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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화

三화









.

 

재앙이다. 이것은 필시 크나큰 재앙이 틀림없다고 도미는 생각했다. 황궁 생활만 어언 20, 온갖 풍파가 날아드는 구중궁궐에서 황후를 지켜 내리라 다짐했던 최고상궁은 다시 한 번 머리가 아뜩해졌다. 세상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있음에도 뭣하나 낙이 없는 사람처럼 무색이던 황제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마마.”

 

일제히 고개를 숙인 내관들과 황후전의 상궁들은 망부석이 되었음은 물론, 황후를 끌어안은 익위사 지민은 제 눈앞에서 황제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 지 신경 쓸 여력도 없이 망연한 얼굴을 했다. 도미만 발을 동동 구르며 정신을 놓은 황후를 애타게 불렀다.

 

하아, 거슬리기 짝이 없군.”

 

잔뜩 굳은 표정으로 도미를 간 떨리게 하더니, 금세 질렸다는 얼굴을 한 정국의 입에선 허탈한 말이 흘러나왔다. 도미는 청력을 바짝 세웠다. 황제의 말이 꽤나 의미심장했기 때문이었다. 일말의 기대가 냉궁의 최고상궁인 도미의 맘속에 피어올랐다. 아예 무심한 줄만 알았더니 혹여 폐하께서? 그래, 이건 정말 일말의기대였다.

 

이리 다오.”

 

곤란한 낯으로 황후를 물끄러미 보던 정국이 한 발 다가갔다. 저렇게 울어버리면 어쩔 도리가 없지 않은가. 정국은 속으로 생각했다. 황제의 발걸음이 가까워지자 비로소 정신을 차린 지민. 허나 이 상황을, 일렁이는 제 마음을 자각할 겨를도 없이 지민은 바로 뼈에 저리는 상실감에 휩싸여야 했다. 황제가 제 품에서 황후를 데려갔기 때문이었다. 여린 몸으로 저를 사력을 다해 끌어안던 황후가 본래 주인의 품으로 떠나갔다. 가볍게 황후를 안아 든 황제는 힐끔 품 속 여인을 내려다보다 이내 정면을 바라봤다. 너무도 쉽게 황제의 품에서 곤히 정신을 잃은 황후, 그리고 황제의 시선을 옭아매는 뺨에 걸린 눈물. 그 때문인지 품 안에서 황후의 숨결이 느껴질 때마다 정국은 답지 않게 몸을 움찔했다.

 

폐하! 테의를 청하였사오니 곧 황후전으로 올 것이옵니다.”

대전회의는 무산이다. 상소문을 황후전으로 가져오라.”

 

때마침 태의를 부르고 달려온 내시백이 도착하고, 황제는 그대로 황후전으로 들었다. 황제의 정무에서 대전회의만큼 중요한 것도 없었으나, 황제는 노쇠한 신료들이 대전에서 얼마를 기다리건 말건 상관없다는 듯 굴었다. 도미는 그런 황제의 태도에 자꾸만 떠오르는 웃음을 삼킬 수 없었다. 이게 얼마만의 황후전 행차인지 가물가물하려던 찰나, 어떤 연유에서든 대전회의마저 무르고 찾아온 황제의 방문은 가히 영광스러웠다. 도미는 입을 꾹 다문 채 눈치껏 저만 황제를 따라 들어갔다. 재빨리 들어가 황후 침전의 금침을 펼치고 정국은 거기에 황후를 조심스럽게 내렸다. 그리곤 손을 황후의 이마에 살짝 대었다.

 

지극히 정상이군.”

 

작게 중얼이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물끄러미 생기 없는 얼굴을 내려다보던 황제는 황후의 머리에 요란스럽게 꼽혀있는 수식을 발견하곤 인상을 찌푸렸다. 저 무거운 것들을 지탱해내려니 여린 몸이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는 게 당연했다.

 

머리장식이 뭐 저렇게 요란한 것이지?”

 

황제가 잔뜩 불만스럽게 물었다. 도미는 고개를 숙이고 황제가 모르게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그게 다 누구보라고 목이 부러질 때까지 감내한 것인데 참으로 야속하기 그지없었다.


줄이겠나이다.”

 

도미의 온순한 대답에도 일그러진 미간을 펴지 않던 황제가 제 손을 뻗어 수식을 뽑아냈다. 화잠부터 옥색 핀, 각양각색의 비녀까지 작은 뒷통수에 올려져있지 않은 것이 없었다. 조심스럽게 어쩌면 닿는 면적을 최소화 하면서 정국은 황후의 머리를 정돈했다. 모든 수식이 제거되고 수수한 머리칼만 남자 비로소 만족한 듯 유한 얼굴을 했다.

 

페하! 태의 들었사옵니다.”

들라.”

 

때마침, 갑작스런 황후의 졸도에 부랴부랴 달려온 태의는 황후의 침전 앞에 선 정국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황후에게 가 있던 시선을 돌린 황제는 덤덤한 눈길로 고개를 까딱였다. 와서 살피란 소리였다. 이에 태의는 조심스레 다가가 금침 밖으로 나온 황후의 새하얀 팔목을 살짝 쥐었다.

 

어떤가?”

몸이 많이 쇠약해지셨사옵니다. 혹여 끼니를 자주 거르십니까?”

 

태의가 심각한 얼굴로 묻자 황제의 얼굴에 짐짓 당황한 기운이 서렸다. 황후가 밥을 챙겨먹는 지 아닌지 본인은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긴 평소에 황후전에 관심이 있었어야 말이지. 곤란해진 황제는 도미를 쳐다봤다. 눈을 내리깐 채 읍하고 있던 도미가 입을 열었다.

 

입맛이 없으시어 아침을 항상 거르시옵고, 다른 때에도 제대로 식사하시지 못하십니다.”

 

입맛이 없는이유에 황제가 한 몫 한다는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았다. 말 하지 않는다면 황제는 영원히 모를 테지만.


허면 신이 체력 보강에 좋은 탕약을 지어 올릴 터이니 식사를 거르지 말고 하신 후에 드시게 하시옵소서. 허면 오늘처럼 작은 행차에도 버티지 못하시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태의의 간곡한 어조에 황제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뭘 얼마나 먹지 않기에 쓰러지기까지 한단 말인가. 자신이 그은 생채기는 생각도 않은 정국은 마냥 황후가 답답했다.

 

이후 황룡포의 깃을 풀며 황제는 황후전에 마련된 탁상으로 가서 앉았다. 도미는 황후의 침전 뒤로 다가와 무릎을 굽히곤 정국이 말만 정리지 거의 헤집어 놓은 황후의 머리를 조심스레 빗어 넘겼다. 탁상에 앉아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국이 몸을 더 편하게 기대며 눈을 꾹 감았다. 지민의 품에서 서러운 듯 눈물을 떨어뜨리던 의식 없는 황후의 얼굴이 맴돌아 황제의 입에선 근심어린 한숨이 튀어나왔다. 황후전 일에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황후전을 이 황궁 깊은 곳에 쳐 박아 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눈에 띄지 않으면 신경 쓰이지도 않으니까. 헌데 자꾸 이리 굴면황제는 더 이상 방도가 없었다.

 

폐하, 오늘 신료들이 올린 상소문을 가져왔나이다.”

 

한참을 짙게 그늘지던 황제의 얼굴이 내시백의 당도에 다시금 평정을 되찾았다. 황제는 자연스럽게 앞에 놓인 상소문 하나를 집어들었고 순식간에 황제의 집무실로 바뀌어버린 공간에 도미는 조용히 황후전을 나갔다.

 

정신을 잃은 채 쓰러진 황후와, 그녀의 옆에서 집무를 보는 황제. 지나치게 이질적이고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허나 황후는 계속해서 정신을 잃은 채 누워있었고, 황제는 묵묵히 상소를 읽고 제 할 일을 해나갔다. 정국은 지나치게 차분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짓걸이는 상소는 쓰레기통에 쳐 박았다. 턱을 가볍게 괸 채 일사천리로 집무를 보는 황제는 꽤나 이지적이었다. 어느새 황후전 안의 공기가 너무도 평온하게 물들었다. 그 속에 아주 익숙하게 스며들던 황제는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이곳이 황후전임을 자각했다. 마지막 남은 상소를 천천히 펼치며 정국은 몸을 느슨히 풀었다. 나른해진 그의 눈은 오랜만에 침소에 누운 황후를 눈에 담았다. 여전히 애정도, 백야를 볼 때처럼과 같은 사내의 욕망도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애틋한 눈길은 천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잠시 황후를 담던 눈을 돌려 상소를 펼쳐보았다. 정갈한 필체로 쓰인 마지막 상소가, 정국의 눈을 매섭게 잡아챘다.

 

천한 항아를 곁에 두어 황실의 기강을 흩트리지 말라 황제를 힐난하는, 요즘 흔히 빗발치던 내용의 상소였다. 순식간에 백야를 불결하고 부정한 계집으로 만들어 버리는 상소에 정국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 따위의 상소를 적어 바칠 위인은 다른 건 몰라도 대승상의 사람이 확실할 터. 허나 황제는 동요하지 않았다. 고아한 몸짓으로 그 상소역시 쓰레기통에 쳐 박았을 뿐. 이래서 더더욱 백야를 놓지 못하는 것이다. 고작 항아 하나에 아래서 들고 일어서는 꼴이란. 제 여식을 황후자리에 앉혀놓은 대승상은 사소한 것에도 제 권세를 잃을까 노심초사했다. 그리고 대승상의 그런 조급함은 명석한 황제를 더욱 자극했다.

