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냥냥이와 댕댕이 >
# 잘못
" 우리 사귈까. "
돌이켜보면, 그건 제 잘못이었다.
*
작년 연말이었다. 쉐어하우스 하메들끼리 송년회를 했던 날.
고등학생때부터 손잡고 들어와 결국은 함께 대학교를 입학하게 된 지민과 태형이 드디어 성인이 된다며 미친듯이 술을 퍼마셨던 날.
시종일관 하이텐션이었던 둘을 감당하느라 평소에 술을 잘 조절하던 윤기도, 애들 챙기느라 술을 자제하던 호석도 진탕 마셔서 머리 끝까지 취한 날이었다.
제 주량도 모르고 소주부터 마시는 바람에 결국은 쓰러진 태형과 지민을 언제나처럼 호석이 챙겼다.
평소보다 취한 윤기는 베란다에 나갔다. 한겨울의 바람이 살결을 가르는 것처럼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나름 그것도 여흥처럼 느껴졌다.
그 곁에 둘을 방까지 챙기고 돌아온 호석이 앉았다.
" 괜찮냐. "
" 뭐, 내일 숙취가 좀 심할 것 같긴 하네. "
미련한 새끼. 윤기의 읊조림에 호석이 작게 웃었다.
윤기는 술이 약한 호석이 둘을 맞춰주느라 과하게 마신 걸 알았다.
윤기도 둘에게 맞춰주긴 했지만 스스로 취한 게 느껴진 순간부터 정색하며 술잔을 마다했는데, 미련한 호석은 끝까지 둘의 술을 넙죽넙죽 받아 마셨다.
호석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미련하게 착한 놈. 항상 자기 생각은 안하는 놈. 남이 자기보다 먼저인 놈.
" 안추워? "
" 어. 있을만하네. "
한참의 적막이 흘렀다. 둘 사이에 휘몰아치는 겨울바람소리만이 들려왔다.
하지만 윤기도 호석도 그 적막이 불편하지 않았다. 오랜 사이에서만 느낄 수 있는 편안한 침묵.
굳이 누군가 말을 꺼내지 않아도 사이의 흔들리지 않는 유대감이 그 시간들을 지탱해줬다.
" 나 여주 좋아해. "
그 침묵을 건너, 호석이 먼 곳을 응시한 채 그런 말을 내뱉었다.
생각치도 못한 말에 윤기가 눈을 크게 뜨고 호석을 바라봤다.
" 고백하려고. 조만간. "
제 쪽을 쳐다보지 않고 말하는 호석의 눈이 꽤 단단했다.
단순히 취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윤기는 그걸 알았다.
" ...그런 걸 왜 말하냐. "
" 넌 알아야 될 것 같아서. "
" ... "
간다, 호석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베란다를 벗어났다.
혼자 남겨진 윤기의 머리 위에 별들이 희미하게 반짝거렸다. 거슬리게도.
호석의 시선이 향했던 곳에는 큰 달이 걸려있었다. 하얗고, 말갛고, 가장 빛나는 게 꼭 여주의 얼굴같았다.
윤기는 눈을 감았다. 겨울 바람에 가신 줄 알았던 취기가 다시 도는 것 같았다.
*
" 우리 사귈까 "
새해를 맞이하고 처음 보는 여주의 얼굴이었다.
전화도 통하지 않는 깡시골 할머니댁에 다녀온다고 했던 여주가 제 어머니 납골당을 함께 가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날.
아마 급속도로 가까워진 계기가 엄마의 장례식날부터였기 때문이었을까. 언젠가부터 매년 여주는 잊을 만하면 꼭 먼저 납골당을 들르자고 연락이 왔었다. 정작 윤기는 그 얼굴조차 희미해진 지 오래였는데.
항상 의례처럼 돌아오는 길에 들르던 순댓국밥집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윤기조차 예상치 못하게.
" 미쳤어? "
명백한 조바심이었다. 납골당을 나오던 길에 내일 갑자기 호석이 보자고 했다는 여주의 말이 내내 머릿 속을 흔들고 있었다.
윤기는 그 눈을 떠올렸다. 캄캄한 겨울밤 속에서 하늘 끝에 걸려있는 누군가를 그리던 호석의 눈. 매서운 바람 속에서도 흔들림 없던 그 눈을.
별안간 불안해졌다. 그 눈 속에 담길 여주가 어쩌면 영영 떠나버릴 것 같아서.
너무나도 당연하게 지금 제 앞에 있는 이 아이가 호석의 손을 잡고 자길 버릴 것만 같아서.
그래서 평소처럼 순댓국을 먹고 있는 여주의 얼굴을 보다가 돌연 튀어나온 말이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 ...싫어? "
" 당연하지. 불알친구랑 왜 사귀냐! "
" 불ㅇ... , 야, 이런 데선 그런 단어 좀 쓰지 마. "
" 쨌튼 개소리하지마. 밥 맛 떨어지니까. '
의도와 달리 뱉은 말은 도저히 주워담을 수 없었다. 잔뜩 질색하는 표정의 여주가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
" 내가 잘하면 돼. 그게 뭐든간에. 너는 네가 원하는 대로만 행동해. "
" ... "
" 만약에 잘안된다고 해도 알잖아. 우린 그렇게 쉽게 갈라질 사이 아니야. "
" ... "
" 한 달. 우리 한 달만 그래보자. "
그래서 윤기는 제 앞에 벙찐 여주에게 지키지 못할 약속을 했다.
언젠가 자신이 먼저 져버릴 걸 알면서도.
*
여주와의 연애가 시작됐다. 이전과 변할 게 하나도 없는 나날들이었다.
점심시간이면 학생식당에서 만나 밥을 먹고, 다음 수업시간 전까지 캠퍼스를 돌아다니고, 공강시간이면 벤치나 잔디밭에서 무릎에 머리를 대고 잠에 들었다.
