는 멈춰야 한다."
영 알아듣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한빈은 더 이상 덧붙이지 않고 턱으로 저 멀리를 가리켰다. 당장 활을 쏘라는 것이었다. 동혁은 할 수 없다고 말하려다가, 포기하고 시복에 담긴 화살 한 발을 집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턱을 삼킬 것처럼 조이는 활의 줄이 아팠다. 동혁은 조금 길게 조준을 하고 시위에서 손을 놓았다. 활은 빛처럼 빠르게 나아가서, 과녁의 중앙 조금 못 미친 부분에 꽂혔다.
"적중이오!"
흰색 깃발이 위로 올라가는 게 보였다. 동혁은 얼떨떨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옆에 서 있는 형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한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동혁은 마른 침을 삼키면서 그가 어떤 말이라도 꺼내기를 기다렸다. 한빈은 말랑말랑한 살갗에 궁현의 자국이 빨갛게 남은 것을 한 번 쳐다보았다. 동혁은 자신의 손으로 집중되는 그의 시선을 느끼고서 얼른 뒤로 팔을 숨겼다.
한빈이 목을 가다듬었다.
"제법이구나."
"…예?"
"나를 닮은 모양이야."
"……."
"내 형은 무술을 싫어하신다."
그는 간결하게 말한 뒤에 여전히 뒤에서 꿈틀대고 있는 손을 덥석 움켜잡았다. 그대로 활을 쥐어주고, 손을 겹쳐 아까처럼 줄을 당기는 모양새를 만들어주었다. 잡히는 손이 미지근했다.
"자, 보아라. 중심에서 조금 아래로 꽂혔다는 것은 활을 쏠 때 네 시선이 가지런하지 못했다는 걸 뜻한다. 이번에는 손에 좀 더 힘을 쥐고……."
동생의 손을 올바른 방향으로 잡아주다가 한빈은 문득 말을 멈추었다. 옆에서 미세한 흐느낌이 느껴졌다. 한빈은 바로 고개를 돌려서 동혁을 바라보았다. 그는 물이 출렁이는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곧 그 밑으로 눈물 한 가닥이 떨어졌다. 한빈은 그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가까이서 보는 동생의 눈물은 처음이었다. 한빈은 동혁의 소리 없는 눈물이 당황스러웠다.
"…왜, 왜 그러는 것이냐? 줄을 잡고 당긴 손이 많이 욱신거리느냐?"
동혁은 답하지 않았다. 그저 활을 들지 않은 손으로 느리게 눈가를 문지르고 있을 뿐이었다. 한빈은 옆에서 자꾸 왜 그러냐고 묻고 있었다. 동혁은 닦아도 잘 지워지지 않는 눈물이 야속했다. 한빈은 이제 동혁의 손을 낱낱이 살피고 있었다. 제대로 헛다리를 짚은 그는 따가울 것 같은 손바닥 위를 서툴게 쓸어주었다. 동혁은 그의 온기가 닿고 있는 손을 한 번 오므렸다. 꼼꼼히 손을 살피고 있던 그가 반사적으로 동혁을 쳐다보았다.
"…기뻐서 그럽니다."
"……."
"형님이 제게 활을 가르침하실 줄 몰랐습니다."
"…넌 사내가 되어서, 같잖은 것에도 눈물이 많구나."
약간의 물기가 섞인 말에 한빈은 아주 잠깐 혓바닥을 질겅거렸다. 그는 욕하는 말을 중얼거리면서 얼굴 위로는 가볍게 웃음 짓고 있었다. 동혁은 이제 막 완벽하게 눈물을 닦아냈다.
한빈이 또 다시 그 위로 손을 잡아 활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적중이오!"
중앙에 거의 근접한 활이 꽂혔다. 한빈은 진환이 했던 행동을 떠올려 그의 머리통에 손을 얹어줄 생각을 하고 있다가, 이내 고갤 저으며 관두었다. 그건 아직 섣불렀다.
또 며칠 후에, 한빈은 형의 부름을 받고 사람의 손을 거의 타지 않은 후원의 뒤로 걸음을 옮겼다. 그저 간단히 담소만 나눌 줄로만 알고 가벼운 마음으로만 향한 곳이었다. 그리고 큰 불찰이었다. 그는 거기서 그닥 마주치고 싶지 않은 얼굴을 보고 말았다. 전에도 몇 번 보여준 적이 있는 서책을 넘기고 있는 형은, 무엇인가를 발견해 딱딱하게 굳어있는 표정의 한빈을 손짓하며 불렀다. 한빈은 움직이고 싶지 않은 다리를 억지로 끌어 그의 앞으로 갔다. 진환의 옆에는, 전과 변함 없이 두려움이 가득인 얼굴의 동혁이 있었다.
"일전에 네게서 활을 배웠다고 아주 기뻐하더구나."
"……."
"고맙다, 동생아."
진환은 많은 말을 생략한 채 고맙다는 칭찬만 했다. 한빈은 어쩐지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뒷목에 잠시 손을 가져갔다. 차가운 손으로 그 열을 식히니 한결 나았다. 말로 설명 못할 화끈한 기운이 점차 가라앉는 중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머릿속으로, 형에게 활을 배운 것을 자랑했을 동혁의 목소리를 그리고 있었다. 도무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하지 못했다. 그는 동혁이 가진 다양한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울어 언성을 높이게 되는 괴팍한 소리나 기뻐서 수줍게 말하는 것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한빈이 유일하게 들었던 동혁의 목청이란 겁에 질려 떨어대는 음색, 그것 단 하나였다.
한빈은 동혁을 쳐다봤다. 진환의 옆에 꼭 붙어서 올망졸망 눈만 굴리고 있을 뿐인 그는 이상한 화를 솟구치게 했다가 또 가령 동정심 같은 딱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이번엔 승과 패를 있게 하지 말고, 그냥 검만 서로 부닥치게 하거라."
다시 동생과 검을 겨루라는 것이었다. 그 어처구니 없는 명령에 한빈은 기가 차서 씨근덕거리는 숨을 내뱉고 있었다. 진환은 태연히 말한 뒤에 마저 서책을 넘기기 시작했다.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는 그의 독서는 은근한 오기를 일게 만들었다. 한빈은 이름 모를 호위무사가 건네는 칼 두 자루를 받아 그 중 하나를 동생에게로 건넸다. 긴장된 빛이 역력하게 검을 받고 있는 그는 반짝거리도록 깎은 날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동혁아."
"…예, 저하."
"내 동생이 너한테 패한 후로 심기가 몹시 불편했다고 하더구나. 이번에는 조금 살살 하거라."
괜히 약을 올리기 위해 하는 말임을 알면서도 한빈은 동혁한테로 쏠리는 형의 관심이 미웠다. 이번에도 지면 정말로 형의 관심에서 박탈 당할 것이란 생각에, 한빈은 이를 악 물었다.
한빈은 손에 모든 집중을 모았다. 모든 소리와 보이는 것을 차단하고, 칼이 가진 빛의 세기를 가늠할 수 있을 정도로 오로지 그 움직임에만 집중했다. 동혁은 진환의 말을 아주 착실하게 들을 것인지 전처럼 검을 위로 치켜들고 있지 않았다. 한빈은 스스로 숨을 조이고 참아가면서 동혁이 칼을 휘두를 때를 예상했다. 낮은 곳을 향하며 서서히 꿈틀거리고 있는 동혁의 검이 한빈의 눈에 담겼다. 그리고 그의 목광이 사뭇 달라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 것처럼 출렁이던 두려움의 형상이 지금 그의 두 눈에선 보이지 않았다.
급작스럽게 등을 피한 곳으로 동혁의 검이 날았다. 동혁은 빠르게 시선을 바꾸며 사라진 형의 잔상을 쫓았다. 그것이 실수였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에 손에서 검을 놓쳤다. 그 검을 옆으로 넘어뜨린 한빈은 늦추지 않고 그가 구부리고 있는 무릎 바로 뒤로 손을 뻗었다. 긴박감이 조성되고 있는 기류 속에서 제외인 것은 오직 진환 혼자였다. 그의 옆으로 늘어선 호위무사들마저 단정히 손을 모은 채 열중임에도 정작 그 둘의 형인 세자는 여전히 서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여유롭고 더디게 책장을 쥐고 있다가, 일순간 들려오는 나른하지 못한 소리에 고개를 정면으로 들었다.
칼들의 발악이 멎어 있는 상태였다. 진환은 서책을 덮고 몸을 살짝 일으켰다. 옆에서 걸음을 옮기려던 호위무사의 팔을 붙잡았다.