 

가여운 황후. 하필 지금, 깊은 잠에 빠져 있던 황후가 조심스레 눈을 떴다.

 

도미야.”

 

지끈거리는 눈을 뜬 황후는 바로 펼쳐지는 것이 황후전의 천장이라 가장먼저 마음을 놓았다. 그리곤 습관적으로 도미를 찾기 위해 고개를 살짝 틀었는데, 황후의 눈에 보인 것은 눈이 시리게 푸른 황제의 용포였다.

 

깨어난 모양이군.”

황상.”

 

꿈이다. 환영이다. 폐하께서 이곳에 오셨을 리 없어. 황후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눈앞에 보이는 황제를 놓지 못했다. 흐린 시야에 보이는 풍경이 진실인지 환영인지 분간도 안 갔다. 애당초 황제가 황후전을 찾았을 리도 만무하지 않은가. 환영이다. 비참한 마음이 만들어 낸 꿈이야. 황후는 이를 악 물었다. 허나 갈수록 또렷하게 보이는 시야 속 황제는 입가를 비틀며 황후를 바라봤다.

 

황상께서 어떻게.”

왜 울었지?”

 

원래도 황후를 배려할 생각은 없었지만, 황제의 기분이 땅 끝까지 추락한 지금은 더더욱 아니었다. 황제는 자신이 가장 궁금했던 것을 부가설명 없이 곧이곧대로 황후에게 질문했다.

 

?”

짐의 발길을 이곳에 붙잡기 위해선가. 아니면 그리도 고고한 척 하던 황후께서도 이젠, 동정심을 유발해 볼 작정인가?”

 

정국의 목소리는 사무치게 나긋하고 또한 가차 없었다. 황후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울었다고? 자신이, 황제의 앞에서? 대체 정신이 나간 동안 무얼 한 거야. 정신을 차린 지 얼마 안 된 황후는 금세 망연자실해졌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황후에게 그런 건 어울리지 않아.”

황상, 신첩은 황상께서 무슨 말을 하시는 지 잘 모르겠습니다.”

짐을 원망하고, 투기하고, 끊임없이 버티란 말이야. 어째서 그렇게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거지?”

 

황후의 나약함이란 황제가 가장 보기 싫어하는 것이었다. 저 흐트러짐 없고 고고한 황후가 한없이 여인처럼 굴 때면, 황제는 가슴이 답답했다. 황후는 오로지 황후여야만 했다. 여인이 아니라 꼿꼿하게 화려한 의복을 견디는 것처럼 무너짐 없는 견고한 황후. 덕분에 상황파악이 아직 제대로 되지 않는 황후는 무작정 하고픈 말만 하는 황제에 울컥 감정이 차올랐다.

 

그대 아비가 대승상이다. 그대의 뒤에는 그를 비롯한 수많은 척신들이 줄을 섰지.”

…….”

그들은 온전히 제 권력을 그대에게 걸었어. 이게 무슨 뜻인지 아나?”

…….”

그대는 내게여인이 아니라, 정적이란 말이다.”

 

황제의 말이 맞았다. 황후의 뒤에는 대승상을 비롯해 온갖 부귀와 권력을 탐하는 척신들이 줄을 섰다. 그들은 황후가 황손을 낳아 최상위의 권력을 잡길 기다렸고, 거기에 빌붙어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온갖 권모술수를 일삼았다. 헌데 어찌 황후가 단지 여인이기만 할 수 있어. 정국의 말에 제 입술을 꽉 깨문 황후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건 신첩이 원한 삶이 아닙니다.”

뭐라?”

신첩은 제 아비의 권력도, 척신들의 기대도 상관없이 그저, 그저 황상께 여인이고 싶었습니다. 황상이 끼고 도시는 백씨 계집처럼 여인이고 싶었단 말입니다.”

 

황후의 음성이 나약하게 떨렸다. 제 입으로 백야에 대한 황제의 애정을 인정하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는데, 울컥 진심을 토하다보니 결국 인정하고야 말았다. 정국에게 백야가 여인이라는 것을.

 

황후는 절대 백야가 될 수 없어. 황후가 날 황제로 만들 때, 그 아이는 나를 필부로 만들 거든.”

 

아아. 황후의 입술을 파르르 떨렸다.

 

황제는 비정하고 한 없이 시린 눈을 하고서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후는 아직 황제를 보내지 못하였는데, 할 말이 억겁처럼 많은데, 황제는 망설임 없이 황후에게서 뒤돌아섰다. 황후는 절대 백야가 될 수 없다. 그 한 마디가 폐부를 찔러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다. 어느새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자각하기도 전에, 황후는 힘겹게 침소에서 일어나 황후전을 빠져나가는 황제를 붙잡고자 했다.

 

황상!”

 

정신이 하나도 없고 머리가 깨질 것처럼 울렁거렸다. 황후의 몸에 걸쳐진 의복이 사방으로 펄럭거렸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정국의 뒤를 따르던 황후의 옷깃에 쓸려 탁상 위 상소가 우르르 떨어지고, 찻잔이 쨍그랑 소리를 내며 산산 조각났다.

 

당황한 황후가 다리에 힘이 풀려 무릎을 굽히고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덕분에 날카롭게 부서진 파편이 황후의 고운 손을 가차 없이 찔렀다.

 

,”


뒤에서 온갖 것들이 부서지고 떨어지는 소리에도 푸른 황룡포를 펄럭이며 또한 가차 없이 걸어 나가던 황제가, 단말마의 비명에 다시 돌아섰다. 서릿발 같은 얼굴과 빠른 걸음으로 저벅저벅 다가온 황제가 황후의 손에 들린 찻잔 조각을 매섭게 뺏어들었다. 그것을 세게 쥔 덕분에 정국의 손에서 새빨간 선혈이 터져 나왔다. 제 손과 파편을 스친 황제의 손, 그리고 황제의 굳은 얼굴을 멍하게 바라보던 황후가 기어코 눈물을 터뜨렸다.

 

황상손에 피가아아, 어떡해.”

 

그리고 이내 작은 손으로 피가 흐르는 정국의 손을 애타게 쥐며, 눈물가득 걸린 눈으로는 정국의 눈을 맞추었다. 작고 여린 황후가 사력을 다해 황제를 걱정했다. 정국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황제가 황후의 손을 뿌리치며 파편들을 바닥에 던지듯 놓았다. 성수 같은 천자의 선혈이 흘러내리는 큰 손으로 황후의 턱을 치켜 든 정국은 황후에게 바짝 얼굴을 붙였다. 정국의 뜨거운 숨이 코끝에 닿았다. 황후는 멍하게 놀란 눈으로 제 눈앞의 황제를 보았다.

 

미련하게 굴지 마라.”

…….”

내 눈앞에 거슬리지 말란 말이야.”

 

황후의 창백한 얼굴에 정국의 피가 묻었다. 그리고 정국은 황후의 귓전에 아주 나긋하고 잔인하게 속삭였다. 질척이는 음성이 아렸다. 황제는 처음으로 황후와 잔뜩 밀착된 몸에 뒷목에 묘한 흥분이 끼쳤다. 그건 아주 꺼름칙하고도 기분 나쁜 감정이었다.

 

덕분에 얼굴을 잔뜩 구긴 채, 황후를 구렁텅이 버려두듯 다시 멀어진 정국은 손에서 피를 뚝뚝 흘리며 황후전을 빠져나갔다. 황후전안에서 들리던 언쟁과 물건이 깨지고 떨어지는 소리, 마지막으로 손에 피를 흘리며 심기 불편한 얼굴로 그 곳에서 나온 황제.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한 도미는 황제가 나가자마자 곧장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그리곤 얼굴에 피를 묻힌 채 주저앉아있는 황후를 보고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마마!”

…….”

뭣하느냐! 얼른 깨진 찻잔을 치우고 황후마마를 뫼셔라!”

 

황후의 망연한 얼굴에 도미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황제는 항상 이런 식으로 황후의 속을 모질게 헤집는다.

 

나는, 나는 괜찮다.”

 

신경이 잔뜩 날카로워진 도미와 달리, 잠시 넋이 나간 듯한 얼굴을 하던 황후는 이내 천천히 일어나며 나인들의 손을 물렸다. 황후는 이 황궁에서 가장 높고 강한 여인. 어느새 침착한 얼굴을 하고서 침소로 걸어간 황후는 천천히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도미야, 갈아입을 옷을 다오.”


황제의 말대로 나약한 건 어울리지 않아. 황후는 화려한 옷을 입고 오늘도 황후가 되고자 애를 썼다. 그것이 황후가 해야 할 일이니까.

 


/ 황후열전

 



황궁은 모두가 질서를 가지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곳이다. 지엄한 법도와 절차를 따라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윤기는 그 일상적인 평온함 사이를 조급하게 뚫고 들어갔다. 빠른 걸음으로 높디높은 황궁 계단을 올랐다. 그는 황후의 오라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대승상의 아들이자 권세를 가진 문하시중. 허나 그에겐 이 황궁이 올 때마다 낯설었고 특히 오늘은 두려웠다. 황후가 쓰러졌다는 전갈을 받았다. 그리고 윤기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황궁으로 달려왔다. 황후전이 아무리 구석에 박혀 있다하나, 오늘처럼 멀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문하시중 어른!”

