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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행렬과 묘 이장은 속전속결로 이루어졌다. 누구도 애도하는 마음 하나 남기지 않고서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고 화씨 일가는 곧바로 새로운 황제를 맞이할 즉위식을 준비했다. 그것은 선황의 죽음은 그들이 오래 고대하던 일이라는 것을 반증하는 모양새였으나 딱히 눈치를 보지는 않는 듯하다. 자신들의 권력을 그다지도 믿고 있다는 뜻이었다.

황자님, 즉위식까지는 사저로 옮기지 않아도 된다는 전갈이 있었습니다.”

갈 때 가더라도 제 아들이 황제가 되는 건 보고 가라... 이리 자비를 베풀어주시니 감복할 따름이구나.”

참석하실 겁니까?”

해야지. 이렇게 넓은 아량을 베푸셨는데 거절한다면 그런 무례가 또 있겠느냐.”

황위에 오름과 동시에 황자님께 허튼짓을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만약을 대비해서,”

아니. 설화에서 황족이 특별한 이유 없이 즉위식에 참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황제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헌데 그런 무엄한 자가 무려 선황의 적자라... 그들에게 그것만큼 좋은 미끼가 더 있을까.”

줄곧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린 채 무심한 듯 턱을 괴고 대답하던 정국은 한순간에 웃음기를 지우고서 대답했다. 마치 이게 나의 본모습이라는 듯.

[방탄소년단] 적국의 황후 02 | 인스티즈

거사 전에는 어디에서든 틈을 보여서는 아니 된다.”

“...”

또한 저들도 그리 쉽게 날 해치지는 못할 테니 그리 염려할 것 없다. 사내놈이 저리 배포가 작아서야.”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요? 허구한 날 아무 생각 없이 태평한 황자님 때문 아닙니까! 배포가 작기는...”

발끈하는 지민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은-쓰다듬었다기보다 헤집어놓은 것에 가까웠다- 정국은 살짝 풀린 옷고름을 고쳐 매고 제 방을 나섰다. 지민의 말대로 마냥 태평해 보이는 그는 사실 꽤 오래전부터 제 형님과 그 어미를 어떻게 치워버려야 하나를 고민하고 있었다. 따지자면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다. 그들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필연적으로 제가 죽어야 했으니까. 한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뜰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정국은 제가 아무리 못난 척, 권세를 바라지 않는 척 해보았자 그들의 칼날을 피해갈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애당초 그렇게 태어난 사람들이었다. 운명처럼, 서로의 죽음과 파멸을 갈구할 수밖에 없는 사이. 타고나길 총명한 정국은 누구보다 그 현실을 잘 알았으며 애써 외면할 생각도 없었다. 굳이 적대감을 드러내고 열을 내기보단 물밑 작업을 하는 게 적성에 더 맞았을 뿐이다. 아주 은밀하고, 확실하게.

어릴 때부터 머리가 비상하다는 말을 자주 들었던 그의 가히 천자다운 여유로움이었다.

황자님. 직학사 나으리께서 운혜궁 정자에서 기다리고 계신다고 전해달라 하셨습니다.”

제 앞으로 조심스럽게 다가온 궁녀의 말에 정국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운혜궁 정자만큼 궁내에서 조용한 곳도 드물지. 참으로 스승님다운 장소 선택이로구나.

직학사는 스물넷의 젊고 훤칠한 청년이었다. 화씨가 주요 관직을 독점하고 있는 형국에 흔치 않은 젊은 인재인 그는 김가의 장남으로 수재 중의 수재라고 소문난 자였으며 황자 정국의 신임을 한 몸에 받는 사람이었다.

선황은 1황자와는 달리 2황자에게 마땅한 스승조차 붙여주지 않았는데, 황제와 화씨의 눈 밖에 날 것을 알면서도 자진해서 정국의 곁에 머물렀던 사람이기도 했다.

제가 스승님의 출사를 막는 것은 아닐까 저어됩니다. 스승님 같은 분은 나라의 동량이 될 인재이지 않습니까. 제 편에 서지 않으셔도 전 괜찮습니다.”

소신은 신념에 따라서만 움직입니다. 저의 신념은 제가 원하는 주군에게 충성하는 것이지 권세에 빌붙는 것이 아닙니다. 황자님께선 제가 바라는 이상향에 가까우시고요. 권력에 아첨하는 것이 출사라면 소신은 차라리 산에서 신선놀음이나 하겠습니다.”

정국은 7년 전을 떠올렸다. 고작 열일곱이었던 제 스승님은 어린 소년의 발언치고는 꽤나 대담하게 제 편에 서겠다고 했다. 물론 저 역시 훌륭한 신하를 저렇게 순순히 적으로 돌릴 생각은 일절 하지도 않았었다.

그저 어떤 대답을 할까 궁금해서 떠본 것뿐이지. 조금 영악하게도.

스승님. 오랜만에 뵙네요.”

정국의 낮은 목소리에 회화나무 아래 보라색 겉옷을 입고 있던 키 큰 사내가 뒤를 돌아보았다. 정국을 발견한 그는 늘 그랬듯 보조개가 곱게 핀 미소를 보였다.


[방탄소년단] 적국의 황후 02 | 인스티즈


신 김남준, 황자님을 뵙습니다.”

여행은 즐거우셨습니까. 휴가를 생각보다 길게 냈던데.”

그동안 소처럼 일만 하지 않았습니까. 가끔 쉬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러게, 제가 옆에 없으니 인상이 훨씬 좋아지셨습니다.”

당치 않은 말씀을. 황자님의 착각이겠지요.”

웃으며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던 두 사내는 생과방 궁녀가 내온 다과 상과 함께 정자에 앉았다. 있어도 없는 듯 줄곧 목석처럼 서 있던 지민을 본 남준이 그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자네도 앉게.”

“...”

, 황자님의 명만 따른다 했었지.”

묵묵부답인 지민에 머쓱해진 남준은 머리를 긁적였다.

앉아라. 괜찮으니.”

정국의 허락이 떨어지자 그제야 천천히 그 뒤에 자리 잡은 지민에 남준은 짐짓 입매를 예쁘게 올려 미소를 지었다.


우리 황자님께 좋은 호위가 있어 늘 다행이구나. 아니, 벗에 더 가까운가.


남준은 여행 중에도 계속 정국과 서신을 나누었다. 지금도 황제의 승하 소식에 남은 휴가를 반납하고 황궁을 찾은 길이었다. 물론 1황자가 차기 황제로 지목되었다는 것도 익히 알고 있었다.

해서, 이젠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황자께서 명하신다면 저희 집안과 설경(*설화의 수도)의 유생은 이미 따를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남준은 비록 화씨의 눈 밖에는 났을지언정 수도에서 공부하는 유생들 사이에선 신망이 아주 두터운 자였다. 먼 지방에도 직학사 김남준에 대한 소문과 칭송은 자자했으니, 설경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남준을 따르는 젊은 인재들이 많은 까닭으로 화씨들조차 섣불리 그에게 손대지 못할 정도였으니까.


제 의사는 변함이 없을 거라는 꿋꿋하고 자신감 있는 얼굴을 보던 정국은 살풋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요새 법전이 재밌더라고요. 다시 보니 써먹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 못 했던 것도 보이고.”


남준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뭔가를 찾아내신 게로구나.


병이 있는 자는 감히 옥좌의 주인이 될 수 없으니 이는 황제의 독자(獨子)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피해 갈 수 없는 것이다. 이를 어기고 옥좌를 탐한다면,”


정국의 낮은 읊조림을 뒤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지민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저런 법 조항을 꺼내신다는 건, 1 황자의 건강에 문제가 있음을 눈치채신 거다. 꽤 눈치가 빠르다고 자부했던 본인도 거기까진 알아내지 못했는데. 어떻게 아신 거지?


