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냥냥이와 댕댕이 >
# 수강신청
" 형 실홥니까 그거 잡았다는 거!!??? "
" 어엉. "
" 헐 진짜요? 대박사건 "
" 생각보다 잡기 쉽던데. "
" 형형 어떻게 잡았어요? "
" 뭐 그냥 정각되자마자 눌렀지. "
" 전 00초 되자마자 그것만 눌렀는데 바로 마감 뜨던데! "
모든 대학생들이 가장 전투력에 불타오르는 결전의 날. 바야흐로 수강신청의 날이었다.
후배들의 SOS요청에 과강의실에 올라간 호석을 제외한 하메들은 새벽같이 일어나 각자의 방에 흩어져 수강신청을 시도했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석진의 수목금 공강신화로 인해 쉐어하우스의 랜선은 축복받은 서버라는 풍문이 돌았기 때문이었다.
홀가분한 얼굴로 나와 주방에서 늦은 아침을 먹고 있는 남준에게 태형과 지민이 달라붙었다.
" 그래서 둘은 수강신청 어떻게 됐어? "
" 저랑 태형이는 그럭저럭 다 건졌어요. "
" 전 그거 못잡아서 결국 전필 잡았어요 힝... "
입이 쭉 나와서 투정부리는 태형의 볼을 남준이 꼬집은 채 자연스럽게 쇼파에 앉아있는 윤기에게 물었다.
" 윤기는. "
" 금 공강 성공. "
" 오~ 결국은 성공했네요 형. "
무심하게 답한 윤기의 얼굴에서 만족스러움이 드러났다. 전공 외에 큰 과목 욕심이 없는 윤기의 유일한 목표는 금 공강이었다.
금요일은 이상하게 곡 작업이 잘되는 날이었다. 평소엔 하루 반나절을 투자해도 멜로디 하나 안나오는데, 금요일엔 불과 몇 시간만에 한 곡을 뚝딱 해치울 수 있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1교시 수업도 모두 피할 수 있었다. 야행성인 윤기에게 있어선 이보다 완벽한 시간표가 있을 수 없었다.
진짜 우리 쉐하가 학교서버 직빵으로 뚫리긴 하나봐요, 지민이 신나서 말하자 남준이 여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 여주는? "
" ... "
" ...여주야? "
모두가 썩 만족스러운 수강신청을 끝마친 가운데, 여주는 여지껏 미니 테이블위에 노트북을 얹어놓은채 망부석처럼 앉아있었다.
“ 헐. 누나 완전 망했네요. “
언제 다가왔는지 노트북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꾸도 않는 여주의 어깨에 태형이 턱을 올린 채 말했다. 악의없이 진짜 불쌍하다는 말투였다. 태형은 윤기가 연애를 시작한 이후 더이상 여주를 괴롭히지 않았다. 오히려 전에 없이 친근하게 굴어서 적응이 안될 지경이었다. 술을 마시면 앵겨오고 자기도 예뻐해달라며 머리를 쓰다듬어달라고 하고,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여주에겐 아무것도 신경쓰이지 않았다. 노트북 화면 속 제 시간표가 믿기지가 않았다. 전부 1교시 시작인 전공 4과목, 교양 0과목의 시간표가 처참하게 펼쳐져있었다.
“ 망했다... “
새내기때는 2학년이 되면, 2학년 때는 3학년이 되면. 그런 안일한 생각으로 매년 적당한 학점을 들었던 여주였기에 지난 학기의 F학점 3개는 큰 타격이었다. 이번 학기만큼은 최소 20학점 이상은 들어야했는데, 결전의 순간 에러 팝업창이 드면서 장바구니에 담아뒀던 교양과목이 싹 다 날아가버렸다. 덕분에 전공과목 제외 교양은 단 하나도 건지지 못한 여주였다. 큰 일이었다.
“ 동기나 선후배한테 물어봐요. 버릴 거 있는지. “
제 딴엔 위로랍시고 태형이 그런 말을 건네왔다. 여주는 그 말에 더 서글퍼졌다. 소문난 핵아싸가 그런 선후배가 있을리가 있나. 이 정도면 심각하게 휴학까지 고민해야 할 판이었다. 그 때 가만히 듣고 있던 윤기가 입을 열었다.
“ 뭐 부족한데. “
퍽이나 무심한 목소리였지만 그 속의 다정함이 젖어있었다. 여주는 익숙한 목소리에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지만, 꾹 참았다. 장마가 시작됐던 그 날 이후 여주는 서서히 윤기와 멀어지기로 작정한 바였다. 자길 생각해서 마카롱까지 사온 윤기에게 죽일 듯이 화를 낸 여주였다. 질투심과 서러움에 눈이 멀어 순간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 성의를 무참히 짓밟고 말았다. 윤기는 누군갈 위해 일부러 사오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침에 들어왔는데도 끝까지 마카롱을 챙긴 이유는 아마도 그 날 기분상한 티를 냈던 저때문일 것이었다.