 

윤기는 황후전에 당도해서 저를 보고 고개를 조아리는 항아도 무시한 채 무작정 들이닥쳤다. 무려 황궁의 안주인인 황후의 처소였으나 오라비가 들었다 고할 시간이 있을 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멈추지 않고 다급하게 문을 여는 윤기의 행동에 문 앞을 지키던 항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허나 다시 그를 붙잡아 새울 틈도 없었다.

 

그리고 윤기는 금방 후회했다. 황후가 쓰러졌다는 소식에 마음이 너무 조급해져서 만약의 사태를 생각지도 못했다. 황후전 문을 열었을 때, 처소 안 황후는 깨어나 있었다. 그리고 도미의 시중을 받아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황후와 도미는 그대로 동작을 멈추고 놀란 얼굴로 윤기의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새하얗고 얇은 적삼 너머로 미처 팔 한쪽 밖에 넣지 못한 황금색 의복과 부드러운 어깨선이 보였다.

 

오라버니!”

 

잠깐의 정적, 황후는 놀란 얼굴을 거두곤 반갑게 윤기를 불렀다. 허나 윤기는 굳은 얼굴로 망설임 없이 문을 쿵- 닫았다. 미쳤군. 아무리 오라비라 하여도 황후의 침전을 덜컥 열어젖힌 건 무모하고 무례한 짓이었다. 어디에도 눈과 귀가 있는 것이 황궁, 황후에게 괜히 좋지 못한 소리가 퍼진다면 남얘기 좋아하는 대소신료들은 물론 아비인 대승상이 가만있지 않을 터였다. 자신의 조급함을 탓하며 윤기는 문 앞에서 지그시 눈을 감았다.

 

조금만 기다리셔요. 황후마마께서 방금 깨어나셔서 옷을 갈아입고 계시는 터라.”

 

그리고 그 고요함을 깨뜨리는 목소리가 있었으니, 고개를 푹 숙인 채 황후전 문 앞을 지키는 항아였다. 기어들어갈 듯한 목소리에 수줍음이 만연했다. 나인은 윤기를 힐끔힐끔 올려다보며 대답을 구했다.

 

그리하지요.”

 

윤기는 하는 수없이 지극히 무미건조한 어투로 답을 주었다. 그에도 항아는 낯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항아들 사이에서 문하시중은 유명인사였다. 누구에게나 존대를 하고 예의 바른, 다정함에 인품과 권세, 훤칠한 인물까지 가진 문하시중. 황후전에 발령받은 지 얼마 안 된 항아는 오늘 그런 문하시중을 처음으로 보았다. 그래서 놀랍고 설레는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오라버니, 들어오세요.”

 

항아는 곁눈질로 윤기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했으나, 그 시간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황후의 부름에 심호흡을 한 번 하던 윤기가 문을 열고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송구하옵니다.”

 

황후는 어느새 눈부신 의복을 갖춰 입고 화려한 장신구로 꾸민 채 앉아있었다. 그를 보고 안도한 윤기는 황후의 앞에 느긋하게 가 앉았다.


도미야, 차를 내오렴.”

, 황후마마.”

 

오랜만에 오라비를 만나 반가운 모양인지 황후의 얼굴은 평소보다 웃음기가 맴돌았다. 반면 윤기는 평소에도 그러하지만 지금도 무덤덤하고 날카로웠다. 서로 천성이 그런 남매였다.

 

쓰러지셨다 들었습니다.”

, 걱정을 끼쳐 미안합니다.”

걱정, 걱정이라. 손은 또 왜 다치셨습니까?”

 

윤기는 조용히 읊조리며 황후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그러다 탁상에 올린 손의 상처를 보았다. 윤기의 물음에 황후는 황급히 의복소매를 내려 다친 손을 가렸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자꾸 숨기려는 듯한 황후의 태도에 윤기의 표정이 미묘하게 뒤틀렸다.

 

황후께선 대체 황궁에 들어앉아 뭘 하시는 겁니까?”

 

도미가 찻상을 들고 들어오다 잠시 멈춰 윤기를 보았다. 또 시작이다. 황후의 오라비라는 작자가 황후를 찾아와 그녀의 가슴을 도려내는 잡소리를 해대는 것. 황후는 머지않아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서 힘없이 제 오라비를 부르겠지. 황제와 태후 다음으로 이 황궁에서 권세가 가장 높다는 황후에게, 그 고고한 여인에게 결국 상처 주는 사람은 황후의 오라비였다. 허나 황후는 매번 윤기가 황후전에 들 때마다 해사한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도미는 윤기와 황후의 앞에 찻잔을 두면서 일부로 윤기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네가 황후마마께 무슨 말이든 짓걸일 수 있으면 해보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윤기는 그런 도미의 시선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황제에게 관심 받지 못해 독수공방하는 것도 모자라 이젠 제 몸 하나 보전하지 못하고 쓰러지기까지. 참으로 가관입니다. 아버님을 뵐 낯은 있으십니까?”

뺨이 찹니다. 밖의 날씨가 춥나요?”

 

윤기의 힐난 섞인 말을 황후는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다만 가만히 손을 뻗어 윤기의 뺨에 가져다 대었다. 순간 잔인한 오라비의 시선도 가차 없이 흔들리는 걸 모두 숨기지는 못했다. 달큰한 살내음이 끼쳐옴에 윤기는 정신이 혼미했다.

 

마마의 냉궁보다 시리겠습니까?”

 

그래서 자존심상하는 속을 감추기 위해 더욱 비수가 되는 말로 황후를 대했다. 덕분에 온기를 가지고 뺨에 닿았던 고운 손이 금세 떨어졌다.

 

백씨 항아를 치워버리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윤기의 어조는 변함없이 평이했다. 중간에 차를 한 모금 음미하는 것까지 빼먹지 않았다.

 

헌데 그 항아가 사라진다고 마마께서 총애를 받으실 것 같진 않군요.”

…….”

폐하께 무시당하는 것도 어느새 익숙해지신 것입니까?”

폐하는 그러실 수 있는 분입니다.”

 

황후의 처연한 얼굴에 윤기는 열이 뻗힘을 느꼈다. 황제가 황제이기에 황후를 무시할 수 있다고? 황후의 미련함이 화를 부추긴다. 정작 본인이 하는 말로 황후를 저 바닥끝까지 추락시키고 있다는 걸, 윤기는 몰랐다.


그러다 백씨 항아가 덜컥 회임이라도 하면 어찌하실 겁니까?”

상상,하기 싫습니다.”

세상만사가 마마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요. 백씨가 용종을 회임하면 아무리 아버님이 계신다 해도 마마의 자리가 견고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

황궁에서도, 집안에서도 내쳐지고 싶으신 겁니까?”

 

제 누이가 저처럼 버려지는 걸 두려워한 다는 것을, 윤기는 사무치게 알고 있었다. 어느새 황후는 원망어린 눈으로 윤기를 노려봤다. 덜덜 떨리는 입술을 깨무는 황후에 윤기는 찻잔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황제의 총애도 얻지 못하는 판국에 황후께서 회임하시는 일은, 당치도 않겠군요.”


황후의 상처받은 얼굴을 보는 것은 피가 거꾸로 솟을 만큼 고역이다. 허나 윤기는 더욱 태연자약한 얼굴을 하며 나긋한 손짓으로 찻잔을 들었다. 자신은 이렇게까지 하는데, 황후는 어째서 제게 화 한 번 못내는 것일까.

 

문하시중 어른, 황후마마께 너무 무례한 것.”

도미야.”

, 황후마마.”

나는 괜찮으니 나가있으렴.”

 

가혹한 말에 옆에서 듣던 중 참다못한 도미가 대꾸했으나 황후는 모순적이게도 그를 저지했다. 황후의 경직된 웃음에 안쓰러운 시선을 건네던 도미는 마지막까지 윤기를 노려보며 황후전을 빠져나갔다.

윤기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할 말 남으셨거든 하세요.”

황후께선, 속도 없습니까?”

 

윤기는 진심으로 물었다. 황후는 그에도 잔잔히 입술을 끌어올렸다.


오라버니시잖아요.”

…….”

제겐 오라버니밖에 없다는 걸, 아시잖아요.”

 

그 말은윤기를 저 높은 곳까지 끌어올렸다가 이내 시궁창으로 쳐 박았다. 윤기는 입가를 비틀었다. 맞는 말이었다. 황후에겐 권세에 눈 먼 대승상과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황제뿐이었으니까. 윤기는 제 손 안에 찻잔을 더 꽉 쥐었다.


너의 인생도 참으로 가엾구나.”


윤기는 허망한 웃음을 터뜨렸다.


가보겠습니다. 아버님께서 일을 지시하시는 날 다시 찾아뵙지요.”

, 오라버니.”

 

생기 없는 황후의 얼굴을 찬찬히 눈에 담은 윤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래 우려져 쓴 물만 남은 차가 빈자리에 놓였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를 돌아봐 주는 이가 하나 없었단 사실을 알았음에도 감히 그러지 못했다. 평온한 몸짓으로 걸어 나와 문을 닫은 윤기는, 문 앞에 항아를 포함해 아무도 없음을 깨닫고는 이내 문에 기대 스르륵 주저앉았다.


미쳤군.”