한빈은 동혁의 혈관이 터지고 있는 것을 보고 더는 재지 않고서 칼을 손에서 놓았다. 어린 만큼 미세하고 정교한 짜임의 핏줄이, 뺨에서 도드라져 피를 흐르게 하고 있었다. 새빨간 선혈에 한빈의 눈이 커졌다. 그는 그의 얼굴에 남긴 상처가 정녕 자신이 저지른 짓인지를 속으로 심판하고 있었다. 동혁은 느리게 손을 들어 축축해진 얼굴 어딘가를 문질렀다. 한빈은 곧 끈적이는 형태로 손에 묻게 된 피를 그저 쳐다만 보고 있는 동생에게 좀 더 다가가 허리를 굽혔다. 불편한 사이인 동생과 눈이 마주치고, 그는 따가운 침을 삼켜내면서 조심스럽게 어린 얼굴 위로 떠오른 흠집을 살펴보았다.
피는 뺨을 타고 꼭 눈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한빈이 한 번도 손 대지 않았던 동생의 얼굴 피부 위로 소매를 가져갔다. 그가 입고 있는 관복에 서서히 동혁의 피가 흔적으로 남기 시작했다. 피는 멈추지 않았다. 그걸 멎게 하려는 한빈의 손 동작도 멈추지 않았다. 동혁은 자신의 뺨을 조금 억세게 닦아내고 있는 형의 모습을 멍하게 쳐다봤다.
그러기를 잠시, 한빈이 그에게서 손을 놓고 별안간 뒤를 돌았다.
"업히거라."
"…예?"
"피가 멈추지 않으니 업히거라. 내의원에 가야겠다."
"전 괜찮습니다, 형님. 그저 살이 살짝 벌어진 게 아닙니까."
그 대화를 들은 어느 호위무사 하나가 앞으로 다가왔다. 대신하여 동혁을 데리고 내의원에 가겠으니 그만 꿇은 무릎을 펴라는 말에 한빈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손가락을 까딱이는 것으로 아까처럼 등에 업히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다리를 다친 것도 아닌데 굳이 이렇게 부담스럽게 구는 한빈을 동혁은 이해할 수 없었다. 처음으로 보는 형의 곧은 등이 평평했다. 동혁은 태평하게 형의 등판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빈은 흐르는 시간이 못내 불안하여 작게 입술을 씹었다. 조금만 더 지체된다면 보드라운 뺨에 보기 흉한 칼 자국이 남을 것 같았다. 그 상처는 영원히 아물지 못할 것 같았다. 한빈은 여태 업히지 않고 있는 동혁이 답답해 문득 뒤를 돌았다.
"대체 언제까지 나를 기다리게 할 것이냐?"
"…실수를 하신 게 아닙니까. 전 괜찮습니다. 그저 잠시 천을 대고 있으면……."
"실수가 아니라고 하면 업히겠느냐."
"……."
"…실수가 아니었다! 모두 내 진심이었으니 어서 업히기나 하거라."
어서! 한빈이 버럭했다. 동혁은 어쩔 수 없이 그 등으로 다가갔다.
진환은 그 모습을 보며 조금 웃다가 다시 서책을 집었다. 동생들의 태도가 흥미로웠다. 얼마 후, 후원의 뜰엔 칼 두 자루만이 덩그러니 놓였다.
한빈은 내의원으로 향하면서 침묵을 지켰다. 도착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피가 낭자한 모습의 동혁을 보고 의원들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상태를 확인했다. 피는 단지 볼에서만 출발했을 뿐, 사실 다른 곳에서 보이는 빨간 것들은 모두 묻거나 한빈의 소매에서 옮겨온 것이었다. 익숙하게 치료를 시작하는 의원들과 멀찍이 떨어져 있던 한빈이 괜히 바쁘게 뒤를 돌고 다시 정면을 주시했다.
"상처가 쓰라리십니까? 조금만 참으시지요."
늙은 목소리에 한빈은 반사적으로 동혁의 얼굴을 확인했다. 울고 있었다. 한빈은 속으로 혀를 찼다. 계집인 것도 아니면서 저렇게나 눈물이 많은 동생을 도무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곧 그게 저번 날의 눈물과 같은 종류의 것임을 알았다. 좋아서 나온 눈물이었다. 그는 여전히 소리 없이 흐느끼는 그를 두고 내의원을 나섰다.
그렇게 밖으로 걸음을 옮기던 찰나에, 모든 것이 검게 변했다. 한빈은 화들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사방이 캄캄했다. 밤에 보던 야행성의 어둠 따위가 아니었다. 수상한 암흑에 심박이 빨리 뛰었다. 위와 아래의 구분이 없고, 하늘과 땅의 감촉이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밟고 서 있는 바닥이 실은 물컹한 증기일지도 모르겠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여기가 어딘지 몰랐다. 한빈은 뒤를 돌았다. 아무도 없었다.
어디선가 형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한빈은 그 소리의 근원을 찾으려고 애썼다. 소리는 점차 커졌고, 곧 근방에 있는 것처럼 생생해졌다. 그 때 누군가가 한빈의 손목을 포근하게 붙잡았다. 이 감각을, 그는 잘 알았다. 형이었다. 한빈은 이 알 수 없는 검은 적막 안에서 형을 만난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손이 존재하고 있는 방향을 찾았다. 형이라면 무서워 말라고 다독여줄 것 같았다.
그리고 숨이 멈췄다. 일순간에 모든 암흑이 피 빛깔로 변했다. 한빈은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는 이가 진환이 틀림 없다고 믿을 수 있었지만, 왜인지 등은 쉽게 뒤 돌지 못했다. 어떤 것에 잡혀 있는 손목이 어느 순간부터 뜨거워졌다. 뜨겁고 질척거리는 피였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흠칫 몸을 떨었을 때 또 다시 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망설임 없이 뒤를 돌았다. 바랄 것도 없이 진환이었다. 한빈은 그 때에서야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았다. 전과는 다르게 귀도 잘 들리지 않았다. 형의 음성을 모을 수 없었다. 문득 진환의 가슴팍이 붉어지고 있었다. 주변의 모든 것이 빨갛게 변했다.
악몽이었다. 한빈의 꿈에 나타나는 진환은 어기지 않고 항상 빨간 모습이었다. 형의 죽은 모습을 본 뒤에 한빈은 종종 이런 아픈 꿈에 시달리고는 했다. 걱정하는 것 없이 웃을 수 있었던 희미하고 눈물겨운 냄새가 나는 그 어린 시절의 조각이 모든 꿈의 시작이었다. 철 없이 동혁을 미워하고 하늘처럼 따르던 형이 보이는 꿈. 그리고 마지막에는 항상 혼자가 되어서, 임종을 맞는 형의 모습을 체험했다. 한빈은 눈을 뜨기가 무서웠다. 꿈에서라도 보고 싶은 형은 굳이 피로 범벅된 모습을 하고 한빈의 머릿속으로 나타났다. 이젠 피가 묻지 않은 모습이 낯설 만큼 그 때의 진환은 검붉었다.
한빈은 형이 누웠던 곳에서 작게 앓는 소리를 내며 뒤척였다. 자꾸만 떠오르는 형의 잔상이 괴롭다. 괴로워서 숨 막혔다. 주변의 기운이 어슴푸레했다. 아직 아침이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나쁜 꿈을 겪어내느라 젖어버린 눈가를 힘겹게 닦아냈다. 여러 복잡한 감정들이 치밀어 올라왔다. 태양이 되고 싶지 않았다. 조선을 이끌 용기가 없었다. 한빈은 새벽이 찾아오는 순간마다 막중한 현실들을 떨쳐내고 싶었다.
궁 곳곳에 죽음의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한빈은 처음 보는 흑룡포의 빛깔이, 무척이나 탁하다고 생각했다. 입고 싶지도 않았고 입을 필요도 없어 보였던 흑룡포는 허무할 만큼 쉽게 한빈의 앞으로 내밀어졌다. 형의 장례가 있는 날이었다. 한빈은 울지 않았다. 그저 맑은 하늘을 몇 번이고 눈에 담아낼 뿐이었다. 슬픈 날에 비가 내리지 않는 비참한 이유를 생각했다. 답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울고 있는 그녀가 보였다. 한빈은 그 모습을 한참 지켜봤다. 눈이 마주칠 뻔한 뒤에는 그대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장례가 끝나고 자선당으로 향할 때 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진 용모가 화려해 화사한 색에만 어울리던 그녀였는데 이렇게 보니 검은 빛깔도 썩 괜찮았다. 한빈은 자신을 위로하려는 기색이 역력한 윤을 말 없이 쳐다보다가 지끈거리는 이마를 잡았다. 두통은 야금야금 한빈의 정신력을 앗아가고 있었다. 윤은 그런 그를 걱정스럽게 쳐다보다가 문득 뜻 모르게 웃었다.
