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아빠가 내일 꼭 돌아올게."
"…싫어."
"응?"
"…나도 데려가."
정적이 도는, 불이 모두 꺼진 집 안에 내 짜증 담긴 말이 조용히 울려 퍼졌고, 엄마는 그에 당황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어물적이는 모습에 불안해져 '나도 데려가라고.' 라며 언성을 높이니, 엄마는 말 없이 고개를 숙이며 여행가방 손잡이만 꽉 잡아보였다. 어깨가 미세하게 움찔거리는가 싶더니 결국엔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려댔다. 항상 강해보였던 엄마가 오늘만큼은 작고, 나약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모습을 아빠는 차마 견디지 못하고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엄마의 어깨를 감싸며 나를 향해 말했다.
"문 꼭 잠그고 집에만 죽은 듯이 있으면 아무 문제 없어. 작년에도 괜찮았잖아."
뭐가 어떻게 되든 상관 없다는 어투다. 그리고 그것이 비수가 되어 내 가슴을 찔러왔다.
문 꼭 잠그고 집에만 죽은 듯이 있으면 아무 문제 없어.
집에만 죽은 듯이 있으면 아무 문제 없어.
아무 문제 없어.
그 짧은 한 마디가 메아리처럼 귀를 강하게 울려왔고, 수많은 의문이 들었다. 그럼 당신들은 왜 떠나는건데? 왜 또 도망치는 거냐고. 하지만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친절하고 정 많은 부모님인 척 했지만, 사실 내게 일말의 신경 조차 쓰지 않았던 그들이였음을 알기에. 또 원체 나를 향한 애착이 없었다는 것을 알기에. 어릴 때 부터 진즉에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괜시리 욱신하게 아파오는 가슴에 인상을 찌뿌렸다. 작년의 일이 생각나고, 또 그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다시는 날 버리지 않을 거라는 희망을 가졌었던 것이 새삼스레 허탈해지는 순간이었다.
"볼륨 작게 해서 티비로 뉴스 틀어놓고 있어. 절대 끄지 말고."
아빠가 나에게 당부하며 몸을 숙여 나와 눈을 마주치려 했다. 커다란 손이 내 뺨을 감싸는 것이 느껴졌지만 나는 고개를 숙이고 들지 않았다. 지금 눈을 마주치면 그 동안 강한 척을 해오며 참아왔던 것이 봇물처럼 터져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묵묵부답인 나의 뺨에서 손을 떼어 낸 아빠는 묵직함이 실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여행 가방을 고쳐잡았고, 엄마의 등을 떠밀며 문고리를 돌렸다. 아빠는 송장처럼 서 있는 나를 뒤로 하고 밖으로 발을 내딛으려다 입을 열었다.
"…언젠가는 우리를 이해하게 될 거야."
그 말을 끝으로 그들은 내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쾅─ 하고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스산한 바람이 얼굴에 훅 끼쳤다. 앞머리가 한참을 흔들거리다가 흐트러진 채 움직임을 멎었다.
다시 돌아 와요. 제발.
혼자 남은 집 안에 작은 중얼거림이 울렸다.
지금이라도 다시 돌아오면 안 미워할게요. 그러니까…
점점 벅차오르는 감정에 목이 메여왔다. 정말 그럴 생각이었다. 지금이라도 다시 내게 달려 와 날 꽉 안아주고, 미안하단 그 세 글자만 말해주면 정말 용서해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미 닫혀버린 문은 무심하게도 열릴 줄을 몰랐다. 내 두 손에 쉽게 열리고 닫혔던 문이, 지금 이 순간에는 그렇게 크고 거대해 보일 수가 없었다. 다시는 넘지 못할 장벽처럼 높게 치솟았고, 나는 그 벽 앞에 한없이 작아져갔다.
