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dusa
찬란히 눈부신 빛을 향하다, 문득 널 향한 욕망이 내게 속삭인다…
001.
종현은 반항적이었다. 유치원에서 아버지의 날, 어머니의 날 따위의 행사를 할때 단 한번도 온 적이 없던 그의 부모님은 그가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도 그런 방식을 고수했다. 자식보다는 일이 더 중요했던 그들 사이에서 사랑이라곤 전혀 받아본 적 없이 자란 종현이 애초에 바르게 자란다는것은 오히려 더 힘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물질적으로 부족한 것 없이 자라서 그런걸까, 그러한 감정의 부재는 그에게 더욱 큰 영향을 끼쳤다.
다녀오겠습니다, 하는 인사도 없이 집을 나선 그는 항상 그렇듯 제 몸만한 큰 백팩을 한쪽 어깨에만 걸치고 바닥만 보며 걷고 있었다. 중간에 턱, 걸리는 누군가의 발만 없었더라면 그는 항상 그랬듯이 그대로 학교까지 갔을 것이다.
"뭐야."
"아, 미안합니다."
고개를 들어 흰 운동화의 주인을 보니 미안한 주제에 환히 웃고있는 제 또래의 남자였다. 뭐라 걸고 넘어질 기분도 나지 않았던 종현은 그저 그렇게 그를 빤히 올려다 보다가 제 갈길을 가기 위해 걸음을 뗐다.
"저기,"
제 걸음을 묶는 부름에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리자 웃는 남자가 머리를 긁적이며 혹시 쪼오기 아파트 사세요? 하고 고개를 갸우뚱해보인다. 눈을 치켜뜨고 고개만 슬쩍 끄덕인 종현은 다시 제 발길을 재촉했지만 남자는 그런 그를 놓아 줄 생각이 없는 듯 이제는 아예 손목을 잡아 챘다.
"왜 이래요?"
"저, 이번에 이사왔거든요!"
참 멍청하게 잘도 웃으면서 사람 귀찮게 하는 성격이구나. 종현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탁 하고 거칠게 제 손목을 잡은 손을 쳐내면서 그는 돌아섰다. 뒤에서 우물우물 미안하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아침부터 제 시간을 빼앗은 불청객의 존재가 불쾌하기만 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말이다.
고3의 시간은 마하의 속도로 지나가는 듯 했다. 이제부터 지옥 시작이구나 한탄하며 보지도 않을 EBS 교재를 샀던 아이들은 어느새 책상위에 쌓인 교재들을 장막삼아 그 뒤에 숨어 자기 일쑤였고, 애초에 그 교재조차 사지 않았던 종현은 대놓고 수업에 참여하지 않았다. 학기 초 담임선생님은 그런 종현을 따로 부르는 등 열의를 갖고 그를 지도하려 했으나 다른 진학을 갈구하는 학생들을 위해 조용히 내버려 두기로 결정했다. 종현은 눈에 띄는 사고는 치지 않으나 학업에 열심이지도 않는, 어쩌면 가장 다루기 수월한 종류의 학생이었다.
그 날은 유독 종례가 길었다. 내일 즈음에 문학과목 교생이 올거라며, 아주 잠시만 있다 갈테니 니들 성적에는 영향 없을거라며 말하던 선생님께 아이들은 원성을 쏟아냈지만 속엔 다 어떠한 기대감이 자리잡아 있었다. 칙칙한 남고, 게다가 입시에 찌들어버린 고3, 어쩌면 매력적인 여성일지도 모르는 새로운 인물의 출현은 분명 설레는 일이었다. 종현은 와글와글 떠드는 철 없는 반 아이들을 훑어보고는 머리를 흐뜨렸다. 교생들은 항상 의욕에 충만해 엎드려 있는 학생들 일으키기를 좋아한다. 이는 종현이 새벽에 자두지 않으면 하루종일 졸음에 시달릴 것이라는 의미였다. 하필 가장 많이 들은 문학이라니. 마른 입술을 축이며 종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군진 모르겠지만 거슬리게 한다면 귀찮음을 무릅쓰고 교실을 나가버리리라, 치기어린 그 나잇대 소년의 생각이었다.
