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O/루민/변백현] 로맨틱 라디오 : 그 해, 여름 | 인스티즈](http://file2.instiz.net/data/cached_img/upload/1/b/8/1b804c2b66c66ee834df3187d9e291d4.jpg)
[변백현 X 시우민] 로맨틱 라디오 : 그 해, 여름
W. 소년
2006년의 여름.
그 해의 여름엔, 각 학교마다 유난떨었던 친선 경기가 있었다. 정말 굴려먹을 수 있을 때 까지 굴렀던 거 갔다. 보충 수업이고 나발이고 수업이 끝나는 대로 운동장에 모여 다음 경기를 준비하고, 배팅은 하루에 족히 300번은 넘게 한 것 같다. 우연치 않게 결승까지 올라오게 돼 연습량이 두 배로 늘어 부원들의 원성이 극에 달할 때였다. 나 역시도 그랬다. 정말, 때려치우고 싶었다. 학교 옆에는 커다란 종합 운동장이 있었다. 우리 학교만 쓰는 것이 아니라, 근처에 있는 모든 고등학교 학생들이 공동으로 쓰는 그런 운동장. 감독님에게 깨질 대로 깨지고, 욕은 욕대로 먹은 뒤 혼자 연습하기 위해 늦게나마 종합 운동장을 찾았다. 한참 경기 시즌이라 오전에는 연습하는 아이들이 많아 해가 저물 때쯤에야 남들을 신경 안 쓰고 여유롭게 연습 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처음 너를 보았다.
처음 너를 보고 든 생각은… 무척이나 더워 보였다.
하늘색 단가라 맨투맨에 하얀 오부바지를 입은 너는 땀에 젖은 앞머리를 올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거기 혼자 있어?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얼마 안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너를 닮아 키가 작은 아이가 배트를 들고 너에게 걸어왔기 때문이다. 한 다리 건너 고등학교의 대주자다. 이름은 몰랐다. 내가 옆 학교 대주자까지 외울 필요는 없지 않은가.
너는 두 손에 소중하게 꼭 쥐고 있던 야구공을 들고 나왔다. 친구, 연습 시켜 주려나보네. 난 신경 쓰지 않고 배팅에 집중한다. 옆에서 웃는 소리가 들리던 말던, 신경 쓰지 않으려 했는데… 거슬렸다. 원체 혼자 연습하는 것을 좋아했기에. 우리 학교가 이기던 말던, 그건 내 알빠 아니지. 그렇게 연습을 접고 집에 돌아간다. 그날은 유독 8시라고 해도 새벽하늘처럼 푸르른 밤하늘이 예뻤다. 옅게 비춰지는 별들까지. 그 하늘을 보니 너가 입고 있던 맨투맨이 생각났다. 입동굴을 드러내며 친구를 보며 웃는, 너. 흘러 흘러 들려오는 너의 듣기 좋은 목소리에 집에 가는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쟤는 엄청 잘하네… 너도 곧 저렇게 될 거야.
나처럼 되긴 무슨. 대주자가 암만 발 벗고 뛰어봐라. 실력은 타고난 거니깐.
*
2008년의 겨울.
너를 다시 본 것은 반 개월이 훌쩍 흘러 고등학교 입학식.
우리 학교는 운동 종목을 아낌없이 지원, 후원 해주었다. 그곳에서 만난 게 루한이었다. 중학교 때 이름 좀 알렸다는 옆 학교 축구부 주장이다. 친해지는 건 어렵지 않았다. 루한은 성격이 꾸밈없고 생각을 감추지 않았다. 그리고 잘 생겼다. 품이 조금 큰, 아빠 정장 같은 마이를 입고 있는 너를 보고 살짝 웃음이 나왔다. 웃음이 나오는 동시에 그 날의 푸른 하늘이 떠올랐다. 내 머릿속에 여름을 닮은 너. 너의 그 ―대주자― 친구는 나와 같은 야구부에 들었다. 실력은, 뭐.
그나저나 넌 나를 기억이나 할까.
먼 훗날의 얘기지만, 난 아직도 너만 보면 그 옛날의 여름이 생각나.
*
2008년의 여름.