나사 빠진 사람처럼 한참을 문 앞에서 멍하니 서있다 후들거리는 발걸음으로 거실로 향했다. 매끈하고 차가운 대리석 바닥이 마치 뜨거운 햇볕 아래의 모래사장처럼 버적버적한 느낌이 들었다. 발바닥이 따끔하게 아려오는 것 같아 1초라도 빨리 소파에 몸을 던지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소파 앞에 다다랐을 때, 혹시 소리라도 날까 조심스레 엉덩이를 붙혔다. 무게가 실려 푹 꺼지는 느낌과 함께 나는 무릎을 세워 두 팔로 감싸안았다. 그리고 얼룩 하나 없는 벽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거실에 홀로 반짝이는 티비 화면 때문에 벽이 색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그 빛깔이 바뀔 때 마다 엄마아빠와 함께 했던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엄마는 좋은 사람이었다. 아빠도 매사에 무뚝뚝하고 칼 같았지만 그다지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내가 기억하는 둘은 꼭 정의를 위해 싸우는 용사처럼 멋졌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였을까, 얼굴은 자세히 기억이 안 나지만 꽤나 친했던 아이 중 하나가 내게 물었었다. 우리 부모님은 문방구 하시는데, 너네 부모님은 무슨 일 하셔? 나는 그 질문에 머뭇거리며 대답하지 못 했다. 제 부모님 직업이라면 나보다 더 어린 꼬맹이들도 흔히 알 터인데, 나는 왜 였을까 알지 못 했다. 그 쉽디 쉬운 질문에 대답하지 못 하고 어버버거릴 동안 아이의 눈에 언뜻 스쳐지나간 눈빛에 나는 그대로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어떻게 자기 엄마아빠의 직업도 몰라? 그 눈빛이 잊혀지지 않았다. 분명히 날 이상한 애라고 생각할 거야.
그날 밤, 늘 그래왔듯이 엄마아빠는 밤 늦게까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초조하게 둘을 기다리다가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마자 달려가 안겼다. 나는 엄마아빠를 올려다 보고, 둘은 그런 나를 내려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내가 '엄마아빠는 무슨 일을 해? 친구들이 자꾸 물어 봐.' 라고 물어봤을 때, 엄마는 잠시 당황하는 듯 싶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엄마아빠는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을 해. 나쁜 사람들이 불쌍한 사람들의 돈을 가져가면, 그 돈을 다시 되 찾아주는 거야. 엄마아빠는, 그런 일을 해.
내가 원하던 정확한 대답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시 물어봐도 대답은 똑같을 거라는 것을 알았기에 나는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던 것 같다.
고요한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티비 화면과 내 생각이 어지럽게 섞였다. 어차피 소용없는 잡생각들을 떨쳐내려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이제는 내가 무엇을 해야할지 생각해야 해.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내 시선은 시계를 향했다. 날카롭게 뻗은 분침이 11을 가리키고 있었다. 심장이 재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제 5분 후, 그러니까 정각이 되면 퍼지 데이를 알리는 알림이 방송될 것이다. 그 후면 참혹하고 잔인한 하루도 시작이 되겠지. 점점 불안해져만 가는 순간에 나는 손을 입으로 가져가 물어뜯기 시작했다. 나쁜 버릇이 또 도진 것 같았다. 손톱과 이가 어긋나는 소리가 딱, 딱하며 들려왔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쓸쓸히 켜져있던 티비 화면이 파랗게 물들었다. 이어 몇몇의 문장이 영화의 엔딩 크레딧처럼 떠올랐다.
이것은 ABC 방송국에서 내보내는 긴급 경고입니다
한국 정부가 주관하여 범죄 행위에 대한 면제권을 드리는 '숙청의 날' 시작을 알려드립니다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하면 살인을 포함한 모든 범죄 행위가 24시간 동안 합법적으로 처리 됨을 알리며,
경찰, 소방, 그리고 의료 서비스들은 모두 사용불가 됨을 알립니다
또한 4등급 무기 사용만을 허가합니다
"2015년 4월 13일 정각. 숙청의 날을 알립니다."
거슬릴 만큼 일정한 톤을 가진 여자 목소리가 퍼지 데이를 알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계적인 목소리가 멎자, 어디에서 시작 되었는지 조차 모를 사이렌이 온 세상을 집어삼킬 듯이 들려왔다. 나는 귀를 틀어 막고 고개를 무릎 사이에 묻었다. 하지만 사이렌 소리가 멎자마자, 들려오는 총소리와 단말마의 비명소리에 나는 질색하며 고개를 들 수 밖에 없었다.