 

대승상이 망국의 피폐한 전쟁터에서 자신을 데려왔을 때부터, 그 집엔 황후가 있었다. 얼굴에 피를 뒤집어쓰고 다 헤진 옷을 입은 고아를 거둬준 대승상, 그리고 새빨간 당의를 입은 채 말갛게 웃으며 손을 내밀던 어린 황후. 윤기는 아직도 그 때를 잊지 못한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혈육(血肉)? 황제의 여인? 모두 웃기는 소리다. 그 아이는 내게 구원이었어.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것이 아니라 하더이다.”

 

윤기는 자조적으로 중얼였다. 대승상을 봐서라도 마음을 거둬야 했다. 모든 감정이 서툴렀던 사내는 이 어색하고 설레는 감정이 불편하고 죄스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매번, 매번 어찌 이래. 깊은 한숨을 내쉬던 윤기가 절망스럽게 고개를 떨구었다.

 





皇后

列傳





요새 황궁에 도는 소문을 들었니? 항아들이 영문도 모른 채 하나씩 사라진다 하더구나.”

 

태후는 무척이나 기쁜 얼굴로 말했다. 의무적으로 하루에 한 번씩 들러 한 시진씩 보내고 가던 지민이 이미 다녀갔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태후전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황후를 품에 안고 있던 지민은 황제에게 그녀를 내어준 후 곧바로 태후전으로 향했다.


신이 먼저 하나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태후가 조잘조잘 떠드는 것을 듣고만 있던 지민이 사상 처음으로 질문이란 것을 하였다. 말을 잇던 태후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감돌았다.


그럼. 무엇이든 해보아라.”


허나 이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덤덤한 기색으로 제 얘기를 듣기만 하던 지민이 제게 용무가 생겼다는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태후가 말이 많은 것으로만 유명했지만 그만큼 할 얘기가 많다는 것은 황궁에 대한 지식이 빠삭하다는 것. 어떤 것이든 대답해주겠다는 듯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태후에 지민은 천천히 말문을 텄다.


태후께서 그리 싫어하시는 도미, 그 상궁이 모시는 황후는 어떤 사람입니까?”

흐음. 황후라.”


도미라는 이름에 두 눈썹을 꿈틀하던 태후는 질문의 결론이 황후라는 것에 의아하다는 얼굴을 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너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였는데 황후는 한 번도 얘기하지 않았구나.


황후의 무엇이 궁금한데?”

무엇이든.”

 

태후의 입가에 짙은 웃음이 들어앉았다.


네가 황후를 처음 만난 모양이로구나.”

…….”

황후는 이 황궁에서 가장 가여운 여인이지. 가장 고귀하고 아름답지만, 박복한왜 가인박명(佳人薄命)이란 말이 있잖니.”


태후는 고아하게 차를 마시며 말했다. 태후의 말이 이어질수록 지민은 알 수 없는 구렁텅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마치 황후가 저와 동화되기라도 한 냥, 심장 한 구석이 끝없는 나락으로 빠지는 기분.


황상이 왜 황후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지 아느냐?”

왜입니까?”

연모할 수 없기 때문이란다. 먹을 수도 없는 떡을 눈앞에 두어 봤자 무엇 하겠니. 황상은 죽어도 황후를 연모할 수 없어. 그 두 사람의 운우지정 한 번에 정계에는 피바람이 몰아치는 법이거든. 가여운 황후. 내 그 옆에 딱 달라붙어 있는 도미 년만 아니라면 황후를 아주 딱하게 여겼을 텐데.”

…….”

그에 비해, 백야는 다르지. 백씨는 황상을 위로할 수 있잖니. 황후는 곧 죽어도 할 수 없는 걸 백야 그 아이는 할 수 있단다. 허니 황상께서도 그 천한 아이를 곁에 두시는 게지. 황상은 아주 영악한 분이란다.”

 

태후의 말 하나하나가 너무도 잔혹하게 황후의 치부를 찔렀다. 제 품에서 꺼질 듯한 숨으로 황제를 찾던 황후의 목소리가 지나지게 생경해서 괴로웠다.

 

태후마마, 신첩이옵니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현실이 되어 그의 곁에 찾아왔을 때에는, 지민의 심장고동이 말을 듣지 않았다. 문 밖에서 나인을 거치지 않고 직접적으로 들려오는 황후의 목소리에 태후도 의아한 눈을 했다. 한창 황후에 대한 이야기 중이어서 그러한가. 뜻밖의 황후의 행차였다. 허나 잠시 지민의 얼굴을 살피던 태후는 짧게 들라하고 명했다. 어른거리는 문이 열리고 금색 의복에 둘러싸인 황후가 지민의 눈을 가득 채웠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지민은 고개를 획 돌렸다. 황후는 알고 있을까 자신이 제 목에 손을 감고 달큰한 숨결을 불어넣었다는 것을. 알았으면 했다. 그래야 이 울렁거리고 불편한 속의 정체가 무엇인지 찾아 낼 테니까.

 




/ 황 후 열 전 熱 血 皇 后 /

 







三.




주나라 황실은 봄이다. 온 생명이 움을 틔우는 계절, 황궁에서의 봄은 싱그러움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아랫것들의 거처를 발령하는 아주 중대한 시기이기도 했다. 어린 항아부터 궁녀와 상궁, 내관과 별감들은 주요 업무 실적에 따라 황제가 거처하는 대명전을 비롯한 웃전의 처소나 타 기관으로 배정받는다. 번살이가 다가오면 황궁의 모두가 가슴 졸이기 마련이나, 특히 별감들은 그 긴장이 유독 심했다. 웃전을 보필하거나 세답방이나 생과방처럼 실용적인 부서 혹은 행정실무를 담당하는 관서에 한정하여 발령되는 상궁 내관들과 달리 별감은 인력이 필요한 어느 곳에든 비치가 가능한 자들이었다. 운 좋으면 황궁 호위, 운이 지지리도 나쁘면 국경선 보조.


후우, 이번에도 제발 봉수대는 피해야 하는데.”

아서라. 봉수대면 절이라도 해야지. 동상 걸려 손 잘린다는 변방만 피해주시면 어디든 이 한 몸 불사르겠소이다.”

 

올 해는 운 좋게 대명전을 지키던 별감들이 오늘도 보초를 서며 다가올 관서이동에 넋두리했다. 하루종일 신호가 오는 지 안 오는 지만 살펴야하는 봉수대도 고역이었지만, 변방은 일단 생사의 문제가 갈린다. 간절히 이 황궁 안의 직책이기만하면 충분하다고, 다들 그렇게 바랄 뿐이었다.

 

허면 태후전도 좋습니까?”

 

변방을 제외한 어느 곳이든지 몸을 불사르겠다는 김 별감의 말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앳된 별감이 혀를 차며 물었다. 경력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일하는 것은 제법 똑부러지고, 여유와 낭창한 태도만은 그를 따라올 자가 없었기에 다른 별감들은 그를, 태연하다 할 때 태를 써서 태()별감이라 불렀다.

 

그가 웃으며 제안한 태후전. 공포의 태후전이라. 김 별감은 변방을 제외한 어디든 괜찮다고 자신 있게 말하긴 했지만 나름 주저하는 눈치다. 하긴 태후전 사람은 별감이건 내관이건 막론하고 태후를 상대해야 했으니. 얼마 전 태후궁 정원을 지키던 별감은 수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태후의 말 한 마디에 3년 기른 수염을 그 자리에서 태워야 했다. 말은 또 얼마나 많은지, 태후가 한 번 산책에 나서면 자신이 살아온 세월을 아주 다정한 목소리로 들려준다고 한다. 허니 태후전은 별감들에게 있어서 변방과도 비슷한 위치. 변방이나 태후전이나. 자신들의 열악한 상황을 깨달은 김별감은 한숨만 내뱉을 뿐이었다

.

태후전은 좀. , 숙비마마나 연재인마마 같은 후궁전 별감도 괜찮 수다.”

, 그렇소?”

 

만삭의 아내와 셋이나 되는 자식들. 김별감은 차라리 황제가 행차하지 않을 뿐 평화롭기는 그지없다던 후궁전을 꼽아본다. 그의 말에 태별감의 얼굴에는 의미심장한 표정이 떠오른다.

 

허면, 황후전은?”

 

그의 입에서 자신 있게 나온 황후라는 말에 김별감을 비롯한 다른 별감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굳는다. 저 젊은 자는 황궁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주나라 황실을 잘 모르는 겐가? 그렇지 않고서야, 황후라는 이름을 저리도 쉽게 꺼낼 수는 없는 것이었다.


,황후전이라니.”

어찌 그리 놀라시오?”

 

주나라의 가장 높은 여인이 사는 곳. 황궁 가장 깊은 곳에 아주 은밀하고 고고하게 자리 잡은 황후전은 철저한 금남의 구역이다. 박복한 삶을 사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황후. 그 소문은 이 황궁 내에 싹이 자라듯 만연했다. 또한 그녀는 황제의 여인이자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대승상의 고명딸. 황후의 뒷배가 그리 번듯하고 그 미색이 절색과 다름없다는데 어떤 사내가 유일무이한 황후전을 넘볼 수나 있을까. 멍하게 질린 별감들을 바라보던 젊은 별감은 빙긋 웃음을 띄웠다.

 

황후전은 좀 그렇지.”

맞아. 황후전은 황궁에 있어도 마치 다른 세상 같단 말이지.”

거기 최고상궁 도미가 그리도 태후마마의 노여움을 얻었다 하더이다. 황후전은 아무래도 불운해.”

그렇군요.”