그 날 여주는 깨달았다. 윤기의 사랑에 자기는 방해가 될 뿐이란 걸. 그 상대가 박희주라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용납할 수 없지만, 희주 곁에 있던 윤기의 얼굴은 너무나도 맑았다. 장대비 속에서 윤기와 희주가 입을 맞추던 그 순간, 여주는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둘 사이를 절대로 가를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걸 알았다. 이미 손을 뻗어도 도저히 닿지 못할 곳으로 윤기는 향해 있었다. 여주는 더이상 친구라는 이름으로 윤기의 삶에 간섭할 수 없었다. 어디까지나 자신은 친구의 탈을 쓴 구질구질한 전여친이었으니까. 언젠가 미련이 깨끗이 사라져서 저 얼굴을 가까이 마주해도 아무렇지 않을 날에서야 겨우 윤기를 제대로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다짐했다. 윤기와 멀어지기로.
“ 괜찮아. 내가 알아서 할게. “
여주는 등 뒤의 윤기를 보고 건조하게 대답했다. 이렇게 작은 것부터 멀어져보자, 우리. 여주는 고개를 돌려 느리게 따라붙는 윤기의 시선을 피했다.
“ 뭘 알아서 해. 받을 사람도 없는게. “
제 시선을 피하는 여주를 향해 윤기가 성큼 다가왔다. 차마 쳐다보지 못하고 노트북에만 고개를 쳐박은 여주를 잠시 보다가 윤기도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 교양 하나도 없으면서 뭘 알아서 해. “
“ ... “
“ 목요일 교양 줄테니까 가져가. “
윤기가 무심하게 여주의 어깨를 두드렸다. 항상 시간표를 엇비슷하게 맞췄던 여주였기에 윤기의 학점상황은 잘 알고 있었다. 아마도 이 교양을 저에게 주면 윤기도 4학년이 빠듯할 예정이었다. 4학년때는 무조건 두 학기 내내 금공강을 사수하겠다고 나름 치밀하게 시간표를 짜던 윤기였다. 그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어서 여주는 가슴 한 켠이 또 뻐근해졌다. 윤기는 끈질기게도 제 다짐을 꺾었다. 이렇게 다정한 방식으로.
하지만 흔들리면 안됐다. 여주는 작게 숨을 쉬고 윤기에게 말했다.
“ 호석이한테 물어보면 돼. “
“ ...뭐? “
“ 어제 가기 전에 혹시 망하면 꼭 말해달라고 했거든. 걔 친구 많잖아. 하나는 얻을 수 있댔어. “
뜬금없이 여주의 입에서 튀어나온 호석의 이름에 윤기의 인상이 구겨졌다. 섬짓한 불쾌함이 뒷목을 타고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 ...걔가 하나 줘도 부족할 거 아냐. “
“ 뭐 그렇긴 한데. 괜찮아. 4학년때 헤르미온느 해보지 뭐. “
“ 괜한 떼쓰지말고 받아. “
“ 싫어. “
시선을 피한 채 차갑게 말하는 여주는 명백하게 고집을 피우고 있었다. 윤기의 속이 끓는 것 같았다. 평소같았으면 먼저 달라고 성화였을 앤데, 준다고 해도 싫다고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호석에겐 부탁을 한다는 여주의 말에 왠지 화가 났다. 입을 꾹 다문채 호석에게 카톡을 보내고 있는 여주의 핸드폰을 윤기가 덥썩 잡았다.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그 다음에 어떻게 할 지 생각치도 않은.
그에 놀란 여주가 눈을 크게 뜨고 윤기를 바라봤다. 저 스스로도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행동이라 놀랐지만, 윤기는 그 얼굴에 대고 묻고 싶었다. 왜 자신의 친절을 자꾸 거절하는지. 왜 우리 둘 사이에 호석의 이름이 튀어나오는지.
머릿 속에서 웅웅대는 말들을 다듬어 끄집어 내려던 순간 남준이 윤기의 손에 있는 핸드폰을 빼앗아갔다.
“ 쓸데없는 걸로 싸우지마. “
“ ...싸운 거 아닌데요. “
“ 그럼 다행이고. “
한껏 매서워진 윤기의 눈에도 남준은 아랑곳않고 핸드폰을 다시 여주에게 쥐어줬다.
윤기에게 향했던 여주의 시선이 남준으로 옮겨갔다. 남준은 그런 여주에게 빙긋 웃곤 말했다.
“ 그럼 내 교양 줄게. “
“ 네에? “
“ 윤기가 학점 모자를까봐 거절한거지? “
“ ... “
“ 그럼 여기서 제일 학점 남아도는 사람이 줘야지. 별 수 있나. “
여주와 윤기의 신경전때문에 한껏 얼어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둘 사이에 눈치를 보고 있던 태형과 지민도 잘됐다며 남준의 말에 크게 반응했다.
여주는 갑자기 제 핸드폰을 빼앗은 윤기에게 따지고 싶었지만, 더이상 분위기를 망칠 순 없었다. 아직도 미간이 좁아져있는 윤기를 외면하고 남준을 바라봤다.
“ 내가 나름 졸업학기라서 과목을 좀 넉넉하게 잡았거든. 하나정도는 줄 수 있어. “
“ 진짜요? “
“ 대신 금요일 오후. 괜찮지? “
“ 그럼요! “
여주에겐 가뭄 속 단비같은 구원의 손길이었기에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고개를 대차게 끄덕이며 절대 무르기없기. 남준에게 약속까지 받아냈다.