그 일상이 꽤나 무탈했다. 처음에 연애를 시작할 때만 해도 모든 게 어색하게 느껴졌던 윤기였지만 여주와의 시간 속에서 생경한 감정은 눈 녹듯 사라진 지 오래였다.
지금껏 제 시간을 빼앗기고 감정소모하는 일이 번거로워 연애를 기피했지만, 이런 게 연애라면 할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와중에 변한 게 있다면 쉐어하우스에서 호석의 말 수가 적어졌다는 것. 평소보다 술자리에 나가는 일이 많아졌다는 것. 늦어도 아침 전까지는 들어오던 호석의 외박이 잦아졌다는 것.
제 잘못이었다. 뻔히 진심을 알면서도, 그 다음날 호석이 여주에게 고백하리란 걸 예감했으면서도 그 기회조차 빼앗은 잘못.
하지만 윤기는 구태여 미안하단 말을 꺼내지 않았다. 만약 호석이 먼저 여주에게 고백했더라도, 아마 둘은 이어지지 못했을 테니까.
여주에게 있어서 자신과 호석의 무게를 가늠한다면 아마 그 저울은 자기를 향해 가라앉을 것이었다.
차라리 호석이 상처받아 이도저도 아닌 상태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이게 나았다.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여주는 제게 이성적인 감정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사귄다는 명목하에 만나곤 있지만, 먼저 채근대거나 쓸데없는 투정을 부리거나 제 감정을 확인하는 일도 없었다.
한달이 넘도록 그 상태가 지속되자 조바심이 든 건 윤기의 몫이었다. 호석의 말 때문에, 괜한 두려움때문에 시작한 관계였지만 묘한 방향으로 감정이 커져가고 있었다.
안을 때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등을 토닥여주는 손길이, 무릎에 기댄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길이, 점점 애타기 시작했다.
담담하게 저를 바라보는 여주의 눈빛을 다른 색으로 물들이고 싶었고, 제 품에 있을 때 닿아오는 숨결을 손에 쥐고 싶었다.
언제나 제 곁에 있는 여주였지만 윤기는 그녀가 나날이 고팠다.
그저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란 걸 깨달은 건, 100일이 되어가던 그 즈음이었다.
오랜만에 여주의 고등학교 친구들이 학교까지 놀러와서 유례없이 술을 진탕 마셨던 날. 늦은 새벽 걸려온 전화에 달려가 보니 여주는 제 몸도 가누지 못한 채 엎어져 있었다.
이미 기숙사 통금을 어긴 시간이었다. 평소 과애들과 친하게 지내지 않는 여주였기에 딱히 맡길데도 없어서 쉐어하우스까지 데리고 올 수 밖에 없었다.
얼마나 마셨는지 술냄새가 코 끝을 진동했다. 윤기는 인상을 찌푸리며 제 침대에 여주를 눕혔다.
여주는 정신도 못차린 채 허공에 손을 휘적거리며 제 이름을 불러댔다.
" 윤기야아... "
" 그래. 그래. 여기있다. "
그 모습이 퍽 귀여워서 윤기는 웃었다.
평소에도 제 이름을 부르는 일은 허다했지만 이렇게 술에 쩔어서도 제 이름을 부르는게 어딘가 대견했다. 그 무의식 속에서도 있는 걸까, 내가.
허공에서 휘적거리는 손을 잡고, 그 옆에 걸터앉았다. 어느덧 주정도 않고 새근새근 잠든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윤기는 그 뺨을 쓸어내렸다. 적당한 온기가 손에 닿았다. 그 따스함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가슴을 채워왔다.
모든 새벽의 공기가 이 곳에만 집중된 듯 머리와 가슴이 천장위로 붕 뜨는 기분이 들었다.
그 때 가만히 잠들어 있던 여주가 제 손길에 반쯤 눈을 떴다. 그리곤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 안아줘. "
여주가 양쪽 팔로 윤기의 등을 감싸, 그 품에 안겨왔다.
순간, 모든 시간이 멈춘 게 아닐까. 윤기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쿵쿵, 모든 게 멈춘 순간 속에서 윤기의 심장만이 쉴 새없이 뛰어왔다. 온 지구가 흔들리는 것처럼. 저 아래부터 대지까지, 엄청난 강도로.
아까는 불쾌하던 술냄새가 어느덧 뭉근하게 윤기의 머릿 속을 침범해왔다. 품에서 느껴지는 여주의 향이 환각처럼 뭉게뭉게 피어났다.
온 몸이 간지러웠다. 어디론가 숨어들어서, 숨결을 공유하고 싶었다. 윤기의 입술이 자연스럽게 여주의 목덜미로 향했다.
포근한 살냄새. 윤기는 그 목덜미를 깨물었다. 제 것임을 확인하듯이.
그 때 숨결이 닿자 여주가 이상한 신음을 냈다.
" 하아, "
소스라치게 놀란 윤기가 몸을 뗐다.
멈춰있던 시간이 순식간에 제 자리를 찾은 듯 머릿 속이 선연해졌다.
품에 있는 여주의 얼굴이 전에 없이 빨갛게 달아올라있었다. 눈을 감은 채, 달뜬 숨을 내뱉고 있었다.
죄책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제게 아무런 감정이 없는 여주에게 하려고 했던 짓을 도저히 스스로 용서할 수 없었다.
다시금 호흡을 되찾고 잠에 든 여주를 침대에 눕히고 윤기는 그대로 작업실로 향했다.
작업실로 향하던 길, 하늘 위에 떠있던 달이 자길 따라오는 게 꼭 여주에게 했던 짓을 꾸짖는 것 같아서 윤기는 하늘도 올려다볼 수 없었다.
윤기는 깨달았다. 여주에게 있어 자신은 해악이었다.