시작 되었다. 단 하루, 모든 범죄가 허용되는 그 날이.
모든 범죄가 허용되는 단 하루ː 퍼지데이
퍼지 데이를 알리는 사이렌 후, 생방송 뉴스가 시작되었다. 볼륨을 제일 작게 해놓은 탓에 뉴스 앵커의 말이 웅얼거리며 흩어졌다. 볼륨을 좀 더 크게 키워야겠다고 생각하며 리모컨을 찾으려 소파를 더듬거렸다. 하지만 어두운 집 안 때문에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소파 위를 배회하던 손을 혹시나 해서 소파 틈 사이로 쑤욱 집어넣었다. 딱딱한 플라스틱의 감촉에 '아, 찾았다.' 하며 그것을 들어올렸다. 먼지가 뒤엉켜 같이 올라왔다. 으으. 괴상한 소리를 내며 먼지들을 털어냈다. 그리고 리모컨으로 볼륨 버튼을 꾸욱 누르니, 그제야 개미 목소리만큼이나 희미했던 앵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저희 ABC 방송국은 제 2회 숙청의 날 상황을 생중계로 내보내드리고 있는데요. 범죄학자 김동규 씨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선 옆으로 고개를 돌려 살짝 숙여 범죄학자라고 소개 된 남자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CCTV 생중계를 시작하기 전, 숙청의 날에 대해 먼저 알아보겠는데요. 13일 하루, 스물 네시간 동안은 모든 범죄가 합법적으로 처리 된다고 하죠?' 라며 그에게 물었다. 카메라가 곧바로 종이 뭉치를 넘기고 있는 한 남자에게로 줌 인되어 넘어갔다. 범죄학자라 해서 중년 아저씨를 상상했었건만, 클로즈업 된 그의 얼굴은 앳된 모습을 띄고 있었다. 매끈한 얼굴선 위로 검은 뿔테의 안경이 쓰여져 있었으나 진한 이목구비와 날카로운 눈빛은 가려지지 않고 더욱 빛나는 듯 했다. 남자는 안경을 치켜 올리며 고개를 들어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보통 국민들 사이에서는 '숙청의 날' 보다 '퍼지 데이' 라고 많이 알려져 있는데요. 범죄율이 급속도로 높아지자 정부는 그에 대한 방책을 내놓겠다며 '숙청의 날' 이라는 연례 행사를 지정했습니다. 2014년부터 매년 돌아오는 4월 13일 정각을 시점으로 스물 네시간은 모든 범죄가 합법적으로 처리된다는 조건 하에 말이죠."
"그래서 문제점이 해결이 됐나요? 범죄를 저질러도 처벌받지 않는 날에 자극 받은 사람들 때문에 범죄율이 더 향상되지 않았을까 하는데요."
앵커가 모노톤의 질문을 내뱉었다. 뉴스를 진행하기 위한 형식적이고 뻔한 질문, 레파토리였다.
"국민들도 그 점을 염려하여 시위를 벌이기도 했고, 많은 논란거리가 되었었죠. 무기를 사지 못하거나, 해외로 도피하지 못 하는 빈곤층들이 아무 죄 없이 죽어나가는 무자비한 학살이라고요. 하지만 놀랍게도 숙청의 날은 국가에 전체적인 해방감을 주었고, 이것은 또한 나라의 경제적인 문제 해소와 범죄율 감소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자료를 보시죠."
남자의 손이 스크린으로 향했다. 그의 손 끝엔 복잡한 차트와 그래프가 있었고, 이내 이해하기 힘든 용어를 섞어가며 어려운 설명을 해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청의 날을 반대하는 반대론자들은 여전히 폭동을 일으키며…' 서로 말을 주고 받으며 진행하는 뉴스를 가만히 보고 있자니 웃겼다. 이게 예능 방송도 아니고, 퍼지 데이가 간단한 토론 주제인 마냥 주거니 받거니 하니 말이다.