가만히 지켜보고있는 윤기의 얼굴이 한 차례 더 굳어졌지만, 여주가 눈치 챌 틈도 없이 태형이 남준에게 소란스럽게 달라붙어왔다.
" 금요일 오후면 그거잖아요! "
" 응. "
" 헐...저 주면 안돼요? 그럼 제가 누나한테 교양 하나 토스할게용 "
" 너 전필 잡았다며. "
여지없는 말에 태형이 힝...풀 죽은 얼굴로 남준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아까부터 시끌시끌하던게 그것때문이었나, 여주는 태형이 저렇게 유난인 걸 보니 꽤 유명한 교양인가보다 싶었다.
" 누나 이번 학기에 남친 생기겠네요. "
남준의 가슴께에 얼굴을 묻고있던 태형이 여주쪽으로 고개를 돌려 별안간 그런 말을 건넸다.
뜬금없는 소리에 영문을 모르는 여주와 윤기가 동시에 태형을 돌아봤다.
" 와 누나 지금 남준이형이 준다는 거 뭔지도 모르는구나. 진짜 누나 계탔다. "
" 뭔데? "
" 성사철이잖아요! "
" 성사철? "
가물가물한 이름이었다. 아무리 아싸여도 웬만한 건 다 꿰고 있는데, 여주가 알고 있는 꿀교양 목록에는 없는 이름이었다.
그런데도 어디선가 들어본 기억이 있는 것 같아서 고개를 갸웃거리니 태형이 속상하다는 듯 입술을 삐죽거리며 답했다.
" 성과 사랑의 철학이요, 성사철. "
*
성사철.
교수님이 학점을 후하게 주는데다 학교내 유일한 ‘이성’에 관련한 수업이기에 강의실 입성이 하늘에 별따기보다 더 어렵다는 꿀교양,
한 학기당 단 삼십명만 들을 수 있는 그 수업은 여러 의미로 풍문이 대단했다.
소문 속 성사철은 오티때부터 한쌍이 된 남녀가 남은 학기를 내내 함께 해야하는 수업이었다. 매주 의무적으로 함께 과제를 수행해야 하며, 그 과제의 수위가 모두의 예상치를 뛰어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이미 결성된 커플 혹은 바로 직전의 남녀가 함께 하기 위해 선택한다는 과목이었다.
“ ...근데 넌 왜 신청했는데? “
“ 누나. 왜케 마음이 닫혀있어요. 수위가 높다고 커플들만 신청하나. “
아직도 어리둥절한 여주에게 성사철에 대해 긴히 해줄 말이 있다며 태형이 식탁의 맞은 편에 앉아 있었다. 아직도 미련이 남은 듯 거실쇼파에서 책을 읽고 있는 남준을 힐끗힐끗 보며 태형이 말을 이었다.
“ 거기 솔로가 절반이에요. “
“ 엥. 왜. “
“ 왜긴 왜에요. 씨씨해볼라고 하는거죠. “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태형이 가볍게 여주의 어깨를 쳤다. 여주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커리큘럼만 봐도 이렇게 숭한데 쌩판 모르는 남이랑 이 수업을 듣는다고?
강의안에 올라와있는 성사철의 커리큘럼은 정말이지 ‘성’으로 가득찬 내용이었다. 중간중간 성역할과 사랑의 철학 같은 건전한 내용도 있긴 했지만 전체적인 맥락은 현대인의 섹슈얼리티였다. 그것도 아주 노골적인 워딩들로 가득찬. 여주는 눈 앞이 캄캄해졌다.
“ 근데 이건 씨씨하려고 하기엔 너무 수위가 높은 거 아냐...? “
“ 누나 생각보다 유교걸이시네요. “
“ 뭐? “
“ 다 큰 성인인데 뭐 어때요. 연애경험 있는 사람들이면 할 만 하대요. “
태형이 여주를 연애경험이 꽤 있는 여자로 보는 듯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했다. 그에 여주는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을 회피했다. 사실대로 말하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왜나햐면 여주는 연애라곤 1도 모르는 연애 무식자였으니까.
여주의 인생 속 유일한 연애는 윤기와의 3개월이 전부였다. 그것도 아주 충동적이고 요상한 고백으로 시작돼서 결국은 여지없이 대차게 차여버린 연애. 뒤늦게 생긴 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서 구질구질함만 남긴 그 연애. 돌이켜보면 윤기와 사귀었던 3개월간 성적인 흥분이 일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저 윤기가 가끔씩 제 목에 숨을 불어넣거나 귓볼을 깨물면 순식간에 열이 올랐을 뿐, 그건 순간에 그치고 말았다. 다른 애들 이야기론 빠르면 한 두달만에 진도를 빼던데, 윤기와 여주에겐 그런 무드는 존재하지 않았다. 정말이지 잔잔한 물결같은 연애였다.
고작 그런 연애를 거쳤던 여주에게 성사철의 커리큘럼은 꽤나 큰 부담으로 느껴질 수 밖에. 수업이야 그렇다 쳐도, 풍문만 떠도는 매주의 과제를 가늠할 수 없었다.