"저하,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항상 온화하셨던 그 분을 잃게 된 저하의 마음을 감히 헤아릴 수 없을 것 같…."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예?"
"…아, 방금은 실언했습니다. 저하로 불리는 내가 하찮고 어색해서……."
평소에는 듣고 싶어 안달이었던 윤의 목소리가 지금은 왜인지 머릿속을 더욱 혼잡하게만 할 뿐이었다. 한빈은 나름 괜찮은 변명을 하다가 불편하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먼저 제안했다.
"…후원에 가겠습니까? 만개한 꽃들을 보여주겠습니다."
그 말에 윤은 금방 좋다고 밝은 얼굴이 됐다. 한빈은 곁에 있던 호위무사들을 먼저 돌려보내고 후원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 너머에 소중한 기억을 만들어준 뜰이 있다. 한빈은 멍하게 허공을 쳐다보다가 재촉하는 윤의 말에 못 이겨 마른 침을 삼켜냈다. 벌써부터 향기에 몸이 나른해질 기미가 보였다. 머리가 아픈 것은 좀처럼 나아지질 않았다. 진한 꽃 향기에 어지럽고 갑갑한 느낌이 전보다 더 심해졌다. 그러나 한빈은 내색하지 않았고, 단지 좋아하는 사람에게 가벼운 미소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었다. 후원에 들어서고 윤이 문득 어떤 꽃 떨기 하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저하, 이 꽃을 기억하십니까?"
까끌까끌한 감이 있는 낯선 호칭에 불끈 주먹이 쥐어졌지만 한빈은 그냥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윤이 말하고 있는 꽃은 기억되는 이름이 무뎠다. 하지만 어여쁜 색깔이 뇌리에 박혀 있었다. 언젠가 윤을 처음 보았을 때, 닮았다고 느낀 바로 그 꽃이었다. 꽃잎은 살짝만 건드려도 찢길 것처럼 연약했으나 그만큼 부드러운 노란 빛이 돌아서 아름다웠다. 윤은 수줍게 두 볼을 붉히고 조심스럽게 꽃을 쓰다듬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좋아하는 건 꼭 가져야 하는 성미였다. 한빈은 윤을 좋아했다. 그래서 가져야 했고 그래서 가졌다. 그는 자신의 것을 잃고 싶지 않았고 부디 오래 곁에 두었으면 했다. 한빈은 윤의 옆선을 짐짓 안타깝게 응시하고 있었다. 아마 배신 당한 기분일 것이었기에. 한빈은 오래 전, 윤에게 자신의 영원을 약속했던 날을 버겁게 떠올려냈다. 서로의 새끼 손가락을 걸었고 모두가 진심이었지만 그건 이제 만만한 사랑 놀이에 그치게 됐다. 그는 윤이 안쓰러웠다.
과민해서 아닐 줄 알았던 인기척이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한빈은 어여쁜 꽃들이 숨 쉬고 있는 공간에서 준회, 그를 보았다. 그는 입가를 가린 두건 위에서 싸늘한 눈빛을 사방으로 퍼뜨리고 있었다. 한빈이 인상을 구겼다. 무심코 윤의 손목을 잡아챘다.
순간적으로 스치는 생각에 한빈은 작게 눈썹을 움직였다. 세자빈의 호위무사였다. 그 혼자서 이런 곳을 찾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빈은 그녀에게 들켰을 이 모습에 저절로 한숨이 났다. 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그녀의 호위무사에게 무언가를 물으려다가 이내 관두었다. 옆에 윤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윤의 손목을 비틀 것처럼 잡고 있었다.
이윽고 호위무사는 천천히 멀어졌다. 형의 옆에 있는 것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한빈은 아까처럼 별 탈 없이 쏟아지기 시작하는 윤의 음성을 끝으로 모든 생각들을 접어 구겨버렸다.
윤과의 꽃 구경은 두통을 조금 완화시켰다. 윤을 배웅하기 위해 궁의 입구에 다다를 생각을 하고 있던 그가 조용히 걸음을 멈추었다. 그런 한빈을 따라 윤의 시선이 어디론가 굴러갔다. 윤은 괜찮다는 뜻으로 웃었다. 한빈은 윤과 영영 마주치게 하고 싶지 않았던 그녀에게 문득 화가 솟았다. 그 때 윤이 한빈에게 귓속말했다. 인사를 하고 싶다고 했다. 한빈이 허락하기도 전에 윤은 그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급하게 윤을 따라잡았고 당연한 모습으로 옆에 섰다. 가리는 것 없이 맑은 목소리에 가슴이 다 탔다. 한빈은 윤보다 더욱 비참한 얼굴인 그녀가 웃겨서 물었다.
"날이 아직 추운데 어디를 갔다 오십니까. 세자빈."
"…대전에 부르심이 있어 잠시 그 곳에 갔다오는 길입니다. 세자께서는……. 윤과 함께 어디를 갔다 오십니까."
"그대가 궁금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딱 잘라 말하자 그녀는 흠칫 몸을 떨었다. 한빈은 형이 사랑했을 얼굴에 아프게 하는 말을 뱉어놓고 윤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중이었다. 윤은 끝이 명확하지 않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녀의 호위무사가 몸을 일으켰다. 한빈은 숨길 수 없는 구박의 눈길을 담고 그 모습을 쳐다봤다. 주제 넘은 것을 물으며 거만하게 구는 꼴이 마찬가지로 웃겨서 그는 그대로 등을 돌렸다.
맞잡고 있는 손을 윤이 풀었다. 그녀가 미동 없이 서 있는 아까의 그 곳으로 윤이 걸어갔다. 윤은 곧 아무렇지 않은 모습으로 한빈의 곁을 되찾았다. 어쩐지 후련한 감정이 비치는 표정에 한빈이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가도 눈이 마주치면 윤은 익숙하게 입을 가려 웃었다. 마음이 편해지는 미소는 한빈이 전부터 갈구하던 것과 많이 닮아있었다. 상처 받았음을 알리는 그녀의 눈 흔들림이 언뜻 머릿속에 번졌다. 이상하게 신경이 쓰이고 돌이 박힌 것처럼 몸 속 어딘가가 거슬렸다.
그 때 비가 오지 않은 이유를 한빈은 외면했다. 어딘지 모르게 곧 소멸될 것만 같은 느낌을 주던 그 두 눈을 모두 다 외면했다.
시간은 물처럼 흘렀는데 그건 꼭 멈추지 않는 적림을 연상케 했다. 사방이 다 무료하고 어딘지 모르게 꼬인 생각이 들면서도 흔들리고 마는 불안정한 심리였다. 혼자만의 장마에 갇혀 보내는 시간들은 그만큼 언짢고 무거웠다. 한빈은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서 밥을 깨작거리고 있었다. 입맛이 돌지 않았다. 밥상 위로 올라온 갖가지의 전들이 조금씩 온기를 잃어 식어갔다. 어려서부터 수도 없이 그러지 말라고 배웠음에도, 한빈은 멋대로 반찬들을 뒤적뒤적거렸다.
"이걸 지금 찬이라고 올린 것이냐……."
결국엔 불만을 쏟아내었다. 아무도 듣지 못하게끔 조용히 중얼거린 한빈은 이상한 심술이 나서 그대로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는 평소와 다른 점 없이 노릇하고 따뜻하게 구워진 반찬들을 짓이기는 것처럼 엉망을 만들었다가 물 한 모금으로만 텅 빈 속을 달랬다. 어린 궁녀가 그 어상을 밖으로 가져가며 혹시 몸 어디가 불편하느냐고 물었다. 한빈은 태연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도 표정은 수심이 가득해 궁녀는 마냥 고개를 수그릴 수가 없었다. 궁녀는 걱정되어 한 번 더 물었다.
"저하, 이렇게나 찬들을 많이 남기신 걸 보니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 같사옵니다. 옥체는 상관 없다고 하시니 이만 생각을 접겠습니다. 혹, 오늘 드린 상에 어떤 나쁜 결함이라도 느끼셨는지요? 부디 말씀해주시면 추후에 꼭 개선하겠사옵니다."
순진하게 생겨서는 꼬박꼬박 묻는 태도가 조금 악착 같았다. 한빈은 자신을 귀찮게 하는 궁녀가 싫어서 언성을 높이려다가 이내 생각을 바꿨다. 그는 잠시 낮게 헛기침을 하다가 물었다. 그의 말을 기다리는 궁녀의 손이 다소곳했다.
"…세자빈도, 나와 항상 같은 것의 밥을 먹느냐? 오늘 나처럼…. 상을 많이 남기느냐?"
"예?"
