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냥냥이와 댕댕이 ]
# 벼랑 끝의 후회공
" ... "
" ... "
" ... "
" ... "
지금으로부터 며칠 전.
석진이 외국으로 떠나고 여주가 이삿짐을 처음 들인 날, 쉐어하우스에서는 환영식이 있었다.
처음 입주하는 하메를 환영해주는 의례적인 행사. 하지만 제 앞에 앉은 하메들은 저마다 다른 곳을 응시하며 입을 굳게 닫고 있었다.
작업때문에 미팅하러 나간 윤기와 조금 늦는다고 했던 호석이 빠진 넷만의 자리는 그야말로 침묵의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윤기 말마따나 한 살 많은 남준은 분위기를 잘 이끌어주는 타입이고 갓 스무살인 지민과 태형은 깨발랄한 분위기 메이커랬는데...
식탁 위에 한 상 거하게 차려진 배달음식들 사이 파리들이 지나가는 소리까지 들릴 만큼 엄청난 정적이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여주는 뭔가 말을 해보려고 입을 열었다.
" 이거 어디에서 시킨 거에요? 엄청 맛있어보인다. "
" 배민이요. "
" 아...단골집이에요? "
" 아뇨. "
" 아... "
시발...
말을 더 이을 껀덕지조차 없게 끊어버리는 지민의 대답으로 인해 분위기는 한층 더 가라앉았다.
그 때 태형이 먼저 입을 열었다.
" 누나는 여기 왜 들어왔어요? "
" ...네? "
" 아니. 우리 쉐하가 혼성이긴 한데 보통 구남친 있는덴 안들어오잖아요. "
초장부터 굳이 꺼내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를 태형이 물어왔다.
보통 이 정도로 노골적이면 말릴 법도 한데 옆의 남준과 지민은 그저 입을 다문 채 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 어...그렇긴 한데 2학기라 집 구하기도 힘들고. "
" 다른데 소개시켜줄까요? "
이번엔 지민이었다.
숨 쉴 틈을 주지 않았다.
" 벌써 계약까지 했구...돈까지 넣어서. "
" 그거야 저희가 도와주면 되죠. "
" ... "
" 여기 인기 많아서 금방 빠지거든요. 석진이형 후배 끌고 올 수도 있고. "
" ...나 여기 있는 거 싫어? "
여주는 아차싶었다. 너무 노골적으로 나가줬으면 좋겠다는 분위기를 뿜뿜 풍기는 지민과 태형의 말에 괜히 울컥해서 필터링도 없이 내뱉어버렸다.
제 말에 둘은 잠시 당황하더니 눈빛을 교환했다. 사이 남준이 치고 들어왔다.
" 그런 건 아닌데. 걱정되서 그래. "
" ... "
" 윤기가 더 힘들까봐. "
남준은 지민태형과 달리 사적인 감정이 별로 섞이지 않은 담담한 말투로 말을 건넸다.
하지만 그 속에서 여주는 느낄 수 있었다. 윤기를 너무나도 아끼는 사람이란 사실을.
그게 고맙기도 하면서 한 편으로는 서글펐다. 이 공간에선 제 편이 단 한 명도 없었다.
" 윤기가 하도 부탁을 해서 알았다고는 했는데 사실 그렇잖아. 너네가 아무리 오래된 친구라곤 해도 사귀었던 사이고. 윤기는 그것때문에 힘들어한 애고. "
" ... "
" 너도 지금 윤기처럼 친구로 대할 수 있는 거면 괜찮아. 미련가지고 있는 것만 아니면. "
"... "
" 그런 거 아니지? "
남준은 마지막 물음에 힘을 주며 눈을 맞췄다.
여주는 그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눈동자를 정처없이 움직였다.
남준의 가늘게 늘어지는 눈빛이 다 알고있다는 듯 비수를 꽂는 것 같았다.
그 때 익숙한 목소리가 숨막힌 분위기를 깼다.
" 형, 그러다 애 뚫리겠어요 "
동아리 회식때문에 조금 늦는다던 호석이 현관에서 들어오고 있었다.