비록 하늘 같은 천자의 자리에 있던 자라 할지라도 그를 폐위하고 그 외척을 몰아내는 데 한 치의 거스름도 없음이라.” 

“...” 

황실 법 73.”


심각하게 듣고 있던 남준은 말을 마친 정국과 눈이 마주치자 그제야 얼굴에 미소가 올랐다.


형법으로만 좇았지 황실 법을 볼 생각은 못했는데. 언제나 허를 찌르시네요, 황자님은.”

이게 다 누구한테 배운 거겠습니까.”


남준은 장난스러운 정국의 대답에 큰 손으로 얼굴을 조금 가리고 낮게 소리 내 웃었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눈빛이 바뀐다. 나른하고 부드럽던 선비가 아니라, 상대의 급소를 발견한 짐승의 눈이었다. 이래서, 즉위식 전까지는 조급해할 필요가 없다 하신 거로군. 생각보다 일이 쉬울 것 같았다.


남은 일은 태의를 포섭하는 것이겠군요.”


정국은 고개를 대충 끄덕였다. 선황의 유일한 적자. 그 사무치게 높은 신분을 가진 정국은 선황이 살아있을 때보다 도리어 지금이 훨씬 제 권위를 휘두르기 쉬웠다. 그러니 태의를 포섭하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런 자를 다루는 방법 따위는 손바닥을 뒤집는 것 만큼 쉬우니까.


전쟁은 불가피하겠지만 최소한 명분은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스승님은 전쟁 준비에 더 힘써 주세요. 태의는 제가 맡지요.”

알겠습니다. ...아 그럼,”

“?”

전에 말씀하셨던 그 약은 어찌할까요. 송구하지만 아직 배후를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는 어쩔 수 없지요. 심증은 있는데 정확한 물증을 찾기 어려우니. ... 어쩌면 화씨가 아니라 다른 세력이 그보다 더 뒤에 있을 수도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이라고 말했지만 정국의 마음 속에 이미 어느 정도의 확신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남준은 모르지 않았다. 저 역시 그런 생각을 했으니까. 그는 힘닿는 대로 화씨들의 뒤를 캤지만 정확한 증좌를 얻지 못했다. 손에 잡히는 표면적이고 얄팍한 증거들은 마치 이 마약의 시초를 자신이 알고 있다는 듯 남준을 유혹했으나 그것들은 단지 단편일 뿐이라는 걸 이 능력 있는 청년은 어느새 꿰뚫어 보고 있었음이라.


얌전히 대화의 흐름을 읽어가고 있던 지민은 조금 놀랐다. 저렇게 철두철미하고 진지한 정국의 모습은 오랜만인 것 같아 의아했기 때문이다. , 굳이 놀란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제가 본 모습은 분명 한가롭게 책이나 뒤적거리던 것뿐이었는데. 그 책이 법전이었던가. 아마 궁인들 하나하나의 시선도 허투루 넘기지 않고 행동을 조심했던 탓에 지민에게조차 알리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황자궁의 사람이 황자의 사람이란 법은 없으니.


/



마마, 무모합니다. 절대 안돼요.”

왜 안 된다고만 하십니까. 유월은 제 나라에요. 제가 지켜야 할 곳이란 말입니다.”

아직 황위에 오르신 것도 아니잖습니까. 형님 말씀 들으세요. 설화와의 국경은 생각보다 훨씬 더 위험한 곳입니다. 궁 밖조차 나간 적 없으신 분이 도성 밖을 나갔다가 어쩌시려고요.”


단호한 호석의 말에 황녀는 입을 다물었다. 호석의 아비가 국경을 지키는 정 율 상장군이니 위험하다는 말은 필시 사실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속상함을 감출 수도, 감출 생각도 없었다. 볼이 살짝 부풀고 붉은 입술이 삐죽 나온 것을 본 석진은 어떻게 우리 공주님을 달래야 하나 고민했다. 걱정될 만큼 순하고 여리신 분이 이럴 때는 또 고집이 있으셔서...

지금 황녀는 국경에 소안이라는 이름의 마약이 거래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참이었다. 아버지 태학사와 열흘간 떠났던 석진은 그곳에서 소안의 참담함을 목격했고 황제에게 현황을 알렸다.


폐하께서 공주에겐 아직 알리지 말라 명하셨는데 이리될 줄 알고 그러셨나. 물론 일부러 일러준 건 절대 아니었다. 잠시 황후를 뵈러 가셨다길래 방심하고 호석과 얘기를 나누던 중이었는데 어떻게 엿들은 모양인지 그녀는 본인이 국경에 가서 살펴봐야겠다고 생고집을 부리는 중이었다. 다른 거였다면 못 이기는 척 들어 드렸을 텐데 황녀의 안전과 직결되는 문제라 석진은 양보할 수 없었다.

호석도 마찬가지인 듯 황녀에게만큼은 보이지 않던 굳은 얼굴을 했다. 황녀는 정확히 이유를 말할 순 없지만 서러웠다.

본인은 이 나라 황제가 될 사람인데, 모두가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스물을 넘긴 지가 벌써 몇 달짼데 그들 눈에 아직도 제가 열 살짜리 계집아이로 보이는 것 같아 자존심도 상했다.

언제는 자신이 훌륭한 황제로 성장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해주었으면서 막상 황제가 되기 위해, 백성을 위해 무슨 일을 하려고 치면 막아서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아바마마와 어마마마는 은청궁에서 갇혀 지내던 그때처럼, 아직도 저를 물가에 내놓은 자식 보듯이 했다.

부루퉁한 얼굴로 잠시 생각하는 듯 보이던 황녀가 그 붉은 입을 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야겠습니다. 그리 중한 일에 황실이 이렇게 무책임하다니... 아바마마는 지금 아무것도 못하고 계시잖아요. 소안이란 것이 그리 끔찍한 것이라면 당장 간단한 조치라도 취해야 하는 게 맞는 것 아닙니까!”

마마. 이는 그리 간단히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설화 군이 주둔해 있지는 않으나 명백히 설화의 영토인지라 외교 문제도 있고 아직은 해독제도,”

처음 그 존재를 알게 된 것이 십 년이 지났다면서요. 아바마마께서 그 십 년 동안 대체 무얼 하셨기에 상황이 더 악화되기만 한 겁니까. 이렇게 바보같이 망설이는 이 순간에도 고통받는 백성들이 늘어나고 있을 겁니다..."

"...."

"간단히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회피한 것이 십 년이면, 충분히 외면해오셨습니다. 더는 그래선 안 돼요.”

석진은 할 말을 잃었다. 황녀가 하는 말에 딱히 오점은 없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그녀만의 군자다운 태도였으나 왜인지 이번만큼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황녀가 좋은 황제로 성장한다면 그것으로 제 할 일을 다 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녀가 더 나아가려 할수록 점점 더 불안하고 제 품에서 보호하고만 싶은 것이 이상했다. 신하로서, 벗으로서 그녀가 가는 길이 옳다면 지지해야 하는 것이 맞는데.

보호하고 싶다는 이 감정이 신하로서인지 사내로서인지 헷갈릴 때쯤 석진은 불경하다는 생각이 들어 눈을 감았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서는 공주의 눈을 마주할 수 없으니까. 제 마음의 가장 밑바닥까지 맑은 눈앞에서는 죄 들켜 버릴 테니.


그리 가시겠다면 저야 뭐, 선택지가 있습니까.”


한숨을 한 번 뱉고 이어진 호석의 말에 황녀가 놀라 돌아보았다.


대신 폐하께는 비밀로 해주시죠. 걸려서 황궁 밖으로 쫓겨나는 날엔 아버지한테 죽은 목숨이라.”