 

별감들이 하나같이 말하는 황후전은 상당히 불길하고 박복함의 대명사였다. 아직 한 번도 황후를 만난 적이 없는 태 별감은 골똘히 황후전에 대해 생각했다. 천성이 호기심 많고 겁이라곤 없는 아이였다.


거기, 한 명만 나를 따라오게.”

 

그때, 찰나였던 대명전 별감들의 휴식을 깨운 것은 한 여인의 목소리었다. 아니나 다를까, 목소리의 주인공은 황후의 수족으로 유명한 황후전 도미. 황후가 아니라 그녀의 상궁을 보았을 뿐인데도 별감들은 벌떡 일어나 도미에게 예를 갖추었다. 도미는 짧게 그 인사를 받고는 가장 눈앞에 보이는 별감에게 손짓했다.


네가 좋겠구나. 조용히 따라오너라.”

 

태 별감은 잠깐 미소를 띄우다가 도미의 뒤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상궁 도미가 가는 곳이라면 당연히 황후가 있는 황후전 일터.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나머지 별감들은 도미와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태 별감의 안녕을 빌 수밖에 없었다.


넌대명전 별감이냐?”

.”

흐음, 어차피 곧 소속이동을 할 테니 지금 소속은 무의미하겠구나. 지금 나는 황후전으로 가는 중이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럼 이것도 아는지 모르겠구나. 황후전은 금남의 구역이다. 고로 네가 지금 출입하는 것도 아무도 몰라야겠지.”

명심하겠습니다.”

 

별감의 대답은 간단하고 명료했다. 재빠른 그의 태도에 도미는 티 나지 않게 웃음기를 머금었다. 다행히 말귀를 잘 알아듣는 녀석을 불러온 모양이었다.


입이 무거워 보이니 말 하마. 황후전의 바닥이 부서졌다. 무거운 협탁이 쓰러지면서 그대로 바닥을 뚫은 것이지. 다른 잡다한 일은 우리 황후전 항아들이나 상궁들로 해결이 되지만 이런 일엔 아무래도 사내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겠니? 알다시피 황후전에는 사내가 없구나. 해서 별감인 네가 황후전 바닥을 좀 살펴줘야겠다.”

 

바닥보수와 같은 일은 황궁의 실무를 담당하는 황청에 말하면 금방 해결될 문제였다. 헌데 그걸 위해 은밀히 별감을 불러들여? 황후전이 대체 어떠한 곳이길래.

 

황후마마. 도미이옵니다.”


여러 겹의 문이 열리고 마침내 문 너머 처소의 형태가 보였다. 도미는 조심스럽게 고한 후에, 천천히 마지막 문을 열고 들어갔다. 도미의 뒤를 따른 별감. 예를 차려야 했기에 고개를 최대한 숙였다. 붉은 색감의 화려한 황후의 처소. 왠지 모를 기시감에 그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별감을 데려왔사옵니다. , 이쪽이다. 네가 잘 살펴보고 황청에 목재와 재료를 요청해라.”

.”


도미가 가리킨 곳을 보자 적당히 향이 올라오는 참나무로 된 바닥이 두 치()정도 처참히 뚫려있었다. 황후는 무엇이 얼마나 짜증났기에 바닥이 이리되도록 탁자를 거하게 엎었을까. 눈앞에 황후가 있었지만 하늘과 땅보다 먼 존재. 별감은 들어차는 궁금증에 입가가 바싹 말랐다. 우선 주어진 일을 위해 무릎을 굽히고 바닥을 찬찬히 살폈다. 문이 다시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도미는 처소를 나간 모양이었다. 금남의 구역이라는 황후전 안에, 그와 황후 두 사람이 남았다. 잠시지만 아주 길게 느껴진 시간동안 황후는 자칫하면 없다고 착각할 만큼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평소 여유 많은 걸로 유명하던 별감도 존귀한 여인의 앞에서 뒷목에 힘을 준 채 목재를 가다듬었다.

 

황상의 별감인가?”


그러다 그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잠시 후의 일이었다. 별감은 황후의 물음이 떨어진 직후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허면 네가 나보다 황상을 더 많이 보겠구나.”


황후는 웃는듯하면서도 묘하게 평이한 어조로 얘기했다. 황후의 자조어린 말에 별감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있었다.


그 바닥은 어찌 부서진 것인지 궁금하지 않니?”


별감의 사고가 일시정지 될 만큼 긴장을 안겨 준 황후는 계속해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사근한 목소리지만 그녀의 말 한마디에 저 같은 별감의 목숨쯤은 쉽게 날라 갈 수도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일말의 두려움과 일말의 호기심. 그는 얼추 짐작이 가면서도 황후의 미묘한 물음이 궁금했다.


황후께서 그러신 것이 아닙니까?”

어찌 그리 생각하느냐?”

감히 황후전 바닥을 이리 만들 이가 황후마마를 제외하곤 없을 것 같아 짐작해보았습니다.”


별감의 담담한 목소리에 황후의 입가엔 작게 미소가 들어찼다.


영명하구나. 고개를 들라.”


지엄한 황후의 칭찬과 함께 들려온 뜻밖의 말에 별감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곤 황후의 명을 착실히 수행하기 위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말귀를 한 번에 알아듣는 정말 영명한 아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가 본 황후의 형체는 불투명했다. 붉은 발이 내려져 있어 둘 사이를 가렸기 때문이었다. 허나 붉은 발 너머에 상체를 반쯤 기대어 앉아있는 황후는 이쪽을 또렷이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가 손에 든 것이 악기인지 아니면 붓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으나 그 인영은 제법 그림 같았다. 그게 무엇이든 발 너머로 황후가 살짝 입에 가져다 댄 것은 외관상으로 꽤나 잘 어울렸으니까. 평소 그 화려한 의복 안에 몸을 쏙 감추고 다니던 황후는 지금은 제법 제 몸에 딱 맞는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럼에도 하늘하늘한 치맛자락이 황후의 손목에 가볍게 감겨있었다.

 

그 바닥은 내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협탁을 엎어 그리 된 것이란다. 난 미련하고 비겁해서 내게 상처 준 자들에게 직접 뭐라 할 수 없거든. 그렇다고 혼자 분을 삯이지도 못하지. 덕분에 널 귀찮게 하였구나.”

아닙니다.”

오늘 도와주어 참으로 고맙다. 대명전 별감이라 하였지? 네 이름이 무엇이냐?”


황후는 적당한 호의를 담은 목소리로 물었다. 별감은 굽히고 앉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꼿꼿이 섰다.


태형이라 합니다.”

태형.”

 

그의 이름이 황후의 입에 잠시 올랐다. 황후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황청에서 목재를 공수해오면 다시 만나겠구나. 도미야.”


황후가 다음번을 기약했다. 웃전에서 나름 신뢰를 하는듯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니 어찌됐건 좋은 건가? 태형은 잠시 속으로 생각했다. 황후와 태형 그 사이의 공기는 도미가 재등장함으로써 자연스레 끊겼다.

 

. 황후마마.”

태후전으로 가야겠다.”

마마, 오늘은 처소에서 심신을 안정하시는 것이 필요할 듯하옵니다. 아까 문하시중께서도 다녀가셨고문후는 하루 거르시지요.”

아니, 갈 것이다. 차비를 하렴.”

, 마마.”


황후는 제법 고집까지 있는 사람이었다. 잔뜩 흥미가 도는 표정의 태형은 아주 가벼운 발걸음으로 황후 전을 나섰다.

 

꽤 영악한 아이를 데려왔구나.”

, 저 별감이 무례를 저지른 것입니까?”

아니, 아니다.”


황후의 평가에 도미가 짐짓 눈가를 찌푸리며 심각하게 물었다. ‘영악하다.’ 제법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황후는 도미의 시중을 받아 겉옷을 걸치면서 고개를 나긋하게 저었다.

하루가 마치 보름은 되는 것처럼 다사다난했던 오늘의 정점을 찍을 태후전 문후. 황후는 원래 점심수라가 끝나고 나면 태후전으로 향했지만 오늘은 사정상 해가 다 지고 나서야 발길 할 수밖에 없었다. 제법 늦은 시간 도착한 태후전에는 누군가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태후마마, 신첩이옵니다.”


무엄하게도 황후가 들어오자마자 고개를 돌리는 사내. 황상의 곁에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익위사 중 한 명인가, 황후는 가만히 생각했다. 태후에게 간결히 인사를 취한 익위사, 지민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황후의 곁을 지나쳐갔다. 황후에게 무례한 태도에 지민을 째려보던 도미는 문득 그가 의식 없는 황후를 황후전까지 안아들고 온 황제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황후는 이런 일은 익숙하다는 듯 아무렇지 않은 표정인 걸 보니, 자신이 끌어안은 익위사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아니 어쩌면 애초에 그의 품에 들렸었다는 걸, 아주 애타게 그의 목을 감싸 안기까지 했으며 눈물도 흘렸다는 걸 모르는 듯 했다. 이에 도미는 안도의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황후가 알지 않는 편이 좋겠다.

 

황후 오시었소?”

황후마마께서 급전에 쓰러지셨사옵니다. 휴식을 취하셔야 하니 문후는 짧게 마쳐야 할 듯합니다.”

송구하옵니다. 태후마마. 신첩이 잠시 의식을 잃은 덕에 제 때 찾아뵙지 못하였습니다.”


