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냥냥이와 댕댕이>
# 정처없는 불안함
" ...너 목에 이거 뭐야. "
올려다 본 윤기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시선이 향한 끝이 제 목이란 걸 깨달은 여주가 급하게 손을 들어 목덜미를 가렸지만, 윤기가 그 손목을 잡아챘다.
잡힌 손목이 금세 아려올 만큼 윤기의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뚫어질 것처럼 저를 쳐다보는 윤기의 얼굴이 지독하게 차가웠다.
" 뭐야. 여주한테 왜 그래. "
가만히 둘을 지켜보던 호석이 머그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제 말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듯 윤기는 여전히 여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호석이 의아하게 바라보자, 윤기는 살벌한 눈빛으로 시선을 맞춰왔다.
" ...무슨 일이야. "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호석이 다시 한 번 물었지만, 윤기는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눈빛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 사이에서 손목이 잡혀있던 여주가 아, 작은 신음을 내뱉자 호석의 미간이 좁혀졌다. 윤기에게 잡힌 여주의 손목이 힘에 짓눌려 벌겋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 손 놓고 말해. "
경고하듯 호석의 목소리도 깊게 낮아졌다.
그에 여주의 손목을 본 윤기가 깨듯 힘을 풀었다. 제 손목을 잡고 여주가 작은 신음을 흘렸다.
여주야. 괜찮아? 쇼파에 있던 호석이 일어나 성큼 여주에게로 다가왔다. 호석은 상태를 살피기 위해 뒤돌아있는 여주의 어깨를 잡고 제 쪽으로 돌리려던 순간, 윤기가 그 손을 내쳤다.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호석의 시선이 여주에게 닿기 전에, 윤기는 여주의 목덜미를 한 손으로 감쌌다. 그리곤 그대로 여주의 손을 이끌고 제 방으로 향했다.
*
" ... "
윤기의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여주의 발이 쉴새없이 움찔거렸다. 튀어야하나, 말아야하나. 미니 냉장고쪽에서 뭔가를 찾고 있는 윤기를 힐끔힐끔 바라보며 수없이 탈주계획을 세웠다가 포기했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말없이 제 목덜미를 내려보다가 이를 빠득 갈곤 말 없이 냉장고쪽으로 간 윤기였다. 무사히 도망칠 기회는 지금밖에 없었다. 여주는 다시 한 번 윤기쪽을 힐끔 보곤 결심한 듯 발 뒤꿈치를 세웠다.
" 잠자코 있어. "
미친, 쟤는 눈이 등 뒤에도 달렸나. 여주는 살벌한 윤기의 목소리에 세운 뒤꿈치를 얌전히 내렸다. 아무래도 도망가긴 글른 것 같았다. 차라리 이 숨 막히는 상황에서 버티려면 뻔뻔해지는 게 낫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여주는 잔뜩 움츠린 어깨를 어색하게 펴고 방을 빙 둘러봤다. 입주날 열린 방문 틈 사이로 훔쳐봤던 윤기의 방 안까지 들어오게 된 건 처음이었다. 밖에서 대충 봤을 때는 역시 민윤기스럽게 인테리어는 1도 신경 쓰지 않은 무채색 소품들만 가득하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들어와서 보니 그 소품들이 차분하게 적절한 곳에 잘 배치되어 있었다. 오히려 파스텔 톤으로 꾸며진 제 방보다 훨씬 정갈하고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째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긴 했지만, 볼 수 있을 때 다 눈에 담아가자는 생각이 들었다. 윤기의 방은 금녀의 구역을 넘어서, 민윤기 제외 모든 인물들에게 금단의 구역이었으니까.
매일 서로의 방이 마치 자기 방인 것처럼 들락날락 거리는 태형.지민과 달리 윤기는 절대로 제 방에 누군가를 들이는 법이 없었다. 그건 오랜 친구인 호석도 마찬가지였다. 가끔 호석이 장난을 치며 방문 안까지 들이닥치면 잔뜩 얼굴이 구겨진 채 온 힘으로 밀어내는 윤기였다.