! 그것은 염려 말거라. 내 유모에게 잘 말해 놓을 테니.”

황녀는 제가 졌다는 표정을 한 호석의 손을 생글거리며 두 손으로 꼭 쥐었다.


대신 제 곁에서 절대! 한시도 떨어지지 않겠다고 약조하세요, 얼른.”


작고 하얀 손에 잡혀 있던 제 손을 바로 빼낸 호석은 새끼손가락을 걸더니 짐짓 엄한 척 약조를 요구했다.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순순히 호석이 하는 대로 손가락을 거는 공주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석진도 못 말리겠다는 듯 푸스스 웃어버렸다.


둘 다 거래 장소가 어딘지도 모르잖아요. 길잡이 하나 필요할 텐데 데려가세요.”


/

황자, 내 아들. 이 어미가 이날만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압니까?”

알지요. 너무 잘 알아서 문제지요. 제가 기억이란 것을 하는 그 순간부터 저에게 해왔던 말씀이지 않습니까.”


파리한 안색의 정훈은 비꼬려는 의도가 다분한 말투로 제 어미에게 대답했다. 제 말 속의 가시를 숨기려는 시도조차 보이지 않았지만 귀비는 그런 아들의 적대감이 익숙한지 조금의 동요도 보이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래요. 우리 아들이 황제가 될 이 날만을 어미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내일이면 황자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겁니다. 기억하세요, 황자. 옥좌는 원래부터 우리 황자의 것이었습니다. 2 황자 따위는 신경일랑 쓰지도 마세요. ? 이상하다 싶으면 이 어미가 없애버리겠습니다.”

전정국 그놈은 아직 사저에 가지 않았습니까.”

? , 우리 아들이 황제가 되는 모습은 봐야지요. 그것이 오랜 관례이고, 또 그래야 황제의 지엄함을 알고 쉽게 나서지 못할 것 아닙니까. 저도 보는 눈이 있으면 당분간은 몸을 사리겠지요.”

그 새끼가 즉위식에서 혹시라도 허튼 생각하면. 그땐 어찌하실 건데요.”

순간 정훈의 침소 안은 얼어붙은 듯 싸늘해졌다. 황제를 꼭 빼닮은 듯 움푹 꺼진 눈을 한 그의 눈빛은 제정신을 가진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그 눈빛은 폭군의 것이었다. 적의는 있었지만 나름대로 침착하게 귀비의 말에 대답하던 걸걸한 목소리도 정국의 이름을 올리자마자 소름 끼치도록 낮게 깔렸다.


황제의 지엄함이고 나발이고, 그 새끼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질 않는데 미친놈처럼 나한테 칼이라도 겨누면 어쩔 거냐고!”

정훈은 폭주하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협탁의 자기들을 바닥으로 던져 깨뜨렸다. 자기 조각에 베인 듯 손에 피를 뚝뚝 흘리는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궁인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지금 잘못 눈에 띈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아는 탓이다.

아냐, 아냐. 그 교활한 새끼는 자객을 시켜서 활을 쏠 수도 있지. 술잔에 독을 탄다던가. .”


그는 피 묻은 손을 바들바들 떨며 같은 자리를 빙빙 돌았다. 바닥을 보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그의 눈은 아무것도 담지 않고 텅 비어있었다. 귀비는 극도의 불안함에 휩싸인 정훈을 차게 식은 눈으로 응시했다. 저러다 다른 세력에게 꼬투리라도 잡히면 어쩌나, 오직 그것이 근심이었다. 아들이 곳곳에 흘리는 피와 공포는 그녀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른 이에게 약점을 잡히는 것. 오직 그것만이 그녀가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정훈은 한동안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다가 호흡이 가쁜 듯 숨을 몰아쉬더니 창백하다 못해 하얗게 질린 손으로 가슴을 짓눌렀다. 심장통인 듯 얼굴을 잔뜩 찡그리던 그는 신경질적으로 내관을 불렀다.

빨리 가져와. 당장.”

황자님. 어머니께서 보고 계십니다. 안 됩니다.”

가져와!”

오늘만큼은 안 됩니다. 남아있던 것은 다 쓰신지 오래고, 하물며 내일이 즉위식이신데 자중하셔야,”


-.

내관의 숱 없는 머리가 바닥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떨어졌다. 말을 끝맺지 못한 입이 허망하게 벌어진 채였다. 몇몇 궁인들은 예상했다는 듯 눈을 감았고 귀비는 살짝 놀란 듯 동공이 커진 채 정훈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듯 거친 숨을 몰아쉬며 피가 떨어지는 칼을 쥔 정훈은 빠르게 방을 나갔다.

가져올 수 없다면 내가 직접 가지러 가는 수밖에.



/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이었다. 유모에게 염낭과 보통 반가의 여인들이 입는 옷을 준비해 달라 이른 황녀는 궁녀의 도움으로 머리를 소박하게 반으로 묶는 중이었다. 중간중간 유모가 폐하께 들키는 날에는 정말 큰일이 날 거라며 걱정했으나 개의치 않았다.

호석님. 아기씨 좀 잘 부탁드립니다.”

심히 불안한 듯 주름진 손으로 제 옷깃을 잡는 상궁에 호석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후 장옷을 쓰고 나온 황녀에게 저를 발판 삼아 궐 담에 올라가게 한 후 호석 역시 유려한 몸짓으로 수월하게 담을 넘었다. 공주를 아래에서 받을 생각으로 돌아봤더니 이미 말 두 필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던 석진이 천천히 안아서 내려주고 있다.

생각보다 빨리 나오셨네요, 마마.”

엄청 새벽부터 일어나 계시더라고요. 마마는 저와... 아니다, 형님과 타는 게 낫겠습니다.”

얼굴이 살짝 상기된 황녀를 흘긋 내려다본 호석이 곧 생글거리며 말을 바꿨다. 정말 들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저러는지 그저 호석이 미울 따름이다. 가끔씩 진짜 짓궂어.

석진은 조금 의아해 했지만 혹여 위험이 생기면 제가 두 손이 자유로워야 검을 쓰든 활을 쓰든 하지 않겠냐는 그럴듯한 말에 수긍하고, 능숙하게 황녀의 작은 몸을 안고서 안장 위로 앉혔다. 뒤에서 여리고 둥근 어깨를 감싸는 석진의 팔에 황녀는 한순간 숨을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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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삐, 잡으세요. 놓치시더라도 제가 안고 있을 테니 무서워하지 마시고.”

? 으응. 안 놓쳐요.”

고삐를 꼭 움켜쥔 작은 손 위로 제 손을 올린 석진은 곧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땀이 차는지 석진의 손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제 손을 꼼지락대던 황녀는 곧 고개를 저었다.

분명 백성들을 위해 향하는 길이라 해놓고 이리 마음이 다른 곳에 흔들려서야.

황제가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며 붉게 달아오른 볼을 다스리려 애를 썼으나 한번 놓인 마음은 쉬이 움직이지 않는 법이라 저를 안은 넓은 품이 좀처럼 의식될 수밖에는 없었다. 이런 식으로 석진에게 오래 안긴 적도 없는 데다, 말이 얌전히 달리는 것이 아닌지라 여린 몸이 자꾸 흔들려서인지 석진이 더 꼭 붙어서 힘주어 안고 있는 게 느껴지니까.




마마, 처음 도성을 나와 보신 기분이 어떠십니까.”


붉은 볼을 숨기려 줄곧 장옷에 숨어 있던 황녀가 호석의 목소리에 문득 고개를 들었다.

...”