범죄학자라는 남자가 말한 내용에 의하면 퍼지 데이는 2014년부터 지정되어진 연례 행사였다. 상식적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되지만 긍정적인 반응을 꽤나 얻고 있다고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반대하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은 아니었다. 안전하게 대피할 곳과 무기가 없거나 해외로 도피할 수 없는 사람들, 그래서 퍼지 데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빈곤층' 또는 '반대론자' 라고 부르곤 했는데 그들이 계속해서 폭동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혹시 특히 주의할 점이 있나 궁금하네요."
설명 후, 앵커의 주의할 점에 대해 물었다. 그 물음에 남자는 고갤 숙여 두 손을 만지작거리며 뜸을 들였다. 그 텀이 길어지자 앵커도 당황한 표정을 보였다. 방송사고인가 싶었다. 앵커가 웃으며 김동규씨? 하며 되묻자, 그제야 고개를 들어 제 왼쪽 가슴에 달린 뱃지를 가르키며 입을 열었다.
"단 왼쪽 가슴 팍에 이런 금빛의 무궁화 뱃지를 단 분들은 국가적 보호를 받습니다. 즉, 숙청의 날에서 자유롭다고 볼 수 있죠. 그 분들은 계급 체계가 높으신 공무원들과 직계 가족분들 이시고요. 또 주의할 점은 13일에서 14일로 넘어가는 정각이 되는 순간, 범죄 면제권은 무효화 되기 때문에 그 후에 발생하는 범죄는 강력히 처벌을 한다는 정부의…"
나는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당신도 결국에는 살아남는 거 잖아. 무궁화 뱃지? 국가적 보호? 그럴거면 왜 퍼지 데이를 만든건데. 어차피 죽을 사람들 이 참에 죽게 내버려 두고, 자기들만 살겠다는 심보일 것 이다. 울화에 치밀어 이것저것 생각하는 사이, 이미 상황은 정리가 된 듯, 앵커와 남자가 끝인사를 하고 있었다. 이제부터 CCTV 생중계를 시작한다는 말과 함께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세트장을 나가기 전, 몸을 숙여 인사했다.
"안전한 하루 보내시길."
짤막하지만 의미 있는 인사와 함께 뉴스는 막을 내렸고, 화면은 주요 사건과 범죄가 일어나고 있는 현장 CCTV를 보여주었다. 범죄가 일어나고 있는 전국의 씨씨티비를 돌려야 하기 때문에 화면은 쉴 새 없이 휙휙 돌아갔다. 그 짧은 찰나에도 눈에 가득히 담기는 끔찍한 풍경에 시선을 황급히 창 밖으로 옮겼다. 건너편 아파트 건물들이 보였다. 몇몇의 집들만 불이 켜져있었을 뿐, 아무도 살지 않는 아파트처럼 깜깜했고,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목을 죄여오는 침묵 속에서 핸드폰이 우웅─하고 울려대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크게 다가오는 진동 소리에 심장이 나락까지 가라앉는 듯 했다. 반 친구들과 만든 단체 채팅방으로부터 메세지가 온 듯 했다. 나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밀어넘겼다. 어두웠던 거실이 순식간에 휴대폰 불빛으로 약하게나마 밝혀졌고, 어둠에 익숙했던 눈이 부셨다. 서둘러 휴대폰을 뒤집었다. 갑작스런 빛 때문인지 허공에 카메라 플래쉬가 터지는 것처럼 아지랑이들이 피어올랐다. 다시 핸드폰 밝기를 조정하고, 친구들에게서 온 메세지를 확인했다.
- 야 너네도 정전됐어? 우리 아파트는 지금 전기 다 끊김
- 헐 왜?