더이상 남자친구라는 이름으로 여주의 곁에 있을 수 없었다. 처음부터 제 조바심으로 시작된 관계에서 더이상 강요할 수 없는 것들이 생겨났다.
좀 더 아무렇지 않게, 여주에게도 자신에게도 상처가 되지 않도록 전의 사이로 돌아가는 것. 윤기에겐 그게 절실했다.
*
" ...헤어질까. 우리. "
이별을 말하는 건 생각보다 간단했다.
제 몰골에 우려스러운 눈빛의 여주를 무시하고 그동안 준비했던 그 말을 꺼내면 되는 일이었다.
중간에 술에 취한 채 전화를 걸어 고백할 뻔 했지만 여주가 받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단숨에 눈물이 차오르는 여주의 눈을 윤기는 외면했다.
작업실 문을 닫고, 윤기는 그대로 문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더없이 허물없는 사이로 다시 되돌아가는 것. 그게 윤기가 생각한 차악의 선택이었다.
# 이끄는 손
" 아 속쓰리ㄷ, "
" ... "
" 어우씨, 깜짝아! ...여주? "
" 예에...접니다... "
" 어우. 야 놀랐잖아. 왜 거기 웅크리고 있어. "
" 아니...속이 넘 쓰려서...뭐라도 먹을 거 있나하고... "
베란다 앞에서 웅크리고 있던 여주가 일어났다. 풍겨오는 술냄새에 남준이 코 끝을 찡그렸다.
" 나 어제 중간에 뻗어서. 얼마나 마신 거야? "
" 모르겠어요. "
" 눈은 왜 그렇게 부었어. "
"(울컥) "
" 괜찮아? "
" 예...지금은 속 쓰린 것부터 어떻게 좀 하고. "
속이 쓰려도 이렇게 쓰려도 되나 싶었다. 여주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한 차례 전을 부쳤다.
아침부터 속을 게워내니 눈물이 찔끔났다. 고개를 들어 마주한 제 얼굴이 흉하게 퉁퉁 부어있어서 또 눈물이 찔끔 났다.
빨리 미칠 것 같은 속부터 처리하고 씻고 싶었다. 술 마신 다음날이면 늦게까지 자는 윤기였기에 그 시간 안에 모든 걸 처리해야 했다.
# 잘못
" 우리 사귈까. "
돌이켜보면, 그건 제 잘못이었다.
*
작년 연말이었다. 쉐어하우스 하메들끼리 송년회를 했던 날.
고등학생때부터 손잡고 들어와 결국은 함께 대학교를 입학하게 된 지민과 태형이 드디어 성인이 된다며 미친듯이 술을 퍼마셨던 날.
시종일관 하이텐션이었던 둘을 감당하느라 평소에 술을 잘 조절하던 윤기도, 애들 챙기느라 술을 자제하던 호석도 진탕 마셔서 머리 끝까지 취한 날이었다.
제 주량도 모르고 소주부터 마시는 바람에 결국은 쓰러진 태형과 지민을 언제나처럼 호석이 챙겼다.
평소보다 취한 윤기는 베란다에 나갔다. 한겨울의 바람이 살결을 가르는 것처럼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나름 그것도 여흥처럼 느껴졌다.
그 곁에 둘을 방까지 챙기고 돌아온 호석이 앉았다.
" 괜찮냐. "
" 뭐, 내일 숙취가 좀 심할 것 같긴 하네. "
미련한 새끼. 윤기의 읊조림에 호석이 작게 웃었다.
윤기는 술이 약한 호석이 둘을 맞춰주느라 과하게 마신 걸 알았다.
윤기도 둘에게 맞춰주긴 했지만 스스로 취한 게 느껴진 순간부터 정색하며 술잔을 마다했는데, 미련한 호석은 끝까지 둘의 술을 넙죽넙죽 받아 마셨다.
호석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미련하게 착한 놈. 항상 자기 생각은 안하는 놈. 남이 자기보다 먼저인 놈.
" 안추워? "
" 어. 있을만하네. "
한참의 적막이 흘렀다. 둘 사이에 휘몰아치는 겨울바람소리만이 들려왔다.
하지만 윤기도 호석도 그 적막이 불편하지 않았다. 오랜 사이에서만 느낄 수 있는 편안한 침묵.
굳이 누군가 말을 꺼내지 않아도 사이의 흔들리지 않는 유대감이 그 시간들을 지탱해줬다.
" 나 여주 좋아해. "
그 침묵을 건너, 호석이 먼 곳을 응시한 채 그런 말을 내뱉었다.
생각치도 못한 말에 윤기가 눈을 크게 뜨고 호석을 바라봤다.
" 고백하려고. 조만간. "
제 쪽을 쳐다보지 않고 말하는 호석의 눈이 꽤 단단했다.
단순히 취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윤기는 그걸 알았다.
" ...그런 걸 왜 말하냐. "
" 넌 알아야 될 것 같아서. "
" ... "
간다, 호석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베란다를 벗어났다.
혼자 남겨진 윤기의 머리 위에 별들이 희미하게 반짝거렸다. 거슬리게도.
호석의 시선이 향했던 곳에는 큰 달이 걸려있었다. 하얗고, 말갛고, 가장 빛나는 게 꼭 여주의 얼굴같았다.
윤기는 눈을 감았다. 겨울 바람에 가신 줄 알았던 취기가 다시 도는 것 같았다.
*
" 우리 사귈까 "
새해를 맞이하고 처음 보는 여주의 얼굴이었다.
전화도 통하지 않는 깡시골 할머니댁에 다녀온다고 했던 여주가 제 어머니 납골당을 함께 가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날.
아마 급속도로 가까워진 계기가 엄마의 장례식날부터였기 때문이었을까. 언젠가부터 매년 여주는 잊을 만하면 꼭 먼저 납골당을 들르자고 연락이 왔었다. 정작 윤기는 그 얼굴조차 희미해진 지 오래였는데.
