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피니트/현성] 김칫국 마시다 흘렸네 1 | 인스티즈](http://file.instiz.net/data/cached_img/upload/b/5/9/b59f3997d1a8015b4563cffaf97b7e2c.gif)
현성 고등학교 1학기 중간고사 성적표.
3학년 7반 4번 김성규 2등.
김성규가 모범생이라 놀라셨다고요? 전혀 그러실 필요 없어요.
왜나면 우리 반 김성규는 뒤에서 2등을 맡고 있거든요.
“으, 으아아ㅡ!!” 난 주, 죽었다 … . 이건 도저히 안 되겠다, 진짜 내가 미쳤지 … … . 성적표를 받아든 현성고 3학년 7반 고등어들의 아우성 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건 성규의 울음 섞인 절규였다. 초등학교 때 공부 좀 한다는 소리를 듣던 성규는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듭할수록 성적이 바닥과 진하게 뽀뽀를 했다. 바로 며칠 전에 치른 중간고사의 결과 또한 그를 착잡하게 만들었다. 어느덧 고등학교 3학년.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 중에 틀린 것 하나 없다더니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어른의 문턱에 서 있는 김성규, 나. 아직 제대로 된 꿈 하나 정하지 못한 준비 덜 된 얼간이 고등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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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반 등수를 그렇다 쳐도 500명 중에 전교 489등이 말이나 돼?! 이런 걸 성적표라고 엄마께 가져다 드렸다가는 … 하아 … . 성규의 깊은 한숨은 당장에라도 교실 바닥을 뚫고 맨틀을 지나 핵 속으로 직진할 기세였다. 어, 어? 그래도 내 뒤에 11명이나 있다 뭐.
끙 … 인내심을 갖고 찬찬히 성적표를 살피던 성규가 개별 가정통신란을 읽다가 끝내 팍- 소리 나게 종이를 구겼다. 성규가 수업 시간에 집중을 잘 못 하는 것 같습니다. 수업 시간에 … (중략) 공부에 집중할 수 있도록 가정에서 지도 부탁드립니다. 라는 마음에 심히 거슬리는 구절 때문이었다. 아, 선생님 저 현기증 …
“죽었냐?” “야 살아있거든?!” “아ㅡ 그럼 죽을 예정? 묫자리 하나 알아줘?” “우이씨-!!”
성규가 철푸덕- 맨땅에 헤딩하는 격으로 책상에 고꾸라지자, 옆에서 그의 다이나믹한 표정을 구경하던 명수가 잘혹히 들어간 성규의 허리춤을 쿡쿡 찌르며 시비를 걸어왔다. 움찔, 또 움찔. 간지럼을 잘 타는 성규지만 이제 녀석의 공격에 화들짝 놀랄 것도 없다.
그래 니 전교 1등이라 이거지? 재수똥.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낸, 흔히 불알친구라 불리는 명수에게 63빌딩만 한 자존심을 굽혀가며 1대 1 과외라도 부탁해볼까 했던 성규의 마음이 싹 사라지는 순간이다.
“존말 할 때, 저리 가라- 엉?” “노트 빌려주러 온 건데.” “고마워.”
같은 년에 태어나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는데, 어쩜 이렇게 다를 수가 있는 건지. 성규는 신이 명수를 편애하는 게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퉁명스럽게 명수의 만점노트를 받아든 성규의 상체가 다시금 책상과 혼연일체를 이루었다. 독서실을 다녀야 하나? 상상도 못할 등수에 단단히 충격을 받은 성규의 정신은 야간 자율학습시간 내내 안드로메다로 가버렸는지, 비몽사몽 했다. 아마 석식 때 나온 오리불고기가 입으로 들어갔는지 코로 삼켰는지 기억도 못할 거다. 눈을 뜬 채 유체이탈을 경험한 듯하다.
종례 후 어둑어둑해진 거리를 오로지 가로등에 의지한 채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평소라면 무심코 지나치며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파란 간판이 쏙 들어온다.
울림 독서실 4F.
아파트 단지 내 그리 높지 않은 건물의 꼭대기 층을 전부 차지하고 있는 독서실. 페인트로 덧칠한 낡은 간판으로 보아 어느 정도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겉모습이지만, 문을 열고 들어서자 생각과는 다르게 평범한 독서실이다. 성규가 이름과 전화번호를 등록하고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카드를 꺼내어 단번에 한 달 치를 시원하게 결제해버린다.