한 사람에게 반하는 건 알 수 있지만,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 사람에게 반하고 또 반하다보면. 어느 순간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나중에야 자각하게 된다. 한번 사랑에 빠지면 지독한 열병을 앓게 된다. 혼자 그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고백하려는 순간이 있고, 정반대로 그 사람과의 감정을 한순간에 정리하려는 순간이 있다. 롤러코스터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 그런 오르락내리락 하는 과정이 거북 할 정로로 힘들었다.
늦은 봄과 초여름의 사이. 춘추복을 입으면 덥고, 하복을 입으면 서늘한. 나는 더위를 잘 타는 편이 아니라 춘추복을 입고 있었던 거 같다. 너는 너와 잘 어울리는 하얀색 하복을 입고 있었고.
평소 노래를 즐겨 듣는 편은 아니었지만, 형의 여자 친구가 생일 선물이라며 형과 함께 mp3를 선물해 주었다. 검정색. 그 해의 유행곡도 빼곡히 넣어서. 시대에는 둔한편이라 나오는 대로 노래를 들었다. 연습이 끝나고 하교하는 길, 2006년의 여름만큼은 아니었지만 아직 초여름이라 그런가 하늘이 8시임에 불구하고 어중간한 색을 띄고 있었다. 나처럼. 새벽하늘에 남색 물감을 군데군데 찍어 바른 것 같은 어중간한. 공부도 야구도 어중간한. 나처럼.
그때 플라시보의 노래가 흘러 나왔다. 그리고 운동장에 있는 너를 보았다. 대주자와 공을 주고받으며 웃고 있는 너를.
내가 너에게 반하는 순간이었다.
*
매번 같은 노래만 듣는 나를 보며 루한은 있는 대로 인상을 구겼지만 얼마 안가 지루한 수업 시간만 되면 자연스레 한쪽 이어폰을 뺐어간다. 참 많이도 들었다. 이 노래를. 너 때문에. 너의 탓은 없다. 그 날 너를 본 이후로 이 노래만 들으면 새벽하늘과 너가 떠올랐다. 좋았다. 이동 수업 시간이면 난 항상 너의 자리에 앉는다. 이런 나의 노력을 너가 알기는 할까?
언제는 mp3를 너의 책상에 두고 온 적이 있었다. 내가 가지고 오려 했지만, 난 그때 코치님과 상담 때문에 급하게 루한에게 부탁을 했었다. 난 친구들이 다 하교한 그 시간에, 너가 교실에 들를 줄 몰랐다. 그리고 나서야 확신하게 되었다. 머릿속을 메우던 뭉친 실타래가 풀리는 그런 기분을. 루한을 보는 너의 시선이 달라졌다.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어제 교실에 mp3두고 가지 말걸. 너가 루한을 좋아한다는데 난 대체 뭘 할 수 있을까. 루한은 영 모르는 것 같지만.
방법은 하나다.
난 그냥 너를 좋아하는 것 밖에는.
지독한 짝사랑의 시작을.
*
2010년의 여름.
야구를 관뒀다. 이제 난 뭘 해야 하나.
아쉽게도 난 형처럼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부모님은 야구를 싫어하셨다.
마지막으로 야구부원들끼리 회식을 했다. 이젠 김민석의 친구도 대주자가 아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날의 하늘은 꼭 2006년의 여름 같았다. 입동굴을 드러내며 환하게 웃는 너.
하늘을 보다 코끝이 시렸다. 눈이 맵다. 눈물이 나온다. 나는 그걸 생각하는 동안 내가 울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다.
너가 정말 보고 싶었다.
*
2010년의 겨울.
루한은 요즘 큰 고민에 빠졌다. 캐스팅 제의가 들어왔다. 반 아이들과 루한의 지인들은 루한을 재촉한다. <루한아 넌 그거밖에 길이 없어.> <넌 딱 연예인이 될 얼굴이야.> <바로 뜨겠네.> 그 시절 고등학생들이 다 그렇듯 루한은 어영부영 대학을 정하는 애들에 속했다. 물론 나 역시도. 루한의 결정에 재촉하진 않았지만, 거들지도 않았다. 그저 루한이 원하는 것을 했으면. 루한은 참 고집 있고 아이 같은 면이 있어서, 결정하는 내내 끊임없이 물어왔다. 다른 친구들의 의견은 묵살하고, 나에게.