항상 의례처럼 돌아오는 길에 들르던 순댓국밥집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윤기조차 예상치 못하게.
" 미쳤어? "
명백한 조바심이었다. 납골당을 나오던 길에 내일 갑자기 호석이 보자고 했다는 여주의 말이 내내 머릿 속을 흔들고 있었다.
윤기는 그 눈을 떠올렸다. 캄캄한 겨울밤 속에서 하늘 끝에 걸려있는 누군가를 그리던 호석의 눈. 매서운 바람 속에서도 흔들림 없던 그 눈을.
별안간 불안해졌다. 그 눈 속에 담길 여주가 어쩌면 영영 떠나버릴 것 같아서.
너무나도 당연하게 지금 제 앞에 있는 이 아이가 호석의 손을 잡고 자길 버릴 것만 같아서.
그래서 평소처럼 순댓국을 먹고 있는 여주의 얼굴을 보다가 돌연 튀어나온 말이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 ...싫어? "
" 당연하지. 불알친구랑 왜 사귀냐! "
" 불ㅇ... , 야, 이런 데선 그런 단어 좀 쓰지 마. "
" 쨌튼 개소리하지마. 밥 맛 떨어지니까. '
의도와 달리 뱉은 말은 도저히 주워담을 수 없었다. 잔뜩 질색하는 표정의 여주가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
" 내가 잘하면 돼. 그게 뭐든간에. 너는 네가 원하는 대로만 행동해. "
" ... "
" 만약에 잘안된다고 해도 알잖아. 우린 그렇게 쉽게 갈라질 사이 아니야. "
" ... "
" 한 달. 우리 한 달만 그래보자. "
그래서 윤기는 제 앞에 벙찐 여주에게 지키지 못할 약속을 했다.
언젠가 자신이 먼저 져버릴 걸 알면서도.
*
여주와의 연애가 시작됐다. 이전과 변할 게 하나도 없는 나날들이었다.
점심시간이면 학생식당에서 만나 밥을 먹고, 다음 수업시간 전까지 캠퍼스를 돌아다니고, 공강시간이면 벤치나 잔디밭에서 무릎에 머리를 대고 잠에 들었다.
그 일상이 꽤나 무탈했다. 처음에 연애를 시작할 때만 해도 모든 게 어색하게 느껴졌던 윤기였지만 여주와의 시간 속에서 생경한 감정은 눈 녹듯 사라진 지 오래였다.
지금껏 제 시간을 빼앗기고 감정소모하는 일이 번거로워 연애를 기피했지만, 이런 게 연애라면 할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와중에 변한 게 있다면 쉐어하우스에서 호석의 말 수가 적어졌다는 것. 평소보다 술자리에 나가는 일이 많아졌다는 것. 늦어도 아침 전까지는 들어오던 호석의 외박이 잦아졌다는 것.
제 잘못이었다. 뻔히 진심을 알면서도, 그 다음날 호석이 여주에게 고백하리란 걸 예감했으면서도 그 기회조차 빼앗은 잘못.
하지만 윤기는 구태여 미안하단 말을 꺼내지 않았다. 만약 호석이 먼저 여주에게 고백했더라도, 아마 둘은 이어지지 못했을 테니까.
여주에게 있어서 자신과 호석의 무게를 가늠한다면 아마 그 저울은 자기를 향해 가라앉을 것이었다.
차라리 호석이 상처받아 이도저도 아닌 상태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이게 나았다.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여주는 제게 이성적인 감정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사귄다는 명목하에 만나곤 있지만, 먼저 채근대거나 쓸데없는 투정을 부리거나 제 감정을 확인하는 일도 없었다.
한달이 넘도록 그 상태가 지속되자 조바심이 든 건 윤기의 몫이었다. 호석의 말 때문에, 괜한 두려움때문에 시작한 관계였지만 묘한 방향으로 감정이 커져가고 있었다.
안을 때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등을 토닥여주는 손길이, 무릎에 기댄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길이, 점점 애타기 시작했다.
담담하게 저를 바라보는 여주의 눈빛을 다른 색으로 물들이고 싶었고, 제 품에 있을 때 닿아오는 숨결을 손에 쥐고 싶었다.
언제나 제 곁에 있는 여주였지만 윤기는 그녀가 나날이 고팠다.
그저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란 걸 깨달은 건, 100일이 되어가던 그 즈음이었다.
오랜만에 여주의 고등학교 친구들이 학교까지 놀러와서 유례없이 술을 진탕 마셨던 날. 늦은 새벽 걸려온 전화에 달려가 보니 여주는 제 몸도 가누지 못한 채 엎어져 있었다.
이미 기숙사 통금을 어긴 시간이었다. 평소 과애들과 친하게 지내지 않는 여주였기에 딱히 맡길데도 없어서 쉐어하우스까지 데리고 올 수 밖에 없었다.
얼마나 마셨는지 술냄새가 코 끝을 진동했다. 윤기는 인상을 찌푸리며 제 침대에 여주를 눕혔다.
여주는 정신도 못차린 채 허공에 손을 휘적거리며 제 이름을 불러댔다.
" 윤기야아... "
" 그래. 그래. 여기있다. "
그 모습이 퍽 귀여워서 윤기는 웃었다.
평소에도 제 이름을 부르는 일은 허다했지만 이렇게 술에 쩔어서도 제 이름을 부르는게 어딘가 대견했다. 그 무의식 속에서도 있는 걸까, 내가.
허공에서 휘적거리는 손을 잡고, 그 옆에 걸터앉았다. 어느덧 주정도 않고 새근새근 잠든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윤기는 그 뺨을 쓸어내렸다. 적당한 온기가 손에 닿았다. 그 따스함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가슴을 채워왔다.