"아니……. 그냥 궁금해 묻는 것이다. 아니, 궁금해 묻는 게 아니다. 그저 갑자기 생각나 묻는 것이다."
다급히 말을 바꾸는 세자의 얼굴이 약간 초조한 기색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궁녀는 느닷 없는 걸 묻는 그가 이상해서 잠깐 침묵했다. 절대 궁금해 묻는 것은 아니니 괜한 오해는 하지 말거라! 말 없는 궁녀가 불안했는지 한빈이 빠르게 덧붙였다. 궁녀는 최대한 생각을 되짚어 답을 올렸다.
"잘 모르겠사옵니다. 송구하옵니다, 저하."
"됐다. 벼…. 별로 궁금하지 않았으니 그렇게 고개 숙일 필요 없다."
약간 더듬대며 나온 말이었다. 한빈은 끝까지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다. 그리고 사과하는 궁녀에게 어서 방을 나가라는 말을 부가했다. 궁녀가 상을 치우자 홀로 남게 된 방 안은 적막이었다. 한빈은 갑자기 한숨을 푹 내쉬기도 하고 손바닥으로 눈가를 가리기도 하면서 뜻 없게 조강이 찾아오는 것을 미적거렸다. 궁녀에게서 원하는 대답을 들었더라면 조금 마음이 편했을까. 한빈은 식욕이 돌지 않는 이유가 어쩌면 그녀가 가진 두 눈 때문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그 눈은 윤처럼 예쁘지도 않고 광택이 있지도 않다. 윤처럼 맑지도 않고 깊지도 않았다. 마음을 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 눈은 왜인지 계속해서 떠올라서 수저를 들 수 없게 했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녀도 밥을 먹지 못하는지 궁금했다. 한빈은 그녀의 몸이 마르게 변하길 바라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저 자신에 대한 생각으로 먹지 못할 만큼의 답답함과 저림을 느꼈으면 했다. 그녀를 괴롭히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마음이 그렇게 원하고 있었다. 만일 그녀가 아무 걱정 없이 숨 쉬고 있다면, 억울할 것 같았다. 여태까지 그녀에게 쏟은 생각들을 모두 보상 받아야 할 것만 같은 철부지 느낌의 감정이었다.
한빈은 쳐다도 보기 싫은 곤룡포를 걸치면서 매일 하는 다짐을 되풀이했다. 형과 윤을 위해서라도 그녀를 사랑하는 일은 없어야 했다. 그녀의 사라져 없어질 것 같은 두 눈이 자꾸만 머릿속을 찾아와도 끄떡 없어야만 했다.
"……."
"……."
조강이 한창 진행 중인 시강원의 내부가 문득 불편한 적막에 젖었다. 본격적인 강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전에 배운 것들을 확인하는 자리에서 한빈은 단 조금도 암송하지 못하고 관료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차마 대놓고 쓴 소릴 뱉지 못하고 있는 관료들 사이에서 탁하게 헛기침하는 것이 들려왔다. 분명 모두가 속으로 죽은 형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총명했던 형과는 다르게 상서조차 제대로 외우지 못하는 그를 각자의 방식으로 욕하고 있을 것이었다. 한빈은 다시 재기가 불가할 정도로 상해버린 자존심에 말을 잃은 것처럼 입을 다물어버렸다. 교재 위에 쓰인 글자들이 어지럽다. 이런 높은 수준의 학문들은 배워본 적이 없었다. 문과에서 통과한 관료들이 차근차근 글자들을 짚어 뜻 풀이를 해주었지만 한빈은 경청하지 않았다.
그 눈. 그 두 개의 눈이 자꾸만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그래서 중식을 먹지 않겠다고 일렀다. 조강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호위무사에게 그녀를 후원으로 부르라고 명했다. 충동적인 결정이었지만 후회는 하지 않기로 했다.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전하고 싶은 말들이 있었다. 그녀가 들어주어야만 했다. 그러지 못한다면, 한동안 불편함으로 가슴 앓이를 하게 되리라. 한빈은 그녀 때문에 감정과 시간을 소모하기는 싫었다. 차라리 못을 먼저 박겠다는 생각이었다.
무심코 입고 있는 곤룡포를 한 번 쳐다봤다. 색이 붉었다. 그런 붉음이 과분했다. 한빈은 잠깐 마른 손길로 그 끝에 붙은 자락을 쥐었다가 놓았다. 익숙하지 않았다. 형에게만 어울렸던 색깔과 네 마리의 용이 낯설어 눈이 아팠다. 짊어져야 할 것들이 늘어났음에 마음이 무거웠다.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버리고 윤과 함께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안다. 그 누구보다도 지독히. 한빈은 홀로 막연한 미래를 걱정하고 있다가 멀리서 보이기 시작하는 그녀의 모습에 잠시 손가락을 떨었다.
그녀는 바로 앞까지 다가와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먼저 인사도 건네지 않는 모습에 이상하게 가벼운 웃음이 났다. 그녀는 겁을 먹은 것처럼 고갤 올리지 않았다. 그럴 마음이 없어 보였다. 한빈은 일부러 집요한 시선을 했다. 그럼에도 좀처럼 눈을 맞출 생각을 하지 않아서, 한빈은 그냥 입을 열었다.
"제가 그렇게도 무섭습니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딱히 대답을 바라고 던진 물음도 아니어서 그는 채근하지 않았다. 한빈은 뱉은 말에 움찔하고 마는 그녀의 몸을 보고 사소한 미안함을 느꼈다. 그녀는 앞에 사나운 짐승이라도 둔 것처럼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그래서 마음에 없던 사죄를 했다. 그렇게 하면 조금 경계를 늦출 줄 알았던 그녀는 그저 놀란 눈을 몇 번 깜빡였을 뿐이었다. 한빈은 그녀가 생각보다 겹이 많은 사람인 것을 깨닫고는 속으로 잠깐 탄식했다. 며칠 전에 그대의 집으로 납채를 보냈고, 어제는 혼인서를 되받아 납징을 했습니다. 모든 것이 너무 급하게 치뤄지고 있는 건 아닌지 내내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형식적인 말투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보는 것이 세상의 마지막인 것처럼 눈을 뜨고 그녀를 쳐다봤다. 형이 사랑하던 사람이다. 형처럼 사랑해야 할 사람이다. 그 두 개의 사실된 것들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하고 있었다.
"이제, 이틀 후면 그대는 내 사람이 될 것입니다."
고백을 했다. 예쁘지 않은 고백이었다. 한빈은 고백하면서도 이게 어떤 뜻인 줄 몰라서 감흥이 없었다. 그저 그녀에게 형과 최대한 비슷한 사람이고 싶어 던진 말이었다. 시큼한 냄새가 났다. 꽃이 시들고 있다는 걸 알았다. 한빈은 고백을 들은 그녀가 그 꽃처럼 상하지 않기를 바랬다. 무리하게 빚어져 생긴 인연이지만 아무렇게나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윤을 잊겠습니다. 그러니 그대께서도 그대의 사랑을 난도하여 주시겠습니까. 그대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이 이제 누구도 아닌 제가 되어도 되겠습니까."
"……."
"오로지 저만을 사랑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애매하게 날을 숨긴 또 한 번의 고백이 그녀에게로 닿았다. 대놓고 형을 잊으라는 명령에 그녀는 여전하게 말이 없는 모습이었다. 한빈은 그녀에게 그동안의 사랑한 기억들을 모두 찢어 버리라고 말했고 스스로 덫이 되기를 자처했다. 덫이 되면 윤에게 더 이상 미안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때에서야 그녀의 눈에 담긴 것이 무엇인지 뚜렷하게 알게 됐다. 그리움이었다. 그녀는 영영 형을 잊지 못할 것이었다. 그래도 한빈은 고백을 무를 생각이 없었고 거짓으로 변한 마음을 다시 철회할 뜻도 없었다. 거짓말로 건넨 고백을 믿을 그녀를 안타깝게 여기는 건 가장 나중의 일이었다.
이기적인 감정이었다. 한빈 자신은 윤을 사랑하되 그녀는 그럴 수 없게끔 만들고 싶었다. 참 이상했다. 이상하고 이기적인 감정이었다. 한빈은 단지 사랑을 지키고 싶었을 뿐인데 자꾸만 그녀에게 마음이 가고 가여워졌다.
그녀가 손가락을 꿈틀했다. 그 곳에 반지가 있었다. 반지의 존재를 처음 알았다. 그걸 발견한 한빈의 눈이 잠시 가늘게 변했다. 그녀는 꿋꿋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송구하오나 반대로 저하께 묻겠습니다."
"……."
"정말로, 윤을 잊을 수 있으십니까?"