-이 길이 맞는 건지 모르겠어.
-나도 그래. 루한.
그냥 루한, 너가 선택하는 길에 후회가 없었으면. 그게 내 바램이야.
*
2011년의 겨울.
너와 같은 대학교에 지원했다. 너가 다른 학교로 갔을까, 신입생 OT때 같은 과가 아님에 불구하고 너의 과에 기웃거리며 너를 찾아다녔다. 수많은 컴퓨터 공학과 남자들 사이로 오렌지색으로 밝게 염색한 너가 보였다. 안심이 되었다. 너 때문에 온 대학, 너가 없으면 정말. 난. 나는 너를 계속 보았지만 너는 날 못 본 거 같다.
대학교에선, 너에게 말이라도 걸 수 있을까.
신입생의 부푼 마음이 아니라, 김민석을 다시 볼 수 있는 부푼 마음으로.
*
2012년의 여름.
루한이 망가져 간다.
*
2015년의 겨울.
이제는 예전의 루한의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루한이, 흘리듯이 물었다.
“너 김민석이라고 아냐?”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루한의 입에서 너의 나온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깐. 난 말을 돌렸다. 되려 모르는 척 했다.
“몰라. 기억이 잘 안 나네. 축구하던 애였던 거 같은데.”
기억이 잘 안 나기는. 매번 학생식당에 너가 있을까, 제일먼저 너를 찾는다. 밥이 맛없다고 투덜거리는 너를 보며 오늘 학식이 어떨지 직감한다. 맛없겠구나. 왜냐하면 너는 웬만한 음식은 다 입에 맞았으니깐. 너를 볼 때면 매번 검은 옷만 입는 남자가 나를 바라본다. 그러면 난, 무언가에 들킨 것 같아 황급히 고개를 돌린다.
루한이 너랑 무슨 말을 했을까.
*
우리 집은 너의 자취방과 꽤 멀었다. 학교와는 멀었지만, 너희 집은 정 반대였다. 그걸 알면서도 빙 돌아가면, 너를 볼 수 있을까. 항상 돌아갔다. 매번 너를 보면서 하고 싶은 말들을 꾹 참는다. 참아 왔는데, 루한이랑 너가 만났다니. 나 역시 무언가를 해야 했다. 그날은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고, 골목 어귀에 너가 보였다. 민석아 미안해.
그 뒤로는 잴 것 없이 뛰었다. 세 개 부딪치면 너가 아플까 부러 너의 팔에 부딪쳤다. 운 좋게도 예상대로 너의 핸드폰은 눈 위에 떨어졌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액정이 안 깨졌다는 거정도?
액정까지 깨졌으면, 더 오래 널 볼 기회가 생기는데.
“그래도 혹시 망가졌을 수도 있으니깐 전화번호 알려줄게요.”
멀쩡한 핸드폰을 보고도 난 되도 않는 핑계를 지껄인다.
“나 원래 전화번호 잘 안 알려줘.”
넌 특이하게도 눈썹을 살짝 구기면서 웃는 버릇이 있다. 어이없어서 웃는 거일지도 모르지만, 난 그 일련의 행동 하나에도 아래가 발딱발딱 선다.
“축제 때 매번 공차드만.”
“봤어요?”
“나도 공차거든.”
혹시 날 알까 물었지만, 역시 넌 날 모르는 듯 했다. 항상 루한과 다투곤 했다. 축구와 야구로. 난 항상 축구를 비하했는데, 이런 내가 매번 축제 때마다 너와 축구를 하기위해 공을 찬다. 김민석 하나 때문에.
그러니깐 민석아. 이런 날 한번만 봐주면 안 될까.
