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출 예약
호출 내역
추천 내역
신고
  1주일 보지 않기 
카카오톡 공유
https://instiz.net/writing/1381706주소 복사
   
 
로고
인기글
필터링
전체 게시물 알림
사담톡 상황톡 공지사항 팬픽 만화 단편/조각 고르기
혹시 미국에서 여행 중이신가요?
여행 l 외국어 l 해외거주 l 해외드라마
gonna 전체글ll조회 507

 

 

오늘도 썸도 아니고 뭣도 아닌 거 같은 둘 사이(...)

 

 

 

 

08

 

 

 

“안 해! 아, 진짜 싫다고!! 야, 놔봐. 잠깐, 잠깐 놔라? 어?”

 

백현이 정색을 하며 말했다. 그러나 주변을 둘러싼 애들은 한 발 후퇴를 하며 숨을 고르던 백현을 순식간에 도로 낚아챈 후 우악스럽게 의자에 앉혔다. 야, 우리는 뭐 기분 좋겠냐? 넌 눈도 작은데.

 

“딴 애도 많잖아!”

“어디에? 노는 애 너 밖에 없잖아, 봐.”

 

주변을 둘러보자 다들 서빙을 맡았거나, 아니면 조리 쪽을 맡았거나. 백현이 암울한 표정으로 입을 닫았다. 아직까지 입에 물려있는 사탕의 단맛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괜히 아침부터 놀러 다녀서...

 

“그리고, 옷 사이즈 봐라. 빌려온 거라곤 이게 단데, 종대 사이즈랑 비슷한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

“그 난쟁이보단 내가 커.”

“그래, 그렇다 치고. 눈 감아, 미스트 뿌린다.”

 

칙! 쏟아지는 물안개에 백현이 눈을 질끈 감았다.

 

“맛있게 드세요.”

“네, 감사합니다.”

 

아예 분식집을 연 다른 반에서 이것저것 얻어왔지만 그래도 모자랄 것 같아 주문해둔 피자를 받아들고 찬열이 동아리방으로 나섰다. 먼저 리허설 중이던 1학년 후배들에게 우선 먹고 있으라고 일러둔 후, 찬열은 백현을 찾아 나섰다. 좀 있으면 우리도 리허설 해야 하는데.

 

“혹시 변백현 있어?”

 

한창 분주한 백현의 반, 앞문 쪽에서 기웃거리던 찬열이 지나가던 친구를 잡고 물어봤다. 서빙에 정신이 없던 친구가 인사를 하려다 말고 대충 고개로 뒤쪽을 가리켰다. 저기 가봐. 뒷문으로 들어가.

 

“백현아, ...”

 

백현을 부르려던 찬열이 그대로 멈춰 섰다. 긴 생머리 가발을 뒤집어 쓴 백현이 뒤를 돌아보았기 때문이다. 아, 박찬열 나가!! 백현의 외침에 파티션 위로 삐죽 올라온 머리 하나가 쏘아붙였다. 야, 변백현 조용히 해. 손님 놀란다고!

 

“... 아, 진짜 쪽팔리게.”

“야, 어... 이거, 김종대가 한다며.”

“엉. 그러니까 그 자식 좀 잡아와줄래?”

 

무뚝뚝하게 대꾸한 백현이 짜증스럽게 옷을 집어 들었다. 훌렁훌렁 옷을 벗어던진 백현이 준비된 옷으로 갈아입고서야 찬열을 향해 말했다. 근데 왜 왔어? 그제야 손에 들린 봉지가 떠오른 찬열이 그것을 백현에게 건넸다. 이거 먹으라고.

 

“아, 역시. 박찬열.”

“피자는 주문해둔 거고, 떡볶이는 밑에 5반 애들이 분식점 열었잖아. 그래서 얻어왔어.”

“냄새 봐. 하...”

“나가서 먹자. 너희 카페 하는데 음식냄새 풍기겠다.”

“상관없는데.”

 

입을 삐죽거리는 백현에게 교복 마이를 덮어준 찬열이 손을 잡아끌고 밖으로 나선 찬열이 잠깐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상담실로 향했다. 여기? 교복 마이 틈으로 눈만 빠끔히 꺼낸 백현의 물음에 찬열이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이런 양아치를 봤나. 백현의 말에 찬열이 피식 웃으며 문을 열었다. 선생님이 맡기신 거야, 어제 청소 좀 검사해달라고 하셔서.

 

“피자 식었겠다.”