그래서 이 상황이 숨이 막히면서도 새삼 호기심이 솟구치는 여주였다. 뭘 숨겨놨길래 그렇게 문을 꼭꼭 걸어잠그는지 전부터 궁금했으니까.
여주는 제 상황도 잊은 채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윤기의 방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 때, 소름끼치게 차가운 무언가가 목에 닿았다.
" 가라앉혀. "
언제 다가왔는지 윤기가 제 목덜미에 미니 아이스팩을 갖다대고 있었다. 어어, 여주가 어색하게 답하며 그대로 아이스팩을 잡았다. 목에서부터 스며드는 차가운 기운이 등골까지 내려가는 것 같아서 소름이 돋았다. 눈을 질끈 감고있으려니, 손목이 부드럽게 잡혀왔다.
" 손목. 많이 아팠어? "
다정한 목소리를 향해 눈을 뜨니 윤기가 옆에 걸터앉아 제 손목을 살피고 있었다. 여주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지만, 윤기는 신경이 쓰이는 듯 코를 찡그리곤 냉찜질팩을 손목에 감쌌다. 여주는 가만히 그런 윤기를 바라봤다. 아까는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처럼 차갑더니 이렇게 또 말랑말랑해지면 어디에 적응을 해야하는지 혼란스러웠다.
" ...정호석이야? "
짧은 적막 속에서, 윤기가 여전히 손목에 시선을 꽂은 채 물었다.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호석의 이름에 여주가 무의식적으로 잡혀있는 손목을 제쪽으로 당겼다. 하지만 윤기가 다시 부드럽게 잡아당겨 그 손을 잡았다. 맞잡은 윤기의 손에서 뜨거운 온기가 느껴졌다.
맞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윤기의 낮은 음성에 여주는 대답않은 채 작게 숨을 뱉었다. 잡은 손에서 힘이 느껴졌다. 윤기가 고개를 들어올려 여주의 눈을 바라봤다. 순간 모든 걸 간파당할 것만 같아서 여주는 그 시선을 피했다. 항상 미심쩍을 때마다 제 눈을 뚫어져라 보며 애써 감춰둔 감정들을 캐치하던 윤기였다. 물론 그건 여주도 마찬가지였다. 별 것 아닌걸로 토라지고 싸워도 결국은 오해가 쌓여 감정을 감춰둔 쪽이 들키고 말았다. 함께한 세월이 만들어준 전리품같은 것이었다. 서로의 눈만 봐도 모든 걸 알 수 있는.
" 나 봐. "
윤기가 조심스럽게 여주의 턱끝을 들어올렸다. 기어코 마주한 윤기의 눈이 깊었다.
" ...사고같은 거야. "
" ... "
" 호석이는 잘못없어. "
제 물음에 수긍한 여주가 호석을 감싸는 듯 답하자 윤기의 속이 뒤틀렸다.
" 그게 어떻게 하면 사고가 될 수, "
속부터 끓어오르는 분노에 윤기가 따지듯 뱉다가 끝을 흐렸다. 어디에서 왜 생겼는지 모를 감정들이 제멋대로 머릿 속을 헤집어 놓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호석에게 달려가 캐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럴만한 명분이 없었다. 저에겐 여자친구가 있었고, 여주에겐 고작 친구일 뿐이었다.
친구라는 이름으로 넘볼 수 없는 영역. 윤기는 그걸 알았다. 설령 둘 중 하나가 진심이었다고 하더라도 제게 끼어들 권리같은 건 없었다.
그게 왠지 모르게 분해서 윤기는 입술을 깨물었다.
" 호석이한텐 비밀로 해주라. "
" ... "
" 걘 진짜 아무것도 몰라. "
제 손을 꽉 잡는 여주의 얼굴이 꽤 간절했다. 가슴이 꽉 답답해지는 기분에 윤기가 숨을 작게 뱉었다.
여주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호석의 이름이 불쾌했던 건 언제부터였을까. 윤기는 맞잡은 손을 내려다보며 정리되지 않은 감정들을 추스렸다.