조금 오래 달렸나 싶었는데, 이제 수도를 벗어난 모양이었다. 태어나 처음 보는 풍경은 황녀의 시선을 빼앗기에 충분했다. 그들이 달리는 풀길 옆으로 오른 편에 보이는 바다는 지금 막 떠오르는 해를 머금고 있었다. 제 계절임을 뽐내는 듯 벚꽃도 바람에 날려 공주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책에서는 지도로만 보아왔었는데. 지도가 아닌 실제로 마주한 유월은 제 상상보다 더 아름다웠다. 늘 멀리서 숲을 보기만 하다 이제야 숲 안에 들어가 나무 하나하나와 교감하는 기분이다.

처음 본 바다, 처음 본 일출, 처음 본 끝이 보이지 않는 들판. 모든 것이 다 처음이었다.

그러나 에 대한 감격은 잠시였다. 한참을 달리던 셋은 곧 설화와의 국경에 다다랐다. 워낙 작은 나라에다 북쪽에 황궁과 도성이 있었던지라-쉬지 않고 계속 달린 것도, 말이 명마였던 것도 한 몫 했지만- 반나절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병사들의 눈을 피해 다른 길로 돌아왔으나 국경은 경비가 삼엄해 어딜 가도 그들을 마주칠 게 뻔한 듯싶어 세 사람은 말을 잠시 멈추게 했다.

도련님. 거래 장소는 어딥니까?”

이곳에서 머지않으나 여긴 병사들이 많이 배치되어 있는 곳입니다. 혹 들켰다가 마마의 외출 사실이 폐하께 알려질 수도 있고, 자칫 얼굴을 보이셨다가는 신변에 위험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잠시 저들의 시선을 돌릴 테니 호석이랑 함께 저쪽으로 가세요. 숲으로 난 길로 쭉 가시면 마을이 하나 나올 겁니다. 정황만 대충 파악하시면 빨리 돌아오셔야 합니다. 부디 몸조심하시구요. 호석아,”

아무래도 걱정되는 듯 다정한 손길로 공주의 장옷을 더 꽁꽁 감싸준 석진은 그녀를 호석에게 넘기고서 병사들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상장군의 아들인 호석과 절친한 벗이기도 하고 얼마 전 태학사와 함께 와 얼굴을 비추기도 했으니 저곳 병사들도 석진을 아주 경계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

/

호석에게 안겨 석진의 말대로 빨리 숲길을 달렸다. 황녀는 병사나 다른 이의 눈에 띄게 될 것이 저어되어 장옷을 흰 것이 아니라 짙은 초록색으로 내달라 할걸, 하고 후회했다.

거친 산길이라 안 그래도 승마에 적응되지 못한 몸이 마구잡이로 흔들렸지만 손바닥의 살갗이 까질 때까지 황녀는 고삐를 놓지 않고 버텼다. 혹 떨어질 것 같으면 호석이 팔로 막아줄 텐데도 티 내지 않고 고통을 감수했다. 성군이 되기 위해서 설령 그것이 아주 사소한 것일지언정- 무엇에서든 한 발짝 더 성장하고 싶은 의중을 알기에 호석도 아무 말 않고 그대로 말을 달렸다.

긴 숲길의 끝에는 석진이 일러준 대로 정말 마을이 있었다. ...마을이긴 했다.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었으니까. 황녀가 생각했던 평범한 마을은 아니었지만.

그 모습은 처참함 그 자체였다. 옷을 입은 듯 만 듯한 여인들이 힘없이 앉아있는 사창가 골목을 지나면 다 쓰러져 가는 집들과 눈 밑이 검게 변한 창백한 자들이 너부러져 있었다. 이 자들이 석진과 태학사 대감이 말했던 소안 가루에 중독된 자들인 것 같았다. 그래서 거래가 되는 장소는 어디인 게야.


호석아. 나 잠시 내릴게.”

? 이 위험한 데서 어딜 가시겠다고,”

이렇게 위에서 내려다봐서는 이들을 구경하는 것일 뿐이지 않으냐. 저자들은 대화가 가능할 성싶지 않으니 여인들이나 다른 자에게 이곳의 실상을 알아봐야겠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저랑 같이 가셔야죠. 약속, 잊은 거 아니죠?”


눈을 가늘게 뜨고 손가락을 움직여 보이는 호석에 황녀는 가볍게 생긋 웃더니 제 손가락을 잠깐 걸어주고서 사창가의 여인들에게로 향했다. 약간 긴장되었는지 짧게 숨을 내쉬고 낡은 의자에 앉은 여인에게 말을 붙인다.

, 물을 말이 좀 있는데.”

황녀가 말을 건 여인은 이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희고 마른 여자였다. 몸 군데군데 멍이 들어 있는 그녀는 황녀의 목소리에 신경질적으로 눈을 부라렸다.


귀한 댁 아가씬 듯싶은데, 험한 꼴 보고 싶지 않으면 빨리 여기서 나가요. 짜증 나게 말 걸지 말고.”

나는 이 마을의 상황을 알고 싶어서 온 사람일세. 귀찮게 했다면 미안하지만 그대들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 내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있겠는가.”

면면히 보이는 적의에 아랑곳하지 않고 공주가 질문을 이어가려 하자 여자는 헛웃음을 지었다. 필시 비웃음이었다. 여자는 앉아있던 나무 의자에서 비척비척 일어나더니 그대로 황녀의 뺨을 내리쳤다.

무엄한,”

생각지 못한 상황에 당황하고 화난 호석이 곧바로 제 허리에서 검을 빼들었으나 황녀가 그를 저지했다. 오른쪽으로 돌아간 얼굴에도 태연하게 떨어진 장옷을 주운 그녀는 참으라는 듯 호석을 올려다보았다.

저 계집이 함부로 손을 놀리기 전에 막았어야 했는데. 망할.

호석은 입속을 잘근 씹었다.


, 검을 빼들었으면 나를 베지 않고. 이것이 여기 사람들의 인생입니다. 나 같은 창녀들은 가족에게 버림받고 팔려 와서 하루하루를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이지요. ? 죽으면 내 자리를 메우느라 내 동생을 데려오거든.”

황녀는 여자의 광기 어린 눈을 피하지 않고 계속 응시했다. 미친년이라며 아무도 듣지 않던 그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

소안에 중독된 자들도 어디 그렇게 되고 싶어 그런 줄 압니까? 설화고 유월이고 다 똑같은 귀족 나으리들이 제 뱃속 불리자고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소안을 뿌립니다. 살기 힘들어 뭔지도 모르고 손을 댔는데 이제는 그 망할 가루 때문에 더 구렁텅이로 빠지지요. 그렇게 정신이 나가버리면 이제는 무슨 수를 써서든 손에 넣으려 합니다. 집을 내놓든, 자식을 팔아버리든!”

여자는 악에 받친 듯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다. 말하다 보니 꾹 눌러왔던 감정이 더 고조된 모양이었다.


도움? 도움이라. , 세상 물정 모르는 귀한 아가씨 눈에는 이곳이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있어 보이나 보네요. 부럽기도 하지.”

잔뜩 황녀를 무시하는 말이었지만 그녀는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 여자가 하는 말이 모두 사실이었으니까. 지금껏 황제가 되기 위한 공부에만 힘썼지 당장의 백성들이 이리 죽어나가는 줄은 몰랐으니까. 물론 저 여자가 엄밀히 따졌을 때 제 백성은 아닐지언정 유월 사람들의 형편도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았다.

고맙네. 말해줘서.”

작고 흰 손이 분노와 좌절로 파르르 떨던 여자의 손을 잡았다. 여자는 영문을 모른 채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황녀를 바라봤다.

이 아가씨는 뭘 하는 사람이기에 제 뺨을 때린 손을 어루만진단 말이야.


혹 소안이 거래된다는 정확한 장소를 안다면, 말해줄 수 있겠는가? 꼭 보답하겠네.”

..., 아가씨.”

순간 마마라고 부를 뻔한 호석은 이 여자 말을 어떻게 믿느냐는 표정으로 보았으나 그녀는 그냥 호석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놓았다. 괜찮다는 뜻이었다.