어두컴컴한 곳에서 이미 몇몇 학생들이 공부를 시작했는지, 양 사이드로 불빛이 비췄다. 성규도 왼쪽 줄 안쪽에 자리를 잡고 촤르륵- 커튼을 쳤다. 스탠드를 켜니 제법 아늑한 공간이 딱 마음에 든다. 좋은데? 성규는 벌써 제가 여느 S대생이라도 되듯 필승! 하며 가방에서 달랑 영어 문제집 하나를 꺼내 들었다.
“아자 아자!”
성규가 작은 목소리로 외쳤다. 해 보는 거야. 며칠 만이라도 하자 제발. 10시에 야자 끝나면 망설이지 말고 후다닥 책가방 챙겨서 곧장 여기로 오는 거야. 쉴 틈을 주지 말자, 넌 할 수 있어 김성규! 성규의 굳은 결심은 3일은 갔다. 즉, 작심삼일은 버텼다. ㅡ 이 말씀이다. 그런 성규에게 격려의 박수를 쳐 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그새 공부에 대한 패기 넘치는 열정과 열심히 하겠다는 초심을 잃은 성규는 급기야 독서실을 제 침실로 삼았다.
순탄치만은 않은 4일째, 오늘도 여김 없이 사각사각하는 연필 소리 외에 독서실은 조용했다. 아 공부는 왜 이렇게 재미가 없는 걸까. 공부도 노래처럼 재밌으면 좋을 텐데 … 한 두 문제는 풀었나? 졸린 눈을 한 성규가 핸드폰에 이어폰을 꽂고 이번 달에 컴백한 잉피니트의 신곡을 틀었다. 으흐흐, 노래 좋다. 금방 기분이 좋아져서는 통통 튀는 멜로디에 심취해 조금만 자야지- 하고 엎드렸던 게 10시. 10분만, 5분만 하다가 일어나보니 큰 시곗바늘이 숫자 12를 가리키고 있다. 하으- 오늘도 잘 잤다. 세상에, 돈 주고 자는 독서실이라니.
자다 일어나 입술 밖으로 비죽 흐르는 침을 슥 닦고 다시 연필을 손에 꼭 쥐는데, 계속 같은 공간에만 틀어박혀 있으려니 따분하고 몸이 찌뿌드드한 게 여간 불편한게 아니다. 무엇보다 배가 고파. 배고파! 자꾸만 위가 수축하며 꼬르륵, 꼬륵- 소리를 내려던 걸 간신히 참는 중이었다. 하긴 6시에 급식 먹고 여태 먹은 게 없으니, 뭐라도 입에 넣어야겠다고 생각한 성규가 벌떡 일어나서 밑에 층에 있을 슈퍼로 향했다.
끼이익- 조심스레 문을 열고 카운터를 지나 미시오. 라고 파란 스티커가 붙여진 유리문을 여는데, 머리 뒤통수에서 웬 후광이 비춘다.
응? 방금 뭔가 엄청난걸 본 거 같은데. 성규가 슬쩍 고개를 돌려 카운터 쪽을 바라봤다.
“ … … ”
독서실 알바생인지, 턱을 괸 채 컴퓨터를 만지고 있는 훈남이 성규의 새카만 두 눈에 별이 되어 박혔다.
허얼… 이게 들어만 보던 독서실 훈남인가? 얼굴이 동백꽃처럼 발갛게 물든 성규가 그대로 독서실을 뛰쳐나와 멀리 가지도 못하고 계단에서 헉헉 숨을 골랐다.
“우, 위험했다아 … ”
“꺄으, 우현 오빠 너무 멋있다.” “야 아까 나보고 웃는 거 봤어? 봤지?!” “지랄, 나랑 눈 마주쳤거든?”
때마침 성규와 같이 배고픔에 시달리던 여중생들이 슈퍼에서 폭행몬 스티커가 든 빵이라도 사왔는지, 아래층에서부터 소란스럽게 등장했다. 한층 높아진 목소리 톤에 성규가 쫑긋이 귀를 세웠다. 우현 … ?