하얗고 자그마한 여주의 손이 제 큰 손안에 꼭 들어와있었다. 새어나갈 틈 없이. 분명히 단단히 제 손에 있는데도 막연하게 두려움이 밀려왔다.
이런 당연한 순간들이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윤기는 곁에 있는 걸 다시 확인하듯이 여주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동그란 이마, 큰 눈, 예쁜 코. 느리게 여주의 얼굴을 훑던 윤기의 시선이 입술에서 멈췄다.
윤기가 모르는 지난 새벽을 말하듯 여주의 아랫입술이 볼록하게 부어 있었다. 공연히 머리가 지끈 아팠다. 연애를 할 때에도 차마 닿지 못한 곳에 다른 이의 흔적이 느껴지는 게 속 깊이 불쾌했다.
윤기는 다른 손으로 부은 입술을 매만지자, 여주가 따가운 듯 눈을 찡그렸다.
" ...호석이 좋아해? "
불안함이 정제되어 나온 말은 겨우 그따위의 물음이었다.
아직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앞으로 변할 지 모르는 그 마음에 대해 확실한 답을 듣고 싶었다.
제 질문에 눈을 동그랗게 뜬 여주의 눈가가 잠시 흔들렸다. 하지만 곧 고개를 내저었다.
" 그럴리가. "
아니,라는 답 대신 그럴 리가 없다는 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윤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여주는 무언갈 생각하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 단호한 얼굴로 덧붙여 말했다.
" 호석이는 친구잖아. 친구로서는 좋아해. "
" ...그럼 됐어. "
뭐가 됐다는 건지, 윤기는 제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마주한 여주의 눈이 한치의 흔들림이 없다는 것. 그 안에선 제가 예감한 불안함의 싹은 보이지 않았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깊은 안도감이 들었다.
윤기는 제 말에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는 여주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오롯이 저만 바라보고 있는 여주를 다시 한 번 확인하듯이.
# 너를 어떻게 미워하겠어
" 어, 여주야. "
" 히익!!! "
" 태형이가 강아지 데리구 왔는데, "
" 나, 나 강아지 알러지 있어서!!!! "
" ...어? "
(도망)
*
" 어. 여주야. 남준이형이 떡볶이 사왔는데, "
" 히익!!! "
" ? "
" 나 떡볶이 알러지 있어!!! "
" 어? "
(도망)
*
" 어. 여주야, 오늘 호석이, "
" 어, 나 호석이 알러지 있어서!! (도망) "
'텁'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 방으로 달려가는 여주의 목덜미가 잡혔다.
" 이거 놔!!놰럐걔!!!! "
" ...너 뭐하냐. "
목덜미가 잡힌 채 발버둥치던 여주가 예상하지 못한 목소리에 고개를 올려다 보았다. 저보다 한참 위에서 남준이 이상하다는 듯 여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호석이 알러지? "
남준이 잡고 있던 목덜미를 놔주며 물었다. 여주는 겸연쩍은 얼굴로 핳,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그에 남준이 호석이 왜, 또 한 번 물었다.
" 아니, 오빠 언제 왔어요. 오늘 스터디 끝나고 바로 취캠 뒤풀이 간다더니. "
" 말 돌리는 거 봐라. "
" 으, 으언제 제가 말을 돌렸어요오. "
" 호석이 왜 피해. "
" ...에??????? "
단숨에 정곡을 찌르는 남준의 물음에 여주가 흠칫 놀랐다. 이 인간은 왜 이렇게 또 눈치가 빨라. 여주는 주체없이 흔들리는 눈동자를 감출 길이 없었다.
" 피할 거면 눈치껏 피하던가. 너무 대놓고 피하니까 전부 알잖아. "
" ... "
" 이제 지민이 태형이도 알겠네. "
" 그, 그렇게 티나요? "
" ...그걸 네가 모르는 게 신기하다. "
남준은 피식 웃으면서 식탁의자에 앉았다. 제 자리에서 벙쪄있던 여주가 깨듯 쪼르르 달려가 남준의 맞은 편에 앉았다.
방금 씻은 듯 남준의 머리칼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남준은 목에 걸려있는 수건으로 물기를 털어내며 여주를 바라봤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여주가 물어왔다.