- 몰라 어떤 미친 놈이 지하실 들어갔나봐
- 힘쇼ㅎ 난 그냥 집에 틀어박혀서 드라마나 볼라고
쉴 새 없이 오는 아이들의 카톡 메세지에 그나마 기분이 나아지는 것 같았다. 얼른 답장을 하려 타자를 치려던 찰나, 갑자기 문 밖에 무언가가 부딪혀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투웅─하는 소리가 난 것을 보면, 가벼운 것이 아닌 묵직한 것이 둔탁하게 부딪힌 거다. 온 몸의 털이 바짝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다. 무거운 공기의 무게에 숨이 턱하고 막혀왔다. 예상보다 너무 빠르게 찾아 온 시련이었다. 집에 없는 척을 할까? 아니면 문에 부딪힌 게 무엇인지, 누구인지 확인을 해야하나? 그러다 갑자기 날 덮쳐오면 어떡하지?
손에 들린 핸드폰을 살포시 내려두었다. 그리고 발을 소파 아래로 내딛었다. 짧은 순간에도 만감이 교차했다. 일단 확인만, 확인만 하는 거야. 작은 발소리라도 들릴까 뒷꿈치를 들어 까치발로 현관문 앞까지 다가섰다. 소리를 들으려 귀를 문에 가까이 대니, 차가운 철문의 감촉이 날카롭게 전해져 왔다. 그리고 희미하게 들리는 소리로 누군가가 문 앞에 온 것을 알 수 있었다. 더욱 자세하게 들으려 귀를 기울였다.
"하윽… 아…."
남자의 거친 숨소리였다. 아니, 숨소리라기 보단 참기 힘든 고통에 앓는 소리에 가까웠다. 다친건가? 현관문 구멍으로 내다보려고 해도 남자가 낮게 앉아 있는건지 당최 보이지가 않았다. 후욱 숨을 깊게 들이마신 후에 문고리를 그러 잡았다. 긴장한 손 안에 차있던 땀이 차가운 금속과 닿아 열기를 식혔다. 힘을 주어 돌리니 끼긱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리고 동시에 문에 기대 위태하게 앉아 있던 남자가 힘없이 옆으로 쏠리며 쓰러졌다.
열린 문 사이로 보인 남자는 온 몸을 떨며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생소한 광경에 나는 어쩔 줄을 모르고 입만 틀어막았다. 입고 있는 검은 정장에는 하얀 먼지같은 것들이 마구 묻어있었다. 그 옆에는 검은 철제가방과 정체 모를 알약들과 가루들이 분산되어 있었는데, 나는 직감적으로 남자가 발작을 일으키고 있는 이유라 판단을 내렸다. 남자가 온 몸을 비틀고, 고개를 젖히며 신음을 내뱉는 모습에 내게까지 고통이 전해지는 듯 했다. 남자의 땀 맺힌 목에 굵은 핏줄들이 서고, 손가락이 뻣뻣하게 굳어갔다.
나는 얼굴을 빼꼼 내밀고 계단 위와 아래를 차례대로 살폈다. 혹시나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이 있다면 나를 덮칠지도 모르니까.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나는 하얀 가루에 덮힌 남자를 일으키려 노력했다. 무모한 선택이었다. 이 남자가 나에게 어떤 해코지를 할 지도 모르고, 내 목숨을 끊어놓을 사람일지도 모르는데 그저 날 도와 줄 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으며 말이다. 남자의 팔 밑으로 손을 넣어 반 쯤 일으켰다. 그리고 질질 끌다싶이 현관까지 데리고 들어왔다. 남자가 입은 검은 정장에 가루들과 먼지들이 섞여 얼룩졌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남자의 발에 신겨져 있던 구두를 벗겨내어 아무렇게나 내팽개치고, 방금까지 내가 앉아 있던, 온기 남은 소파 위로 힘겹게 들어올렸다.
남자가 누워있을 동안, 나는 부엌으로 가 찬장에서 유리컵 하나를 꺼내 차가운 물을 따랐다. 물이 차오를수록 손바닥에 냉한 기운이 돌았다. 물이 어느 정도 담기자, 나는 컵을 들고 조심히 남자의 앞으로 가지고 갔다.
"여, 여기. 물 가져왔어요."