살았다...!! 여주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낯선 술자리에서 호석의 존재는 그야말로 구원과도 같았다. 호석 근처에만 있으면 좀처럼 어울리지 못하는 여주도 적당히 묻어갈 수 있었다.
호석은 자연스럽게 들어와 여주의 옆에 앉아 어깨를 감싸곤 남준에게 말했다.
" 얘 그런 애 아니에요. 윤기 힘든거 세상에서 제일 못보는 앤데, 얘가. "
호석이 자리에 앉자 쉐어하우스의 무거운 공기가 순식간에 환기됐다.
시종일관 미간을 좁히고 있던 지민도, 뾰루퉁하게 바라보던 태형도, 저를 빤히 꿰뚫어보던 남준도 호석의 등장에 모두 환해졌다.
호석이 자기를 믿으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여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모습에 셋도 탐탁치는 않지만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호석은 그런 사람이었다. 어디서든 마냥 환하고 모두를 스며들게 만드는.
" 그럼 다행이고. 늦는다며. 일찍 왔네. "
" 다 피곤해가지고 1차만 하고 왔어요. "
" 오늘도 형이 동아리 사람들 다 챙겼죠. "
" 어어. 그렇지 뭐. 걔넨 워낙 손이 많이 가는 애들이라. "
" 칫, 맨날 형만 챙겨. "
태형이 아랫입술을 쭉 내밀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예상은 했지만 호석은 아직까지도 술자리 끝까지 남아서 사람들을 챙기는 모양이었다. 하여간, 그 다정함이 어디가진 않을테지.
가까이 붙어 앉은 호석에게서 술냄새가 살짝 났다. 또 못빼고 사람들한테 맞춰서 마셔준 모양이었다.
여주는 고개를 들어 호석에게 물었다.
" 또 맞춰서 마셔줬어? "
" 조금. "
호석이 눈을 찡긋하며 웃어줬다. 그 눈이 살짝 풀린 것 같아 걱정됐다.
원체 술이 약한 호석은 새내기 때 선배들 사이에 껴서 빼지도 못하고 마시다 완전히 취해도, 그 자리에 있는 동기들은 끝까지 챙기고 쓰러지기 일쑤였다.
윤기가 그런 호석을 들쳐업고 오면 온갖 숙취해소제를 챙겨주는 건 여주의 몫이었다. 윤기의 등에 업혀 쉐어하우스에 가는 호석이 여주는 내내 걱정이었다.
이제는 학년도 올라서 그런 일이 없는 줄 알았더니 여주 모르게 또 그런 미련한 짓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여주는 속도 모르고 웃고 있는 호석의 가슴을 아프지 않게 쳤다.
호석은 셋의 말에 대꾸하면서 감싸고 있는 어깨의 손에 더 힘을 줬다. 괜찮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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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헤에...취한다아...우리 여친 보고싶다아... "
다들 술이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평소엔 보이지 않던 모습들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까는 그렇게 까칠하고 예민하게 굴던 지민은 세상 사랑꾼이 되어서 계속해서 여친을 부르고 있었다.
째깐한 게 죽고 못사는 여자친구가 있는 모양이었다. 저렇게 푼수떼기가 자기한텐 왜 그렇게 못되게 구는 지, 여주는 자기가 미움을 받아도 단단히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준은 이미 취해서 자겠다며 방에 들어간 지 오래였고 태형은 지민에게 착 달라붙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유난히 길게 느껴진 술자리의 끝이 보였다.
" 우리 지민이 태형이, 얼른 방에 들어가서 자자. "
" 에에...형 저 더 마실 수 있눈데... "
" 그건 내일 니 여친이랑 더 마시고, 일어나. 태형이도 얼른. "
호석이 양쪽 팔에 둘을 끼고 방으로 향했다.
여주쪽으로 오는 술은 족족 호석이 받아 마셨기에 여주는 전혀 취하지 않은 상태였다.
다들 취했는데 혼자만 정신이 너무 말짱해서 무안하기까지 했다. 여주는 둘을 끌고가는 호석의 뒷모습을 보다가 너저분해진 식탁을 치우기 위해 일어섰다. 아무래도 남자만 넷이라서 시킨 음식의 양이 어마어마했다. 마지막엔 다들 취해서 술까지 쏟는 바람에 엉망이었다.