" 어떻게 티나요? 정확히 구체적으로 말해주세요. 서술형으로다가. "
" 너 요새 거실 나올 때마다 방문 살짝 열고 호석이 있나 확인하지? "
" 헐 "
" 호석이 있으면 문 닫고 안나오고. "
" ... "
" 맛있는 거 사와도 호석이 있으면 나와보지도 않잖아. 먹을 거 사오면 제일 먼저 튀어나와서 셋팅까지 하던 애가. "
" ... "
" 거실에 있다가도 호석이 나오면 또 후다닥 들어가고. 말도 안되는 이유 갖다대면서. 오늘은 뭐, 호석이 알러지? "
남준의 입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제 행적에 여주의 얼굴이 붉어졌다. 제 스스로도 유난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제 3자가 보기에도 이런 지랄발광이었을 줄이야.
그 날 이후 계속해서 호석을 피하던 여주였다. 그 얼굴만 봐도 지난 새벽의 장면들이 눈 앞을 스쳐지나가서 도저히 정상적으로 마주할 수가 없었다.
하루 이틀이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호석의 얼굴만 보면 심장이 요동을 쳐서 일주일 가까이 도망을 치고 있었다.
어째 이상한 기분이었다. 친구를 상대로 야릇한 충동에 사로잡힌 죄책감이 이렇게도 길게 이어지는 건지. 제 감정을 알 수가 없었다.
여주의 얼굴이 심각해지자 남준은 젖은 수건을 개켜두며 물었다.
"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
남준의 목소리가 퍽 다정해서 여주는 낱낱이 다 말하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아무리 혼자 들고 가야하는 비밀이라고는 해도, 매일 마주치는 얼굴 앞에서 속절없이 마음이 휘청이곤 했다. 그럴 때마다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상담이라도 받고 싶었다. 이게 대체 무슨 감정인지, 어떻게 수습해야 하는 건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제 입으로 꺼내기엔 너무 민망한 일이었고, 얼떨결에 들킨 사람은 하필이면 윤기였다. 윤기는 제게 호석을 좋아하냐는 이상한 질문을 던지고는 아니라는 제 대답에 그럼 됐다는 식의 모호한 말을 끝으로 이 일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호석과 단 둘이 있을 순간에 처하면 저를 부르거나 먼저 데려가는 등 이상한 행동만 했다.
여주는 한숨을 뱉고 남준을 바라봤다. 특별한 해답은 나오지 않지만, 무슨 말이든 편하게 들어줄 사람. 남준은 한참이나 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옆에서 자꾸만 징징대는 카톡은 신경쓰지도 않은 채. 여주는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 일이, 있긴 했는데요. "
" 응. "
" 약간 사고 같은 거여서...좀, 많이 이상한, 그런 사고같은 거. "
" 응. "
" 그게 저는 알고, 호석인 몰라요. 걔가 그 날 많이 취해가지고. "
처음으로 남에게 말하려니 말이 두서없이 튀어나왔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정리해서 말을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여주가 한참을 입을 달싹이자, 그래서? 남준이 물었다.
" 근데 그 날 이후에 호석이 얼굴을 보는 게 되게 불편해요. "
" ... "
" 막 걔만 보면 그날이 떠올라서 머리가 지끈거리고. "
" 흠. "
" 이게 죄책감인지 뭔질 모르겠어요. 그래서 계속 피하게 돼요. "
구체적으로 남준에게 그 날의 기억을 말할 순 없었지만, 최대한 가감없이 제 감정을 끄집어냈다. 차라리 말하고 나니 속이 후련한 것 같았다.
아무도 이 문제를 해결해줄 순 없겠지만, 쉐하에서 제 솔직한 심정을 아는 이가 한 명은 있다는 게 심적으로 위로가 됐다.
생각에 빠진 듯 진중해진 남준이 잠깐의 적막 후 여주를 바라봤다.