 

우울한 표정으로 중얼거린 백현이 얼른 봉지에서 피자를 꺼냈다. 배가 꽤나 고팠던 모양인지 허겁지겁 먹어치우던 백현에게 떡볶이를 꺼내준 찬열이 힐끔힐끔 백현의 얼굴을 훔쳐보며 말했다. 야, 근데...

 

“진짜, ... 너 화장 누가 해줬어?”
“엉... 메이크업 공부한다는 애였는데, 누구지. 걔, 예령이 아냐? 우리 반에 맨날 아이라인 그렸다가 걸린 애.”

“야, 야. 너 조심 좀 하고 먹어. 다 묻겠다.”

“아, 가발 거슬려. 야 이거 벗으면 다시 못 쓰겠지? 아씨.”

 

어설프게 머리카락을 쥐고 떡볶이를 뒤적이는 모습이 답답했던 찬열이 결국 꼬지에 떡을 찍어 백현에게 들이댔다. 너 머리카락 잡고 있어. 내가 먹여줄게.

 

“입에 묻히면 죽인다.”

“벌써 립스틱 다 지워졌어.”

“아, 빨리. 다 먹었어.”

 

올챙이배가 될 때까지 음식을 먹어치운 백현이 그제야 소파에 편하게 기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어보였다. 옆에서 뒷정리를 마친 찬열이 게으름을 피우는 백현의 곁에 앉아 가만히 시간을 보냈다. 헝클어진 백현의 가발을 정리해준 찬열이 슬슬 버거울 정도로 밀려오는 카톡에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가야할 거 같은데.

 

“야, 근데 나 리허설 조금만 하고 바로 여장남장대회 리허설 가야해. 애들이 나 대회 열리기 전에 너랑 만난 거 알면 완전 화낼걸? 비공개가 원칙이잖아, 이거.”

“동아리 가면 다 봐. 후배 애들은 일단 먼저 내보낼게. 우리끼리 한번 씩만 돌리고 하자.”

“어, 알았어.”

“... 근데 너 다리 좀 오므려라.”

 

처음부터 끝까지 다리를 쩍 벌리고 있는 백현을 보고 찬열이 말했다. 그제야 제 다리를 내려다보고 백현이 대꾸했다. 이게 뭐. 마이로 다리를 덮어준 찬열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너 무대가서도 그럴 거냐?

 

“파격적이지. 섹시하냐?”

“바지 너무 짧다. 잠시만 있어봐.”

 

상담실의 캐비넷으로 다가가 담요를 꺼내온 찬열이 백현의 허리에 둘러주며 덧붙였다. 이러고 다녀. 옷 갈아입기 전까지.

 

“배려 쩐다. 여친한테도 이랬어?”

“내 여자 친구는 이렇게 안하고 다녀서.”

“우왕. 나한테만 이래주는 거야?”


냉큼 매달려 애교를 떨었더니 찬열이 슬쩍 백현의 머리를 치워내며 말했다.

 

“왜 이러세요. 난 옷 야하게 입는 여자 싫은데요.”

“시댕. 준 게 이게 다였는데 어쩌라고. 그럼 치마를 입으랴?”
“한복이 나았을 걸.”

“하긴 내가 좀 어깨가 있잖아.”
“성장이 덜 끝난 변백현 군. 그런 소리는 키 다 크고 좀 해라.”

“야, 싸우자, 임마.”

 

당장이라도 달려들 태세의 백현을 막아 세운 찬열이 핸드폰을 가리키며 재촉했다. 야, 우리 빨리 가야해. 이러고 놀 시간도 없다.

 

“야, 변백현 뭐야? 우왁, 대박.”

 

웃음을 터트리며 정신을 못 차리는 애들을 보고 쪽팔려 죽겠다고 투덜거리던 백현이 마이크 앞에 섰다. 야, 그래도 예뻐. 생각보다는 나쁘지 않은데. 태광의 말에 백현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쏘아붙였다. 야, 생각보다? 네 생각은 어땠는데, 야, 말해.

 

“백현이 예쁜데, 진짜? 야, 화장 누가 해줬어? 대박이다.”

“어. 너보다는 변백이 낫다.”

“이게 죽으려고.”

 

혜인과 태광이 말싸움을 하는 동안 찬열이 준비를 마치고 말했다. 야, 얼른 시작하자. 백현이 먼저 나가야 해서 한 번씩만 돌리고 끝내야 해. 찬열의 말에 모두 그제야 제 자리로 돌아가 리허설을 준비했다.