"종현 형!"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슬쩍 고개를 돌리자 복도 끝에서 익숙한 인영이 그를 향해 달려오는것이 보였다. 누구도 종현과 친할것이라 예상치 못했던 인물, 민호였다. 처음 그들이 함께있는 모습을 발견한 모 남학생이 당연히 종현이 모범생인 민호에게 해꼬지를 하는 줄 알고 다급히 학생부장 선생님을 데리고 왔던 웃지못할 에피소드도 있었다. 민호는 항상 전교 석차 한자리 밖으로 밀려 난 적이 없었으며 특유의 승부욕으로 못하는 것 하나 없는, 심지어 외모까지 훌륭한 주변 여고생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형, 나 애인 생겼어."
그런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종현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항상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하며 자기관리에만 시간을 쏟던 민호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다고? 종현은 민호가 장난을 치나 싶어 그의 얼굴을 의심쩍게 바라보다 가만히 웃고만 있는 양이 진심인 것 같아 천천히 손뼉을 마주쳤다. 짝,짝, 느릿느릿한 박수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축하."
"그게 다야?"
"그럼 뭘 더 해줘?"
어쩐지 시무룩한 표정을 해 보이는 민호였다. 종현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뭐하는 년인데, 하고 툭 던지든 말했다. 사실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년이 아니라, 놈인데."
민호의 말을 이해하는 데 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멀뚱히 눈만 마주치고 깜빡깜빡 몇분이 흐른 뒤에야 종현은 입을 뗄 수 있었다. 당혹스러움이 묻어나 약간 튄 목소리로 뭐, 하고 되물은 종현을 보며 민호는 박장대소를 했다.
"미친, 너, 아니지?"
"형이 생각하는게 맞는 것 같은데."
잠시 정적이 흘렀다. 종현은 미간을 짠뜩 찌푸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는 이전부터 민호의 그런 성향을 어느정도 파악하고 있었기에 받아들이기까지 큰 거부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누구야?"
갑자기 호기심이 일었다. 자신의 주변에 민호말고 다른 누군가가 그쪽이라고 생각하니 종현은 몹시 궁금해졌다. 아주 어릴때부터 함께 지냈던 탓에 민호가 아는 사람이라면 자신도 아는 사람임이 분명하니까.
"으응, 기범이."
"미친놈."
순간적으로 나온 말이었다. 기범은 이미 학교내에서 유명한 아이였다. 그는 마성의 게이 따위의 유치하기 짝이없는 별명으로 뒤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며 그와 동시에 이상하게 추앙받는 존재였다. 예쁘장 하지만 결코 훌륭하다 말하지는 못할 외모임에도 불구하고 기범은 거무죽죽한 남고생들 사이에서 홀로 핀 장미꽃 같이 화려했다. 까칠하고 공격적인 성격이 그러한 분위기를 더 증폭 시키는 데에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김기범이 너랑 사귀어준다고?"
"응."
"뭐라고 했는데?"
민호는 잠깐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큰 눈을 도르륵 굴렸다.
"다른 애들이 너 위험하다는데, 정말 그런지 확인해보고 싶어."
라고 말했어. 태연하게 저를 쳐다보는 민호에 종현은 할 말을 잃었다. 참 멋진 프로포즈구나, 종현은 민호의 사차원적인 발언에 혀를 내둘렀다. 평소에도 좀 이상한 녀석이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그런 종현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민호는 헤헤 웃으며 기분좋은 표정을 띄고 있었다.
"나, 기범이 보고싶다."
뜬금없이 던진 민호의 말에 종현은 어쩌라고, 하고 대답했다. 기범이 보러갈래. 코를 찡긋하며 종현을 향해 손을 흔들어보이고 민호는 긴 다리로 휘적휘적 복도를 가로질러 멀어져간다. 정말이지 이해할래야 이해할 수 없었다.
종현은 멍하니 민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저도 걸음을 옮겼다. 어쩐지 발걸음이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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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 시작입니다. 어두운 글이 될 것 같습니다.
미리 진기에게 사과의 말을 전해요. 내가 너를 너무 좋아해서 그래 진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