가슴이 어둡게 변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신경이 마비되는 것만 같은 착각을 받았다. 그것이 화로 변질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인 윤이 덜떨어진 가치의 그녀에게서 계산되고 있는 중이었다. 한빈은 굳이 짜증을 내지 않고 뒤를 돌았다. 따라오는 숨이 덥고 어지러웠다. 뒤에서 그녀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는 이제 궁금하지도 않았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혼란에 잠식 당하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를 그 때 본격적이게 깨달았다.
정말로 잊을 수 있냐는 말에 제대로 된 대답을 줄 수가 없었다. 그걸 물은 그녀에게 화난 것이 아니었다. 대답을 망설이는 자신에게 역한 감정이 들었다.
이게 대체 뭔지 정확하게 정의할 수 없었다. 분노라면 타당했고 원통이라면 인정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한빈은 점점 그녀에게로 쏠리는 자신이 무서워졌다. 그녀에게 느끼는 것이 단 조금이라도 없었으면 좋겠는데, 마음이 가서 자꾸만 이상한 억울함이 들고 미워하고 싶었다. 어떤 감정이라도 느껴선 안 되는데 자꾸만 계속해서 꼬인 행동을 보이게 됐다. 그녀에게서 도망치는 것처럼 뒤 돌던 걸음이 빨랐다. 순간적으로 울컥해서 한빈은 벅찬 숨을 토해냈다.
평소와 다름 없었던 하늘이 까맣게 얼룩지기 시작했다. 또 다시 악몽이 시작되는 줄 알고 잠시 몸을 떨던 한빈이 교묘하게 가려지는 해를 보고 깨달았다. 일식이었다. 빈번해서 굳이 놀랄 것 없는 현상에 한빈은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윤이 아닌 그녀가 떠올랐다. 괴로웠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가 그녀에 대해 고심한 것은 몇 초 남짓이었다. 한빈은 다시 다리를 움직였다. 그녀에게 가기 위해서였다.
깜깜한 세상에 익숙해지기 시작한 시야가 급하게 그녀를 찾았지만 볼 수 없었다. 후원엔 시든 향을 풍기는 꽃들만 무수하게 남아있었다. 한빈은 끝 없이 자신의 모순됨을 꾸지람하면서 다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후원을 이어주는 길목에 그녀가 보였다. 보이는 모든 것이 어렴풋했다. 그녀라는 확신을 가지기도 전에 눈 위로 손을 가져갔다. 늘 그리움으로만 뒤덮여 반짝이는 곳을 한빈이 다 가렸다. 일식인가. 가까이 몸을 맞대고 있는 게 어색해 괜히 중얼거리자 그녀가 흠칫거리는 게 느껴졌다. 한빈은 그 후로 아무 말하지 않았다.
태양이 달을 벗어났다. 시간이 원점을 되찾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고, 그녀는 웃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까처럼 겁을 먹고 웅크리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변명해야 했는데 마냥 입술만 씹고 있었다. 그녀에 대해 자꾸만 교차되는 감정들이 고단했다.
이내 한빈은 뻔뻔하다고 할 수 있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제게 윤을 잊을 수 있겠느냐고 물으셨습니까."
"……."
"아마 잊지 못할 겁니다. 오랫동안 다듬어진 사랑을 무슨 수로 잊는단 말입니까."
"……."
"하지만……. 그대 앞에서는 내색하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까 그런 말씀을 드렸던 것입니다. 저는 이제부터 그대 앞에서 윤에 대한 어떤 것도 입에 담지 않을 것입니다. 그대에게, 어떤 상처도 생기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
"……그러니 그대께서도, 제 앞에서 다른 사람을 떠올리지 마십시오. 거짓이라도 좋습니다."
그녀는 실망한 것 같았다. 한빈의 품을 벗어나고, 그녀는 미련 두는 것 없이 등을 돌려 점차 사라졌다. 한빈은 그녀를 붙잡을 틈도 없이 그 뒷모습만 멍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서로의 사랑을 지키자는 제안에 그녀가 외면한 이유를 가늠할 수 없었다. 한빈은 어떤 것이 실수였는지를 생각하다가 복잡한 속을 가까스로 가라앉히며 동궁으로 돌아왔다. 그녀를 만나느라 주강 때를 놓쳤다. 관료들은 세자를 호되게 호령하는 것 대신에 짓고 있는 표정들이 모두 불쾌했다. 그녀로 인해 들끓는 감정 위로 글자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모든 게 어려웠다. 최선을 위해서 희생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한빈은 그 날 빈 속으로 잠에 들었다.
그건 생각해보니 꽤 괘씸한 일이었다. 한빈은 그녀와의 혼례를 며칠 앞두고, 복잡한 심정으로 괴로운 나날들을 보냈다. 확신할 수 없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착잡하고 뻣뻣한 감정만이 가슴에 남게 됐는지를.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줄 것만 같았던 그녀는 생각보다 당돌했고 내세우는 모든 것들이 올곧았다. 한빈은 잠시 이전의 일을 회상했다. 그녀는 여전히 형을 사랑하고 있었고, 평생을 그렇게 할 것처럼 딱딱하게 굴었다. 기가 차서 차마 위로해줄 수 없는 감정이었다. 한빈은 서로가 상처 받지 않는 방안을 매몰차게 거절하던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며 생각을 비우려고 애썼다.
"동궁마마, 이조판서 여식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래서 윤을 불렀다. 그녀로 인해 불편하고 혼란스러운 모든 것들을 잊어버리고 싶었다. 만류하던 내관들을 모두 무시했다. 한빈은 짧게 허락의 말을 뱉으면서 자세를 살짝 정리했다.
윤이 과연 그녀를 망각되게 할 수 있을까.
"안녕하십니까, 저하."
정말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물어도 되돌아오는 건 없었다. 한빈은 마른 침을 삼켰다.
예쁘다고 칭찬하는 게 무의미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윤은 오늘도 변한 것 없이 아름다웠다. 그는 가볍게 고갤 숙이고 있는 윤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요동하던 가슴은 조금 진정되는 것 같다가도 금방 또 떨리고 있었다.
한빈은 수줍게 변하고 있는 윤의 모습을 꼭 곧 떠나는 사람처럼 질기게 응시했다. 언젠가 마음을 죄다 앗아가버린 적이 있는 아리따운 모습은 실로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왜 그렇게 빤히 보십니까?"
"…아름답기에, 그랬습니다."
"과찬이십니다."
형식적인 칭찬과 대답이 오고 갔다. 한빈은 기껏 윤을 이 곳으로 불러놓고 할 말이 없어 미적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목이 탔다. 그녀를 두고 윤에게 계속해서 미안함을 느낀다. 해서는 안 될 짓이었다. 하지만 방도가 없었다. 한빈의 몸은 원래부터 윤에게만 반응하라고 맞춤돼 있었다. 그걸 어겨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어길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안 되는 것이었다. 한빈은 그게 정상적인 현상이라고 믿었다. 그 탄탄한 신뢰가 고작 그녀로 인해 무너지게 된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붕괴된다. 가슴에 구멍을 뚫어 오로지 윤으로만 가득 메웠던 그 곳이 천천히 주저앉고 있었다.
"저하…. 제게 미안하십니까?"
궁녀가 가지고 온 차를 천천히 쳐다보고 있던 윤이 입을 열었다. 한빈은 속내를 들킨 것만 같아 잠시 움찔했다.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훌륭한 군주가 되셔야지요. 이젠 절 잊으셔야 하는 겁니다."
숨이 막혔다. 한빈은 순간적으로 자신이 숨 쉬는 방법을 까마득히 잊었노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지금의 호흡은 이상적이지 않았다. 누군가가 숨통을 쥐고 멋대로 흔들어 내던지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어째서 그런 감각이 들었는지는 명확히 알아차릴 수 없었다. 이별을 예고하고 있는 윤의 입술이 참을 수 없이 슬펐다. 더불어 이해해야 한다는 강박마저도 슬퍼서 견딜 수가 없었다. 지금의 이해가 어떤 미래를 가지고 올지 어렴풋이 알게 됐다. 머리가 아팠다. 선뜻 부정의 말을 건넬 수 없었다.
핏기가 모두 가시는 기분이었다. 사랑은 태연하게 찾아올 수 있다. 하지만 태연하게 버릴 수는 없었다. 그는 그 괴리를 끝 없이 속으로 외쳤다.
"그 분이 웃어야 저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
"안쓰럽습니다, 그 분이."
"…어째서, 입니까?"
"예?"
"어째서 그녀를 그렇게 여기고 있습니까?"