 

“안녕하세요, ... 3반 변, 백, .. 희입니다.”

 

당당한 척 굴더니 막상 올라서니 창피했던 모양인지 백현의 귀 끝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와, 예쁜 여학생이 올라왔네요. 이중에서 대상은 누가 탈 것 같아요?”

“... 당연히 저죠. 아, 어디다 갖다 대요, 저런 애들을.”

 

백현의 뻔뻔한 태도에 짓궂은 MC도 웃음을 터트렸다. 아, 1반 여학생이 주먹을 쥐는데요? 저 팔뚝에 맞아도 괜찮겠어요, 백희 양?

 

“괜찮아요, 제가 호신술을 좀 배워서.”

“그래요? 그럼 시범을 한 번 보여주시겠어요?”
“네, 그럼... 김종대 올라와라.”

 

조신한 척 굴던 백현이 단번에 이를 빠득 갈며 외쳤다. 흠칫, 객석에서 구경하던 종대가 놀라는 모습이 보였다. 도망치려 자리를 피해보지만 끝내 반강제로 무대 위까지 올라온 종대는 결국 바닥에 패대기쳐지고 나서야 자리로 돌아갈 수 있었다. 변백현, 진짜 너무하다. 종대가 눈물을 찔끔 보이며 서운한 기색을 드러내자 백현이 웃으며 대꾸했다. 이걸로 끝이라고 생각하지마라, 김종대.

 

“그럼, 다음은 매력을 살펴봐야겠죠. 댄스타임 한 번 가겠습니다.”


MC의 요청에 여자아이들 중에 댄스부인 몇 명은 꽤 난이도 있는 남자 아이돌 춤을 추기도 했다. 와, 저건 나도 못 추는데. 입을 벌리고 구경하고 있던 백현은 본인의 차례가 되어서야 정신을 차렸다. 시댕, 나 뭐하지? 쳐웃을 타이밍이 아니었군.

 

“아, 잠깐. 음악 바꿔주세요.”


음악을 듣자마자 손을 휘저은 백현이 말했다. 아, 난 역시 AOA야. AOA의 노래가 나오자마자 환호성이 쏟아졌다. 그래, 이거지! 뿌듯한 표정으로 신나게 AOA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춘 백현이 노래가 끝나자마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자리로 돌아갔다. 쪽팔려도 할 건 해야지. 근데, 좀... 이거 많이 창피하다. 큽.

 

“자, 이제 마지막 선택에 앞서, 하실 말씀 부탁드릴게요. 뭐, 내가 대상을 타야하는 이유, 이런 것들 부탁드립니다.”


MC의 말에 백현은 비로소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실감했다. 이제 드디어 끝난다. 하, 이 답답한 가발부터 벗어던져야지.

 

“그런데, 백희 양은 밴드부 보컬이시잖아요?”
“아뇨, 그건 제가 아니라 변백현을 말하는 것 같아요. 백현이는 남자고, 전 여.자.”

 

불안하다. 이런 얘기가 나오면 꼭 뭘 시키드라. 백현이 주변의 공기를 빠르게 읽은 후 냉큼 선수를 쳐버렸다. 가증스러운 웃음까지 걸고 또박또박 대답을 마친 백현이 브이 표시까지 해보였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은 MC는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럼 혹시 백희 양이 대상을 탄다면 백현 군은 여장을 한 채로 노래를 해줄 수가 있을까요?”

 

애절한 사랑 노래에 여장한 꼴로? 장난하나? 백현이 푸흡, 물을 마시다말고 기침을 토해냈다. 아, 이번에 그냥 저 MC한테 물을 뿜어버리는 건데. 나름 회장이라고 그러지도 못하고. 백현이 노려보는 사이 객석에서는 이미 큰 환호소리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아, 진짜!! 누구 마음대로! 환호성이 커져갈수록 백현의 표정은 어두워져갔다. 그리고 결국은,

 

“... 네, 이런 모습으로 인사를 드리게 되었네요. 하하.”


분명 옷 갈아입을 시간은 충분했었는데 말이죠. 백현이 땀을 닦으며 멘트를 시작했다. 다들 준비를 마칠 때까지 시간을 벌어두는 것도 보컬의 일이었다. 후우, 입을 푸는 사이 밑에서 환호가 섞인 야유 소리가 들려왔다. 야, 변백현 야하다!

 

“야해요? 왜요, 빨개요라도 춰줘요?”