" 그렇게 계속 피하면 달라질 게 있을까. "
" ...네? "
" 호석이만 보면 머리가 아프고 복잡해지는 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는 거야? "
남준이 영문 모를 말들을 건넸다. 의중을 알 수 없어서 여주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 내가 보기엔 갈수록 심해질 것 같은데. "
" 에? "
" 지금 너 얼굴만 봐도. "
남준은 입꼬리를 올리며 여주의 머리를 흩트렸다. 아, 쫌. 여주가 질색하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엉망이 된 앞머리 사이사이로 남준의 얼굴이 들어왔다. 여주는 앞머리를 한 번에 넘기며 따지듯 물었다.
" 그게 뭔 소리에요. "
" 그건 네가 알아내야지. 나한테 물을 게 아니고. "
또 영문 모를 소릴 하며 남준이 핸드폰을 든 채 식탁을 벗어났다. 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어서 여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이 뒤에서 현관문을 향해 걸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에 돌아보니 남준이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 있었다.
" 어디 가요? "
" 취캠 뒤풀이. "
" 엥? "
" 스터디가 일찍 끝나서 잠깐 들른거야. "
" 근데 왜 씻어요. 차피 술마시러 가면서. "
여주의 물음에 남준이 잠깐 뜸을 들였다.
" 잘보이고 싶으니까. "
" ...????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요 오빠? "
" 아마. "
답한 남준의 얼굴이 해사했다. 바깥은 벌써 어둑어둑한데 그 얼굴만 유독 빛나는 것처럼. 사랑에 빠진 얼굴이 저런 건가, 여주는 신기했다.
" 들어오면 다 물어볼거에요. 각오해요. "
" 귀여운 경고네. 근데 어쩌지. 나 오늘 늦게 들어올 건데. "
대놓고 늦게 들어오겠다는 선언에 여주가 아연실색했다. 헐, 역시 으른. 여주의 말에 남준은 피식 웃곤 신발을 고쳐신었다.
" 그래서 말인데 오늘 호석이 네가 좀 챙겨줘. "
" ...네? "
" 호석이 오늘 공연 끝나고 회식까지 갔대. "
" ... "
" 다른 애들은 집에 없고. 부탁할 사람이 여주뿐이네. "
갑작스러운 부탁에 원망스러운 듯 여주의 입꼬리가 점점 내려갔다. 아랑곳 않은 채 남준은 문고리를 잡았다.
" 호석이, 부탁해. "
*
애꿎은 천장만 노려보던 여주가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두시에 가까워진 시각이었다.
" 망할... "
차라리 잠이라도 들었으면 좋겠는데, 잠이 오질 않았다. 아마도 오늘 낮에 태형이 사다준 아메리카노때문에 잠이 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망할 놈이 샷을 하나 빼달라고 했더니 잘못 알아듣고 한 샷을 추가한 바람에 세샷이 들어간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말았다. 카페인이 지나치게 잘 받는 여주는 그 덕에 피곤한데도 잠에 들 수가 없었다. 심장이 쿵쾅대는 게 밤이 되니 카페인이 몸 속을 활발하게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게다가 나가면서 직접 저에게 호석을 부탁한다고 한 남준의 말이 귓가에 계속해서 맴돌고 있었다. 집에 아무도 없으니 챙겨달라는 부탁을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공연을 다녀오면 파김치가 되는 호석이 또 뒤풀이에 간다는 게 그 와중에도 걱정되는 여주였다. 그 때 봤던 진상자식이 또 있다면. 머리가 지끈거렸다.
윤기에게 들어서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호석은 동아리에서 아낌없이 돈을 쓰는 모양이었다. 아무런 거리낌없이 호석의 카드를 놓고 가라고 했던 그 인간과, 무례한 말에도 아무런 제지가 없었던 다른 동아리 사람들이 그걸 증명해주고 있었다. 오늘도 동아리 사람들과 마시는 거라면, 틀림없이 호석이 전부 계산할 것이었다. 속에서 화가 부글부글 끓었다.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이나 별반 다를 게 없는 인간들에게 환멸이 일었다.
고등학교 때도 전교회장이라는 명목으로 필요없는 지출이 잦던 호석이었다.