모든 새벽의 공기가 이 곳에만 집중된 듯 머리와 가슴이 천장위로 붕 뜨는 기분이 들었다.
그 때 가만히 잠들어 있던 여주가 제 손길에 반쯤 눈을 떴다. 그리곤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 안아줘. "
여주가 양쪽 팔로 윤기의 등을 감싸, 그 품에 안겨왔다.
순간, 모든 시간이 멈춘 게 아닐까. 윤기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쿵쿵, 모든 게 멈춘 순간 속에서 윤기의 심장만이 쉴 새없이 뛰어왔다. 온 지구가 흔들리는 것처럼. 저 아래부터 대지까지, 엄청난 강도로.
아까는 불쾌하던 술냄새가 어느덧 뭉근하게 윤기의 머릿 속을 침범해왔다. 품에서 느껴지는 여주의 향이 환각처럼 뭉게뭉게 피어났다.
온 몸이 간지러웠다. 어디론가 숨어들어서, 숨결을 공유하고 싶었다. 윤기의 입술이 자연스럽게 여주의 목덜미로 향했다.
포근한 살냄새. 윤기는 그 목덜미를 깨물었다. 제 것임을 확인하듯이.
그 때 숨결이 닿자 여주가 이상한 신음을 냈다.
" 하아, "
소스라치게 놀란 윤기가 몸을 뗐다.
멈춰있던 시간이 순식간에 제 자리를 찾은 듯 머릿 속이 선연해졌다.
품에 있는 여주의 얼굴이 전에 없이 빨갛게 달아올라있었다. 눈을 감은 채, 달뜬 숨을 내뱉고 있었다.
죄책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제게 아무런 감정이 없는 여주에게 하려고 했던 짓을 도저히 스스로 용서할 수 없었다.
다시금 호흡을 되찾고 잠에 든 여주를 침대에 눕히고 윤기는 그대로 작업실로 향했다.
작업실로 향하던 길, 하늘 위에 떠있던 달이 자길 따라오는 게 꼭 여주에게 했던 짓을 꾸짖는 것 같아서 윤기는 하늘도 올려다볼 수 없었다.
윤기는 깨달았다. 여주에게 있어 자신은 해악이었다.
더이상 남자친구라는 이름으로 여주의 곁에 있을 수 없었다. 처음부터 제 조바심으로 시작된 관계에서 더이상 강요할 수 없는 것들이 생겨났다.
좀 더 아무렇지 않게, 여주에게도 자신에게도 상처가 되지 않도록 전의 사이로 돌아가는 것. 윤기에겐 그게 절실했다.
*
" ...헤어질까. 우리. "
이별을 말하는 건 생각보다 간단했다.
제 몰골에 우려스러운 눈빛의 여주를 무시하고 그동안 준비했던 그 말을 꺼내면 되는 일이었다.
중간에 술에 취한 채 전화를 걸어 고백할 뻔 했지만 여주가 받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단숨에 눈물이 차오르는 여주의 눈을 윤기는 외면했다.
작업실 문을 닫고, 윤기는 그대로 문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더없이 허물없는 사이로 다시 되돌아가는 것. 그게 윤기가 생각한 차악의 선택이었다.
# 이끄는 손
" 아 속쓰리ㄷ, "
" ... "
" 어우씨, 깜짝아! ...여주? "
" 예에...접니다... "
" 어우. 야 놀랐잖아. 왜 거기 웅크리고 있어. "
" 아니...속이 넘 쓰려서...뭐라도 먹을 거 있나하고... "
베란다 앞에서 웅크리고 있던 여주가 일어났다. 풍겨오는 술냄새에 남준이 코 끝을 찡그렸다.
" 나 어제 중간에 뻗어서. 얼마나 마신 거야? "
" 모르겠어요. "
" 눈은 왜 그렇게 부었어. "
"(울컥) "
" 괜찮아? "
" 예...지금은 속 쓰린 것부터 어떻게 좀 하고. "
속이 쓰려도 이렇게 쓰려도 되나 싶었다. 여주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한 차례 전을 부쳤다.
아침부터 속을 게워내니 눈물이 찔끔났다. 고개를 들어 마주한 제 얼굴이 흉하게 퉁퉁 부어있어서 또 눈물이 찔끔 났다.
빨리 미칠 것 같은 속부터 처리하고 씻고 싶었다. 술 마신 다음날이면 늦게까지 자는 윤기였기에 그 시간 안에 모든 걸 처리해야 했다.
# 잘못
" 우리 사귈까. "
돌이켜보면, 그건 제 잘못이었다.
*
작년 연말이었다. 쉐어하우스 하메들끼리 송년회를 했던 날.
고등학생때부터 손잡고 들어와 결국은 함께 대학교를 입학하게 된 지민과 태형이 드디어 성인이 된다며 미친듯이 술을 퍼마셨던 날.
시종일관 하이텐션이었던 둘을 감당하느라 평소에 술을 잘 조절하던 윤기도, 애들 챙기느라 술을 자제하던 호석도 진탕 마셔서 머리 끝까지 취한 날이었다.
제 주량도 모르고 소주부터 마시는 바람에 결국은 쓰러진 태형과 지민을 언제나처럼 호석이 챙겼다.
평소보다 취한 윤기는 베란다에 나갔다. 한겨울의 바람이 살결을 가르는 것처럼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나름 그것도 여흥처럼 느껴졌다.
그 곁에 둘을 방까지 챙기고 돌아온 호석이 앉았다.
" 괜찮냐. "
" 뭐, 내일 숙취가 좀 심할 것 같긴 하네. "
미련한 새끼. 윤기의 읊조림에 호석이 작게 웃었다.
윤기는 술이 약한 호석이 둘을 맞춰주느라 과하게 마신 걸 알았다.
윤기도 둘에게 맞춰주긴 했지만 스스로 취한 게 느껴진 순간부터 정색하며 술잔을 마다했는데, 미련한 호석은 끝까지 둘의 술을 넙죽넙죽 받아 마셨다.