*
나는 너를 보면 핸드폰 얘기부터 꺼냈다. 안타깝게도 너에게 말을 걸 수 있는 건 핸드폰을 제외하곤 없었기 때문에. 그러면 너는 멋쩍게 웃으며 핸드폰을 보여준다. 멀쩡하네. 사실 망가지길 바랬는데. 조금 더 세게 부딪칠걸 그랬나. 그럼 내가 너한테 조금 더 말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친구들과 포차에 가던 중 근처 고기 집에 박찬열이 있다는 말을 듣고 박박 우겨서라도 노선을 바꿨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널 보지 않을까 해서. 예상대로 너와 ―오늘도― 검은 옷을 입은 도경수, 그리고 박찬열이 있었다. 나는 또 다시 핸드폰을 들먹였고, 너는 또 다시 핸드폰을 보여주었다. 주제는 흘러 흘러 여자에 관해 떠들기 시작했다. 너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나 역시 따라 일어났다. 담배 피러 가나보네. 너는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담배를 피곤했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나 역시 담배를 자주 피는 편에 속하진 않았지만, 너와 말하기 위해 친구의 담배를 챙겼다. 역시 핸드폰이 없으면 너와 나는 할 말이 없구나.
새삼 나 자신을 한탄하며 그나마 너와 친해질 수 있는 주제를 입에 올린다.
“여자 얘기 말고. 루한 얘기면 들어줄 거야?”
생각보다 너의 반응은 격했다. 담배피면 몸 상하는데. 물까지 챙겨 줬것만, 너는 루한 얘기에 그 물을 다 뿜어버렸다. 역시 너는 아직도 루한을 많이 좋아하는구나.
서운한 표정이 드러날까 괜히 더 틱틱거렸다. <더럽잖아.> <나한테 분수 보여주고 싶냐?> 물론, 다 진심은 아니었다.
“아직도 진행 중?”
내 목소리가 떨리는걸, 넌 알았을까.
“아니. 대학교 들어온 순간부터 잊는 중.”
새벽하늘을 닮은 아이는 거짓말을 한다.
“오. 깔끔하네.”
그런 하늘이 되지 못한 아이 역시도, 거짓말을 한다.
*
“나 너 고등학교 3년 내내 좋아했어. 물론 지금도 좋아.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다시 보니깐 그러네.”
잊는 중이라며, 민석아.
루한과 통화를 듣고 바쁘게 나가는 너의 모습을 보며 속이 쓰렸다. 조금만 옆을 돌아보면 너 만큼이나 너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말이야,
“민석아. 난 너가 날 그렇게 생각하는 줄 몰랐어.”
생각 외의 대답에 너의 눈이 커진다. 옆에서 지켜보는 나 역시도. 그리고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지만, 도경수의 눈가가 가느다래진다. 너는 루한 앞에서 엉엉 울었다. 아이처럼. 나도 언젠가 너의 앞에서 그렇게 울 날이 있었으면 좋겠다. 너가 내 마음을 알아줘서, 나도 너처럼. 너의 앞에서 행복하게 우는.
민석아. 민석아. 나를 위해 울어줄 수 있는 날이 와줬으면 해.
*
“나다운 게 대체 뭐야.”
참, 루한다운 대답이다. 내가 루한의 곁에 남아있는 특별한 이유는 없다. 돈도, 유세도 딱히 필요 없었다. 세상에 홀로 남은 저 아이는 내가 없으면 이젠 정말 남은 게 없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루한이 제 모습을 감추기 시작한 게. 친구로서, 정말 안쓰러웠다. 혼자 발악하는 루한을, 나 말고 누군가가 알아 줬으면.
그 모습을 알아주는 게, 너라고 해도.
*
김민석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오전 까지만 해도 루한을 만난다며 방방 거리던 애가. 루한을 만난 뒤 밥이나 먹자며 김민석과 대학로에서 꽤 괜찮다던 순대볶음 집에 들렀다. 대학로가 거기서 거기지. 순대볶음은 맛이 없었다. 너는 언제나 맛있게 먹는다. 먹고 있는 너의 표정은 전혀 맛있어 보이지 않았지만.
“루한한테 휘둘리진 마.”
하루가 지겨운 루한은, 그저 너를 시간 때우기로 생각하는 것 같으니깐.
나라면 너와 보내는 하루하루가 너무 소중해서 시간을 붙잡아 두고 싶을 텐데.
“…걱정 해주는 거야?”
너의 대답이 너무 어이없고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너는 나에게 웃음을 주는 사람이다. 그게 루한의 일이라 해도.
“백현아.”
내 이름을 부르는 너의 목소리에 하마터면 사래가 들릴 뻔했다. 물로 체하면 답도 없다던데. 큰일 날 뻔했네.
“너가 보기엔 나 되게 한심하지.”