왜인지 새된 표현이 흘러나왔다. 그걸 들은 윤의 표정이 급격히 가라앉았다. 한빈은 이것이 모진 말임을 알면서도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저 답답하게 한숨을 내쉬며 속이 헤집어지는 것을 느끼고만 있었다. 윤은 문득 그가 그녀의 편을 들고 있다는 걸 깨닫고는 삐죽 웃었다.
"저는 돌을 돌로 부르고 하늘을 하늘로 부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안쓰러운 것을 안쓰럽다 여기는 것이 크게 잘못되었습니까?"
"……."
"저하……. 그 분이 안쓰러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던 분을 잃고 저하의 미움마저 받아야 하는 처지가 아니십니까? 그러니 그 분께 살가워지셔야지요, 저를 위해서라도."
"…내가 그간 사람을 잘못 보았습니다."
"예? 무슨 말씀이십니까?"
윤이 도통 모르겠단 표정을 짓다가 잠시 웃었다.
"저하, 저를 잊는 것과 그 분을 사랑하는 일 중에 무엇이 더 괴로우십니까?"
"……입을 다물으세요. 더 이상 나를 실망시키지 마세요."
"…저를……. 세자저하, 저를…. 제 몸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그녀를 경계하는 심리. 새로운 사랑을 경계하게 되는 마음. 그것은 한빈에게 고달팠다. 하지만 마음이 떠난 사랑을 지키는 일이 한빈에겐 더욱 더, 고달파졌다. 한빈은 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안심으로 물드는 윤의 얼굴 색을 그는 유심히 쳐다보고 있지 않았다.
여름이 시작되고 있었다. 한빈은 그녀가 삶의 일부가 되었음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다가도 언제 쯤이면 그 모습이 꼭 사라질 것만 같아서 불안해했다. 그리고 지금 그 불안은 어떤 때보다도 증폭돼 있는 상태였다. 그녀가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한빈은 형을 잃었던 날처럼 불안정한 숨을 내몰며 손톱을 씹고 있었다.
"목이 잘리고 싶은 것이로구나. 감히 무사 주제에 지금 내 동생을 의심하느냐?"
"…아닙니다, 송구하옵니다. 저하."
곤은 망설이다가 그에게 보았던 모든 것을 빠짐 없이 말해주었다. 동혁이 급작스럽게 활이 있냐고 물었던 것과 창백한 낯으로 어딘가를 향해 떠난 것. 한빈은 그렇지 않아도 불안해 다 찢어질 것만 같은 가슴에 복잡한 것 하나를 내놓는 호위무사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궁 주변을 집중적으로 탐색하라고 명한 것이 벌써 몇 시간 전이었다. 그녀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발견되어주지도 않았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한빈의 속이 썩어 문드러졌다.
멀리서 그녀로 보이는 몸집이 이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을 때 한빈은 그만 너무도 다행이라서 다리에 힘이 풀릴 뻔했다. 꾸역꾸역 그 안도를 참아내고 그녀를 안으니 한결 마음이 진정됐다. 바라보는 얼굴 위에 눈물의 흔적이 있어도, 그는 그저 그녀가 무사하다는 사실에 깊이 안심했다. 돌아왔으니 되었다.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동혁이 입을 열기 전까진.
"숲에 가셨다가 도적 떼를 만나셨습니다."
동생을 바라보는 눈에서 의심의 여지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한빈은 어쩐지 조금 수상한 느낌을 내고 있는 동혁을 온전하게 신뢰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섣불리 추궁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그는 그렇게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어리고 애정이 필요한 존재다. 한빈은 형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영원토록.
"사랑합니다. 믿어주시겠습니까."
그만의 그녀는 그걸 남기고 떨어졌다.
입 속에 모래 몇 줌이 들어와 씹히는 기분이 들었다. 한빈은 그녀가 사라진 그 곳에서 자신의 세계가 멸망되는 처참한 신경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화살이 여기 저기로 날아왔다.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검을 어딘가로 던지고 무릎을 굽혔다. 이게 설마 현실이라곤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득하고 먼 절벽이 보였다. 심장이 무언가를 기어코 터뜨릴 기세로 거세게 뛰고 있었다. 한빈은 고개를 빼고 그 위태롭게 세공된 절벽의 단면을 쳐다봤다. 그녀가 없었다. 어디에도, 없었다. 덜덜 손이 떨렸다.
활을 쥐고 있던 동생의 잔상이 꺼질 것처럼 꺼지지 않고 뇌리에 박히고 말았다.
"…저하! 피하셔야 합니다!"
조선의 호위무사들이 차례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모두 가슴팍에 명중이거나 다리에 화살을 맞았다. 평소 날쌔던 동작들은 촉이 꽂힌 후에 몹시 굼뜨고 느려졌다. 그들의 군관복이 점차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혼란스러움의 극치를 경험케 하는 상황 속에서 조용한 숨을 내쉬고 있는 이는 오직 한빈이 다였다. 말을 타고 있는 무리들이 서서히 그의 곁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한빈은 줄곧 멍청한 얼굴로 깎아지른 절벽의 끝을 쳐다보고 있었다. 꿈일 것이다. 사실이 아닐 것이다. 생각하며, 그는 믿기지 않는 악몽에서 깨어나기 위해 발악하기 시작했다. 이럴 수는 없었다. 그는 잠잠한 낭떠러지 앞에서 살면서 한 번도 그러지 않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곤이 영문 모를 그의 곡을 확인하다 제 팔뚝에 박힌 화살을 우지끈 부러뜨리며 뽑았다.
자칫하면 살아남지 못할 수도 있다. 바로 앞까지 다가와 말의 고삐를 당기고 있는 검은 복장의 무리를 쳐다보며 곤은 생각했다. 그는 대강 눈으로 인원을 파악했다. 이 쪽이 절대적으로 열세했다. 곤이 입술을 콱 물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태양만은 지켜야 했다. 그는 상황에 좀 더 신랄하지 못했음을 자책했다.
적으로 변한 벗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검은 무리들 사이에서 태연하게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곤은 밭은 숨을 뱉었다. 활이 꽂혔던 팔이 저려왔다.
"…너희들은, 무엇이냐? 감히 무엇이기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느냐?"
후들거리는 손을 오로지 악으로만 버티며 곤이 물었다. 그 중에서 눈이 하나 불구인 자, 묘목은 그저 아주 만족스럽다는 것처럼만 웃고 있었다. 춥지도 않은데 소름이 끼쳤다. 곤은 문득, 뒷목 언저리가 싸하게 차가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순식간에 목숨을 잃게 된 동료들 중 누군가가, 저승 길에 오르지 못하고 아직 살아있는 그의 덜미를 어렴풋이 만지고 있는 듯했다. 누구일까. 곤은 함께 지내며 정을 쌓아온 여러 동료들의 얼굴을 기억하려 애썼다. 머릿속은 백지였다.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실처럼 떠오르는 것조차 없었다. 그 죽은 혼의 쓰다듬에 단지 살려야겠다는 의지만이 가득해졌다.
호위무사는 이제 여섯 남짓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피를 철철 흘리면서 위태롭게 삶을 지지하고 있었다.
"저하의 심장을 가지러 왔다."
터무니 없는 것을 입에 담아 올리며 그는 두건을 벗었다. 준회의 바싹 마른 두 눈을 쳐다보는 게 곤은 괴로워서 이만 시선을 접어버렸다. 끝까지 믿었지만 준회에겐 곤과의 정보다 부모에 대한 신념이 더 컸다. 그가 가지고 온 미래가 너무나도 암담해 모든 것이 검게 변하는 것만 같았다. 준회의 선택으로 너무 많은 것들이, 뒤바뀌고 있었다.
주비는 다 같은 표정으로 활을 쥐고 있었다. 모조리 창백하고 어떤 불굴의 감정을 담은 얼굴들이었다. 조준 당하면 그대로 목숨을 잃게 될 것이었다. 곤은 경계하면서 뒤를 돌았다. 그리고 지시했다. 어떤 것도 생각 말고 검을 쥐라고만 말했다. 검과 활은 그렇게 한참을 대적하며 있었다. 금방이라도 쏘아져 군관복에 느른히 박히게 될 주비의 화살은 전부 앙심의 깃털을 품고 있었다.
"…준회야."
"……."
"이렇게 하면……. 네 어버이가 기뻐할 것 같으냐?"
"……."
"틀렸다."
"……."
"틀렸다, 준회야. 네 생각이 틀렸다."
곤이 유언했다.
준회는 말 위에서 그를 위한 활을 당기고 있었다.
"내 눈 앞에 조선의 반역자들은 들어라! 너희들이 누구이거나 무엇이거나 상관하지 않겠다. 다만, 너희들의 실패와 죽음만은 내가 상관할 것이다."