황후를 보며 인자한 미소를 짓던 태후는 그 옆의 도미가 입을 열자마자 표정을 무섭게 굳혔다. 그에도 끄떡 않는 도미, 태연하게 눈을 내리깔고 제 할 말을 한다. 도미의 거침없는 태도에 잔잔한 웃음을 머금은 황후는 공손히 태후에게 아뢰었다,


이 늙은이가 무슨 권리로 황후를 붙잡겠소? 황후는 건강관리를 열심히 하세요. 이 황궁에서 남는 것이 몸뚱어리 말고 무에 있다고.”

명심하겠나이다.”


솔직히 말하면 황후에겐 별다른 악감정이 없었다. 황후나 태후나 황궁에 메여있는 다 같은 팔자인 것을. 다시 말하면 앞전에 지민에게 말 한 것처럼 황후는 아주 가여운 여인이었다. 태후는 늘 안타까운 시선으로 황후를 보았다. 모든 것을 가졌지만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황후. 태후는 그 연민을 차를 다정히 따라주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그러고 보니 연회도 황상과의 합방도 얼마 남지 않았구려. 황후께서 참으로 바빠지겠어.”

아닙니다. 겉만 그렇지 다 아랫것들이 하는 걸요?”


황후가 작게 웃었다. 오랜만에 평화롭고 잔잔한 대화였다. 그 사이에서 평화를 체감할 새도 없이, 태후전은 아주 갑자기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태후마마. 순빈마마와 연재인 마마 납시었사옵니다.”


예상치도 못한 후궁들의 등장이었다. 함께 놀란 얼굴을 한 태후와 황후는 서로 잠시 눈을 마주다가, 태후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에겐 두 명의 후궁이 있다. 3년 전 주나라에 의해 패망한 주제국의 공주 순빈과, 개국공신 연순의 외동딸 연 재인이 그 둘이었다. 물론 황후도 황제의 관심 밖인 판국에 품계만 후궁이었지 그들은 직위뿐인 황궁 여인들이었다. 그들의 처소 역시 대명전과는 멀찍이 떨어진 아예 황궁 밖에 딸린 소화궁이 전부. 멀리 있는 후궁들이 무슨 일로 태후전까지 행차했을까. 덕분에 태후의 얼굴엔 의아함이 들어찼다.


태후마마를 뵙사옵니다.”


제법 오랜만인 순빈과 연 재인은 태후를 향해 공손히 읍했다. 그리곤 먼저 고개를 든 순빈이 옆에 앉아있는 황후를 발견하고는 다시 허리를 숙였다.


황후마마를 뵙사옵니다.”

어서오시오. 순빈, 연 재인. 태후궁전엔 무슨 일로?”

 

태후는 환하게 웃으며 그들을 맞았다. 태후의 손짓에 따라 황후와 태후의 앞에 앉은 둘은 잠시 서로의 얼굴을 보며 머뭇대는 듯했다. 그리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연 재인이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문후를 여쭌 주제에 염치없게도, 태후께 부탁드릴 것이 있어 들렀사옵니다.”

후궁 두 분의 부탁이 무엇일지 참으로 궁금하군요. 말해보세요.”

 

태후는 그들을 향해 웃어주었지만 그녀의 눈치를 살피던 후궁들은 힘겹게 입을 열었다. 황후는 그들 대화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찻잔만 기울였다.


후궁들의 거처를 황궁 안으로 옮겨주십시오!”

뭐요?”

순빈마마와 저는 허울만 후궁이지 폐하를 제대로 마주할 기회도 없었사옵니다. 신첩의 아비가 공신이고, 순빈마마의 부친께서 전 주제국의 천자였기에 후궁 지위를 얻을 것을 모르지 않으나, 저희는 엄연한 황제폐하의 여인. 적어도 폐하의 울타리 안에 있어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황궁밖에 딸린 소화궁이 후궁들의 거처인 것이 억울하다, 뭐 그런 내용의 고해성사였다. 태후가 어깨를 으쓱였다. 물론 일년에 황제를 한 두 번 마주할까 말까한 후궁들의 사정이 안타까웠지만, 황궁 안에 있다 해도 황제를 자주 볼 수 있을 지는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백씨 항아 때문에 애가 타는 것인가요?

 

난감해하는 태후에 잠자코 있던 황후가 입을 열었다. 사근한 목소리에 두 후궁의 시선이 황후를 향했다. 오랜만에 보아도 고아한 황후. 아름답지만 어딘가 두려움을 주는 황후는 후궁의 시선을 똑똑히 맞추었다.


백씨 항아가 곧 후궁품계라도 받을까 걱정이 되는 게로군요.”

마마.”

허나 기대마세요. 순빈과 연재인이 황궁 안으로 거처를 옮긴다 해도, 백야처럼 폐하의 총애를 얻긴 어려울 테니.”

 

너무도 명확하고 가차 없는 황후의 말에 태후는 무안히 입맛을 다지며 시선을 회피했다. 황후는 섬섬옥수를 뻗어 찻잔을 들며 여유를 잃지 않았지만, 연 재인은 눈에 띄게 상처받은 얼굴을 했고 순빈은 표정에 독기가 들어찼다.


, 그건 황후마마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

 

결국 성질 급한 순빈이 사고를 치고 말았다. 옆에 앉은 연 재인이 조심스레 순빈의 옷자락을 잡아 당겼지만 억울함과 분에 찬 순빈은 눈앞에 뵈는 것이 없었다. 한 번 무례하게 열린 순빈의 입은 닫힐 줄 몰랐다. 상대가 무려 황후임에도 불구하고,


황후마마의 처지도 저희와 다를 바 없다고 보는데요? 폐하께서 백씨 항아를 총애하는 것은 분명하나, 황후께서 몇 년째 독수공방한다는 사실도 이 황궁안의 모두가 알지요. 황후전은 박복하고 불운하다, 이 지침. 황후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맞은편에서 태후가 그 입을 좀 다물라는 신호를 준다. 허나 순빈은 겁도 없이 나오는 말을 짓걸였다. 잔을 굴리며 순빈의 무례하기 짝이 없는 말을 듣던 황후는 이내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 다 끝났습니까?”

,제 말은 황후마마도 저희의 심정을 잘 알 것이니 저희의 청을 들어주십사그러니까,

우리가 다를 바 없다고요?”

 

황후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 웃음조차 나긋해서 그 속에 숨겨진 진의를 파악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순빈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곤 말을 더듬었다. 제가 지금, 황후의 앞에서 무슨 얘기를 짓걸인 거야.


패망한 주제국의 공주였던 순빈과, 황후인 내가 같다라.”

…….”

난 이 황궁의 유일한 안주인입니다. 고작 품계뿐인 후궁 나부랭이가 함부로 얼굴을 보고 짓걸일 수 있는 신분이 아니지요. 순빈.”

…….”

순빈은 그대의 아비가 어찌 죽었는지 알고 있나요? 주제국과의 전쟁에 제 아비의 사병 10만이 참전하였습니다. 그대의 아비는 그 10만 중 한 명의 칼에 찔려 저 차가운 주나라 변방에 묻혔답니다. 한나라의 천자였던 사람이 그리도 볼 품 없이 묻혔는데, 아비의 목숨 값으로 그 자리에 오른 순빈이 이리 방자하게 굴어선 안 되지요.”

마마.”

 

태후가 골치 아프다는 듯이 머리를 짚었다. 순빈이 잘못 건드려도 단단히 잘못건드렸다. 황후가 가장 잘하는 것이 조곤조곤히 말로 사람을 짓밟는 것임을 어찌 모른단 말인가.

 

반면, 내 부친은 주나라의 대승상이십니다. 내 오라비는 문하시중이시지요. 그래서 황후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난 태생부터 순빈과는 달라요. 물론 순빈의 말대로 나 역시 폐하의 총애를 받지 못하지만 내겐 기회라도 있잖아요. 늙어죽을 때까지 총애를 받지 못하다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 채로 비참하게 죽을 순빈과 달리 나는 죽을 때까지 황상의 안주인일 테니까요.”

…….”

순빈, 넌 나와 하늘과 땅이 같지 않은 것보다 다르단다.”


다정한 황후의 말에 순빈이 기어이 눈물을 흘렸다. 손이 아릴 때까지 치맛자락을 꽉 쥔 순빈이 서럽게도 울자, 난감해진 태후가 상궁에게 손짓했다. 황후의 눈도 못 마주치는 연 재인과 함께 순빈을 데려가라는 신호였다. 오랜만에 행차한 후궁은 황후의 기세에 눌려 비참히도 태후전을 빠져나갔다. 나갈 때도 예는 잊지 않은 연 재인은 황후와 태후에게 깍듯이 인사한 후에 우는 순빈을 데리고 나갔다.

 

.”

 

풍랑이 물러가자 태후가 한숨을 내쉬었다. 황후는 여전히 태연하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오늘은 좀 심하셨소.”

태후마마 앞에서 무례를 보여 송구하옵니다.”

살살 하시오. 살살. 어찌보면 저들도 가여운 이들이 아닙니까.”

마마.”

 

태후가 후궁들이 물러간 자리를 불쌍한 눈으로 바라봤다. 문득 잔을 입에서 떼던 황후가 조용히 태후를 불렀다.


저들도 알아야지요. 이 황궁에서 폐하의 시선 한 번 얻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

기대가 없어야 상처도 덜 받는 법입니다. 신첩의 마음에 벅찬 기대가 신첩을 이리 가엾게 만들어버린 것처럼요.”