아니. 전혀. 난 좋아하는 사람한테 말도 못 붙여본 병신이거든. 너처럼 난 당당하지 못해.
오늘도 속으로만 되네인다. 내가 널 많이 좋아해. 널 답도 없이 7년을 좋아했어. 그거보다 더. 이제 8년이 되어가. 그 때, 내가 너에게 mp3를 찾으러 갔더라면. 난 너에게 말이라도 붙여 볼 수 있었을까. 혹시 너가 날 좋아하지 않았을까. 그런 부질없는 말을. 난 오늘도 혼자 속삭인다. 나만 들을 수 있도록.
“너 야구 좋아하냐?”
너가 야구 좋아하는 거, 내가 잘 알거든.
따지고 보면 너나, 나나 축구를 싫어하는 편이었지.
*
너와 함께 처음으로 야구를 보러 왔다. 날을 잘못 잡은 것 일까, 요즘의 너는 너 답지 않았다. 새벽하늘이 검은 하늘로 변해간다. 마치 그 옛날의 루한처럼. 루한에게 연애설이 터졌다. 인기가 인기인만큼 쉽게 전해들을 수 있었다. 너가 웃는다. 억지로. 너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계속 결려오는데, 루한인 것 같았다. 받지도 못하면서 핸드폰을 구명줄처럼 쥐고 있는 게 웃기고, 귀여웠다. 난 김민석의 어떠한 모습도 좋아 할 수밖에 없으니깐.
너랑 줄곧 야구 보러 오는 상상을 하곤 했는데,
이럴 줄 몰랐는데.
“안 받으면 끄던가. 아님 내가 받는다.”
“…네가 왜.”
이런 마음으로 너와 야구를 보는 건 무리였다. 너가 우울하면 나까지 우울하니깐. 너를 보내야했다. 루한이랑 일은 너가 알아서 하겠지. 잘 되던, 안되던.
너는 나에게 미안하다며 자리를 떴다. 너의 눈 끝에 주름이 졌다. 4연승 했으면 좋겠다. 너와 이 경기를 보고 싶었다. 같이, 야구를. 그런데 너는 끝까지, 왜 나를 신경 쓰이게 해. 첫 번째 타자의 파울이 이어지고 난 그대로 너에게 갔다. 작게 떨리는 너의 어깨가 가까워지고, 난 그 어깨를 잡고 돌려세웠다. 얼굴이 붉은 너가 보인다. 너에게 이런 표정을 짓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나였으면.
아니, 나였으면 이렇게 널 두지 않을 텐데.
“얼굴 터지겠네.”
모자를 씌어주자 너는 아랫입술을 물었다. 두 눈에 물이 차오른다. 너를 울리는 루한이 밉다. 너의 작은 어깨를 쓰다듬어주니 크게 숨을 들이킨다. 이대로 두면 정말 울겠네. 내 앞에선 울지 마. 너 울면 장난 아니고, 나도 진짜 무너질 것 같으니깐. 그런 너를 보지 않기 위해 나는 너를 보낸다. 너가 멀어지고 점이 될 때까지 지켜보다 자리로 돌아왔다.
그날의 맥주는 먼 훗날에 생각해도, 썼다. 쓰고 맛이 없었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너 때문에 타들어가는 내 속을 대신 해준 건 아니었을까.
결국 그날의 경기는 3연승에 그치고 말았다.
*
루한과 김민석은 서로를 의식하지 않으며 지냈다. 그렇게 둘은 생각하겠지만, 지켜보는 사람은 아니었다. 사실 조금 기쁜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다. 너가 루한을 잊는다고 했으니. 하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난 너와 루한, 둘 다 좋아하니깐. 그런 둘의 모습을 지켜보는 나 역시도 좋진 않았다. 부모님이 권하셨다. 유학을. 선택권은 없었다. 매번 이렇게 살아온 삶은 나에게 선택권 따위를 주지 않았다.
“김민석 없으니깐 어때.”
난 이제 없으니깐, 너는 행복하길 바라며. 난 너의 웃는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고 싶으니깐.
그게 나를 위한 게 아니더라도.
“허전하고 보고 싶고.”
내 앞에선 영락없는 고등학생을 벗어나지 못한 루한이, 너의 웃음을 찾아 줄 수만 있다면.