내 다급한 목소리에 남자는 반응한 것 같았다. 그는 눈에 힘을 주어 떠보려 했지만 눈썹만 미세하게 당겨 올려질 뿐이었다. 몸 또한 굳어서 움직이지 못 하고 끙끙대는 소리만 냈다.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 컵을 집어들었다. 컵을 남자의 입술에 가까이 가져가 조금씩 기울여 남자의 입으로 흘려 보냈다. 그 짓을 몇 번이나 반복한 후에야 그의 호흡이 점점 고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꽤 시간이 후른 후,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는 가슴이 들썩일 만큼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가 내셨다.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내가 다 숨통이 트이는 듯 했다. 조심스레 입을 열어 물었다.
"저기요. 정신이 좀 들어요?"
내 물음에 남자는 얼굴을 찡그리며 상체를 힘겹게 들어올렸다. 아직은 무리인지 상체를 지탱하고 있는 팔이 간헐적으로 떨려왔다. …어디야. 그는 머리가 아픈지 손을 이마에 갖다대며 읊조렸다. 아직 무슨 상황인지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가 불빛이라고는 티비 화면밖에 없는 어두컴컴한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경계가 가득한 눈빛으로 내 머리 꼭대기부터 발 끝까지 주욱 훑었다.
"너 뭐야."
이런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나는 남자와 같이 챙겨왔던 무늬 없는 투명한 비닐을 집어들었다. 그 안에는 보란 듯 하얀 가루가 자잘하게 들어있었다. 어둠 속에서 남자의 눈이 번뜩였다. 그가 비닐을 낚아채려 나에게 손을 뻗었지만, 내가 빨랐다. 최대한 팔은 안 움직이려 함에도 불구하고, 몸의 반동에 흔들려 가루들이 바닥으로 오소소 떨어졌다. 그리고 나는 뻔뻔하게 말했다. 속으로는 까무러칠 만큼 덜덜 떨고 있으면서.
"내가 당신 구했어요."
"그거 당장 내려 놔."
무섭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죽기 싫다는 마지막 몸부림, 희망을 걸었다. 내 마지막 빛줄기일 테니까.
"당신이 정신 나가서 축 늘어져있을 때, 혹시 해코지라도 당할까 집에 데리고 온 거라구요."
내 손 끝에 달랑달랑 쥐어져있던 봉투로 향했던 남자의 시선이 내게로 옮겨졌다. 그리고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쓸데없는 짓을 했군. 싸하게 식은 그의 두 눈에 식은 땀이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저 사람이 없으면 약해빠진 난 죽고 말 거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아빠 앞에서도 참았던 것이 모르는 남자 앞에서는 주체할 수 없이 터져나왔다. 결국 엉엉 울며 주저 앉아 남자의 다리에 매달렸다.
"나, 나 사실 진짜 무섭거든요. 제발 살려줘요."
"……."
"엄마아빠가 날 두고 도망갔어요."
남자는 내 갑작스러운 울음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의 바짓단을 잡고 우는 내 꼴이 추할 것을 알면서도 난 멈출 수 없었다. 아무리 아닌 척 해도 죽음이 두려운 나약한 존재였다.
"도와주세요."
"……."
"하루만 같이 있어주면 되는 거잖아요."
내 부탁에 남자는 얼굴을 종잇장 구기 듯 찡그렸다. 굉장히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우는 나를 한참을 내려다보다가 굳게 닫혀있던 입술을 열었다. 알겠으니까 바지에서 그 손 치워. 가시가 돋혀있지만 날 안심시키는 목소리에 얼른 손을 떼며 눈물을 훔쳤다. 그는 곧바로 상체를 숙여 내가 잡고 있던 바짓단을 툭툭 털어냈다. 그리고 바닥에 앉아 있는 내 옆에 털썩 앉았다. 그는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리며 나지막한 한숨을 내뱉었다.