한편 아까보다 누그러진 듯 보이는 마른 여자는 곧 위치를 일러주었다.

, 잘못 걸리는 날에는 살아나올 수 없을 것이니 각별히 주의하라는 말과 함께.

/


정훈은 미친 듯 한참을 달렸다. 바람을 맞으니 속이 좀 뚫리는 것도 같았다. 그가 지나오는 모든 길들이 내일이면 그가 다스리게 될 땅이었고, 지나오는 모든 사람들이 제 백성이 될 터였지만 그는 당장 자신의 고통과 쾌락이 먼저였다. 제 나라의 모습 따위는 눈에 들지도 않았다.

처음 왔을 땐 분명 이쪽이었는데. 거래 장소가 그 사이 바뀌었나.

첫 방문 때 이후로는 매일 제 아래 심복들을 시켜왔던 터라 거래 장소를 모르는 정훈은 길을 헤매는 중이었다. 조급한 마음에 입속으로 욕을 중얼거리던 그는 흰 장옷을 쓴 여인이 사창가의 창녀와 무언가 말을 하는듯한 모습을 보았다.

이런 곳에 저런 여인이라니.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하며 말을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무슨 말을 한 건지 창녀에게 뺨을 맞은 여인의 장옷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바닥으로 풀썩 떨어지고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흰 얼굴이 조금 드러났다. 길길이 화내야 마땅한 상황에 아무렇지 않은 듯 장옷을 줍고 제 옆의 호위무사로 보이는 놈을 말리기까지.

이해할 수 없는 모습에 흥미로움을 느껴 여인을 계속 응시하던 정훈의 동공으로 곧 말간 얼굴이 맺혔다. 바람이 조금 불면서 머리카락이 넘어가 작고 하얀 얼굴이 남김없이 죄 드러났다.

그는 설화에서 내로라하는 미인들을 봐왔지만 여태 저런 여인은 보지 못했었다. 오밀조밀 모난 데 없는 이목구비에 귀여운 듯 고아한 독특한 분위기까지, 특별함 그 자체로 보이는 여인은 다시금 그의 집착적인 성향을 일깨웠다.

유월의 계집인가. 그렇다면 필시 귀족이겠구나.

무력하던 삶에서 오랜만에 무언가에 흥미가 돋는 듯 살짝 푸른 끼가 도는 입매는 비릿하게 올라갔다.


***


이곳은 모두 한없이 차갑구나.

황녀는 그리 생각했다. 거래하는 사람들의 눈과 마음도, 거리의 모습도, 사리사욕을 채우려 다른 사람을 사지로 내모는 상인들도. 하나같이 똑같은 온도, 똑같은 빛을 띠고 있었다.

그녀는 정말로 냉기가 느껴지는 것 같아 괜히 장옷을 더 끌어당겨 제 몸을 감쌌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아니다. 나는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말거라.”

괜찮지 않으신 것 같은데. 호석은 황녀의 낯빛을 살피고자 했으나 장옷 안으로 더 파고 들어가 버린 탓에 얼굴을 보기 힘들었다.

처음으로 이리 멀리 나와 보시니 조금 피곤하실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리 참혹한 모습들은 평생을 궁에서 살았던 마마께 조금 충격일 수도 있겠지.

이제 그만 돌아가자고 말씀드릴까 하고 호석이 생각하던 순간 좀 전보다 뚜렷해진 목소리가 어느새 담담한 눈빛을 하고 있는 황녀에게서 흘러나왔다.

분명, 붉은 꽃의 열매에서 그 약을 만들어낸다 들었다. 그렇지?”

“... . 아직 꽃이 완전히 만개할 시기는 아니지만 이 근방에서 자라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꽃의 이름은 알아내지 못하셨다 하시더냐.”

태학사 어르신 말씀으로, 설화에서는 적월초라 한다 합니다.”

적월초.... 적월초라.”

황녀는 붉은 입술로 그 붉은 꽃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아예 처음 들어보는 이름은 아니었다.

은청궁 밖을 나가는 일조차 어려웠을던 유년 시절에 그녀는 상궁의 도움으로 황궁 내에 있는 거의 모든 책을 다 읽어볼 수 있었다. 당시 나이에 비하면 다소 어려운 책들이었지만 타고나길 총명했던 터라 큰 어려움 없이 술술 읽어내곤 했는데 그중에는 갖은 식물과 그 특징을 기록해 놓은 책도 많았다.

책을 읽었던 그 기억에 따르자면 적월초는 유월에서는 보기 힘드나 설화에서는 비교적 흔한 꽃이었다.

그러나 그 어떤 약학 서적에서도 적월초가 마약의 원료가 된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는데.

호석의 말에 따르면, 현재로서는 설화와 유월의 경계에서 주로 재배되고 있으며 대부분 설화의 귀족들이 그 땅의 소유주라고 한다. 언제, 어디서부터 마약의 원료로서 유통이 시작되었는지는 아직 알 수 없는 데다 적월초, 소안에 대한 모든 권리는 땅을 가진 귀족에게 있다고도 했다.

이런 걸 몰랐다니. 가만, 그럼 설화의 황궁에서는 이 사실을 다 알고 있는 겐가?

황녀는 또다시 조그만 머리를 열심히 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설화의 황족과 만나지 않는 이상 그녀가 아무리 애를 써도 알 수 없을 것이었다. 이번에 설화 황제가 새로 즉위한다 하던데, 그래도 유월에 굳이 오진 않을 테니....

낭자.”

그리 가깝지는 않았으나 뒤에서 들리는 낮고 긁는 음성에 곰곰이 생각하던 황녀는 소스라치게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누구...”

어느 틈엔지 호석이 당장이라도 빼어들 듯 칼집에 손을 얹고 황녀의 곁에 섰다. 뒤에 누가 있음은 느꼈지만 그저 색주가를 찾은 놈팡이인 줄 알았는데.

낭자라고도 부릅니다, 그 적월초라는 꽃.”

...”

순간 저를 부르는 것으로 알았던 황녀는 살짝 민망해져 남자의 시선을 피했다.

사실 무서워서 피한 것도 있었다. 그의 눈 밑은 어두침침하게 움푹 패어 있었고 눈빛 역시 아까 그 마을 사람들처럼 아무것도 담지 않은 차가움이 생생했으니까. 오늘 처음 보았지만, 이제는 그 텅 빈 눈이 낯설지 않은 공주는 모순적이게도 그 익숙함이 무서웠다. 게다가 눈앞의 사내는 단지 푸르스름한 입꼬리만이 억지로 끌어당긴 듯 부자연스럽게 올라가 있을 뿐이어서 더욱 께름칙했다.

그는 호석의 경계에도 당혹스러운 티조차 내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호석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이름만 그렇지 낭자 같은 여인에게 어울리는 꽃이 아닌데, 어찌 찾으십니까.”

제 오라버니께서 그 꽃 때문에 목숨까지 위태로울 지경이어서요. 하여 제 눈으로 봐야 쓰겠습니다. 대체 어떻게 생겼기에 사람을 그 꼴로 만드는지.”

아가씨.”

호석은 곧 담담하게 말하는 황녀를 내려다보며 그녀를 저지하고자 했다.

뭘 하시려고 거짓말까지. 저 자와 더 엮여서 좋을 게 없어 뵈는데.

저런.”

잠시 눈빛이 흔들리던 남자, 정훈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얼굴을 했다.

제가 그 꽃을 좀 아는데, 함께 가시겠습니까.”

“.... 그럼요.”

잠시 고민하는 듯 말을 않던 황녀가 곧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생긋 웃어 보였다. 여기서 안절부절 못하는 사람은 호석뿐인 듯싶었다.