“진짜 남우현은 누구도 손 델 수 없음.” “맞아, 내 남자가 못 될 바에 게이나 돼라 킥킥.” “으하학- 헐 그럼 대박이겠다.”
남들은 D-DAY니 뭐니 수능이 며칠 남았는지 새는 판에 혼자 수포자가 되어 그만둘까. 했던 성규에게 독서실 훈남의 존재는 성규가 다시 공부에 불을 지피는데 충분했다. 하기는 처음부터 이상하다 했어. 이런 허름해 보이는 독서실에 비이상적으로 학생이, 아니 유독 여중생만 우글우글, 무슨 개미떼처럼 모여있는 게 이제야 이해가 간다.
성규는 쥐도 새도 모르게 그 여학생 무리에 합류하게 되었다. -
우현을 알게된지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서로 얼굴을 익히려 안녕하세요 하며 꼬박꼬박 인사를 건넸다. 일종의 성규를 각인시키기 위한 방법이었다. 처음엔 저를 이상하거나 더럽다고 생각하면 어떡하나 했는데, 우현도 어느 정도 성규에게 관심이 있는 눈치다. 일주일간 성규는 명수의 팬으로 추정되는 여중생들과 고군분투하며 온갖 스파이 짓을 하는 등 그에 대한 정보를 습득하기에 이르렀다.
이름 남우현, 나이 23살, 취미는 피아노 치기, 8시부터 12시까지 4시간 동안 울림 독서실에서 파트 알바 중.
4살 차이는 궁합도 안 본다던데.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우리가 사귀기라도 한다면 … 으핫 부끄러워! 저도 제가 이렇게 무서운 면이 있었는지 새삼 깨닫다가 우현의 얼굴을 생각하며 사르르- 천사같이 녹는 성규다. 어느새 성규가 독서실에 다니는 목적은 우현을 만나기 위한, 불순한 의도로 변질되고 있었다. 인사를 할 적마다 생글생글 보조개가 쏙 들어간 채 미소를 짓는데, 그게 머리에서 떠나가지 않는다. 이 마약 같은 남정네 … !
“너 요즘 독서실, 자주 가더라?” “ … ? ”
수업 시간인 것도 잊고 망상에 젖어 실실 쪼개던 성규의 혼을 명수가 돌려놨다. … 응? 아, 아! 나 공부하려고 흐흐. 명수가 의심의 눈초리로 성규의 오동통한 뺨을 때렸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혼자서?” “당빠.” “ … … ”
는 당근 개구라지.
“지금 수학인데?” “뭐?”
명수가 턱 끝으로 성규 쪽을 가리키자, 자연스레 고개를 내린 성규가 표지에 떡하니 English 라고 쓰여있는 교과서를 발견한다.
“공부한다고?” “… 어, 그래 … ”
… … .
원래 수학 시간에 영어 공부하고 영어 시간에 수학하는 거야, 우리 아빠가 그랬어.
어느새 시간은 빠르게 흘러, 계절이 뒤바뀌고 6월의 무더운 초여름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성규가 독서실에 다닌 지도 4주가량이 지났다. 한 달 하고도 며칠이 지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얼굴에 웃음꽃이 펴서는 여느 동네 바보처럼 싱글벙글하던 녀석이, 오늘은 무슨 일인지 조례 때부터 풀이 죽어있다는 것이다. 눈꼬리가 아래로 확 쳐진 모습이 흡사 삐친 여우 같기도 하고 … 죽 끓는 듯 하는 성규의 변덕을 명수는 알 길이 없었다. 미친놈 … 습관인건지 뿌우- 하고 답지 않게 볼을 크게 부풀려서는 쫙 찢어진 눈 밑에 찹쌀떡을 매달아 놓은 성규의 모습에 명수가 혀를 찼다.