호석의 아버지가 중견기업 사장님이란 걸 알게 된 이후로는 아이들의 성화가 더 심해졌다. 교내 행사같은 게 열릴 때마다 이번엔 햄버거를 사달라느니, 피자를 사달라느니하는 투정에 가까운 요구가 늘어났다. 그에 호석이 음식을 사들고 오면 그에 대해서도 저렴한 브랜드를 골랐다며 이런 저런 트집을 잡기 일쑤였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호석은 해사한 얼굴로 다음번엔 더 좋은 걸로 준비하겠다며 웃었다. 그 곁에서 지켜보던 여주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갔다. 착해빠져서는 속상한 티도 내지 못하는 호석이 안타까웠으니까.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말을 여주는 그때서야 배웠다. 아낌없이 잘해주면 더 많은 걸 바라는 아이들이 호석의 곁에는 너무나도 많았다.
' 버려지는 것보단 내가 좀 더 참는 게 나아. '
언젠가 어두운 얼굴로 그런 말을 했던 호석이, 여주의 가슴 한 켠에 내내 자리잡고 있었다. 단 한 번도 지친 내색을 하지 않던 호석이 유일하게 진심을 비추었던 그 날.
' 너도 민윤기 돌아오면 나 버릴 거잖아. '
다 안다는 듯 초연하게 뱉어오는 그 말에 단호하게 아니라고 답하지 못한 자신이 지금까지도 원망스러웠다.
그 날 이후 호석은 다시 전처럼 마냥 해맑고 밝은 아이로 돌아와 있었다. 그 전보다도 더 과할 만큼.
뒤늦게 후회스러워서 몇번이고 진지하게 대화를 시도해봤지만, 빈번히 장난으로 웃어넘기는 호석때문에 실패한 여주였다. 그게 아직도 마음에 걸렸다. 어쩌면 그 날 호석에게 다른 대답을 주었다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때문에.
여주는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까만 밤하늘에 드문드문 별들이 반짝였다.
그 위에 걸려있는 초승달이 꼭 호석같았다. 항상 반짝반짝이며 방긋 웃고 있는 정호석.
아무래도 오늘은 호석이 괜찮은 지 제 눈으로 확인해야할 것 같았다. 여주는 문 소리가 들리면 방문을 살짝 열고 그 틈으로 호석이 괜찮은지 살펴볼 계획을 세웠다.
때마침 현관문 소리가 들렸다. 여주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방문을 살짝 열었다.
문 틈 사이로, 지친 걸음으로 현관에서 올라오는 호석이 보였다. 오늘도 많이 마신 듯 얼굴이 꽤 붉었다. 그 새끼가 멕였나, 여주는 이를 빠득 갈았다.
호석은 한번 빙 둘러보더니 쇼파에 쓰러지듯 앉았다. 온 몸에 힘이 풀린 듯 늘어진 채 기댄 호석은 한번 숨을 크게 내쉬었다가 이내 고요해졌다. 거실의 시계초침만 들리는 적막 속에서 여주는 문 틈사이로 호석을 살피며 발을 동동 굴렀다. 얼마 전 인터넷 기사에서 과음했다가 제대로 숨을 못쉬어서 죽을 뻔했다는 사람이 퍼뜩 떠올라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숨소리가 들리질 않으니 제대로 숨을 쉬는지 어쩐지 알 수가 없었다.
여주는 잠시 고개를 들어올려 호석을 보다가, 조심스레 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곤 살금살금 호석에게로 다가갔다.
쇼파 등에 머리를 기댄 채 호석이 눈을 꼭 감고 있었다.
" ... "
예쁘게도 자네, 여주는 작게 혼잣말을 흘리며 가까이 귀를 갖다댔다. 새근새근 규칙적인 숨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숨소리가 고른 걸 보니 오늘은 만취할 정도로 마시진 않은 모양이었다. 지난번에 봤던 정국인가 하는 남자애가 챙겨줬을까. 여주는 안도했다.