정훈은 근처에 있는 제 소유의 밭으로 갈 생각이었다. 좀 전에 길을 헤매던 중 운 좋게도 제 땅에서 일하는 소작농 하나를 마주쳐 길잡이 하나를 얻었으니.

물론 아랫것들에게 다 맡겨왔기에 그 자의 얼굴 하나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으나 지레 겁을 먹은 사내가 저 혼자 머리를 조아리며 술술 다 말해버린 것이다.

앞서가는 정훈의 뒤에서 거리를 둔 채 따라가는 황녀에 호석은 한 손에 말고삐를 잡은 채 바짝 붙어 귀엣말을 했다.

어쩌려고 저런 믿을 구석 없는 자를 따라가십니까. 지금이라도 관두세요.”

생각이 있으니 그냥 가자. 이상한 곳이다 싶으면 그때 내빼도 늦지 않으니.”

똑같이 귀엣말을 하는 황녀에 호석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궁에서 작은 화초처럼 자랐다지만 겁이 없어도 너무 없는 분이다. 앞으로 제 앞날이 꽤나 고단할 것을 짐작한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하나뿐인 제 주인이신데 지켜드려야지. 그리 생각하며 묵묵히 조금 험한 길을 한참 따라가던 중이었다.

..”

생각보다도 훨씬 큰 밭의 규모에 황녀가 입을 벌렸다. 이 정도 크기의 밭이 수십 개는 족히 있다는 소린데, 도대체 어디까지 퍼져 있단 거야.

꽃이 아직 제대로 피진 않았는데, 원하신다면 하나 꺾어드리지요.”

황녀는 말없이 제 손을 내밀었다. 정훈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고 바로 옆에 있던 꽃 하나를 꺾어 작은 손에 쥐여주었다.

저는 낭자에게 낭자를 드렸으니, 낭자께선 제게 무얼 주실 겁니까. 제게도 꽃 말고 다른 낭자를 주신다면야 감사히 받을 텐데.”

무례합니다.”

호석이 무엄하다고 미처 말하기도 전 정훈의 말에 담긴 뜻을 바로 파악한 황녀가 싸늘하게 대답했다. 호석은 당장이라도 저 파렴치한 입을 찢어버리고 싶은 지경이었다. 감히 황녀님께 저런 저급한 농을 하고 웃는 꼴이라니.

막상 정훈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생각보다 단호하시네. 허면 이 정도는 알려주실 수 있겠지요. 유월의 귀족이십니까, 아니면 설화의 귀족이십니까.”

황녀는 잠시 머뭇거렸다. 호위까지 있는 여인이 귀족이 아니라고 해봤자 믿을 것 같지도 않고. 정말 알려줘도 되는 건가.

그러나 꽤 비싼 값이라는 꽃을 받고 입을 싹 닫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느 정도 대가는 치러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돈을 줄 생각이었는데 딱히 돈이 궁해 보이지도 않는 데다 화폐를 본다면 유월국 사람임이 탄로 날 테니 굳이 숨길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유월 사람입니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그는 곧 제 말에 올라탔다.

저는 따로 급히 가 봐야 할 일이 있어 그럼 이만. 나중에 꼭, 다시 뵙게 되길 바라지요.”

이라는 말에 강조를 둔 그는 끝까지 그 푸른 입매를 빳빳이 끌어올리며 웃더니 흙먼지와 함께 사라졌다. 정훈이 작은 점처럼 되기까지 주시하던 호석은 찜찜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이리 쉽게 떠날 위인 같지는 않았는데.

뭐 아무렴 지금은 공주를 챙기는 것이 우선이었다. 식사는커녕 허기를 때울 만한 것도 제대로 드시지 못했으니.

마마, 많이 곤하실 텐데 이제 그만 돌아가시지요.”

황녀는 피다만 꽃을 손에 쥔 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양인지 우두커니 있는 공주를 보고 호석이 눈을 맞추었다.

마마?”

? 불렀느냐?”

. 고단하실 테니 이제 그만 돌아가자고 말씀드렸습니다. 혹 많이 힘드시면 잠시 쉬었다 가도 되고요.”

, 괜찮...”

-꼬르륵

습관적으로 괜찮다고 말하려 하던 황녀의 목소리 사이로 잠시 정적이 일었다.

이 근처에 국밥집 있는 걸로 아는데, 괜찮으시면 그리로 갈까요?”

민망해서 모른 척하는 황녀에게 호석이 미소로 물어보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여기가 마을 초입이니 형님부터 만나서,”

아아악!”

나름 평화로웠던 공기 사이로 귀를 찢는 비명 소리가 그 모든 것을 깨버렸다. 아까 사창가 골목 쪽에서 나는 소리다. 당장 가봐야 한다는 황녀의 다급한 눈빛을 읽은 호석은 그녀를 안아 들고 곧장 말에 올랐다.

비명이 들릴 정도의 가까운 거리여서 굳이 말을 탈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짐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급히 자리를 떠야 하는 상황일지도 모르고 말을 공주에게 맡기고 혼자 다녀오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았다.

이런 낯선 골목에 공주를 혼자 두느니 내가 좀 다치고 말지.

​​

/

큰 소리가 난 적 없던 유월의 황궁은 지금 모두가 숨죽이고 있는 상태였다.

단 한 사람, 황제를 제외하고.

공주가 어디로 갔는지 정녕 아무도 모른단 말이야!”

분노한 황제가 은청궁에 들이닥친 것은 아침나절쯤 되었을 무렵이었다. 석진이 이곳에 온 것에 의심을 가진 국경의 장군이 기어이 황제에게 전갈을 보낸 모양이었다. 공주가 이곳에 온 것 같다는 내용에 그는 매우 불안했고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딸을 걱정하는 것인지 혹여 딸이 불러일으킬 파장을 걱정하는 것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공주가 국경으로 가서는 안 되었다는 것. 안 그래도 설화의 상황이 좋지 않은데. 그는 몇 년간 거머리처럼 붙어있던 그 지겨운 악몽이 실현되는 것 같은 환각을 느꼈다. 어지러웠다.

평소 은청궁을 자주 찾는 황제가 아니었으므로 갑작스러운 행차에 유모 김상궁을 포함한 모든 궁인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고 어린 나인은 애꿎은 손톱을 뜯기까지 했다.

폐하... 어찌 예까지 발걸음을 하셨습니까.”

공주는 어디 있느냐.”

화를 삭이는 듯 들리는 엄한 목소리에 궁인들은 모두 제 발끝만 보고 서 있었다. 황궁 생활만 무려 30년인 김상궁도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 어찌할지 모르고 입을 꾹 다물었다.

공주가 어디 있느냐고 짐이 묻질 않느냐.”

“...”

공주가 궁을 나간 것이냐.”

송구하오나 그러합니다.”

어디로 갔느냐.”

국경으로 가신다는 말밖에 하지 않으셔서... 소인도,”

.”

자기가 산산조각이 나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황제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옆에 있던 청자를 집어 던진 것이다.

공주를 찾는 즉시 내 앞으로 끌고 오거라. 혹 일이 생겼을 시에 은청궁 궁인들은 엄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알겠느냐?”

/

​​

아까 그 여자였다.

마르고 흰 몸에 아까는 그리도 혈색이 돌지 않더니 지금은 아예 그 혈에 뒤덮여 있는 채 고꾸라진 그녀는 움직이질 않았다. 날카로운 것에 여러 번 찔린 듯 옷에서는 쉴 새 없이 피가 배어 나왔다.

한발 늦었는지 범인은 알 수 없었으나 보나 마나 술에 거나하게 취한 주정뱅이나 여자가 제 말을 고분고분 듣지 않아 화난 포주의 짓임이 분명했다.