여기서 김성규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고작 4주가 지난 게 아니라, 4주씩이나 지났다는 사실이었다. 기다림의 미학? 개풀 뜯어먹는 소리 하고 앉았네. 그 알바생, 남우현인가 나문가 하는 그 자식. 드럽게도 반응이 없더란다. 살아있는 물고기 한 마리 없는 호수에 멍청한 낚시꾼 하나가 미끼를 던져놓은 셈이었다. 이쪽 타입이 아닌가, 싶어서 결국에 내린 답은 마음도 전하지 못한 채 이대로 접어야하는가ㅡ 였다. 진짜 딱 내 타입인데 … 성규가 안타깝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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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 … ”
정말로 사람이 죽을 때가 다 되면 변한다더니, 김성규는 변해도 너무 변했다. 명수가 며칠간 김성규의 행동을 관찰한 바로는 얘는, 정신병자가 확실했다. 예를 들면, 허구한 날 으아아-! 괴성을 지르며 주먹으로 책상을 두둘기지 않나, 멀쩡한 머리를 쥐어뜯으며 이상한 신음을 내거나 이따금씩 조용하다 싶어서 보면 흐리멍덩한 눈으로 창 밖을 보고 있었다. 가뜩이나 이상한 녀석이 두 배로 이상해졌다. … 미쳤어요, 얘? 4교시 수학 시간, 오늘도 김성규는 반쯤 혼이 나간 상태였다. 명수가 심드렁한 얼굴로 칠판을 바라보고 있을 때, 오늘 무슨 요일이지? 4번. 4번 나와서 풀어보자. 하는 여선생의 낭랑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4번?
“ … ! 아 저요!”
대체 독서실에 가서 무슨 공부를 하는 거냐, 너는? 충분한 수면에 대해서 공부하니? 어떠한 환경에서 더 잠이 잘 오나 이런 거? … … . 나름 철학적인 내용을 늘어놓던 명수가 끝내 고개를 저었다. 긴장했는지 발딱- 일어서서 어기적어기적 앞으로 향하는 성규의 걸음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와 같았다.
“하 … … ”
진초록 바탕의 칠판은 산이요, 허연 물백묵은 물이렷다. 성규의 머릿속 백지화 과정은 이미 가속화 단계를 밟은 지 오래였다. 브레이크도 없이 뻥 뚫린 고속도로는 심연의 끝을 달리고 있었다. 그래도 제 딴에 풀어보겠다고 우기며 서 있던 게 정확히 5분하고도 20초가 더 지났고 김성규는 여전히 칠판 앞에서 저 쉬운 문제 하나 가지고 진땀을 빼는 중이었다.
“쌤, 잠깐만요 … ” “ … … ” “아니다 아아, 다시!”
연신 아, 아는데! 저 알아요 이거 진짜 … 를 외치던 성규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다시 문제를 읽는가 싶더니, 드디어 칠판에 소문자 a가 새겨졌다. 명수를 제외한 반 아이들 모두의 시선이 김성규의 손으로 향했고 뚝- 별안간 펜 뚜껑이 닫혔다.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 선생님 … 모, 모르겠는데요오 … 하고 울렸다. 푸흡! 절반의 아이들이 폭소를 터뜨리는 반면, 김명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귀까지 벌게져서 이를 갈았다. 저 머저리가 … !
성규가 문제를 푸는 데에 시간을 끌어준 덕분에, 여선생이 풀이 과정을 말해주기도 전에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딩동댕- 울렸다. 얘들아, 진짜 이거 쉬운 거야. 이 정도는 다 풀 줄 알아야 된다. 는 여선생의 잔소리를 끝으로 엎드려있던 아이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들며 지하에서 3000년간 묵혀있던 미라처럼 일어나기 시작했다.
“야 일어나.” “쪼갰냐?”
솔직히 딱 말해. 하는 진지한 성규의 표정에 대수롭지 않은 듯 명수가 고개를 끄덕이고 존나, 실망. 하고 덧붙였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 … 아이씨.”
성규가 군말 없이 씩씩대는 명수의 뒤를 따랐다. 3학년 되니까 급식 빨리 먹어서 좋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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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반찬 봐. 존나 먹기 싫다. 밥이며 국이며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다며 굶주려있던 남학생들의 원성이 급식실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시바, 또 속았어! 비벼 먹을, 매점에서 빵이나 사 먹을걸. 이미 학교 급식의 미묘한 맛을 알면서도 새로운 메뉴 하나 나왔다 하면, 쓸데없이 남학생들의 심장을 설레게 하곤 했다. 오늘 영양사 누나의 미끼는 아몬드 타르트였다. 계집애처럼 입맛이 까다로운 성규가 후추 맛 나는 계란찜부터 맛을 본다. 이거 식판을 엎어, 말아?