여주가 조심스레 태형에게 물었다.
“ 매주 과제에 대해서는 들은 거 있어? “
“ 음. 저도 건너건너 들은 거라서 정확힌 모르는데. “
기억을 짚어보는 듯 태형의 미간이 좁아졌다. 여주는 자존심도 버리고 애타는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 하나 기억나는 건 상대방의 성적판타지 알아오기. “
” 미친 “
여주의 입에서 필터링없이 욕이 튀어나왔다. 전혀 상상치도 못한 분야였다.
“ 아 근데 그건 막판인가 그렇고. 처음부터 그렇게 쎄진 않대요. “
“ ...아주 큰 위로가 되네. “
“ 상대의 매력적인 신체부위 알아오기 이런 것도 있었던 거 같은데. “
“ 김여주. 그거 버리고 내가 주겠다는 거 가져가. “
연이은 충격적인 태형의 말에 여주가 낙담한 가운데 언제 주방까지 왔는지 윤기가 가까이서 말을 건넸다. 여주가 고개를 들어 윤기를 쳐다봤다. 식탁 끝에 올려둔 손가락을 가만두질 못하는 게 어딘가 초조해보였다.
“ 괜한 고집 피우지 말고. 네가 그런 걸 어떻게 들어. “
“ ... “
“ 그것도 모르는 남자랑. “
“ ... “
“ 내 교양 줄테니까. “
윤기가 보채듯 말을 이었다. 꼭 듣고 싶은 답이 있는 것마냥 구는 게 어딘가 이상했지만, 여주도 이 순간만큼은 윤기에게 멀어지겠다는 제 결심을 무너뜨리고 그에게 의지하고 싶어졌다. 아무리 들어도 쌩판 모르는 남자랑 듣기에는 부담스러운 수업이었다.
“ 수강취소해. “
고민하는 여주의 눈빛에 윤기가 참지 못하고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곤 노트북을 제 방향으로 틀고 마우스를 잡았다.
“ 뭘 취소해? “
그 때 거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주의 말도 듣기 전에 제가 먼저 취소버튼을 누르려던 윤기가 그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또, 정호석이었다.
“ 여주 교양 없다며. “
호석이 성큼 다가와 윤기와 여주 앞에 섰다. 학교에 내려오는 길에 비를 맞은 듯 호석의 한쪽 어깨가 푹 젖어있었다. 너 또 우산 누구한테 줬어. 여주가 인상을 팍 구긴채 그 어깨를 푸닥거리며 털어냈다. 후배들 씌워주느라 좀 맞았네. 호석은 여주의 높이에 맞춰 어깨 한쪽을 기울이며 눈을 예쁘게 접었다. 쒸익대며 노려보는 여주에게 호석이 다정스레 물었다.
“ 여주 교양 부족해? 아까 남준이형한테 하나 받았다고 하지 않았나? 내가 더 알아볼까? “
“ 아니. 그건 아닌데... “
“ 근데 왜? “
“ 누나가 남준이형한테 받은 교양이 성사철이에요. “
여주를 대신해서 태형이 끼어들어왔다.
“ 성사철이 아예 모르는 남자랑 짝꿍되서 해야되는 거라서 누나가 부담스러운가봐요. “
태형의 말에 호석이 다시 여주를 쳐다봤다. 여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애달픈 눈으로 호석을 바라봤다. 오늘따라 유난히 동그랗고 귀여운 여주의 얼굴에 호석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호석에 작게 웃자, 여주가 코를 찡그리며 항의했다.
“ 뭐가 웃기냐. “
“ 귀여우니까. “
“ 헐...립서비스 무슨 일이야 이런 상황까지 그러기야? “
“ 립서비스 아닌데. “
“ 장난치지마. 나 지금 완전 일촉즉발의 위기거든? “
“ 왜? “
“ 야. 내가 이걸 어떻게 모르는 남자랑 들어. 이거 커리큘럼 봤어? 완전 숭해! “
호석이 오자마자 제 심경이 쏟아져 나오는 여주였다. 아까 저에겐 그렇게 쌀쌀맞게 굴더니, 호석에게는 볼까지 부풀리며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윤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 내가 교양 빼줄거니까 넌 신경쓰지마. “
“ 어? “
“ 내 목요일 오후 교양 여주 줄거야. “
“ 너도 학점 빠듯하지 않아? “
“ 상관없어. “
더이상 선을 넘지 말라는 듯 윤기가 호석의 말을 차단시켰다. 그리곤 다시 꺼진 노트북 화면을 켰다.
“ 쌩판 모르는 남자만 아니면 되는 거 아냐? “
윤기의 손을 호석이 막았다. 윤기의 시선이 느리게 호석의 얼굴로 향했다.
“ 뭔 소리야. “
“ 나 그거 신청했어. “
“ ...뭐? “
“ 나랑 들으면 되겠네. 그럼. “
호석이 아직 노트북 위에 있는 윤기의 손을 강한 힘으로 밀어냈다. 한차례 더 굳은 윤기가 호석을 쳐다봤다. 호석은 여전히 해사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런 의도가 없는 것처럼, 무해하게.