“후회되면, 잡으시면 돼요.”
난 어쩌면 루한이 처음으로 진심을 말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생각해왔을지도 모른다. 너에게 루한이 진심을 말하기를. 혼자선 아무것도 못하는 소년인 루한은, 내가 없으면… 너라도 루한의 곁에 남아 주길.
“안가면 안 되는 거지.”
알면서 물어보는 루한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여기서 부턴 내가 빠져줄 타이밍이다. 나머진 루한이 알아서 하겠지. 넌 그냥 진심을 말하는 루한을 받아주기만 하면 된다. 그래야, 내가.
내가…
*
마지막으로 친구들과 술자리를 가졌다. 너와 루한은 부르지 않았다. 요즘 너와 루한은 좋아 보였다. 다행이야. 내가 마지막으로 보는 너의 얼굴이 웃는 얼굴이어서. 오전부터 몇 시간을 놀고 몇 차까지 갔는지, 술이 쉴 새 없이 들어갔다. 시간이 꽤 늦어지고 하나둘씩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너의 친구가 왔다. 도경수. 박찬열과 둘이 있던 와중에 찾아온 게 너의 친구였다. 그렇게 친하진 않지만, 찬열이 자리를 뜨고 둘만 남았다. 오고가는 말은 없었다. 그저 술잔이 비면 채워지길 반복할 뿐.
사실 나에게 마지막으로 찾아오는 사람이 너이길 바랬다.
그저, 바램일 뿐일까.
“김민석은.”
“…….”
“만나고가.”
찬열이 자리를 뜨고 도경수에게 실없는 말만 일방적으로 하던 중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도경수의 눈은 흔들림 없이 올곧았다. 너의 이름 하나에도 난 이렇게 오락가락하는데, 너는 아니겠지.
“…축구가 좋냐? 야구가 좋냐?”
“둘 다 싫어.”
도경수 다운 대답이다. 도경수의 입에서 너의 이름이 나온 순간부터, 기분이 이상했다. 서럽고, 화나고, 기쁘고, 난 정말 뭐하는 새끼지. 복합적인 감정에 피실 피실 웃음만 나온다.
아니야. 김민석은 야구를 더 좋아해. 끊임없이 되네였다. 도경수가 듣지 못할 말들을. 누군가 들어줬으면 하고.
“너한테만 말하는 건데…”
술은 가끔 속에 있던 말들을 나오게 한다. 그래서 취중 진담이 무서운 것이다. 가볍고도 무거운. 가슴 속에서 묻어 두고만 있던, 그 말을. 제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를 만큼. 가슴속에 있던 무게들을 덜어낸다. 어쩌면 상대가 도경수라 나왔는지도 모른다. 혹은, 누군가가 알아주었으면 하고.
사실 너가 루한에게 처음으로 울면서 진심을 토해내던 순간부터 도경수는 알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고.
처음으로 말해본다. 누군가에게.
이 상황에도 너가 내 진심을 들어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이런 내가 이기적인 걸까.
*
아침부터 도경수의 부름에 부랴부랴 나갔다. 이유는 몰랐지만 그냥 나오라기에 나왔다. 도경수가 날 부른 적은 처음이니깐. 도경수는 다짜고짜 나에게 족발을 넘기고 너의 집으로 갔다. 도어락을 누르는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놀랐다. 곧 잠에서 덜 깬 너의 모습이 보였다. 오른쪽 머리가 살짝 떠오른 게 귀여워서 흠, 헛기침을 했다. 웃음이 나올 거 같아서.
“백현아 너 유학 간다며.”
“엉.”
루한에게 들었나보다. 괜히 너와 유학에 관해 얘기하기 싫어 채널을 돌리며 딴청을 피웠다. 우연히 티비에 루한이 나오기에 채널을 멈췄다. 너의 표정이 살짝 굳는다. 오늘 아침에도 루한과 있었으려나.
“쌀 사러가. 밥 없잖아.”
“나 햇반 살 건데?”