“너, 진짜 수상해.”
아, 진짜 더럽게 맛없다. 싱거운 멸치볶음을 깨작거리는 성규를 보며 명수가 밥을 먹다 말고 입을 열었다. 느닷없이 뭐야.
“뭐가?” “ … … ”
“야, …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되냐?” “뭔데?” “닌 … 아, 아니야!”
이게ㅡ 장난하냐? 명수가 국을 뜨려 들었던 숟가락을 탕-! 신경질적으로 식판 위에 내리쳤다. 참치탕인지 우거지탕인지, 아무튼 황토 색깔 국물이 출렁임과 동시에 김성규가 다시 입을 열었다.
“ … 너, 너.” “어, 나 뭐.”
“아니야 … … ” “아, 미친.”
김성규 이 세상 그만 살고 싶나 봐.
씨발, 너랑 이성열이랑 어쩌다 사귀게 됐냐고 어떻게 물어봐.
“ … … ” “ … … ”
짜증 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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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일로 무거운 발걸음이 독서실로 향했다. 무겁다, 무거워. 몸도 천근만근같이 무겁고 책가방도 무겁고 걸음마저도 무게를 더했다. 이대로 남우현 때문에 독서실을 그만두기에는 쏟아부은 돈이 아깝고 계속 다니자니 남자나 훔쳐보며 혼자 사랑을 키우긴 싫었다. 지금 김성규는 웃기지도 않는 두 가지 갈림길에 서 있었다.
덜컹. 무작정 문을 열고, 컴퓨터에 코를 박고 있는 남우현을 힐끔, 훔쳐보고 1번 방으로 들어와 늘 앉던 자리에 궁둥이를 붙였다. 정신도 차리고 머리도 식힐 겸 앉은 채로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잡생각을 떨쳐냈다. 아무래도 저번에 이어서 오늘 받은 2차 충격이 의지를 불러일으킨 듯싶다. 본격적으로 공부할 셈인지, 까만색 뿔테 안경을 꺼내 쓴 건 독서실은 공부하러 오는 곳이다! 를 마음속으로 크게 삼창한 후였다.
사실상 일주일? 아니, 보름 뒤면 벌써 기말고사라는 두려움에 두 시간은 족히 집중한 것 같다. 머리는 맑은데 눈 사이 미간이 지끈거리고 눈알이 뻑뻑했다. 김명수가 빌려준 S급 시험 노트를 촤르륵 넘겨보다가, 한 줄 한 줄 빼곡히 적혀있는 노트에 성규가 머리를 짚었다.
내일까지 갖고 와라.
이, 씨발. 말하는 개 싸가지 봐라. 이걸 어떻게 하루 만에 마스터해ㅡ? 씨, 아예 그 새끼도 못쓰게 구겨버릴까 생각하다가 정수리 위로 노란 전구가 뿅! 떠오른다.
“복사다 비융신아 으흐학학- ”
성규가 승리의 미소 비슷한걸 지어 보이더니 장엄하게 문을 열고 카운터에 옆에 있을 복합기로 향했다. 평범한 복합기 맨 위에 코팅된 노란 종이에는 친절하게도 장당 100원이라는 문구가 쓰여있다. 돈 벌려고 별짓을 … 에휴, 급히 호주머니를 뒤지니 나오는 거라고는 하얀 이어폰뿐. 여섯 쪽이면 열두 장이고 그럼, 천이백 … 복사할 노트를 빼고는 빈손이라, 서둘러 방으로 향하려는 성규의 발걸음을, 의문의 그림자가 잡아 세웠다.
“이거 먹을래요?” “ … … ” “ … ” “ … 으에?” 참, 뜬금없게도 다가오는 남우현ㅡ 너다. 뭐가 그렇게 여유스러운지 성규가 좋아라하는 미소를 지으며 비타 700이라고 적힌 병 두 개를 흔들어 보였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설령 병에 독극물이 들었다고 해도 김성규는 기꺼이 받아마실 기세였다.
우당탕ㅡ! 실제로 이러한 소리가 나지는 않았지만, 성규의 헐떡거리는 망상의 세계에서는 이미 만화와 같은 효과음이 펼쳐지고 있었다. 현실세계와 망상 속을 구분하지 못한 성규가 헉. 하고 숨을 내뱉었다.