하지만 이 상태로 잠드는 건 영 불편해보여서 여주는 제 방에서 담요와 베개를 챙겨왔다. 베개를 쇼파 끝에 두고 호석의 머리를 옮기기 위해 양 손으로 고개를 잡는데, 전해오는 온기가 뜨거워서 여주는 흠칫했다. 별안간 속이 울렁거려서 여주는 느리게 호석의 얼굴을 훑었다. 어쩐지 애달픈 듯한 기분이 들어서, 가만히 그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 날 새벽과는 결이 다른 감정들이 가슴에 차오르는 것 같았다. 여주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숨을 뱉었다. 지금은 이런 잡념에 빠져들 타이밍이 아니었다.
여주는 조심스레 호석의 머리를 베개에 얹고, 틀어져서 불편해보이는 몸을 고쳐 잡았다. 그리곤 제 잡념을 몰아내듯이 그 위에 담요를 덮었다.
오랜만에 가까이 마주한 호석의 얼굴이 반가워서 여주는 쉽게 걸음을 떼지 못했다. 남준의 말마따나 언제고 피할 수 있는 얼굴이 아니었다. 잠깐 마주하지 않은 건데도 이렇게 마음이 애타는 걸 보면. 여주는 조만간 호석에게 장난처럼 사과를 건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오늘은, 이렇게 잠깐 눈에 담아두고.
여주는 허리를 숙여 호석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본 뒤 일어섰다. 조만간이 아니라, 내일 당장 사과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탁'
그 때 일어서던 여주의 손목이 잡혔다.
" ...여주야. "
호석이었다. 언제 잠에서 깬 건지 호석이 담요 사이로 손을 빼내 제 손목을 잡고 있었다.
놀란 여주가 호석을 향해 무언갈 말하기도 전에, 호석이 그 손목을 잡아 끌어 제 품으로 당겼다.
순식간에 호석의 품으로 쏟아진 여주는 온 몸이 굳었다. 시계의 초침소리만 들려오는 적막 속에서 제 심장소리가 온 지구를 흔드는 것처럼 뛰어왔다.
" 미안해. "
정신 차릴 틈도 없이 밀려들어오는 향과 품의 온기 너머 호석의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내가 다 잘못했어. 그게 뭐든. "
호석의 어깨가 작게 떨려왔다.
" 그러니까 나 버리지마. "
" ... "
" 나 미워하지마. "
잠긴 호석의 목소리에서 절박함이 느껴졌다.
착해빠진 정호석은 제가 피하는 이유를 전부 자신에게서 찾고 있었다. 가슴이 미어지게 아파서 여주는 호석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너를 어떻게 미워하겠어, 너를 어떻게 버릴 수 있겠어, 내가.
공연히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여주의 목 끝에 그런 말들이 맺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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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바...너 왜케...애잔해...제가 쓰면서도 넘나 애잔한 우리 호서기ㅠ
지난 화에 댓글 많이 달아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달려볼게요 :-)
오늘도 재미있게 읽어주셨길 바랍니다!
〈 암호닉 명단 > -12.26기준
연꽃 / 느낌표 / 흩어지게해 / 빙빙 / 티백 / 찰떡쿠키 / 한결 / 청포도 / 사탕 / 토마토 / 김김이 / 어남윤 / 하얀설탕 / 복숭아 / 사삼공 / 만두 / 어남석 / 수박바 / 콩나물 / 고앵이 / 흑슈가 / 참새쨍 / 블루 / 콩이 / 순 / 윤꼬꼬 / 키딩미 / 가든 / 뷰뱌 / 불면증 / 보금자리 / 푸름 / 딸기 / 해결 / 프리지아 / 무럭무럭 / 도리도리 / 유니 / 봄 / 해강 / 율무차 / 토미 / 싱글벙글 / 감자탕 / 서콩이 / 달빛주스 / 새싹이 / 1218 / 가지 / 여나 / 예그리나 / 소우주 / 댕댕 / 하꼬 / 밍밍이 / 솜사탕 / 쪼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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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에서 신청된 암호닉이 많아서, 오늘 9화까지 받고 다음 10화에서 정리된 명단을 들고 올게요!
암호닉 신청해주신 분들 너무너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