# 이상한 기분
또 비였다.
이 놈의 장마는 언제쯤 끝날런지 빗줄기가 희미해진다 싶으면 다시 굵어지곤 했다. 덕에 전처럼 덥진 않았지만 가시지 않는 습기가 꿉꿉했다.
방에 있자니 딱히 할 게 없어서 여주는 전에 읽던 시집이라도 다 읽어보려는 생각으로 거실로 나왔다. 밤시간만 되면 약속한 것처럼 꾸물꾸물 제 방에서 튀어나오는 하메들이 오늘은 아무도 없었다. 넓은 쇼파에 풀썩 앉으니 공허한 거실의 공기가 제 몸을 감싸는 것 같았다. 성가시긴해도 북적거리는 맛이 있었는데. 어느샌가부터 하메들의 소란이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개강직전이 되자 하메들은 바빠지기 시작했다. 하반기 공채를 노리고 있는 남준은 취업캠프때문에 아침 일찍부터 나갔고, 아직 간이 쌩쌩한 새내기 둘은 동기들과 술잔을 기울이러 초저녁부터 나가 있었다. 하지만 그 중 가장 바쁜 건 호석이었다. 본인은 원치 않았지만 얼결에 맡게 된 댄스동아리 회장타이틀 덕에 호석은 매번 술자리가 있을 때마다 불려다니기 일쑤였다. 호석의 친구들은 그가 술이 약하단 걸 모르는 건지 매번 쉽게 집으로 보내주지 않았다. 결국 마지막까지 꽐라가 된 애들을 챙기고 다 풀린 다리로 혼자 집을 찾아오는 건 호석의 몫이었다. 가끔 윤기가 챙겨주긴 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을 정도로 호석은 매일이 바빴다.
여주는 테이블에 놓여져있는 시집을 집어들었다. 오늘은 왠지 쉽게 잠에 들면 안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공연히 호석이 걱정되서, 들어올 때까지는 버틸 요량이었다.
오늘을 포함하면 연거푸 삼일 째 술자리에 나가는 호석이었다. 어제 술자리가 유독 늦게 끝나서 오후에 잠에서 깬 호석은 내내 시체처럼 쇼파에 누워있다가 초저녁에 걸려온 동아리 애들의 전화에 또다시 집을 나섰다. 전화건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지나치게 하이텐션인게 오늘도 호석이 꽤나 시달릴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시를 읽어내려가자 잠이 꾸벅꾸벅 쏟아지는 것 같았지만 여주는 불굴의 의지로 기울어지는 고개를 쳐들었다.
" 뭐해. "
그 때 잠잠하던 윤기의 방문이 덜컥 열렸다. 방금 깬 듯 윤기의 머리가 부스스했다. 어제 밤부터 작업실에 박혀있다가 낮이 되서야 쉐어하우스로 돌아온 윤기였다. 낮부터 지금까지 쭉 잔 모양이었다.
" 잘 거면 들어가서 자. "
윤기가 여주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여주는 무심결에 윤기를 봤다가 고개를 훽 돌렸다.
미친. 하마터면 욕까지 할 뻔했다. 쏟아지던 졸음이 단번에 달아날 정도로 방금 잠에서 깬 윤기는 너무 귀여웠다.
여주는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려 숨을 골랐다.
" 왜 안자고 여기서 이러고 있어. "
지진난 심장을 달래고 있는 여주를 아는지 모르는 지 윤기가 머리를 기울여 어깨에 기대왔다. 윤기 특유의 따뜻하고 말랑한 냄새가 났다.
" 그냥. 좀 잠이 안와서. "
" 아까 보니까 거의 잠들기 직전이던데. "
" ... "
" 들어가서 자던가. "
" 오늘은 좀 늦게 잘라고. "
여주는 어깨에 느껴지는 뭉근한 무게가 따스해서 당장이라도 윤기를 안아버리고 싶었지만, 꾹 참으며 떨어뜨린 시집을 들었다.
평소같지 않은 여주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던 윤기가 물었다.
" 왜. "
" 호석이 기다리려구. "
" ...뭐? "
" 걔 오늘 또 술마시러 나갔잖아. 어제도 그렇게 시달려놓고. "
" ... "
" 걱정되니까 올 때까지 기다리려고. "
그 말에 윤기가 어깨에서 머리를 뗐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여주가 어리둥절하게 윤기를 바라봤다.
아직 잠의 여운을 전부 떨쳐내지 못한 듯 눈이 살짝 풀려있었지만 그 속에서 심기가 뒤틀린 것이 보였다. 마치 왜, 라고 묻는 듯한 윤기의 눈빛에 여주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 너도 알잖아. 걔 분위기 안망치려고 끝까지 마시는 거. 지 주량 뻔히 알면서. "
" ... "
" 또 마지막엔 다른 애들 챙기느라 제일 늦게 들어오고. 바보같은 게. "
" ...그래서. "
" 어? "
" 그걸 네가 왜 기다리냐고. "
윤기의 목소리가 잔뜩 낮아져있었다. 그게 어딘가 어색했다. 매번 술자리에 불려나가는 호석을 함께 걱정하던 윤기였다.