호석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미련하게 착한 놈. 항상 자기 생각은 안하는 놈. 남이 자기보다 먼저인 놈.
" 안추워? "
" 어. 있을만하네. "
한참의 적막이 흘렀다. 둘 사이에 휘몰아치는 겨울바람소리만이 들려왔다.
하지만 윤기도 호석도 그 적막이 불편하지 않았다. 오랜 사이에서만 느낄 수 있는 편안한 침묵.
굳이 누군가 말을 꺼내지 않아도 사이의 흔들리지 않는 유대감이 그 시간들을 지탱해줬다.
" 나 여주 좋아해. "
그 침묵을 건너, 호석이 먼 곳을 응시한 채 그런 말을 내뱉었다.
생각치도 못한 말에 윤기가 눈을 크게 뜨고 호석을 바라봤다.
" 고백하려고. 조만간. "
제 쪽을 쳐다보지 않고 말하는 호석의 눈이 꽤 단단했다.
단순히 취해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윤기는 그걸 알았다.
" ...그런 걸 왜 말하냐. "
" 넌 알아야 될 것 같아서. "
" ... "
간다, 호석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베란다를 벗어났다.
혼자 남겨진 윤기의 머리 위에 별들이 희미하게 반짝거렸다. 거슬리게도.
호석의 시선이 향했던 곳에는 큰 달이 걸려있었다. 하얗고, 말갛고, 가장 빛나는 게 꼭 여주의 얼굴같았다.
윤기는 눈을 감았다. 겨울 바람에 가신 줄 알았던 취기가 다시 도는 것 같았다.
*
" 우리 사귈까 "
새해를 맞이하고 처음 보는 여주의 얼굴이었다.
전화도 통하지 않는 깡시골 할머니댁에 다녀온다고 했던 여주가 제 어머니 납골당을 함께 가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날.
아마 급속도로 가까워진 계기가 엄마의 장례식날부터였기 때문이었을까. 언젠가부터 매년 여주는 잊을 만하면 꼭 먼저 납골당을 들르자고 연락이 왔었다. 정작 윤기는 그 얼굴조차 희미해진 지 오래였는데.
항상 의례처럼 돌아오는 길에 들르던 순댓국밥집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윤기조차 예상치 못하게.
" 미쳤어? "
명백한 조바심이었다. 납골당을 나오던 길에 내일 갑자기 호석이 보자고 했다는 여주의 말이 내내 머릿 속을 흔들고 있었다.
윤기는 그 눈을 떠올렸다. 캄캄한 겨울밤 속에서 하늘 끝에 걸려있는 누군가를 그리던 호석의 눈. 매서운 바람 속에서도 흔들림 없던 그 눈을.
별안간 불안해졌다. 그 눈 속에 담길 여주가 어쩌면 영영 떠나버릴 것 같아서.
너무나도 당연하게 지금 제 앞에 있는 이 아이가 호석의 손을 잡고 자길 버릴 것만 같아서.
그래서 평소처럼 순댓국을 먹고 있는 여주의 얼굴을 보다가 돌연 튀어나온 말이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 ...싫어? "
" 당연하지. 불알친구랑 왜 사귀냐! "
" 불ㅇ... , 야, 이런 데선 그런 단어 좀 쓰지 마. "
" 쨌튼 개소리하지마. 밥 맛 떨어지니까. '
의도와 달리 뱉은 말은 도저히 주워담을 수 없었다. 잔뜩 질색하는 표정의 여주가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
" 내가 잘하면 돼. 그게 뭐든간에. 너는 네가 원하는 대로만 행동해. "
" ... "
" 만약에 잘안된다고 해도 알잖아. 우린 그렇게 쉽게 갈라질 사이 아니야. "
" ... "
" 한 달. 우리 한 달만 그래보자. "
그래서 윤기는 제 앞에 벙찐 여주에게 지키지 못할 약속을 했다.
언젠가 자신이 먼저 져버릴 걸 알면서도.
*
여주와의 연애가 시작됐다. 이전과 변할 게 하나도 없는 나날들이었다.
점심시간이면 학생식당에서 만나 밥을 먹고, 다음 수업시간 전까지 캠퍼스를 돌아다니고, 공강시간이면 벤치나 잔디밭에서 무릎에 머리를 대고 잠에 들었다.
그 일상이 꽤나 무탈했다. 처음에 연애를 시작할 때만 해도 모든 게 어색하게 느껴졌던 윤기였지만 여주와의 시간 속에서 생경한 감정은 눈 녹듯 사라진 지 오래였다.
지금껏 제 시간을 빼앗기고 감정소모하는 일이 번거로워 연애를 기피했지만, 이런 게 연애라면 할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와중에 변한 게 있다면 쉐어하우스에서 호석의 말 수가 적어졌다는 것. 평소보다 술자리에 나가는 일이 많아졌다는 것. 늦어도 아침 전까지는 들어오던 호석의 외박이 잦아졌다는 것.
제 잘못이었다. 뻔히 진심을 알면서도, 그 다음날 호석이 여주에게 고백하리란 걸 예감했으면서도 그 기회조차 빼앗은 잘못.
하지만 윤기는 구태여 미안하단 말을 꺼내지 않았다. 만약 호석이 먼저 여주에게 고백했더라도, 아마 둘은 이어지지 못했을 테니까.
여주에게 있어서 자신과 호석의 무게를 가늠한다면 아마 그 저울은 자기를 향해 가라앉을 것이었다.
차라리 호석이 상처받아 이도저도 아닌 상태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이게 나았다.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여주는 제게 이성적인 감정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사귄다는 명목하에 만나곤 있지만, 먼저 채근대거나 쓸데없는 투정을 부리거나 제 감정을 확인하는 일도 없었다.