딱 붙어있던 성규의 분홍색 입술이 홍해 바다가 갈라지듯 쩍 벌어졌다. 으, 아 뭐지? 헐 쟤 뭐야? 이거 주는 이유가 뭔데? 왜 주는 건데?! ㅡ. 초등학교 이후로 연애 경험이 전혀 없던 성규의 순수함에서 나온 소녀감성이 퐁퐁 샘솟았다.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과 더불어 몸을 후들거리는 부가적인 요소도 함께 말이다.
90도로 허리를 숙여 감사의 뜻을 표한 다음 냉큼 음료수를 받아들고는 지잉, 지잉 거리며 인쇄된 종이를 뽑아내고 있는 복합기를 뒤로한 채 성규가 총총걸음으로 카운터를 빠져나왔다. 한 편의 시트콤이 따로 없다. 멀리서 저기! 하고 부르는 우현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성규의 귀에는 닿지 않은듯하다.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듯 복도로 달려나오니 응? 이거 데자뷰 … ?! 머리가 삐죽삐죽 서서는 여전히 상기된 얼굴로 후하후하 숨을 고르며 부풀어 오르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바빴다.
창문 틈을 뚫고 들어오는 밤바람이 시원하다. 긴장도 별로 안 한 거 같은데 순식간에 손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있다. 흐아 … 바지춤에 손바닥을 벅벅 닦고는 아까보다는 조금 옅어진 연분홍색 볼을 한 성규가 바깥으로부터 찬 기운을 몰고 독서실로 쌩하니 들어갔다 나온다.
그새 화장실이라도 간건지 카운터를 지키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마주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우울감이 확 몰려왔다.
독서실을 빠져나와 계단으로 내려가는 도중 급하게 나오느라 가슴팍에 가득 움켜줬던 필기도구들과 미쳐 잠구지 못한 가방 안에서 음료수병이 와르르ㅡ 굴러떨어졌다. 아!!!! 씨!!
성규가 아직도 콩콩 뛰는 가슴을 부여잡고 분주한 손길로 이것저것 주워담기 시작했다. 반쯤 조각난 지우개까지 집어내고는 한층 동작이 느려진 손으로 제일 멀리 굴러떨어진 병을 움켜집었다.
어떻게 해애ㅡ! 울음 섞인 성규의 외마디가 계단 밑으로 메아리쳤다. 흩어진 연필 몇 자루를 주워담기는 쉽지만 부풀대로 부풀려진 마음을 주워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큰일이었다.
일단 사건은 그렇게 일단락되었는데. 도망치듯 독서실에서 나온 성규의 행동 덕에 음료수만 냉큼 받아오고는 3일째, 갈색 병은 냉장고에서 요지부동하지 않고 있었다. 행여 가족이 먹을까 실시간으로 냉장고에 얼굴을 들이밀어 비타700의 생존 여부를 확인했다. 잘 있는지 없어지지 않았는지 잘 때도 노심초사하며 지켜오다가 결국 마지막 유통기한 날이 다가온 그제야 뚜껑을 열었다.
달큰한 목 넘김에 시원하다고 느낄 즈음에 병이 텅 비었다. 야속한 100mL 같으니라고. 마지막 아쉬운 한 방울이 성규의 혓바닥 위로 톡 떨어졌고 성규는 내용물을 비워 쓸모가 없어진 병에게 기꺼이 책상 한켠을 내주었다.
멍ㅡ.. 다크서클이 턱밑까지 내려올 것 같은 성규의 얼굴이 평소보다 조금 이른 아침을 맞이했다. 책상에 올려진 병 한 번 보고 한숨 쉬고 또 보고.
독서실에 발길을 끊은 지 3일째였다. 음료수를 받고 튄 다음부터였으니, 3일째가 맞다. 며칠씩이나 지났다고 남우현 금단 현상이라도 오는건지 매번 불면증에 시달리던 성규가 결국 밤을 샜다. 남우현이 있을 독서실을 찾아가기가 사막에서 바늘 찾는 것보다 어려워서는 아니다. 절대로.
