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늦을 거 같다. 먼저 자. 미안.]
띠링, 경쾌한 소리와 함께 방금 도착한 문자를 가만히 내려 보고만 있자, 곧 액정이 까맣게 꺼진다. 액정에 비친 두 개의 눈동자를 마주보니 한심한 꼴이 우습다. 홀드 키를 누르자 잠금 화면 위에 맞잡은 투박한 두 손 위에 하얗고 굵은 숫자가 뜬다. 11:49. 식탁 위의 냉기가 소름 돋게 싫다.
[왜 늦는데?]
[부장님이 잡고 안 놓아 주시네. 부장님이 나 많이 아끼시잖아.]
박찬열이 말하고 있는 부장님이, 아까 나에게 전화를 걸어 나와 같이 외식을 할 거라며 네가 하루 종일 들떠 있었다며, 부럽다고, 말 한 사실을. 박찬열은 알고나 부장님 핑계를 대는 걸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저녁식사를 차리지도 않은 내가 애잔하다.
부엌으로 가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찬밥을 꺼내 물을 말아 넘어가지 않는 것을 꾸역꾸역 집어 먹었다. 먹먹함에 넘어가지 않는가 싶더니, 그래도 물을 말아서인지 꽤나 잘 넘어간다. 기계적으로 숟가락질을 하고 턱을 움직이다보니 어느새 밥알은 사라지고 뿌옇게 된 물만 그릇 한 가득 남아있다. 그릇 째로 입을 대 물을 벌컥벌컥 마시니 타는 속이 좀 가라앉기는 무슨. 밥이랑 김치도 같이 먹을 걸 그랬다. 내 코끝이 찡해 오는 건 다 생강을 씹어서 그런 거라고. 변명이라도 할 수 있게.
3년. 결혼 생활 3년차면 아주 적은 날도, 그렇다고 많은 시간을 보낸 거도 아닌 아주 애매한 시간 속의 부부이다. 그렇기에 권태가 오기도 쉬운 때. 나와 박찬열은 딱 그 시간 속에 갇혀있다,
한 달, 아니 어쩌면 더욱 전에서 부터 박찬열의 권태기는 찾아왔다. 타이밍 좋게도 나 역시 비슷한 시기에 권태기가 찾아왔고, 우리 둘의 사이가 서먹해 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친구로 2년, 연인으로 5년, 부부로서 3년, 도합 8년이 넘는 시간 동안 쌓아온 관계가 무너지는 건 아주 한 순간이었다.
“도경수, 너 요즘 박찬열이랑 사이 안 좋냐?”
“어. 권태기지, 뭐.”
“너 그러다 박찬열 바람나면 어쩌려고 그래.”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다. 옛 말은 틀릴 것이 없었다. 정말, 사람 잡았다. 출장을 간다던 박찬열을 친구들끼리 놀러간 펜션에서 이름 모를 여자와 있는 모습을 목격 한 건 매우 불쾌한 경험이었다. 혹시나 한 마음에 박찬열 몰래 그의 핸드폰을 보자 ‘애기’ 라는 이름으로 저장되어 있는 번호와 수많은 애정 어린 연락을 한 기록이 선명했다. 물론, 그 번호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었고, 화면을 한참 내리고서야 ‘경수’ 라는 번호를 찾을 수 있었다.
솔직히, 이해는 갔다. 아무리 알파와 오메가의 관계라고 해도, 박찬열은 여자를 좋아했으니까. 저러다 말겠지 한 바람이, 벌 써 한 달이 넘도록 끝나질 않는다. 아니, 오히려 사이가 더 깊어진 거 같다. 그와 반비례해서, 나는 박찬열과 집 밖에서의 시간을 즐긴 게 까마득하다. 기껏해야 일주일 전에 집에서 맥주와 육포를 안주로 공포영화를 본 게 우리의 마지막 데이트였다.
[술 많이 마시지 말고 와. 차 안 가져갔지?]
[응. 먼저 자. 미안해.]
미안하다는 건 뭐가 미안하다는 걸까. 단순히 회식이 늦어져서? 아니면 바람을 피워서? 아니면, 나를 바보로 만들어서? 그 어느 이유로 생각해 봐도 유쾌하지 않다. 명치끝이 아릿한 게, 아무래도 방금 넘긴 밥이 체한 것 같다. 아, 차라리 전부 토하고 편해지고 싶다.
* * *
삑, 삑, 삐비빅.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리기도 채 전에 느릿느릿 눌러진 비밀번호 소리와 현관문이 열렸다. 박찬열이 돌아 온 모양이었다. 어두워 보이지 않는 앞에 인상을 쓰며 더듬더듬 핸드폰을 찾는데 먼저 거실에 불이 켜졌다. 갑작스러운 밝은 빛에 두 눈이 따갑다.
“박찬열, 지금이 몇 시야.”
잠에 묻혀 있다가 꺼내진 목소리는 이리저리 갈라져 볼품없기 그지없었다. 큼큼, 한 번 목을 가다듬고 삐딱하게 팔짱을 낀 채로 박찬열을 노려보자 술을 얼마나 마신건지 헬렐레, 아마 여기가 지 집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거 같다. 이 덩치 큰 애새끼를 어떻게 해야 좋지. 밀려오는 두통에 관자놀이를 꾹 누르고 이리 비틀 저리 비틀대는 박찬열을 부축하자 낑낑대며 안겨온다.
“으으, 애기야. 오빠 토…”
애기. 박찬열은 절대 날 애기라고 부르지 않는다. 경수야, 도경수. 혹은 여보, 자기야. 그리고 내 남성성을 존중하고 싶다는 이유로, 절대 나에게 오빠라는 호칭으로 자신을 지칭하지 않는다. 장난으로도.
“내팽겨 치기 전에 화장실로 기어들어가.”
“우으, 윽.”
냉정하게 어깨위에 있던 팔을 내던지며 거의 밀치듯 박찬열을 밀어냈더니 윽, 윽, 대면서도 화장실로 기어들어간다. 애기. 그건 분명 핸드폰 속 그 여자를 부르는 말이다. 같이 펜션에 놀러간, 그 여자. 아마 방금까지도 같이 있었을 그 사람.
체한 속이 다시 뒤집어지는 느낌에 문을 거세게 닫고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누웠다. 넓은 킹사이즈의 침대가 미워서 괜히 발길질도 했다가, 곧 기운마저 빠져 가만히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시발새끼. 내일 아침 저 새끼 정신 돌아오면 이젠 정말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 언제까지 이런 상태로 지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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