" 냅둬. 내가 치울게. "
쏟은 술을 일단 닦으려고 행주를 찾고 있는데 뒤에서 호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돌아보니 호석이 식탁 앞에 서 있었다.
호석의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처음부터 술을 마신 상태였는데 또 여기서도 맞춰주느라 마시고 제 술잔까지 받아마셨으니 말짱할리가 없었다.
" 너 취했잖아. 내가 치울테니까 들어가. "
" 아냐. 내가 뭘 ㅊ, "
거기까지 말하던 호석이 갑자기 휘청였다. 여주가 급하게 달려가 호석을 붙들었다.
가깝게 마주한 호석의 이마에서는 식은땀까지 나고 있었다.
" 취했잖아. 너. "
" ...그런가보다. "
호석은 반쯤 감긴 눈으로 방긋 웃더니 여주에게 완전히 안겨왔다.
술 냄새와 호석의 과일향 향수냄새가 섞여 여주의 후각을 덮쳐왔다.
지민과 태형을 끌고 갈 때는 멀쩡해보이더니, 다리까지 풀린 게 취해도 단단히 취한 것 같았다.
" 여주야. 나 방 좀 데려다 주라. "
명백한 어리광이었다.
마치 주인님 손길에 목마른 강아지처럼, 호석은 가끔 이런 식으로 제게 어리광을 부렸다.
평소에 애교는 부려도 절대로 누군가에게 어리광 피우는 법이 없는 호석은 가끔 과하게 취했을 때 무장해제되는 것 같았다.
여주는 그럴 때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애들이 걱정됐다. 자기야 익숙하니 착각하는 법이 없지만 분명 다른 사람들은 호석이 자길 좋아한다고 착각할 수도 있는 부분이었다.
고등학교때도 몇몇 여자애들이 호석에게 연심을 품었다가 상처받는 광경들을 여러번 목격했던 여주였기에, 다음에는 호석에게 단단히 이야기를 해둬야 겠다고 생각했다. 호석이 자신 앞에서만 무장해제된다는 사실을 여주는 몰랐다.
여주는 한숨을 쉬면서 품에 안겨온 호석을 방으로 이끌었다.
문을 열자마자 알록달록한 원색 소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참으로 호석스러운 인테리어였다. 무채색으로 가득한 윤기의 방과는 확연히 달랐다.
분명 금녀의 구역이었지만 여주는 별 감흥이 없었다. 이상야릇한 분위기가 생기기엔 너무나도 사심 없는 사이였다. 윤기와는 달리.
여주는 호석을 침대에 던지듯 눕히고, 그 옆에 잠시 걸터앉았다. 그대로 잠들기에 호석의 옷이 너무 불편해보였으니까.
안에 반팔티를 입은 걸 확인했으니 후드티를 벗기면 됐다. 여주는 허리춤의 후드티 시보리를 잡고 그대로 위로 올렸다.
말랐지만 단단한 호석의 몸이 느껴져 순간 흠칫했지만 금방 잡념을 몰아내고 팔쪽을 빼려던 찰나, 얌전히 감고있던 호석의 눈이 떠졌다.
" ...덮치게? "
별안간 불경스러운 말을 내뱉는 호석에게 소스라치게 놀란 여주는 그대로 중심을 잃고 그 위로 엎어졌다.
코와 코 끝이 닿을 거리에서 마주한 호석의 눈이 새삼 야했다. 이런 눈을 하는 애였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여주는 소름이 돋았다.
민윤기에 대한 육욕이 여기까지 미쳤나.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빠르게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호석의 단단한 팔이 여주의 등을 감아왔다.
피하지 않고 내내 반쯤 감긴 눈으로 저를 내려다보던 호석이 입을 열었다.
" 윤기때문에 여기 들어온 거 맞지. "
예상치도 못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아까 하메 삼인방 앞에서완 달리 여주는 호석 앞에서 솔직할 수 있었다. 그래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윤기 좋아해? "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마주한 호석의 눈이 한층 더 깊어졌다.