감히 조선을 뭘로 보느냐, 여기 있는 누구도 저하의 심장에 손 댈 수 없을 것이다……. 왜인지 눈물이 섞여 있는 발언에 일순간 주변이 정적에 휩싸였다. 준회는 삐딱한 표정으로 시위를 아래로 내렸다. 속에 항상 품고 있던 무언가를 그에게 말하려다가, 옆에서 천천히 나아가고 있는 말을 확인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묘목을 태우고 있는 말이 느리게 느리게 절벽의 끄트머리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곤은 좀 더 칼에 힘을 실었다. 곤의 바로 앞에서 다리를 멈춘 말이 잠시 발굽을 흙 사이로 문질렀다.
곤이 저 멀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안심이 됐다. 뜨거운 눈물을 가까스로 삼켜내고 있는 곤에게 묘목이 말했다.
"한낱 무사 주제에 말이 많구나."
"……."
"그래, 한 가지만 묻겠다."
"……."
"누구나 살면서 지키고자 하는 게 있을 테지……. 그게 너에겐 조선이자 군주일 것이고, 우리에겐 억울하게 타버린 무수한 목숨들이다."
"……."
"어떤 것이 더….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말을 마치고 묘목은 질척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기분 나쁘고 소스라치게 되는 공기가 주변을 잠식했다.
한빈은 아직도 멍했다. 자신의 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어떤 목숨들이 화살로부터 짓이겨졌는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한빈을 다섯의 호위무사들이 둘러쌌다. 곤을 가장 앞에 두고, 모든 감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의 희미한 비린내가 한빈의 코 끝 어딘가를 스쳐 지나갈 때 쯤에 묘목이 망설이지 않고 화살 하나를 곤의 목 근처로 꽂았다.
그리고 묘목의 목에도 화살 하나가 날아들었다. 분수처럼 피가 솟았다. 급소를 찔려 중심을 잃게 된 그가 말 위에서 굴러 떨어졌다. 주비는 순식간에 혼잡해졌다. 누구의 짓인지를 판별하기 위해 돌아가는 시선들이 무자비하게 떨리고 있었다. 준회가 고삐를 쥔 손을 부들거리며 떨었다. 말을 타고 인기척도 없이 다가와 주비의 핵을 무찌른 동혁이 그의 차가운 시선을 받아내며 다른 활을 시위에 맞췄다.
"어리석은 숨들아. 이젠 어떻게 할 테냐? 너희의 대장이 그만 죽고 말았구나."
"…이런, 젠장할……!"
그늘이 졌다. 그 그늘의 등장에, 누군가가 욕을 하며 탄식했다. 동혁으로서는 드문 말투와 표정이었다.
빛이 다 꺼지고 식어버린 준회의 눈이 죽어가는 곤의 몸집으로 향했다.
"알아서 절벽 밑으로 떨어지겠느냐, 아니면 나와 함께 조선으로 돌아가 목을 잘리고 너희의 대가 처참히 멸하게 되는 꼴을 지켜보겠느냐?"
말이 힘차게 발질을 시작했다. 혼자 살겠다고 후퇴를 위해 움직이고 있는 말 하나를 향해 동혁이 미련 없이 활을 쏘았다. 굳건한 다리에 정통으로 활을 맞게 된 말이 까무러치며 몸을 흔들었다. 날뛰고 있는 기제류 짐승 위에서 떨어진 검은 사내가 곧 말굽에 밟히고 괴로운 숨을 토해냈다. 그 곳을 쳐다보는 주비의 눈들이 공포감에 아득히 젖어갔다.
"왜 대답들이 없느냐. 묻고 있지 않느냐. 내 형의 나라를 농락한 댓가를 어떻게 받을 것인지를."
살벌한 목소리였다. 피로 물든 난이 비로소 끝을 맞이하고 있었다. 하나 둘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몸체가 많아졌다. 이윽고 그것이 준회만을 앞두었을 때, 동혁은 살며시 눈을 감았다. 한빈은 여전히 울고 있었다.
조선은 크게 흔들렸다. 왕은 이제 거의 죽음만을 앞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걸 부정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피폐해졌다. 망국을 원하고 있는지, 곧 왕의 뒤를 이어야 할 그는 매일 취하기에만 바빴다.
내전에서 열리게 된 회의에서 신하들은 서로 시끄러운 견들을 주고 받고 있었다.
"…성군 아닌 폭군이 되실 것이옵니다. 부디 다른 분을 태양의 자리로 인도해야 합니다.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마마!"
왕후는 계속되는 치정 싸움에 지끈거리는 이마를 잡았다.
그런 상황을 알고 있으면서도 한빈은 취했다. 동궁은 어느 틈엔가 여러 색들이 넘나드는 기방으로 변했다. 하루 아침에 미쳐버린 그는 오늘도 어김 없이 기생들이 따르는 술을 받아 넘기고 있었다. 술로 모든 걸 잊으려는지 그는 많이 취했음에도 손에서 잔을 놓지 않았다.
"…저하. 제가 왔습니다."
동혁이 부름을 받고 한빈이 있는 곳을 찾았다. 그는 정신을 잃을 정도로 취해서 동생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계속해서 질 낮은 계집들에게 입술 세례를 하고 있었다. 그의 등장에 기생들이 서로 소곤소곤 말하던 것을 멈췄다. 한빈이 풀어진 눈을 돌려 제 앞으로 다가와 절을 하는 동생을 쳐다봤다. 그는 한참이 지난 뒤에야 동혁에게 아는 척을 했다.
"동생아, 계집이 고파서 나를 찾아왔느냐?"
"……."
"내 너한테 얼마든지 빌려주겠노라. 마음에 드는 여인으로 골라보거라."
그 말에 기색들이 하나 같이 반색을 하며 눈을 굴렸다. 동혁은 불편한 눈길들을 하나 하나 참아내며 올곧게 말했다.
예전 같지 않은 표정과 음성이 동혁의 맘을 괴롭게 했다.
"세자저하. 아뢸 것이 하나 있습니다. 수색을, 관두셔야 할 것 같습니다."
동혁은 겁 먹지 않고 고개를 들어 형을 쳐다봤다. 한빈의 얼굴이 단번에 취기를 털어내고 굳어졌다. 그가 기생들에게 방을 나가라고 명했다. 싸늘해진 목소리에 계집들이 절을 할 것도 모두 잊어버린 채 후다닥 그 곳을 빠져나갔다.
가만히 숨을 쉬기만 해도 짙은 술 냄새가 느껴졌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좀처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동혁은 너무나도 안쓰럽게 수척해진 그가 이만 죄책으로부터 벗어나야 할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닥쳐라. 지금 네가, 나를 놀리느냐?"
"…저하. 군주가 되셔야 합니다. 제 아버지와…. 제 형과 같은, 좋은 군주가 되셔야 합니다."
"죽은 것이더라도 그녀라면 사랑할 것이다."
"……."
"그런 내 소원을 감히 네가 짓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불쾌한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한빈의 눈이 금방 촉촉해졌다.
"…아니……. 그녀가 죽지 않았기에 이토록 수색이 늦어지는 것이다. 죽지 않았으니…. 죽은 몸이 발견될 일도 없는 것이다……. 세자빈은 죽지 않았다. 내일이면 내 곁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필히 그럴 것이다…. 동생아, 내 말이 잘못되었느냐? 응? 내가 잘못된 것이냐?"
"……저하. 사실이 아닙니다. 착각이십니다. 그 분은……."
동혁은 말을 끊었다. 현실을 부정하는 형의 눈에서 가망 없는 어떤 빛 하나를 보아서였다.
"그 날, 넌 왜 죽지 않았느냐."
"……."
"왜…. 죽지 않았느냐……?"
"……저하의 손에 죽기 위함입니다."
"……."
"저하께선 왜 저를 죽이지 않으십니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모습이었다. 한빈은 미루지 않고 술 한 잔을 따라 입으로 털어넣었다. 혀에 감기는 맛이 썼다. 써서 눈물이 밀려올 지경이었다. 그 둘은 잠시 말이 없었다. 태양이 무너진다. 그늘은 그 무너짐을 그저 견디고만 있었다. 그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죽이라고 네게 활을 가르친 것이 아니었다."
"……."
"…내가 사랑하는 것을 쏘라고, 그 때 네게 활을 가르친 게 아니었다."
"…저하. 세자저하."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느냐……. 동생아."
후회는 비탄으로 이어졌다. 소리 없이 울기 시작하는 그를 보며 동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가슴이 저렸다. 왜 하필이면 불쌍하고 나약한 것들만 죄다 사랑했을까. 한빈은 생각했다.