황녀는 크게 충격받은 듯 가만히 서 있다가 여자에게로 한 발짝 다가갔다. 이에 기다렸다는 듯 핏기 없는 손이 어지러이 허공을 뻗대다 황녀의 치맛자락을 쥐었다.

아가씨...”

황녀는 놀라 소리 지를 뻔한 것을 겨우 참고 빠르게 무릎을 굽혀 앉아 여자의 마른 몸을 감싸 안았다.

조금만 참으시게. 빨리 의원을 불러올 테니 조금만,”

, 니요.. 제 동생 좀.. 제 동생 좀, 데리고 도망가 주세요... 제발...”

그게 무슨,”

순간 섬광처럼 여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죽으면 제 동생을 대신 데려오니 마음대로 죽지도 못한다고. 죽어가는 와중에도 여자는 동생을 걱정했다. 가진 것 하나 없던 생에서 유일하게 지키고 싶은 존재가 동생이었나.

... 여자의 동생마저 똑같은 신세가 되는 일은 없어야 했다. 원하는 대로 이루어진 것이 하나도 없었을 여자의 생에서 마지막 소원은 들어주어야 마땅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공평하다.

이 길 아래로 조금만 내려가셔서... 피한골 홍가 년이라 하면 다들 알려, 줄 겁니다... 제발 그 아이 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뚝뚝 끊기는 말을 이어가던 여자는 결국 황녀의 품에서 눈을 감았다. 황녀가 처음 겪은 죽음이었다. 것도 제 품 안에서 아주 생생히. 충격인지 안타까움인지 어느 것 하나로 구분 짓지 못할 여러 감정이 큰 눈에서 눈물로 떨어져 죽은 여자의 창백한 얼굴을 적셨다.

마마. 괜찮으십니까.”

심히 걱정된다는 눈빛으로 호석이 공주를 내려다보았다. 저 작은 몸으로 오늘 너무 많은 일을 겪으시는 것 같은데. 하지만 공주의 성정이라면 분명 저 여인의 동생을 구하겠다 하시겠지.

“... . 빨리 아이부터, 아이부터 찾아 여길 나가야 해.”

예상했던 대로라는 듯 고개를 끄덕인 호석은 작은 손으로 눈물을 닦아내는 황녀를 또다시 안고 곧바로 말을 달렸다. 피한골이면, 다 쓰러져 가는 집들이 모여 있는 빈촌이었다.

아버지 따라 국경에서 지냈던 것이 조금은 도움이 되는구나. 그때는 그냥 이유 없이 싫었는데 말이야. 겨울이 유난히 추워서 그랬나.

행인에게 좀 물어야,”

그럴 필요 없겠는데요.”

조금 있다 피한골에 다다른 황녀와 호석의 앞에 조그마한 여자아이를 억지로 끌고 가려는 거구의 사내가 보였다. 홍가 아이라는 여자의 동생을 일일이 물어서 찾아야 하나 생각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럴 필요도 없는 것 같다. 누가 봐도 저 아이니까.

방울만한 년이 쇠를 삶아 먹었나! 꼭 지 언니 년처럼 말을 안 들어 처먹어!”

마을 사람들은 모른 척 제 할 일을 했다. 이런 일이 하루 이틀이 아니라는 듯 잔인하도록 무심한 태도. 사내 역시 보는 눈 따위 신경도 쓰지 않고 울며 버둥대는 아이를 들쳐 업으려던 때였다.


[방탄소년단] 적국의 황후 02 | 인스티즈


그리 방울만한 아이, 뭣 하러 데려가나? 그만 내려놓지.”

호석이 잔뜩 굳은 얼굴로 말에서 뛰어내렸다.

척 봐도 이제 열 살쯤 먹은 것 같은 애를. 쓰레기 같은 새끼들. 속으로 욕을 뇌까리던 호석을 바라보는 사내의 수염이 덥수룩한 얼굴 역시 심기가 불편해진 양 무섭게 일그러졌다.

이 년 언니라는 계집이 자리를 비워서 말이야. 그럴 수는 없겠는데?”

자리를 비운 게 아니라 네놈이 죽인 거겠지. 짐승만도 못한 새끼야.”

언니가... 죽었어요?”

그렁그렁한 아이의 눈을 본 호석은 아차 싶었다. 젠장. 내가 더 울리게 생겼네.

호석이 당황스러워하는 사이에 어느새 말에서 내려온 건지 황녀가 아이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아니야. 네 언니는 여기보다 훨씬 좋은 데로 간 거야. 그래서 우리더러 너를 돌봐주라고 부탁했단다. 이름이 뭐니?”

연이... 홍 연이요...”

놀고 있네. 댁은 뭐요?”

사내는 장옷을 뒤집어쓴 황녀에게 위협적으로 다가갔다. 호석이 막아서는 바람에 더 가까이 가지는 못했지만.

돈이 필요해서 데려가는 거라면, 값을 줄 테니 아이를 놓아 주거라.”

사람을, 하물며 노비도 아닌 평민을 물건처럼 사고파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지금 당장 이 사내에게는 돈 말고는 설득할 게 없어 보였다. 차라리 돈만 받고 떨어지면 다행일 텐데.

불행하게도 순식간에 돌변한 저 사내의 집요하고 더러운 눈빛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앞을 가로막았던 호석을 무지막지한 덩치로 밀쳐내고는 황녀를 끌어안아 장옷을 들추었다. 허리에 닿는 불쾌한 촉감이 기분 나빴다. 제 몸 안으로 끈적하고 더러운 기운이 스며드는 것만 같아 흠칫 몸을 뒤로 뺐지만 사내는 순순히 놓아주지 않는다. 오히려 벗어나려 애쓰는 황녀를 보는 게 즐거운 듯 수염 난 입가에는 웃음이 흘렀다.


그것도 꽤 괜찮은 제안인데, 내가 구미가 당기는 쪽은 이쪽이라서 말이야. 호오, 이렇게 보니 생각보다 더 반반한 것이 꽤나 값, 으아아악!”

그러니 좋은 말 할 때 그만뒀어야지, ?”

호석이 피 묻은 검을 더럽다는 듯 소매로 훑어내며 싱긋 웃어 보였다.

소리 하나 내지 않고 빠르게 베어버린 듯 좀 전까지 황녀의 장옷을 들춰 얼굴과 허리께를 만졌던 두꺼운 팔목 하나가 사내의 몸뚱어리를 벗어나 있었다.

고통에 제 어깨를 부여잡고 고꾸라지는 사내에게서 빠르게 벗어난 황녀가 저 역시 놀란 차에 망설임 없이 연의 눈을 가렸다.

너는 칼을 휘두르기나 했지 맞아본 적은 없었을 거야, 안 그런가? 네가 든 칼의 무게를 생각하고 행동해. 무력은 약자에게 쓰라고 있는 게 아니니. 앞으론 들 일도 없겠지만.”

, 미친 새끼, 시발, 아아악...!”

마음 같아서는 목을 베고 싶었는데 내 주인이 그런 걸 싫어하셔서. 또다시 이 아이나 우리 아가씨를 찾아오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어쩔 수 없고.”

그러게 그 더러운 손으로 감히 누굴 만져.


호석은 제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어린아이와 공주 앞에서 과격하게 군 것 같아 잠시 후회했지만, 싸늘한 눈으로 고통에 신음하는 사내를 훑더니 생각을 고쳐먹었다. 저런 놈은 손을 못 쓰게 하는 게 맞으니까.


세 사람은 곧 말에 올라타고 피가 낭자한 그 자리를 벗어났다. 갑자기 일어난 일에 놀라서 숨죽이던 피한골 사람들은 세 사람이 자리를 뜨자 그제야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

​​

마마, 어디서 뭘 하시다 이제야...!”