물론 저처럼 발까지 동동 굴러가며 호들갑을 떨진 않았지만, 늦은 새벽까지 호석이 연락을 받지 않으면 급격히 안색이 어두워지며 함께 찾아다니던 사람이었다.
그랬던 윤기가 제게 이유를 묻고 있었다. 호석을 왜 기다리냐고. 여주는 혼란스러웠다. 호석을 걱정하고 기다리는 일에 이유가 필요한가 싶었다.
숨 쉬듯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여주에게, 호석이란 사람은.
" 호석이니까. "
머릿 속을 관통할 필요도 없이 가슴에서 곧바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 대답에 어딘가 맥이 탁 풀린 듯 윤기의 눈이 공허해진 이유를 여주는 알 수 없었다.
윤기는 잠시 할 말을 찾는 듯 눈동자를 데구르 움직이다가 고개를 돌리곤 쇼파에 머리를 기댔다.
" 그래도 벌써 열한시야. 들어가서 자. "
" 기다린다니까. "
" 내가 기다릴테니까. "
" 응? "
" 내가 호석이 챙길테니까 넌 들어가라고. "
천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 윤기가 말했다. 아까보다 누그러진 목소리에 여주는 잠시 생각하다가 그러지 뭐. 가볍게 답하고 쇼파에서 일어났다.
그 때 테이블에 올려있던 윤기의 핸드폰이 울렸다.
'희주'
무심결에 스친 핸드폰 화면에서 그 이름이 보였다. 방으로 돌아가려던 여주의 걸음이 멈췄다. 윤기가 튀어나오듯 핸드폰을 들었다.
" 윤기야! "
그 건너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여지없이 들려왔다.
" 어. 갑자기 무슨 일이야. "
밤 늦게 걸려온 제 애인의 전화에 윤기의 목소리에서 걱정이 묻어나왔다.
건너에서 희주가 왜 그렇게 심드렁하냐며 보채왔지만 여주는 알 수 있었다. 무심한 목소리에서 뚝뚝 묻어나오는 애정을.
아까는 크게 들려오던 빗소리가 마치 사라진 듯 윤기와 희주의 대화만이 여주의 귓가에서 아른거렸다. 왜 전화했어, 윤기 보고싶어서, 술마셨어?, 응 좀 많이 마셨지, 어디야, 나 데리러 오게?, 지금 갈게. 꽤나 짧게 끊긴 대화 속 낱말 하나하나가 온갖 비수처럼 여주의 가슴에 꽂혀왔다.
적막을 가르고 외투를 걸쳐입는 윤기를, 여주는 도저히 쳐다볼 수가 없었다.
" 금방 다녀올테니까, 들어가서 자. "
" ... "
윤기가 여주의 어깨를 두드리며 곁을 스쳐지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여주는 쓰러지듯 쇼파에 기댔다. 저 스스로가 구질구질해서 참을 수 없었지만, 여지없이 눈물이 차올랐다.
걱정되서 가만두지 못하겠다는 듯 다급하게 나간 윤기의 뒷모습에서 주체하지 못하는 사랑이 보였다. 단 한 번도 여주가 겪어보지 못한 윤기의 모습이었다.
저와 사귈 때도 과하게 술에 취하면 종종 호석을 내보내던 윤기였다. 윤기는 예고도 없이 불러내는 걸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술에 취한 날은 더욱 그랬다. 그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윤기에 대한 마음을 자각한 이후에도 제대로 된 투정 한 번 부린 적 없던 여주였다. 원래 연애가 그런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잊었다고 생각했던 지난 상처가 드문드문 떠올라서 여주는 가슴이 아팠다. 윤기는 저를 사랑하긴 했던 걸까. 여주는 확신할 수 없었다.
*
' 따르릉 '
고요한 적막 속에서 집전화가 요란하게도 울렸다. 그 소리에 소스라치듯 일어났다.
분명 눈을 최대한 떴는데도 제 눈 속에 담긴 세상이 반쯤 접혀보였다. 손으로 눈두덩이를 더듬어보니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시계를 올려다보니 어느덧 네시였다. 창 밖에서는 아직도 굵은 빗줄기가 주륵주륵 내리고 있었다. 윤기가 그렇게 떠난 이후 혼자 펑펑 울다가 결국은 지쳐서 쇼파에서 잠이 든 모양이었다. 여주는 제 몰골이 처량했다. 진짜 실연당한 사람도 아니고. 진짜 구질구질의 끝을 보고있는 것만 같았다.
' 따르릉 '
쉬지도 않고 집전화가 울렸다. 평소에 집전화가 있었던가, 여주는 처음보는 전화기를 어둠 속에서 찾아냈다.
" 여보세요? "
전화기 건너가 꽤나 소란스러웠다. ㅇ,여ㅂ, 여보세, 자꾸만 같은 말을 반복하는 상대의 목소리가 뜨문뜨문 들려왔다.
" 누구세요? "
" 아, 거ㄱ, 호석이형네 쉐ㅎ, 맞아요? "
시끄러운 자리에 묻히는 남자의 목소리 속에서 선명하게 호석의 이름이 들려왔다. 여주는 다급하게 대답했다.