안심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눈물은 멈추질 않는 바람에 눈가의 물기를 계속해서 옷소매로 닦아야 했다.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의미없는 티비 화면만 바라보았다. 이 대화없는 시간이 체감상 10분은 더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어색한 정적을 깨고자 나는 철제가방을 옆으로 그에게로 스윽 밀며 '조직… 뭐 그런 일 하는 거예요?' 라고 물었다. 앞을 향해 있던 그의 얼굴이 돌아 나를 바라보았다. 눈을 질끈 감고만 싶었다. 망했네. 그래도 그렇지 어쩌자고 그런 질문을 해. 나는 그와 눈을 마주치고 손사레를 치며 말했다.
"아, 아니 의심한 거 아니에요…! 그냥 검은 정장에 구두라서요. 영화 보면 그렇잖아요."
눈알만 이리저리 굴리며 자책하고 있는데 옆에서 남자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딱히 부정은 안 해."
"…아."
그리고는 가방을 챙기며 정말 어떻게 알았냐는 눈빛으로 날 쳐다본다. 이로 씹어버려 다 까져서 까칠한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느릿하게 말했다. 사실 옷차림도 그렇고 이상한 향 나는 가루들도 그렇고요. 또 엄마아빠가 돈 쪽으로 일하셔서 그 쪽 같은 사람들 많이 봤어요. 나도 어깨를 한 번 으쓱이며 감흥없이 말하자, 남자는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네 부모님이 돈 쪽으로 일하셨다고?' 하고 되물으며 뭐가 그렇게 재밌는 건지 그는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내며 아까 전까지만 해도 내 손에 들려있던 봉투를 철제가방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새지 못하게 잠갔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다 물었다. 그런데 이름이 뭐예요? 나이는요? 뜬금없는 물음에 남자의 얼굴에 의아함이 번졌다.
"그건 알아서 뭐하게."
"저 지켜 줄 사람 이름이랑 나이정도는 알아야죠."
뻔뻔한 요구에 그는 사람 참 피곤하게 만든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길게 뻗은 검지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던 그가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름은 김종인,' 그의 이름 석자가 내 머리를 댕하게 울려왔다. 그의 흑표범같이 진한 이목구비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럼 나이는요? 하니 스물다섯이라 했다. 내가 예상했던 것 보다 젊은 나이였다. 나이가 많아 보였다는 건 아니다. 그저 이런 일을 하기에 나이가 좀 있겠다고 예상했었을 뿐이다. 나는 그의 나이를 곰곰히 생각하다가 딱히 부를 호칭이 없어 조금은 장난스럽게,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다.
"완전 아저씨네요?"
내 말에 남자는 어이없다는 듯 날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게…' 하며 손을 치켜올렸다. 내 몸은 반사적으로 웅크러졌고, 그 모습을 몇 초간 지켜보고 있던 남자는 허공에 있는 손을 슬쩍 내렸다. 그의 손이 원위치로 돌아간 것을 확인한 후, 나는 다시 몸을 반듯이 피고서 입을 열었다.
"아저씨."
아저씨라고 부를래요. 호칭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했지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도 딱히 자신이 불릴 호칭이 마땅치 않은 것을 아는 모양이었다. 이제 나는 안전하다는 생각에 입가에 슬쩍 걸리려는 미소를 애써 감추었다. 하지만 둘 사이의 대화가 끝나니 집 안에는 어색한 정적만이 흘렀다. 나는 어차피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티비 화면을 보면서 몸을 좌우로 갸우뚱거리며 딴청을 피웠다. 곧 옆에서 움직임이 느껴졌고, 내 두 눈은 자연스레 아저씨를 향했다. 줄곧 입고 있었던 정장이 불편했던건지 재킷을 벗고 있었다. 검은 재킷 한 꺼풀이 벗겨지자, 안에 입고 있던 새하얀 셔츠가 드러났다. 아저씨는 목을 답답하게 조이는 단추부터 아래로 두 개를 툭 툭 풀었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에게서 눈을 돌려야 할 것 같아 시선을 옮기려던 순간, 아저씨가 물어왔다.
"근데 꼬맹이 너,"
"…?"
"이 집에 살아?"
이상한 질문이었다. 이 집에 사냐니요? 이 집에 사니까 제가 여기 있죠. 그리고 내 대답에 아저씨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묘한 눈빛으로 쳐다보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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