" 여기 사람들이 가만두지 않을 걸. "
" 어. 그러니까 네가 도와주라. "
" ... "
" 여기 내 편이 아무도 없어. 그러니까 네가 내 편 좀 해주라. "
절박한 진심이 튀어나왔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긴 했지만, 아까 술자리에서 받았던 하메들의 눈칫밥은 다 감안했던 여주에게도 꽤나 서러운 것이었다.
윤기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편은 오직 자신이라고 생각해온 여주였다.자신이 그랬으니까. 세상에서 가장 의지할 수 있는, 언제 어디서나 내 편일 사람은 오직 윤기뿐이었던 여주였으니까.
하지만 이렇게도 윤기를 아끼는 사람들이 가득한 곳이었다. 윤기는 자신이 없는 곳에서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온 세상이 윤기뿐이었던 여주와는 달리.
그래서 여주는 지금 이 순간 호석이 제 편이 되어주길 간절히 바랐다.
자신을 이렇게 싫어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래도 한 명은 제 손을 잡아줄 사람이 되어주길 바랐다.
" ...싫어. "
하지만 여주의 기대와 달리 호석은 메마르게 대답을 돌려줬다. 정말 여지없이.
" 다시 잘되는 거 싫어. 안도와줄 거야. "
" ...정호석. "
" 내가 제일 열심히 방해할 거야. "
호석은 그 말을 끝으로 잠에 빠져들었다.
여주는 그 품 위에서 한참을 절망에 빠져있었다.
# 친애하는 방해자
" 당근 소개팅 가야지. "
정호석은 정말 자신의 말을 잘 지키는 아이였다.
제게 차갑게 구는 다른 하메들보다 훨씬 더 집요하게 윤기와의 사이를 방해했다.
호석은 빠르게 여주 옆에 비집고 들어와 앉은 채 어깨를 감쌌다. 여주가 질린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자 빙긋 웃었다. 빌어먹게도 아주 예쁘게.
" 너 지난번에 소개팅도 안갔잖아. 이번엔 가줘야지. "
" 뭐 그렇긴 한데. "
" 옷 기가 막히게 잘어울리네. 다녀와, 다녀와. "
심드렁한 윤기에게 호석은 계속해서 바람을 넣고 있었다.
" 그거 옆학교 무용과라며. 거기 예쁜 애들 많기로 완전 유명해. "
" 그러냐. "
" 향수도 뿌렸네, 새끼. 진짜 소개팅 가고 싶었나보다. 그치 여주야. "
돌연 저에게 고개를 돌려 동의를 구하는 호석의 얼굴엔 말간 미소가 걸려있었다. 망할 놈...!!!
쉽게 답할 수가 없어서 여주는 시선을 피한 채 그러게, 작게 말했다.
그 소리에 윤기의 어깨가 움찔했다.
" 두시라며. 지금 나가야 안늦겠네. "
" ...어. "
" 가보고 영 아니다 싶으면 안만나면 되잖아. 얼른 가봐. "
" ... "
호석의 등쌀에 못이긴 윤기가 일어나 여주쪽을 잠시 바라봤다.
제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있는 여주가 어쩐지 신경쓰였지만 윤기는 호석이 이끄는 대로 문을 나섰다.
여주는 윤기쪽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가지말라고 한 마디도 못하는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져서 당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윤기를 문 밖으로 내보내고 빠르게 돌아와 제 곁에 앉은 호석도 쳐다보지 못했다. 제 마음을 다 알고 있으면서, 호석은 너무 못되게 방해하고 있었다.
" 화났어? "
호석의 말투가 너무나도 다정했다.
결국 제 편이 아니면서. 결국 자기도 윤기를 더 아끼면서.
" 갖고 노니까 좋냐. "
" ... "
" 너 진짜 못됐어. "
여주는 자리를 박차고 거실을 벗어났다. 사이 스친 호석의 짙은 눈따위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여주는 몰아치는 감정들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호석이 너무 못돼서 미우면서도 한 편으로는 그 다정한 목소리가 제 감정을 녹였으니까.
여주는 호석을 아주 미워할 수 없었다. 여주에게 호석은, 그런 사람이니까.