 

황후는 괜히 태후가 미안하도록 환히 웃으며 말한 후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면 신첩은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온화한 표정을 무너뜨리지 않은 황후가 태후전을 빠져나갔다. 독한 것. 태후는 우수에 찬 눈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황궁의 삶이란 그런 것이지. 서로가 가엾고, 스스로가 가여운. 황궁에도 곧 꽃이 필 무렵이었다. 도화나무에 봉우리가 분홍빛으로 들어찼다.

 




/ 황후열전

 




황궁의 밤은 어둡고 적막했다. 황후는 그 깊은 밤을 헤매며 쉽게 잠들지 못했다. 정국이 돌아간 후 아무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의 앞에서 울음을 보였다는 것도 신경 쓰였지만, 찻잔의 파편에 찔린 황제의 피 흘리는 손은 눈앞에 선했다. 치료는 제대로 하셨으려나. 궁금했지만 또 언제 황제를 만날 수 있을지조차 모른다. 황후는 내내 잠을 뒤척이다 결국 침소에서 일어났다. 마음이 하도 답답해서 바람을 좀 쐬고 싶은데, 막상 도미를 귀찮게 하고 싶지도, 늦은 밤에 궁인들을 데리고 요란하게 나가고 싶지도 않았다. 덕분에 황후는 늦은 새벽 혼자서 황후전을 빠져 나왔다. 보초를 서는 별감들이 황궁 안을 돌아다니고 있었지만 황후는 가볍게 그들의 눈을 피해서 멀리까지 나올 수 있었다. 침의에 긴 머리를 풀어서 늘어뜨린 황후는 마치 항아의 행색과 엇비슷했다.

 

화궁전(花宮殿).”


황후가 발길을 멈춘 곳은 넓은 황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수많은 꽃과 나무들이 선연히 자리 잡은 황제의 대명전에서 꽤나 가까운 곳이었다. 다만, 아주 높은 곳에 있어서 계단을 제법 올라야 했다. 평소에 잘 들리지 않는 곳이라 궁금하긴 했지만 그 위까지 다다르는 길에 다리는 제법 아팠다. 허나 그 고통이 무색하게 펼쳐진 풍경은 평생 고귀한 것만 보고자란 황후의 눈에도 들어찰 만했다.

 

꽃내음이 만연한 길을 따라 천천히 걸은 황후는 제법 지대가 높아 바람이 불어드는 곳에 멈췄다. 고개를 돌리니 그 화원 아래로 한 번에 보이는 황궁풍경이 펼쳐졌다. 감탄사를 내뱉은 황후는 더 가까이 가서 가만히 그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아주 오랫동안 몸 담고 있었으나 익숙해지지 않는 차디찬 황궁. 얇은 옷을 입어 더 부서질 듯한 황후의 몸은 바람에 나긋하게 흔들렸다. 끝에 몰린 그녀는 마치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황후는 눈을 가만히 감고 그 바람을 느꼈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평안함이었다. 그런 황후가 눈을 뜬 것은 제 몸을 무섭게 잡아채는 손길 때문이었다.


뭐하는 짓이지?”

 

재빠른 손과 대비되는 낮은 목소리에 황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바로 고개를 돌린 황후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정국임을 깨달았다. 황후와 시선을 마주한 정국의 얼굴도 순식간에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그 표정은 이내 단단히 일그러졌다.

 

늦은 밤 똑같이 화궁전을 찾은 황제는 위태롭게 절벽에 선 여인의 뒷모습을 보았다. 자다가 나온 항아나 궁녀쯤으로 생각한 그 이가 마치 곧 절벽에 몸을 던지기라도 할 듯 위태로워 보이자, 구할 심산으로 바로 달려간 것이었다. 헌데 그 사람이 황후라는 것을 안 순간, 정국은 전보다 알 수 없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대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 여기서 떨어져 진정 나를 비정한 황제로 만들고 싶었나?”

 “황상.”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대체.”

죽으려 한 것, 아니에요.”


흥분에 휩싸여 황후가 이때까지 보아온 것 중 가장 빠르게 말하는 정국에, 황후가 나직이 그 말을 끊었다. 정국의 얼굴에 의심이 들어찼다.


정말입니다. 황상.”


황후의 단단한 목소리에 정국은 황후의 몸에 닿았던 손을 뗐다. 그리곤 바로 황후에게 등을 돌렸다. 그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급함이 먼저 튀어나왔다. 그래서 사리분별 하지 못하고 되도 않은 논리로 황후를 몰아붙이기나 했다. 그런데 죽으려 한 게 아니었다니. 머리가 지끈거린다. 쓸데없이 그녀를 잡아 세운 꼴이 되어버렸다. 더 이상 황후의 그 말간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돌아선 정국은 그대로 앞으로 걸어나가싿.

 

황상!”


헌데 뒤에서 황후의 부름이 들려온다. 못들은 척 계속 걸어갔지만 이내 달려온 황후에게 손이 잡히고 말았다. 정국은 최대한 무정한 얼굴로 돌아섰다. 황후를 내려다보는 눈이 공허했다.


이게 뭡니까.”

 

반면 황후는 정국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건 관심도 없이 그의 손을 들어올렸다. 어제 피투성이가 된 손에서 피만 닦아냈을 뿐 치료는 하지 않은 채 상처 그대로였다.


뭐하는 짓이지?”

황상치료하지 않은 것입니까?”


황후의 물길어린 목소리에 황후의 시선이 향한 제 손을 바라본 정국이 미미한 탄식을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황후전을 다녀오고 나서 굳이 내시백에게도, 태의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자신은 아무렇지 않았는데, 황후는 어째서인지 곧 울 것같은 얼굴을 했다.

 

신경 끄면 좋겠군.”

황상은 늘 이런 식입니다! 저번 전장에서 돌아왔을 때도! 어깨에 그만한 상처가 났는데 신첩이 알기 전까지 아무런 치료도 않으셨어요!”


정국의 무덤덤한 말에도 황후는 황제의 손을 두 손에 꼭 쥐며 언성을 높혔다. 덕분에 정국은 오랜만에 얼떨떨한 얼굴을 했다. 황후가 이렇게 제게 화내는 것이 처음이라서였다. 화려한 옷도, 장식도 하지 않은 채 깨끗한 얼굴로 화를 내는 황후라니. 이 상황이 너무도 이질적이라 황제는 문득 한 걸음 물러섰다.


짐이, 알아서 할 것이다.”

무얼 알아서 하시는데요? 손에 흉이 질 것입니다. 어떡해.”


황후가 연신 손을 쓰다듬으며 울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손을 바라보는 황후를 내려다보던 정국은 잔뜩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황후의 손이 닿는 제 손의 상처가 홧홧했다.


이러니 신첩이 계속 의심이 들지 않습니까. 그 때 다치신 어깨에 약은 제대로 바르고 계신 것입니까? 어디 봐요.”


이젠 지난번에 다친 상처까지 걱정하며 든다. 거침없이 황제의 옷깃을 들추며 당장이라도 의복을 벗길 태세인 황후에 정국은 잔뜩 당황하여 그 손을 붙잡았다. 정국의 당황을 얼굴을 발견한 황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송구하옵니다. 황상. 신첩이 또 무례를 범했습니다.”

 

정국이 기겁하며 저지하자 그제야 제가 무얼 하고 있는 지 깨달은 황후가 급히 손을 내렸다.


그대는 대체.”

 

정국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황후는 대체 가늠할 수가 없는 여인이다. 바로 어제 제 앞에서 그렇게 울음을 터뜨린 주제에 이제 와 태연하게 걱정이라니. 더 이상 황후와 함께 있다가는 이성이 풀려도 단단히 풀릴 것 같아, 황제는 다시금 뒤돌아 섰다. 황후는 가만히 손을 포개고 황제의 뒷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 황후.”


조금 멀어진 후에 문득 발을 멈춘 황제가 황후를 나직이 불렀다. 주눅 든 얼굴을 하던 황후가 뜻밖의 부름에 들뜬 채 대답했다.


내일 백야에게 첩지를 내릴 것이다.”

…….”

 

황후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정국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말했지만 황후는 아무렇지 않게 들을 수가 없었다. 들떴던 감정이 찬 물을 끼얹은 듯 굳어버렸다. 매정할거면 차라리 쭉 매정하던지. 황제는 항상 이런 식으로 그녀를 저 위까지 끌어올렸다가 너무도 쉽게 그 손을 놓아버린다.

 

그걸, 왜 신첩에게 말씀하시는 겁니까?”

 

덕분에 황제에게 말이 퉁명스럽게 나왔다. 정국은 끝까지 황후의 질문에 답하지 않은 채 멀어져갔다. 상처받지 말란 소리야. 황제는 제 정신을 어지럽게 만들었던 꽃나무 사이에서 나오자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황후의 얼굴이 선명해서 아주 괴로운 밤이었다.

 




/ 황후열전

 



다음 날, 도미의 걱정과는 달리 황후는 아침수라를 물리지 않았다. 어의의 말대로 끼니를 거르지 않고 천천히 먹었다. 허나 황후는 오늘따라 유달리 이상했다. 평소에도 다른 말은 거의 없었으나 오늘은 유독 차분하고 말이 없는 것이 도미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도미야.”

. 황후마마.”

내가 오늘은백야, 그 아이를 만나고 싶은데.”