내 어깨를 쥐고 일어난 도경수는 먹은 족발을 치우는 박찬열과 변백현에게 걸어갔다. 쥐어진 어깨에 힘이 실렸다. 웃음이 나왔다. 도경수가 왜 김민석 친구인지, 이제야 알 것 같다. 마트 방향과 우리 집 방향은 같다. 넌 마트에 가는 내내 내 눈치를 본다. 사실 너가 집에 나온 순간부터 속이 일렁였다. 바다 한가운데 빠져 파도를 만난 것처럼. 그 옛날의 김민석과 마주하는, 그런 기분을. 너는 알긴 할까. 사실 속으로 살짝 원망하기도 했다. 왜 어째서 그 옷이 아직도 있는 거야. 마트에 간다며 윗옷을 갈아입고 나온 너를 본 순간부터, 그 새벽하늘을 닮은 하늘색 맨투맨을 다시 본 순간부터. 간신히 고이 접어둔 마음이 선을 넘어 넘쳐 오르려 한다. 이러면 안 되는데, 안되는데.
소매가 늘어난 그 맨투맨 소매가 시야에 들어온다. 그때도 작았지만, 고등학생 때라도 별반 다르지 않았던 넌. 아직도 그때의 맨투맨이 잘 맞았고, 잘 어울렸다.
카트에 들어가는 너의 것들을 보며 골이 아팠다. 이런 걸 먹으니깐 그렇게 마르지. 결국 내가 담아주었다. 너가 먹었으면 하는 것들을. 하나씩 카트에 찰 때마다 너는 울상을 지었다. 다 못 먹는다며. 부러 무시했다. 이젠 내가 챙겨줄 수 없으니깐. 루한이 알아서 하겠지. 아님 루한 집에 데리고 살던가.
일단 그건, 내가 간 뒤에 일이고.
“나 오면 야구 보러 가자.”
“당연하지. 오면 나한테 제일 먼저 연락해.”
그때는 그런 얼굴로 야구 보지 마. 그때는, 정말 웃으면서 너와 야구를 보고 싶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그리고 온전히 나에게 집중했으면, 작게 바래본다.
“넌 여름이 좋냐? 겨울이 좋냐?”
너에게 물어보면서 간신히 떨리는 목소리를 감췄다. 들켰나?
“나?”
너가 대답하기를 기다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혀가 말랐다. 1초가 1시간 같은 느낌이 든다. 나는 왜 이런 시덥지 않은 질문에 긴장을 할까.
그건 아마도,
“…여름?”
긴장이 탁 푸리는 기분과 함께 웃음이 샜다. 너가 여름을 좋아한다. 여름을. 두 눈이 시큰거렸다. 목이 달아오른다. 더 이상은 안 될 것 같아 고개를 돌리려던 타이밍에 너에게 전화가 왔다. 다행이다. 이상하게 눈물이 나왔다. 억지로 참았지만 비집고 흘러나오는 걸 막을 순 없었다. 사람들이 쳐다볼까 딸기 상자에 시선을 두었다. 딸기 두 팩을 들고 어떤 게 더 좋은지 흐려서 안보였지만 개중 괜찮은 걸로 담았다. 진짜, 지랄 맞게 이 타이밍에 왜 눈물이 나오는 걸까.
너에게 바라는 게 수백 가지, 이루어진 건 아직 없지만 하나만은 꼭 간절히 바래본다.
겨울이면 루한을 생각해도, 김민석의 여름엔 내가 있기를.
그 여름의 남색 물감을 푼 하늘을, 김민석도 기억하길.
통화를 마친 나를 보며 웃으며 다가온다. 나는 서둘러 눈물 자국을 지웠다. 순간, 그날의 웃는 너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하나도 변한 게 없는 너. 너의 웃는 모습이 좋다. 내가 만들어줄 수 없는 너의 웃는 모습을, 이제야 되돌려준 것 같아 좋았다. 도경수에겐 미안하지만 이 웃음을 지켜주고 싶었다. 난 김민석에게 늘 그런 것만 해주고 싶은 사람이니깐.
그러니깐, 내가 다시 오면. 지금처럼 웃으며 날 반겨주길.
간절히 기도한다.
내가 선물한 그 웃음을, 내가 없어도 루한이 지켜 줄 테니깐.
그날, 집에 돌아가는 내내 여름의 푸르른 밤하늘이 떠올랐다. 그 하늘 아래는 웃고 있는 너가 있었다. 하늘이 밝아 살짝 비춰지는 별을 눈에 박은 너가, 나를 보며 손짓했다.