" 네 맞는데요! "
" 아 그럼 혹시 여기 좀 와주시면 안될까요? 지금 형이 많이 취해서! "
빨리요, 하며 건너의 남자가 여주보다 다급한 목소리로 주소를 읊었다. 쉐하에서 가까운 호프집이었다.
여주는 전화를 끊고 잽싸게 옷을 걸쳐입었다. 지금껏 취해서 호석이 먼저 연락 온 적은 있어도 다른 사람한테 연락이 온 적은 없었기에 초조해졌다.
우산을 두 개 챙겨서 들고 나가려는데 바구니에 우산이 하나뿐이었다. 윤기가 나가면서 두갤 챙겨간 모양이었다.
여주는 어쩔 수 없이 남은 우산을 챙겨서 집을 나섰다. 민윤기는 끝까지 저를 처량하게 만들 셈인 것만 같았다.
*
호프집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이미 한참 달리고 난 듯 술에 쩔어있는 애들로 가득 차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자 마자 풍겨오는 진한 술냄새와 각종 안주들이 섞인 냄새가 역해서 여주는 얼굴을 잔뜩 구겼다.
" 어. 여기에요. 여기. "
아까의 남자가 말한 대로 자리를 찾아가니 앳된 얼굴의 남자의 어깨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는 호석이 보였다.
호석을 발견하자 마자 뛰어온 여주에게 앳된 얼굴의 남자가 손을 휘적거렸다. 남자 또한 이미 취한 듯 눈이 반쯤 풀린 채로 여주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 안녕하세요, 저 같은 댄동에 전정국입니다. "
" 아. 네네 안녕하세요. 전 김여주에요. 호석이 많이 취했어요? "
" 네에. 아까 3차때부터 많이 취해가지구, 제가 가랬는데 끝까지 사람들 챙기겠다고 해가지구. "
들어봤자 다 알만한 내용이었다. 정호석이 그렇죠 뭐. 여주는 익숙하다는 듯 정국의 말에 대꾸했다.
" 근데 평소보다 형이 많이 취해서요. 전화기는 꺼져있구. 그래서 급하게 비상연락처로 전화걸었어요. "
여주가 정국의 말을 들으며 곁에 있던 호석의 얼굴을 가까이 살폈다. 얼굴부터 목까지 새빨개진 게 마셔도 보통 마신 게 아닌 것 같았다.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얼른 여기서 탈출시켜야 했다. 여주는 호석의 한쪽 팔을 부축하면서 정국에게 말했다.
" 혹시 저기 입구까지만 부축해줄 수 있을까요? "
" 아. 네네. 그럼요. "
정국이 튀어오르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국이 단숨에 호석의 다른쪽 팔과 허리를 잡으며 일으켜세웠다.
취한 정국이 조금 비틀거리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꽤 단단하게 호석을 부축해주어서 여주는 수월하게 테이블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단숨에 입구까지 가려하는데, 별안간 어떤 손이 호석의 옷을 잡아당겼다.
" 야~ 정호석 벌써 가냐? "
잔뜩 달아오른 얼굴의 남자였다. 같은 동아리 사람인 듯 했다. 이미 잔뜩 취해서 정신까지 잃은 호석을 붙잡고 남자가 놓아주지 않았다.
" 하 이 새끼 취한 척 하는 것 좀 봐라. 야 정호석! "
" ... "
" 니 없이 뭔 술을 마시냐~ 나랑 아침까지 조져야지~! "
" ...저기요. 호석이 취해서요. 좀 놔주실래요. "
가만히 있으면 기어코 호석을 다시 제자리에 앉힐 것만 같은 남자의 행동에 여주가 입을 열었다.
남자는 눈을 두어번 깜빡이며 여주를 보더니 푸, 웃어버렸다.
" 이 새끼 이렇게 금방 취하는 애 아니에요~ 맨날 마지막까지 같이 달리는 새낀데 취하기는 무슨. "
" ... "
" 친구분이 호석일 몰라도 너무 모르시네. "
" 뭐라구요? "
" 지금 빨리 집 가고 싶어서 취한 척 하는 거라고요. 이 간사한 새끼. "
" 놔요. 당장. "
결국은 여주가 화를 참지 못하고 남자의 손을 내쳐버렸다. 속절없이 내쳐진 제 손을 보던 남자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가요 얼른. 정국이 그 사이를 지켜보다가 여주에게 조용히 말했다. 여주는 남자를 잠시 노려보다가 다시 호석을 이끌고 입구로 향했다.
그 뒤로 남자의 말이 또 다시 꽂혔다.
" 야, 가더라도 카드는 두고 가라. "
" ... "
" 맨날 계산하던 새끼가 내빼면 누가 내냐, 엉. "
" 저 개새끼, "
정국이 낮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리곤 발걸음을 멈추고 여주에게 말했다.