그리고 황후가 오늘 처음으로 꺼낸 말은 너무도 뜻밖의 얘기였다. 황후가 제대로 본 적도 없지만 이미 마음 깊이 증오하는 항아 백 씨. 자신은 받을 수 없는 황제의 사랑을 담뿍 받는 백야를, 황후가 직접 만나겠다고 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지금 대청전에 있는 백야를 불러주렴. 나머지는 내 치장을 도와라.”


지엄한 황후의 명에 도미는 걱정스런 얼굴로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도미가 백야를 데리러 대청전으로 향한 동안 황후는 오늘의 치장을 시작했다. 황제의 여인을 만나는 날이라, 치장에 더욱 공을 들였다. 절대 그 계집 앞에서 허술하게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진푸른 의복을 입고 머리를 올리고, 마지막으로 청옥 귀걸이를 낀 황후는 고아하게 황후전 한 가운데 앉아 있었다.

 

어떠하냐.”

아름답습니다. 황후마마.”

 

어린 궁녀의 말에 황후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미가 백야를 데리고 도착했다. 황후는 저도 모르게 긴장하여 뒷목이 뻣뻣했다. 백야가 자신을 어떻게 볼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몰래 대명전을 훔쳐보던 중에, 황제와 입을 맞추는 백야를 보았다. 아름답지 않은 항아복을 입고 있었지만 황제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백야였다. 기어코 문이 열리고 백야가 들어왔다. 상아색 의복을 간단히 입은 백야는 고개를 확 숙이고 황후전에 조심스럽게 발을 들였다.

 

그녀를 이리 황후전에 데려올 수 있었던 것도 황제가 잠시 대명전을 비웠기 때문이었다. 황후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백야의 무엇이 황제를 연모하게 만든 것인지 알아내고자 했다. 곧 있으면 후궁첩지까지 받을 사람이었으니까.

 

황후마마를 뵙사옵니다.”

 

백야는 뱉는 한 마디 한마디에 주의를 기울였다. 고개를 깊이 숙여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맑은 백야의 음성은 황후의 기분을 확 상하게 만들었다. 저 아무것도 아닌 아이가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사실 하나가 황후의 치부가 되었다.

 

백야.”

, 마마.”

고개를 들어라.”


나긋한 황후의 말에 잠시 머뭇대던 백야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맑고 수수한 그 얼굴을, 황후는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덕분에 백야의 눈동자가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황후가 백야에게 눈을 떼지 않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백야는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이 여기에 온 걸 황제조차 몰랐다. 그 말은 즉 황후가 여기서 제게 무슨 짓을 하건 아무도 구해 줄 수 없다는 말이었다. 허나 예상과 달리 황후는 다정한 손길로 백야의 턱을 치켜들었다. 찬찬히 눈에 담던 황후는 자조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넌 여인이라 하시더구나.”

마마.”

나는 정적인데, 너는 황상을 필부로 만든다고그리 비수를 꽂으시더구나.”

 

백야의 눈동자가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당장 뭔가를 말하면 눈앞의 황후가 제 목을 틀어쥘 것 같았지만, 뭔가를 말하지 않고는 못 베겼다.

 

소녀가, 소녀가 황후께 송구하옵니다.”

뭐라?”

 

떨리는 음성을 숨기며 백야는 당돌하게도 제 앞에 황후에게 말했다.

 

제가 폐하의 마음을 얻는 바람에 황후마마께서.”

…….”

독수공방하게 되신 듯하여, 제가 폐하를 앗아간 것이 송구해서.”

 

악의 하나 없다는 듯, 진심으로 송구한 듯 건네지는 백야의 말. 황후가 입술을 달달 떨었다. 황제도 동정하지 않는 저를 동정하는 항아. 자신 있게 황제를 황후에게서 앗아갔다 말하는 백야에, 황후는 기가 찼다.

 

너는 그동안 내가 얼마나 우스웠니?”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마마. 저는 단지 마마께

닥쳐라. 감히 너 따위가 나를, 나를 이리 농락하는 구나.”

 

황후는 웃으며 말했지만 그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려옴이 느껴졌다. 턱을 쥔 황후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가서, 백야의 얼굴 또한 고통에 물들기 시작했다.


그래, 이제 말해 보아라. 넌 어찌 황상의 마음을 녹였니?”

마마

궁금해서 그러한다. 내게 한 것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척 황상의 옷깃을 스쳤니? 아니면 황상의 약한 마음을 노려 동정을 구했니?”

 

나긋하게 몰아붙이는 황후의 말에 백야가 두려움에 질렸다.


황후마마, 저는, 저는 진정으로 폐하를 연모합니다. 연모하기에.”

연모? 웃기는 구나. 황후인 나도 받지 못하는 황상을 연모를 어찌 너 따위가!”

 

황후의 악에 받친 소리가 황후전에 울려 퍼질 때 즈음, 폭풍이 날아들었다. 처소 문을 벌컥 열고 등장한 누군가 때문이었다. 황후의 시선이 백야 너머 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주인공이 정국인 것을 안 순간 황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황상.”

도저히 못들어주겠군.”

 

평소처럼 지독히도 시린 얼굴을 한 황제가 빠르게 걸어 들어왔다. 백야의 턱을 쥐고 소리치는 황후가 보이는 순간 정국의 머릿속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곧장 다가간 그는 백야에게 닿은 황후의 손을 쳐냈다. . 황후가 외마디 탄식을 뱉을 만큼, 가차 없이. 그리고 백야의 팔목을 잡아 끌어 제 뒤로 숨겼다. 순식간에 구도가 미묘하게 바뀌었다. 태산 같은 황제의 뒤에 숨은 백야. 그 앞에 초라하게 선 황후. 경멸스러운 눈으로 황후를 내려다보는 정국에 황후는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황제의 그 눈이 너무도 가슴 아팠다.


황상! 오해십니다!

시끄럽다. 오해라 할 것도 없어. 그대는 늘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정국은 황후의 변명을 들을 생각도 없이 매정하게 뒤돌아섰다. 그에게 손이 잡힌 백야는 계속해서 황후를 뒤돌아보며 황제의 손길에 따라갔다. 혼자 우두커니, 남겨진 황후.


제 말 좀 들어보세요, 황상! 제발.”


멍하게 서있던 황후는 이내 정국을 부르짖으며 뛰어나갔다. 황제의 발걸음이 다시금 멈춰섰다. 어제와 똑같은 뒷모습이지만 오늘따라 더 멀게만 느껴져서 황후는 또다시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그대도 그대의 아비와 다를 바 없다. 권세에 눈이 멀어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는 게지. 그대는내게 결코 여인이 아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뱉어내는 시린 말에 황후는 금방이라도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았다. 일말의 기대도 버렸다는 듯 황제는 제게 미련하나 남기지 않았다. 제 여인을 데리고 가는 황제가 너무도 거침없어서, 계속해서 그의 뒤를 쫓아가는 황후는 힘이 들었다. 황상. 제발. 그리 말하며 황후의 체통도 벗어던진 채 황제에게 가던 황후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한 사람이었다. 그 누군가가 황후의 앞을 막아섰다. 눈물이 고여 흐릿한 시야에 보이는 그의 너머로 황제가 멀어지고 있었다. 치맛자락을 부여잡은 황후가 눈물을 흘렸다.


비켜, 뭐하는 짓이냐!”

 

황후가 악에 받쳐 소리 질렀다. 그럼에도 황궁은 고요하기만 했다. 눈앞의 사내가 묵묵히 서 있다가 이내 한 쪽 무릎을 굽히고 고귀한 황후 앞에 부복했다. 뒤에서 계속 소리치며 따라오던 황후의 음성이 끊기자, 황제역시 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또 저번처럼 쓰러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뒤를 돌아본 황제의 눈에 펼쳐진 것은, 멈춰선 황후와 그 앞에 부복한 한 사내였다.

 

황후마마.”

 

나직한 목소리로 황후를 부른 것은, 다름 아닌 얼마 전에 보았던 별감 태형이었다. 눈물로 엉망이 된 황후는 태형을 알아보곤 의아한 얼굴을 하다가 이내 무례하다는 듯 짙은 눈썹 사이를 일그러뜨렸다. 황제역시 가만히 태형이 하는 짓을 바라봤다. 태연자약한 표정을 한 태형은 잠깐의 정적을 여유롭게 즐기다가 이내 황후를 향하여 말했다.


신이, 황후마마를 사모합니다.”


사무치게 다정하고 덤덤한 그 한마디에 황후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무엄하게도 황후에게 제 마음을 고백한 태형과, 그걸 똑똑히 지켜본 황제. 황궁에 피바람이 일었다.

 



/ 황 후 열 전 熱 血 皇 后 /

 





암호닉 까먹으셨다는 분들도 많이 계시고 그래서

새롭게 암호닉 신청 받겠습니다! 기존에 신청해주셨던 분들은 간단히 암호닉 말하고 가주셔요!

대사나 장면이 좀 달라졌는데 기존에 보셨던 내용과 전개자체가 달라지는 건 한 7편정도 일 것 같아요..!

그거 감안하고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정국이였던 말머리도 없어진 게 기존과 스토리가 좀 바뀌어서 그래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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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412
핫쉬 태형아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2년 전
독자413
헐 태형아... 이게 무슨 일이니 아 이제 3화까지 읽었는데 벌써 몰입 엄청 되는데요ㅠㅠㅠㅠ
2년 전
독자414
정주행 시작
1년 전
1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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