# 어떤, 무게
사실 여주의 머릿 속에서 처음 기억된 호석은 중학교 3학년때부터였다.
" 전교회장 후보 기호1번 정호석입니다! 한 번만 뽑아줘잉 ღ "
온 몸에 1번 스티커를 덕지덕지 붙이고 전교회장에 출마한 후보 1번. 선거철 즈음 반을 돌며 뽑아달라고 온갖 애교를 부리던 애.
소름돋을 만큼 필사적으로 애교를 부리는 게 여주는 좀 속이 울렁거렸는데, 의외로 아이들 반응이 꽤나 좋았었더랬다.
기호 2번이 와서 저럴 때는 분위기가 쎄하더니. 여주는 몰랐지만 호석은 동급생 사이에서 자주 이름이 언급되는 인싸였다.
착한 애. 잘 웃는 애. 다정다감한 애. 잘 챙겨주는 애. 이쁜 말만 골라서 하는 애.
좋은 평판이란 평판은 다 달고 다니는 호석이 여주는 신기했다. 애들 말마따나 넉넉한 집에서 부족함없이 사랑만 받고 자란 사랑둥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아이였다.
접점이라곤 윤기밖에 없는 자신마저 윤기가 없을 땐 챙겨주고 먼저 말을 건네와줬으니까.
호석은 사람을 참 좋아하는 애 같았다. 내성적이어서 많은 사람들과 접하는 걸 딱 질색하는 윤기에 비해 호석은 먼저 많은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고, 뒤늦게 들어가도 어디서든 잘 스며드는 아이였다.
가끔은 사람만 보면 방긋방긋 웃는 호석이 마치 사람만 보면 좋아죽는 강아지들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옆반에 윤기의 오래된 친구가 있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게 호석이란 걸 명확히 알게 된 건 그때 즈음이었다.
아마 윤기 보면서 몇 번 스치고 인사도 받았던 것 같긴 한데. 여주는 딱히 관심이 없었기에 그 이름을 기억하지 않았다.
" 여주야! 나 알지? 윤기친구 호석이. "
항상 먼저 인사를 건네오는 쪽은 호석이었다.
매번 흐린 눈으로 가물가물한 기억 속을 더듬는 여주에게 '윤기친구'라는 수식어를 꼭 붙이면서.
여주가 먼저 '호석아'라고 부르는 일은 딱히 없었다. 잊을만 하면 먼저 '여주야'라고 말을 걸어주던 호석이었다.
여주가 정작 부를 때는 귀찮다며 안오더니 자기 마음이 내키면 다가와서 안겨오는 윤기가 고양이같았다면, 호석은 여주가 있는 곳마다 얼굴을 내밀며 달려오는 강아지같았달까.
여주도 그런 호석이 부담스러울 때도 있긴 했지만 싫어하진 않았다. 물론, 무게의 정도가 윤기에 비하면 한참 가볍긴 했지만.
[ 윤기야 공부중? ] 8:30am
[ㅇㅇ] 3:20pm
고등학교 3학년. 더이상 학교에선 음악공부를 할 수 없다며 자퇴한 윤기는 연락이 뜸했다.
여주도 나름 입시준비로 바쁜 와중이라 학교 외에 윤기를 볼 시간이 없었기에 드문 연락이 속상하기도 했다. 먼저 카톡을 하면 꼭 몇시간은 있다가 답장이 되돌아왔다.
매일 일상 속에 스며들어있던 윤기가 없으니 여주에게 학교는 하기 싫은 숙제같았다. 매일 등하교를 함께하던 사람이 없으니 괜시리 외롭기까지 했다.
그때쯤 텅 비어버린 여주의 일상 속에 호석이 들어왔다.
" 여주야, 같이 학교가자! "
호석은 신기하게도 윤기의 빈 자리를 꼭꼭 채워줬다. 매일 아침 함께 등교하려 제 집앞을 찾아오고, 점심시간이면 많은 친구들도 마다하고 저와 밥을 먹고 학교뒷뜰에 나가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워낙 주변에 아이들이 많은데다가, 고등학교에서도 전교회장을 맡은 호석이기에 윤기만큼 둘만의 시간이 오롯이 지속되진 않았지만 호석의 타고난 친화력으로 인해 여주는 그 주변 친구들과도 친해졌다.