" 여긴 제가 알아서 할테니까 형 좀 부탁드려요. "
단숨에 호석을 맡기고 정국이 남자에게로 향했다. 여주는 뒤돌아볼 틈도 없이 호석을 안고 호프집을 벗어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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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석은 꽤나 무거웠다. 워낙 활발하고 운동도 좋아하는 호석이라 마르다고만 생각했는데, 거의 질질 끌다시피 안고 오면서 여주는 호석의 몸이 꽤나 단단하고 무겁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와중에도 꾸역꾸역 우산을 들고 왔지만, 거침없이 쏟아지는 장대비 속에서 결국은 둘 다 푹 젖고 말았다. 쉐하에 겨우겨우 도착하고 나니 온 몸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마음같아선 바로 침대로 뛰어들고 싶었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여주는 호석을 거실까지 끌고 가서 앉혔다. 아직도 술기운 때문에 힘든 듯 호석의 숨이 거칠었다.
" 호석아, 호석아. "
여주의 부름에도 호석은 정신을 못차리고 있었다. 깨우려고 어깨를 짚으니 미세한 떨림이 느껴져왔다.
" ...추워. "
호석이 눈을 감은 채 작게 읊조렸다. 여주는 순간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에 빠졌다.
호석이 입은 티셔츠는 이미 젖어서 그대로 두면 체온을 빼앗겨 꼼짝없이 감기에 걸릴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다른 옷으로 갈아입히자니...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옷을 벗기고, 그 몸을 닦아주고 새 옷을 입히는 건 아무리 친구라곤 해도 꺼려지는 일이었다.
" 추워. "
하지만 여주를 재촉하는 듯 호석의 떨림이 더 강해져왔다. 이마에 손등을 갖다대니 아까보다 더 열이 오른 것 같았다.
별다른 수가 없었다. 지금 쉐어하우스에는 아무도 없고, 호석을 챙길 수 있는 사람은 저밖에 없었으니까.
" 잠깐만 기다려 호석아. "
여주가 빠르게 달려가 수건과 호석의 티셔츠를 챙겨왔다.
그리곤 호석의 앞에서 두 어번 크게 숨을 내쉬었다. 마치 중요한 임무라도 떠안은 듯 진중하게 호석을 바라봤다.
" 호석아. 내 사심은 없어. 진짜로. "
여주는 무의미한 말을 마지막으로 숨을 크게 내쉬곤, 그대로 호석의 티셔츠를 벗겼다. 암홀에서 걸린 걸 빼느라 팔을 잡으려는데 호석의 맨살이 손등에 닿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순간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힌 기분이 들었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 처럼 피가 계속해서 솟구치는 게 느껴지고, 숨이 턱 막혀서 머릿 속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느낌이었다. 옷을 전부 벗기니 후각을 덮쳐오는 호석의 향수와 술냄새가 더욱 여주를 이상한 기분에 젖게 만들었다. 마치 뜨거운 화마가 온 몸을 지지는 것만 같았다.
잠시 뭐에 홀린 듯 호석을 보고 있던 여주는 잡념을 몰아냈다. 눈 앞의 호석은 불알친구, 자기를 잘 따르는 댕댕이.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마른 몸에 단단히 자리잡혀 있는 근육들이 지나치게 야성적이긴 했지만...여주는 다시 고개를 휘저었다. 여주는 이를 꽉 깨물고 수건으로 호석의 몸을 빠르게 닦아냈다.
중간중간 닿는 맨 살이 데일 것처럼 뜨거웠다. 여주는 이러다 진짜 큰 일이 날 것 같아서 얼른 호석의 티셔츠를 집어들었다. 자꾸 불경스러운 생각을 품게 하는 호석의 몸을 얼른 가려야 했다.
그 때, 옷을 입히려 어깨를 잡은 순간 호석의 눈이 반쯤 떠졌다.
" ...여주야. "
풀린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호석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여주는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이건 마치 자신이 호석을 덮치려고 하는 상황같았다. 잔뜩 젖어있는 제 몸과 정신을 잃은 채 상의가 벗겨져있는 호석의 모습이 정말 변명할 껀덕지조차 없게 노골적이었다.
여주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말을 더듬었다.
" 호, 호석아. 이건, 너가 춥다고 해가지구, "
" ... "
호석의 눈이 한층 짙어졌다.
" 나 진짜, 사심 없이. 그냥 추워 보여서, "
" ...여주야. "
" ...어? "
호석이 느리게 손을 들어 여주의 뺨을 쓸었다. 아직 물기가 자박한 호석의 손끝에 여주의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애틋하게 제 얼굴을 쓸어내리는 호석이 여주는 낯설었다. 이번에는 온 몸이 간지러운 게 잠자코 있을 수 없는 듯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도저히 점점 가까워져오는 호석의 눈동자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호석아. 여주는 저도 의식하지 못한 채 그 이름을 불렀다.
" 여주야. "
그 부름에 답하듯, 호석의 입술이 여주의 입술에 맞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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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재미있게 읽어주셨을까요?
호석이가 여러분의 심장에 불을 지폈군요 워후! 윤기 분발해...^^
오늘은 정국이도 드디어 등장했습니다. 정국이는 아마 앞으로 호석이편에서 열심히 활약하게 될 것 같아요 :->
남은 연말 잘 마무리하시고, 우리는 연초에 봐요! 해피뉴이어입니다 독자님들!!
< 암호닉 명단 > -12.26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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