백현아, 백현아.
너가 내 이름을 불러주었다.
*
마지막으로 떠나기 전, 아쉬운 마음에 공항을 둘러봤지만 보이는 건 검은 모자를 푹 눌러쓴 잠을 얼굴에 붙인 도경수만 보였다. 두 눈이 졸렵지만 제 주인을 닮아 고집스럽게 버티고 있다. 루한과 너는 만나지 않았다. 만나면, 정말 떠나기 싫을 거 같아서. 매번 집요하게 물어댄 도경수는 기어이 출국 날짜를 알아내 이렇게 배웅을 하고 있다. 어울리지 않게.
사실 고맙기도 했다. 마지막에 혼자 떠나는 건 좀 그렇잖아.
“언제가게.”
“곧.”
“전화해.”
“누구.”
“김민석.”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했지만 도경수는 팔짱까지 끼며 큰 눈을 도르륵 굴렸다. 그렇게 티가 났나, 핸드폰만 만지는 내가 답답했던 건지 도경수는 머리를 쓸어 올리곤 내 핸드폰을 가로채 김민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시 건네받은 휴대폰에 긴 연결 음이 흐른다. 크게 숨을 들이켰다. 마지막이기에.
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게, 마지막이니깐.
“여보세요?”
잠에 취한 너의 목소리가 들렸다. 짜증이 그득한 목소리다.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그 무엇보다도 너가 보고 싶다.
“여보세요?”
다시 한 번 너가 물었다. 난,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렇게 전화가 끊길까봐. 말을 하면 되는데, 왜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할까. 결국, 난 용기내서 겨우 입을 연다. 바라보고 있는 도경수의 눈이 무섭기도 했다.
“…잘 지내.”
“응…?”
잠투정인지 모를 웅얼거림이 들려왔다. 귀가 달아오른다.
“루한이랑 잘 지내고, 다시 돌아오면 반겨줘. 할 말이 없네. 잘 지내라는 것 밖에는.”
“…….”
“나 이제 가. 민석아.”
“…변백현?”
“나도 겨울보다, …여름이 좋아.”
목이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로 짙은 숨소리가 들린다. 더 이상은 안 될 것 같아 통화를 끝냈다. 또 전화가 걸려올까 전원까지 껐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울면 안 되는데. 진짜, 흠흠, 목을 다듬었다. 크게 숨을 들이켜니 일렁이는 마음이 조금 나아졌다. 나아 져야만 한다. 어느새 다가온 도경수가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렇게, 터졌다. 기폭제처럼.
너를 향한 내 마음이.
눈물이 나왔다. 시야가 흐려지고 볼이 뜨거워졌다. 눈물인지 모를 것들이 도경수의 어깨에 젖어든다. 결국 난 끝까지 말하지 못했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고. 변백현이 김민석을 좋아한다고. 한번만 알아주길 바랬다. 7년 동안 미련하게 좋아하기만 하는 사람은, 너가 아니라. 나라고. 나도 너 앞에서 이렇게 울어보고 싶었다. 좋아해. 좋아한다. 너를. 민석아, 민석아.
나는 너의 이름을 말하며 울었다. 아이처럼. 이제 너를 못 본다는 생각에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다시 너를 보았을 땐, 너가 웃고 있기를. 지금처럼. 난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깐. 너가 지금처럼만 행복하길.
민석아, 김민석아.
나의 푸르른 여름을 닮은, 너는 내 전부야.
그러니깐, 너의 여름에도 내가 존재하길.
간절히 바래본다.
2006년의 여름, 그 옛날의 여름에 내가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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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다는 걸 좋아하진 않지만 이 글은 변백현 번외부터 생각해두고 쓴 글입니당. 구상도 작년에 해둔 글이고.. 한참 변백현이 힘든 시기요.
이런 변백현도 보고 싶은 마음에 번외는 뺄 수 없었어요. 사실 마지막에 넣으려다가 이 순서가 맞는 거 같아 마지막 전에 올립니다
저는 변백현만 보면 탁한 회색하고 새벽하늘 색이 떠올라여 이유는 없고 여름도. 그래서 비지엠도 여름, 밤 입니당
다음이 정말 마지막 항상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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