한달이 넘도록 그 상태가 지속되자 조바심이 든 건 윤기의 몫이었다. 호석의 말 때문에, 괜한 두려움때문에 시작한 관계였지만 묘한 방향으로 감정이 커져가고 있었다.
안을 때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등을 토닥여주는 손길이, 무릎에 기댄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길이, 점점 애타기 시작했다.
담담하게 저를 바라보는 여주의 눈빛을 다른 색으로 물들이고 싶었고, 제 품에 있을 때 닿아오는 숨결을 손에 쥐고 싶었다.
언제나 제 곁에 있는 여주였지만 윤기는 그녀가 나날이 고팠다.
그저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란 걸 깨달은 건, 100일이 되어가던 그 즈음이었다.
오랜만에 여주의 고등학교 친구들이 학교까지 놀러와서 유례없이 술을 진탕 마셨던 날. 늦은 새벽 걸려온 전화에 달려가 보니 여주는 제 몸도 가누지 못한 채 엎어져 있었다.
이미 기숙사 통금을 어긴 시간이었다. 평소 과애들과 친하게 지내지 않는 여주였기에 딱히 맡길데도 없어서 쉐어하우스까지 데리고 올 수 밖에 없었다.
얼마나 마셨는지 술냄새가 코 끝을 진동했다. 윤기는 인상을 찌푸리며 제 침대에 여주를 눕혔다.
여주는 정신도 못차린 채 허공에 손을 휘적거리며 제 이름을 불러댔다.
" 윤기야아... "
" 그래. 그래. 여기있다. "
그 모습이 퍽 귀여워서 윤기는 웃었다.
평소에도 제 이름을 부르는 일은 허다했지만 이렇게 술에 쩔어서도 제 이름을 부르는게 어딘가 대견했다. 그 무의식 속에서도 있는 걸까, 내가.
허공에서 휘적거리는 손을 잡고, 그 옆에 걸터앉았다. 어느덧 주정도 않고 새근새근 잠든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윤기는 그 뺨을 쓸어내렸다. 적당한 온기가 손에 닿았다. 그 따스함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가슴을 채워왔다.
모든 새벽의 공기가 이 곳에만 집중된 듯 머리와 가슴이 천장위로 붕 뜨는 기분이 들었다.
그 때 가만히 잠들어 있던 여주가 제 손길에 반쯤 눈을 떴다. 그리곤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 안아줘. "
여주가 양쪽 팔로 윤기의 등을 감싸, 그 품에 안겨왔다.
순간, 모든 시간이 멈춘 게 아닐까. 윤기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쿵쿵, 모든 게 멈춘 순간 속에서 윤기의 심장만이 쉴 새없이 뛰어왔다. 온 지구가 흔들리는 것처럼. 저 아래부터 대지까지, 엄청난 강도로.
아까는 불쾌하던 술냄새가 어느덧 뭉근하게 윤기의 머릿 속을 침범해왔다. 품에서 느껴지는 여주의 향이 환각처럼 뭉게뭉게 피어났다.
온 몸이 간지러웠다. 어디론가 숨어들어서, 숨결을 공유하고 싶었다. 윤기의 입술이 자연스럽게 여주의 목덜미로 향했다.
포근한 살냄새. 윤기는 그 목덜미를 깨물었다. 제 것임을 확인하듯이.
그 때 숨결이 닿자 여주가 이상한 신음을 냈다.
" 하아, "
소스라치게 놀란 윤기가 몸을 뗐다.
멈춰있던 시간이 순식간에 제 자리를 찾은 듯 머릿 속이 선연해졌다.
품에 있는 여주의 얼굴이 전에 없이 빨갛게 달아올라있었다. 눈을 감은 채, 달뜬 숨을 내뱉고 있었다.
죄책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제게 아무런 감정이 없는 여주에게 하려고 했던 짓을 도저히 스스로 용서할 수 없었다.
다시금 호흡을 되찾고 잠에 든 여주를 침대에 눕히고 윤기는 그대로 작업실로 향했다.
작업실로 향하던 길, 하늘 위에 떠있던 달이 자길 따라오는 게 꼭 여주에게 했던 짓을 꾸짖는 것 같아서 윤기는 하늘도 올려다볼 수 없었다.
윤기는 깨달았다. 여주에게 있어 자신은 해악이었다.
더이상 남자친구라는 이름으로 여주의 곁에 있을 수 없었다. 처음부터 제 조바심으로 시작된 관계에서 더이상 강요할 수 없는 것들이 생겨났다.
좀 더 아무렇지 않게, 여주에게도 자신에게도 상처가 되지 않도록 전의 사이로 돌아가는 것. 윤기에겐 그게 절실했다.
*
" ...헤어질까. 우리. "
이별을 말하는 건 생각보다 간단했다.
제 몰골에 우려스러운 눈빛의 여주를 무시하고 그동안 준비했던 그 말을 꺼내면 되는 일이었다.
중간에 술에 취한 채 전화를 걸어 고백할 뻔 했지만 여주가 받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단숨에 눈물이 차오르는 여주의 눈을 윤기는 외면했다.
작업실 문을 닫고, 윤기는 그대로 문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더없이 허물없는 사이로 다시 되돌아가는 것. 그게 윤기가 생각한 차악의 선택이었다.
# 이끄는 손
" 아 속쓰리ㄷ, "
" ... "
" 어우씨, 깜짝아! ...여주? "
" 예에...접니다... "
" 어우. 야 놀랐잖아. 왜 거기 웅크리고 있어. "
" 아니...속이 넘 쓰려서...뭐라도 먹을 거 있나하고... "
베란다 앞에서 웅크리고 있던 여주가 일어났다. 풍겨오는 술냄새에 남준이 코 끝을 찡그렸다.