윤기가 함께하던 학창시절은 모든 시간이 윤기를 중심으로 돌아갔다면 호석과 함께하는 1년은 여주를 중심으로 호석과 그의 친구들로 채워진 시간들이었다.
종종 호석의 높은 텐션을 감당하기 버거울 때도 있었지만, 여주는 호석과 함께하는 크고 작은 소란들이 재미있었다. 언제부턴가 뜸한 윤기의 연락이 신경쓰이지 않을 만큼.
" 호석아, 이것 좀 도와줄 수 있어? "
" 당근이지. 대신 다음에 떡볶이 한 번 쏘기. "
하지만 여주가 보기에 호석은 착함의 정도를 넘어서서, 호구에 가까웠다.
원체 거절하는 법이 없는 호석이었기에 몇몇 아이들은 그에게 과한 요구를 해왔다.
이런 저런 부탁들이 많았지만, 특히 제 일까지 떠넘겨 그 일을 호석이 마무리 짓게 하는 건 지켜보는 여주 입장에서는 너무 화가 나는 일이었다.
매번 호석은 그들에게 환한 웃음을 돌려줬다. 나중에 맛있는 거 사라면서. 하지만 그들은 단 한 번도 호석에게 밥 한 끼 대접한 적도 없었다.
여주는 단단히 벼르고 있다가 호석과 단 둘이 하교하는 날, 속에 꾹꾹 담아뒀던 말을 하기로 결심했다.
" 호석아. 너 너무 애들한테 다 퍼주지마. "
" 어? "
" 네가 너무 다 받아주니까 애들이 만만하게 보고 과한 것까지 시키잖아. "
" ... "
" 그런 애들은 친구도 아니야. 그니까 적당히, "
" 안하면 버려질 걸. "
처음 듣는 호석의 낮은 목소리였다.
매번 방긋방긋 웃어주던 호석의 얼굴에선 처연한 어둠만이 깔려있었다.
" 애들이 나 좋아해주는 거, 내가 모든 부탁 잘 들어주고 착하게 구는 것 때문이잖아. "
" ... "
" 내가 싫다고 거절하면 걔넨 날 버릴 거야."
호석은 다음 말에 망설이듯 잠시 뜸을 들였다.
" 버려지는 것보단 내가 좀 더 참는 게 나아. "
호석의 눈에는 여주가 헤아릴 수 없는 싶은 슬픔이 가득 차 있었다.
여주는 당혹스러웠다. 왜 저 눈이 가슴에 하나하나 맺혀서 공연히 자기까지 슬퍼지는지 몰랐다.
" 그런게 어딨어. 애들은 그냥 너 자체로 좋아하는 거야. "
" ... "
" 널 왜 버려. 걔네가 뭔데. "
여주는 그 눈을 위로하고 싶었다. 되는대로 뱉었지만, 진심이었다. 정호석 그 자체로 사랑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을 지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여주의 진심과는 달리 호석은 그 눈을 빤히 보더니 작게 웃었다. 마치 제 스스로 상처를 내는 것처럼, 그렇게 웃었다.
곧 호석은 미소를 지우곤 여주를 향해 말했다.
" ...너도 그럴 거잖아. "
" 뭐? "
" 너도 민윤기 돌아오면 "
" 나 버릴거잖아. "
다 알고 있다는 듯 초연하게 시선을 던지는 호석에게 여주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초연함에 지금껏 꾹 눌러두었던 상처들의 틈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여주는 그 틈을 파고 들어갈 용기가 없었다.
호석은 여주에게 그 만큼의 무게를 가진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___
또 써버렸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예...사실 생각없이 쓰고 싶은 대로 쓰다보니 편하긴 하네요...어우 호석이짤 찾는데 호석이도 너무 예쁘고...
여튼,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모쪼록 여러분의 어남() 선택에 도움이 된 화였기를 바랍니다!
어남()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어요. 꾸준히 댓글로 의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