- 퀭한 눈으로 교문으로 들어서는 성규를 발견한 명수가 때리기 좋게 뽈록 튀어나온 뒤통수를 힘껏 후려갈겼다. 주말에 공부 잘했냐?
오 … 오 공부 열심히 했나 보네. 화, 화이팅. 지구 멸망 직전인 성규의 얼굴을 양껏 놀리려던 명수가 어깨를 두어 번 토닥여주고는 얄미운 엉덩이를 흔들며 저 멀리 점이 되어 사라졌다. 하아 … 성규의 입가 위에 썩은 미소가 그려졌다. 김명수 개새 … .
- 방과 후 학교를 쏜살같이 벗어난 성규는 백 원짜리와 오백원짜리 은색 동전을 짤랑거리며 집 앞 슈퍼에서 고군분투하는 중이었다. 뭘 좋아하려나? 고민되네 … . 음료수도 다 마셨겠다. 하룻밤을 꼬박 새고 결심한 게 나도 무언갈 해주자! 였다.
학교에서 몇 번 김명수에게 야아, 이거 내 얘기는 절대 아니고 … 하며 입을 열었지만 돌아오는 답이라고는
그래 너 태도 그딴 식으로 해! 남우현이 뭐라고 …… 성규의 높디높은 자존심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고작 같은 음료수 하나 사는데 이런 용기가 필요했던 건지, 새삼 깨닫는다. 성규에게 사랑은 이제 막 직립보행을 시작한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맞먹었다.
성규는 제 손에 꼭 쥐어진 음료수를 보며 골똘히 생각에 빠졌다. 사실 이런 음료수, 이딴 거 별거 아닌데. 단지 전해주어야 할 대상이 남우현이라는 것만으로 떨리고 수십 번을 고민해야 했다. 뭐 마려운 강아지도 아니고 음료수 진열대 앞에서 30분간 왔다 갔다를 반복 중인 성규를 유심히 쳐다보던 슈퍼 주인이 입을 열었다.
“아 학생! 거서 뭐하는겨 잉? 마실 게 없는감?” “아뇨, 아니! 그 … ” “그럼 뭐여. 퍼뜩퍼뜩 안 고르고!” “예에!”
재촉하는 아저씨의 구수한 사투리에 무작정 딸기 우유를 골라 계산대에 올렸다. 육백오십 원. 네에 … . 엉겁결에 사기 싫은 물건을 사버린 손님처럼 토라진 성규가 독서실로 향했다.
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에어컨 바람이 온몸을 감싼다. 아 시원해. 여느 날과 다름없이 카운터를 지키고 있는 우현에게 흘낏 눈길을 주었다가 재빨리 2번 방으로 들어갔다. 뚱한 표정으로 턱을 괸 채 모니터를 보고 있는 모습이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다.
가방 안에는 방금 산 딸기우유가 책들 사이에 안쓰러운 자태로 부대끼고 있었다. 아직 차가운 우유 팩을 들어 책상에 올리자, 송글송글 맺혔던 물방울이 책상 위에 물웅덩이를 만들었다. 성규가 노란 포스트잇을 뜯어 삐뚤빼뚤한 글씨로 음료수 감사했어요. 를 적어내렷다.
평소 무뚝뚝한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서 누가 봐도 김성규! 할 정도였지만, 성규는 우현이 없을 때를 노려 몰래 우유를 전해주려는 작전을 실행에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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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쪽팔림을 이기지 못한 성규가 한참을 이불 발차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넋이 나간 표정으로 침대에 누워있자, 몸에 힘이 빠지고 저절로 잠이 쏟아진다. 졸려어 …… .
몽롱한 기분을 붙잡고 눈꺼풀을 올려 핸드폰 액정을 올렸다. 한동안 공부한답시고 핸드폰을 끊었던 성규였던지라, 오래간만에 울리는 핸드폰에 성규의 눈이 휘 번뜩 빛이 났다. 누구지? 모르는 번혼데.
우유 … . 부터 시작하는 글자에 성규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는걸. 독서실에서처럼 이모티콘으로도 눈웃음을 날리는, 이건 분명 남우현의 문자였다.
본의 아니게 순결을 지켜온 성규의 일방통행적 사랑이 마침내 막을 올리는 순간이다.
오랜만에 왔으니 길게 썼어요:D 2편에서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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