" 나 어제 중간에 뻗어서. 얼마나 마신 거야? "
" 모르겠어요. "
" 눈은 왜 그렇게 부었어. "
"(울컥) "
" 괜찮아? "
" 예...지금은 속 쓰린 것부터 어떻게 좀 하고. "
속이 쓰려도 이렇게 쓰려도 되나 싶었다. 여주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한 차례 전을 부쳤다.
아침부터 속을 게워내니 눈물이 찔끔났다. 고개를 들어 마주한 제 얼굴이 흉하게 퉁퉁 부어있어서 또 눈물이 찔끔 났다.
빨리 미칠 것 같은 속부터 처리하고 씻고 싶었다. 술 마신 다음날이면 늦게까지 자는 윤기였기에 그 시간 안에 모든 걸 처리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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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 왜 그렇게 부었어. "
하지만 어제부터 행운의 신은 여주를 져버린 지 오래였다. 평소엔 열두시쯤에 일어나던 윤기가 웬일로 일찍 깨서 제 몰골을 보고 다가왔다.
시발...아침부터 그렇게 얼굴 들이밀면 반칙이쟈나...
" 어제 소주 마셔서 그런가봐. "
" 그러게 내가 어제 맥주 마시랬지. "
" ...내맴. "
" 또 그런다. "
" ... "
" 근데 소주 먹어도 그렇게 눈 안부었잖아 원래. "
미심쩍은 듯 윤기의 시선이 깊어졌다. 여주는 윤기의 어깨를 밀며 그 시선을 뿌리쳤다.
이 몰골로 보이는 것도 속상한데 광광 울어서 눈이 부었다고 이실직고할 수는 없었다.
집요하게 얼굴을 들이미는 윤기를 주춤거리며 뿌리치는데 멀리서 호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야, 여주 그러다 넘어지겠다. "
언제 일어났는지 멀쩡한 얼굴로 호석이 쇼파에 앉아있었다.
쟤도 평소엔 다음날에 시체가 되어있더니. 무슨 일이래. 여주는 평소같지 않은 둘을 번갈아보다가 잽싸게 윤기를 피해 호석쪽으로 달려갔다.
사이 윤기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 잘 잤어? "
여주가 곁에 앉자 호석이 다정하게 머리를 쓸어넘겼다.
머리도 안감아서 떡졌는데 비위가 참 대단도 했다. 여주는 찌릿 호석을 째려봤다.
" 눈 땡땡 부었네. 귀엽게. "
개의치 않는 듯 호석이 말갛게 웃었다.
여주는 그런 호석을 뾰루퉁하게 바라보다가, 돌연 속이 울렁거려서 인상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속이 너무 쓰렸다.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머리를 쓸어넘기던 호석이 걱정스레 물었다.
" 속 많이 안좋아? "
" 어. 엄청. 토할 것 같음. 혹시 여기 여명 있어? "
" 없을걸. 어제 태형이가 마셨어. "
" 어린 놈의 자식이 장유유서도 없ㅇ... "
" 사러가자. 옷입어. "
멀찍이서 가만히 호석과 여주를 지켜보던 윤기가 말했다.
뜬금없는 소리에 여주가 윤기쪽을 쳐다봤다. 묘하게 일그러진 얼굴이 어딘가 수가 틀린 듯 굳어져있었다.
갑자기 왜 저러는 지 이해할 순 없었지만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어어, 그래. 답하며 여주가 일어나는 순간 호석이 끼어들었다.
" 윤기야. 너 어제 걔한테 전화 와있더라. "
" ...뭐? "
호석은 테이블에 놓여있던 윤기의 핸드폰을 던졌다. 엉겁결에 핸드폰을 받은 윤기의 표정이 구겨졌다.
" 전화해봐 얼른. 여주는 내가 챙길테니까. "
" 사러가자. 옷입어. "
멀찍이서 가만히 호석과 여주를 지켜보던 윤기가 말했다.
뜬금없는 소리에 여주가 윤기쪽을 쳐다봤다. 묘하게 일그러진 얼굴이 어딘가 수가 틀린 듯 굳어져있었다.
갑자기 왜 저러는 지 이해할 순 없었지만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어어, 그래. 답하며 여주가 일어나는 순간 호석이 끼어들었다.
" 윤기야. 너 어제 걔한테 전화 와있더라. "
" ...뭐? "
호석은 테이블에 놓여있던 윤기의 핸드폰을 던졌다. 엉겁결에 핸드폰을 받은 윤기의 표정이 구겨졌다.
" 전화해봐 얼른. 여주는 내가 챙길테니까. "
" 사러가자. 옷입어. "
멀찍이서 가만히 호석과 여주를 지켜보던 윤기가 말했다.
뜬금없는 소리에 여주가 윤기쪽을 쳐다봤다. 묘하게 일그러진 얼굴이 어딘가 수가 틀린 듯 굳어져있었다.
갑자기 왜 저러는 지 이해할 순 없었지만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어어, 그래. 답하며 여주가 일어나는 순간 호석이 끼어들었다.
" 윤기야. 너 어제 걔한테 전화 와있더라. "
" ...뭐? "
호석은 테이블에 놓여있던 윤기의 핸드폰을 던졌다. 엉겁결에 핸드폰을 받은 윤기의 표정이 구겨졌다.
" 전화해봐 얼른. 여주는 내가 챙길테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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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주야. 가자. "
호석이 여주의 손을 이끌었다.
여주는 어리둥절한 채 그 손에 이끌려 걸음을 재촉했다.
차갑게 식어가는 윤기의 눈을 등지고.
*********
오늘도 재밌게 읽어주셨나요?
오늘은 윤기의 시점이 풀렸으니 조만간 호석시점도 풀리겠네요!(무책임함)
어떻게...독자님들 마음 속의 어남()은 계속 변하고 있으려나요!?
어남()반응 너무 재미있으니 앞으로도 꼭 의견으로 댓글 달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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