예정보다 조금 늦게 돌아오자 내내 마음을 졸이고 있던 석진이 황녀에게로 달려왔다.

가까이 다가오자 멀리서는 잘 보이지 않았던 붉은 핏자국이 눈에 선명히 들어온다. 놀란 토끼 눈이 된 석진은 말에서 내리려는 황녀를 다급히 안아들었다.

[방탄소년단] 적국의 황후 02 | 인스티즈


다치셨습니까? 어디 봐요.”

, 아닙니다! 제가 다친 게 아니라, , 여러모로 일이 많았습니다. 나중에 다 말씀드릴게요, 지금은 저 아이가...”

아이라니요?”

곧장 공주에게 시선을 빼앗겼던 터라 아이가 있는 줄도 몰랐던 석진은 호석이 아이를 말에서 내려주고 있는 것을 보았다. 작고 마른 여자아이였다.

저 아이 옷에도 피가 묻은 걸 보니 호석이 한바탕 했나. ... 그럼 그렇지. 호석에게도 검은 옷이라 크게 티 나진 않았지만 검붉은 핏자국이 좀 튀어 있었다. 이래서 그리 위험하다 말씀드린 건데.

형님, 왜 저는 다쳤냐고 안 물어보십니까? , 좀 섭섭하네에-”

너는 지나치게 멀쩡해 보여서 그런다. 그나저나 저 아이는?”

말하자면 사정이 좀 깁니다. 밥이나 먹이고 괜찮은 가게에 부탁하려고요. 형님은 괜찮았습니까?”

그게... 마마, 송구합니다. 아무래도, 황궁 쪽에 연락이 닿은 것 같습니다. 제 불찰입니다.”

아니요. 도련님께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그 정도 각오도 안 하고 나왔을까 봐요? 제가 알아서 책임지겠습니다. 너무 걱정마세요.”

생각보다 꽤 씩씩하게 대답하는 공주에게 석진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마마... ? 황궁...? 혹시 언니가 그 공주 마마셨어요?”

...”

연의 물음에 석진이 허망한 표정을 했다.

애가 너무 자그마해서 있는 걸 또 까먹었다.

이를 어쩐다.

그렇단다. 근데 이건 우리 연이랑 언니랑 둘이 비밀로 하자, ? 다른 사람한테 알려주면 언니가 다시는 연이 못 볼지도 몰라.”

손으로 입을 막으며 놀란 연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석진은 둘의 모습이 꽤 귀여워 보여 자기도 모르게 눈을 반달처럼 접은 채 해사하게 웃었다. 저 아이, 우리 공주님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이네.

형님, 근데 이 꼴로 국밥집은 좀... 그렇죠?”

, .”


/


말해보아라. 궁 밖의 무엇이 너를 그렇게 이끌었느냐. 궁 안의 무엇이 그리도 부족했단 말이야!”

아바마마. 소녀는 궁 안의 것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궁 밖이 부족했기에 나간 것입니다.”

뭐라?”

궁 안에 가득했던 아바마마의 성은이 왜 궁 바깥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까? 궁금했습니다. 앞으로 제가 다스릴 나라가, 제가 굽어살펴야 할 백성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가요. 헌데 제가 알고 있던 것과 너무도 달랐습니다. 아바마마, 이 황궁만이 유월이 아닙니다. 주제넘지만, 소녀는,”

그래서,”

황제는 황녀의 말을 끊었다. 지금 황제의 서재 안에는 황제와 공주, 둘뿐이었다.

저녁께 돌아오자마자 황녀는 폐하의 명이라며 황제의 업무실로 끌려가야 했다. 호위인 호석도 들지 못하게 할 정도면 굉장히 엄중히 벌하겠다는 의미인지라 문밖의 석진과 호석은 그저 공주께서 매만 맞지 않으시길 바라고 있었다.

그래서, 앞으로도 그렇게 황궁 밖으로 자유롭게 다니겠단 말이더냐.”

필요하다 생각되면 그리할 것입니다. 이번은 아바마마께서 소안에 대한 것을 해결하려 하지 않으시기에,”

너를 과신하지 마라!”

“... ?”

네가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지 말라는 말이다. ... 너는 앞으로 황위에 오르거든, 정사에 대한 모든 것을 대신들에게 맡겨라. 그게 싫다면 너에게 어울리는 부군을 맺어 줄 테니 그 자의 말에 순종해라. 그것이 네가 황제가 되어 해야 할 일이다.”

그게... 무슨...”

황녀는 이해할 수 없는 말에 고개를 들어 황제를 보았다. 황제의 눈빛이 불안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저 눈은, 나를 신뢰하지 못하신다는 뜻이다.

? 평생을 옳은 황제가 되기 위해 살아온 내게, 대체 왜.

아바마마. ... 예언 때문에, 저를 믿지 못하시는 겁니까.”

황제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내가 내 딸을 믿지 못하는 것이 과연 예언 때문인가, 악몽 때문인가. 귀에 맴도는 환청 때문인가. 아니면.... 아직 스스로도 내리지 못한 답이었다.

예언 때문에... 지금 제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조심하여서는 잃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하여 너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마음 여린 네가 너로 인해 재앙을 맞이했다 아파할까 봐 그것이 아비로서 나의 두려움이다. 그 두려움의 가능성으로부터 너를 지키고 싶기 때문이다. 미처 말로써 만들어지지 못한 생각들이 황제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황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제 무릎을 바라보았다. 무릎을 덮은 치맛자락이 한 방울씩 짙게 물들어갔다.

아바마마께서는.... 저를 지키고 계신 것이 아니라, 죽이고 계신 겁니다.”

고개를 든 황녀의 눈에서 원망과 서러움이 떨어졌다.



+

여러분 저를 매우 치세여.. 최대한 빨리 오겠다고 했으면서 망할 혐생 때무네..... 아직도 과제가 안 끝나서 종강 존,버 하고있는 사람 ㄴㅇㄴ....

[방탄소년단] 적국의 황후 02 | 인스티즈


글에서 나오는 적월초니 소안이니 하는 것들은 아시다시피 존재하지 않는 식물, 마약입니다. 양귀비(아편)랑 거의 흡사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봐주시면 될 거 같아요!

실존하는 식물을 가지고 썼다가 혹시나 잘못된 정보를 전달해 드릴까봐 이름만 대충 바꿨습니당... 저는 쫄보에여웅앵...

그리고 양귀비의 다른 이름 중에 '낭자'가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정훈 캐릭터가 여주를 부르는 호칭으로 어울릴 것 같아서 써먹었습니다. 아는 건 또 써먹어야 제맛..!(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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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작가릠,,보다가 찾아왔습니다 흑흑 !!너무 좋아요!!!!!!
4년 전
독자2
흑흡 너무재밋어여 ㅠㅠ
4년 전
비회원24.155
너무 재밌어요 ㅜㅜ 이 글보려고 왔답니당
4년 전
독자3
꺟 잘보고 있어요💜
4년 전
독자4
다음편이 궁금하네요 기다리겠습디다!
4년 전
비회원127.112
블로그에서 넘어오셨다고 해서 찾아왔어요ㅎㅎ
4년 전
독자5
호아ㅏ... 작가님 저 정주행 중인데 정말 이거 정말
계속 써주실거죠ㅠㅠㅠㅠㅠㅠ 언제까지나 기다릴거에여ㅜㅜㅜ 그러니까 계속 써주시기만 해주세요ㅜㅜㅜㅠ

4년 전
로즈
네네 가능하다면 계속 쓸 예정입니다ㅎㅎ
4년 전
독자6
헐 ㅠㅠㅠㅠㅠㅠ 감사합니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 가능하시길 빌께요ㅠㅠㅠㅠㅠ 감사해요
4년 전
독자7
진짜 넘 재미있어요 최고 ㅠ ㅠ
4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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