양위에 대해 한창 시끄러운 말들이 돌 때 쯤, 한빈은 언젠가 사랑한 적이 있는 여인을 불러 제 앞에 앉혔다. 윤은 그의 선처로 겨우 목숨을 건졌으나 예전처럼 생기가 있지는 않았다. 꼭 무섭고 흉한 짐승을 바라보는 듯이 윤의 시선이 까무러칠 것처럼 흔들렸다. 한빈이 무심코 윤의 얼굴을 보드랍게 쓰다듬었다. 술 냄새가 났다. 윤은 겁 먹은 표정으로 조금 달라지기 시작한 한빈의 눈을 쳐다보았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이 눈이 아니다."
"……."
"이 코도 아니다."
"……."
"이 입술도……. 아니다."
"…저하, 고정하시옵소서."
"그녀가 아니다…. 너는 그녀가 아니다. 그녀는 대체 어딜 갔느냐. 응? 말해보거라, 그녀는 어딜 갔느냐? 왜 나를 떠난 것이냐?"
으깰 기세로 윤의 얼굴을 쓸고 있던 한빈이 고요하게 중얼거렸다. 그녀를 떠올리며 차례로 이목구비를 확인하던 그의 눈가가 잠시 젖었다.
북北으로 향한 군주의 혼을 다시 부르기 위해, 내시는 상위복을 삼창하였다. 궁의 지붕 위에서 왕의 옷 더미를 펄럭이는 손길이 애처롭게 떨렸다. 불미스런 일로 첫 자식을 잃고 점점 위독해졌던 왕은, 이어 유달리 아꼈던 마지막 아들마저 신하들의 손에 죽임 당한 것에 감히 표할 수 없는 슬픔을 느끼다가 결국엔 병을 이기지 못하고 오늘 새벽 승하했다. 그가 눈 뜨고, 걸음마를 시작하여 효경을 외우고 왕위의 오르기까지의 모든 것을 지켜봤던 내시는 제 평생을 잃어버린 것처럼 지독히 고통스런 슬픔을 느꼈다. 그 통각은 좀처럼 잠재울 수 없었다. 상위복을 외치는 내시가 왕의 혼이 부디 멀리 가지 않았기를 빌며 마음 속으로 고요히 그의 삶을 애도했다.
졸곡 후에 상복을 벗고 정무를 시작하게 된 한빈이 문득 말했다.
"사관은 들으라."
"예, 전하."
"앞으로 내 모든 것을 빠짐 없이 적어주게."
"……."
"…어려서부터 말썽을 자주 하여 부모에게 그리 효하지 못한 아들이었고, 동생을 역모로 몰아 죽게 한 것이 바로 나이며…. 형의 여인을 부끄럽게도 오래 사랑했다고 써넣어주게."
"……전하, 부디 명을 거두어주소서. 소인은 없던 일을 진실로 기재할 솜씨가 되지 못하옵니다."
"죽을 때까지 그 사람을 그리워한, 조선의 가장 못난 왕이 바로 나라고 기록해주게. 그렇게 실록에 기록되기까지 내 모든 걸 글로 풀어 남겨주게."
새 시대가 열렸다. 위태로움에 단단함을 덧댄 조선의 태양이 진심으로 발광해야 할 때가 왔다. 그의 손가락 어딘가에 쇠 붙이 하나가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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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환이 외전 편 단어 *규장각: 조선시대 왕실의 도서관으로, 왕들의 시문, 친필, 서화 등을 기록해 보관하며 학술과 정책을 연구하는 곳이기도 함. 역사적인 측면에선, 정조 시대의 대표적인 정치와 문화의 발전을 상징함. *서장: 책꽂이. *지물: 종이 질감. *수지: 궁에서 사용하는 언어로, 왕족들의 손을 뜻함. *삭풍: 겨울에 북쪽으로 불어오는 바람. *외감: 감기. *이팔청춘: 열 여섯 살의 전과 후를 뜻하는 말로 사람의 청춘인 때를 뜻함. *잠행: 미복잠행을 줄인 말. 미복잠행이란, 왕이 백성들의 삶을 알아보기 위해 직접 평상복 차림으로 호위무사만 대동해 나가는 것을 말함. 이를 통해 국정 운영에 기여하는 것이 목적임. *팔랑개비: 바람개비의 다른 말. *밥풀산자: 조선의 과자로, 술과 콩물로 반죽하여 쪄서 말린 다음 기름에 튀긴 뒤 밥풀이나 깨 등의 고물을 묻혀 완성함. *염낭: 주머니. *구하: 여름의 가장 뜨거운 90일을 뜻함. *접문: 입 맞춤. *실어: 말이 없거나 말할 수 있는 기능을 상실함. *상대점: 왕의 사망을 확인한 후 이를 공고하는 것. *반립: 밥풀. *춘화: 봄 꽃을 뜻함. *동절: 겨울. *가례도감: 조선시대 왕족들의 혼례를 위해 설치되는 관서.
이번 외전 편 단어 *오조룡: 왕만이 입을 수 있는 옷. 다섯 마리의 용을 뜻함. *궁현: 활 시위. *목광: 눈빛. *적림: 장마. *사관: 왕의 곁에 있으며 왕의 모든 것을 기록하던 조선시대의 역사 기록자.
안녕하세요 독자 님들!! 6233입니다. 다들 설날은 잘 지내셨나요? 너무.. 오래 기다리셨죠? 기다리게 해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ㅠㅠ (브금으로 롱타임노씨를 재생한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뭐라 드릴 말씀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브금은 316 - 망향입니다.
사실 한빈이 외전은 가장 늦게 올릴까 했는데.. 그냥 지금 올립니다. 가장 공 들여 썼는데 어째 결과물은 가장 별로인 것 같아서 추후에 조금 수정될지도 모르는 그런 글입니다..ㅎ
오타는 나중에 제가 천천히 정주행하며 수정하도록 할게요! 매의 눈으로 알려주시는 모든 분들 정말정말 감사합니다... 더럽...♡
드릴 말씀이 너무 많지만 지저분해질 것 같아 이만 줄일게요. 항상 감사드리고, 또 또 감사드리고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암호닉은 가나다순으로 정리했으니 봐주세요~ 암호닉은 이제 받지 않도록 하겠슴미다. 혹시나 빠진 분이 계시다면 댓글로 알려주세요... ㅠㅠ 저는 바보라서 실수를 잘하거든요..
언제 또 만날 수 있을까요? 이번주였으면 좋겠네요!!! 그럼 그 때까지 안녕!! 독자 분들 건강 잘 챙기고 기다려주세요!!!!! 사..사..! 사랑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야단법석)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암호닉 - 가나다 순 1104 님 2015 한양 님 HB 님 yeevely 님 ㄱㅈㅎ 님 가지 님 감귤 님 갠짠 님 구닝 님 구주네 님 구준회가먹으라구준회 님 국밥 님 기승전 님 기화 님 김밥빈 님 김빱 님 김치볶음밥 님 김한빈김지원 님 꾸욥 님 꾸주네 님 꾸준해 님 나비 님 눈물점 님 달 님 덴맠우유 님 돈도니 님 동그라미 님 동동동 님 동동만두 님 동동아 님 됴종이 님 두건 님 두둠칫 님 떡볶이 님 또또 님 뜨뚜 님 맘비니 님 맘빈 님 망고 님 메추리 님 메추리밥 님 메추리알 님 모카 20 님 바나나킥 님 바비도령 님 바비아이 님 반스 님 밤비 님 밥햫럽 님 블라 님 비니송송 님 빈 님 빈궁 님 빈블리 님 뽀로로 님 뿌랄요정 님 뿌링클 님 뿌요뿌요 님 삐야기 님 사룽 님 삼겹살 님 설날 님 설렘 님 세자빈 님 소녀 님 수레기 님 수박 님 숨소리 님 슬기 님 슬리퍼 님 시계태엽 님 시루떡 님 에린지움 님 에클 님 엘사 님 연결고리 님 옷쟝 님 우산 님 우엉차 님 우왕굿 님 우쭈쭈 님 음흉 님 일이세개 님 잇쇼니 님 ㅈㅇㅈㅇ 님 쟉하 님 젤리 님 주네 님 주네야 님 주네역 님 준회 님 지난지난 님 찌푸 님 천상여자 님 초록프글 님 초코 님 총총총 님 쵸무룩 님 친주 님 케빈 님 콘스프 님 콘초 님 콘콘 님 콩기름 님 쿠쥬 님 크로나 님 태양아래 나비 님 텔비 님 파랑짹짹이 님 판다 님 팬더 님 페브리즈 님 한빈두빈 님 한빈아사랑해 님 한빈아춤추자 님 한빈이네 꽃밭 님 한양소녀 님 핫초코 님 햇님 님 햇님달님 님 헤헷 님 혜민서송씨 님 흐림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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