 

장난을 맞받아치며 씩 웃음을 짓던 백현이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고는 신경질을 냈다. 아니, 뭐가 야하대. 뭐 바지 입었는데. 쩍벌이 뭐 어때서. 그러다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백현이 뒤쪽에 있는 찬열에게로 걸어갔다. 찬열이 벗어둔 남방을 집어 백현에게 건네자 왁, 짓궂은 환호가 쏟아져 나왔다.

 

“아, 박찬열이 이래요. 남 앞에선 이미지 관리 완전 열심히 하죠. 아, 준비도 끝난 모양인데, 그럼 저희 멤버들 소개를 하겠습니다. 기타에 박찬열.”

 

멤버들 하나하나를 소개한 후 드디어 첫 곡이 시작되었다. 비록 백현이 기대했던 멋있는 보컬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뭐 모두가 즐거워했으니 축제의 의미는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나 싶었다.

 

“.......”

 

그래도 대기실에 얌전히 걸려있는 무대의상을 보니 가슴은 아팠다. 다 같이 입으려고 맞춘 건데. 아니, 굳이 그런 거창하고 낯간지러운 이유 말고도,

 

“... 이거 입었으면 진짜 끝났을 건데.”

 

으아아. 백현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주저앉았다. 공연이 끝난 후, 우르르 뒤풀이를 하러 가자는 아이들을 먼저 밀어내고 백현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향한 참이었다. 중학교 때에 이어서 또 여장이나 하다니. 백현이 암울한 표정으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물론 상금은 탔다. 근데 그게 다 내 꺼냐고. 다 같이 피자 먹을 때나 쓸 텐데. 백현의 표정에 잔뜩 억울함이 떠올랐다.

 

“아직 안 갈아입었어?”

 

은근히 마음에 들었던 거 아니야? 문을 열고 들어선 찬열의 농담에 백현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아, 미안! 그러게 얼른 갈아입고 나오지.

 

“다 같이 고기 먹으러 가기로 했어. 나중엔 공부한다고 다들 시간도 없을 거고.”

“......”

“왜, 딴 거 먹고 싶어?”
“...... 화장 언제 지워. 이러고 가?”

 

백현이 암울한 표정으로 찬열을 바라봤다. 지우는 법도 모르는데 어쩌란 거야. 이 몰골로 밖에 나가는 건 싫고, 집에 가서 엄마한테 지워달라고 말하긴 더 싫었다. 이 꼴을 보면 엄마가 뭐라고 하겠어. 백현이 끙끙거리며 고민할 동안 찬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화장 지우는 거 안 받았어?

 

“까먹었어. 달라고 하는 거. 다 집에 갔지, 뭐.”

“이따가 화장품 가게 들렸다 가자.”

“이러고 가라고? 나 못 가.”

 

백현이 신경질을 내며 곁에 있던 의자에 주저앉았다. 발을 옭아매던 신발도 벗어서 내팽개쳐버렸다. 끈에 쓸린 발이 벌겋게 부어있었다. 군데군데 살까지 까여 피도 맺혀있는 것을 본 찬열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가방에서 밴드를 꺼내 붙여줬다.

 

“와, 소름. 그런 거까지 들고 다니냐? 여자 친구들이 뭐래? 그런 거 보면 좋아하냐?”

“내가 뭐만 하면 다 여자랑 관련지어. 그냥, 저번에 색연필 깎다가 손가락 베여서 그래서 들고 다닌 거지, 뭐.”

“아, 아파! ... 나 신발도 신겨줘. 내 신발 저기 종이 백에.”

 

맨발을 달랑거리며 입으로 주문만 해대는 백현을 빤히 올려다 본 찬열이 몸을 일으켜 신발을 챙겨주며 말했다. 야, 발 줘. 찬열의 말에 좀 기분이 풀린 백현이 휙휙 발을 쳐들며 말했다. 옹냐.

 

“초딩 조카 보는 기분이야, 지금은.”

“니 조카는 완전 철 들었나보다. 진짜 초딩 조카를 못 봐서 그렇지, 너. 추석 때 한번 놀러 와라.”

 

뻔뻔한 백현의 태도에 찬열이 기가 찬 표정으로 헛웃음만 흘렸다. 아, 진짜 쟬 누가 이겨. 옷을 갈아입고 짧은 머리로 화장을 한 채 나가는 게 더 이상할지, 아니면 이대로 나가는 것이 더 이상할지 고민 중인 백현을 두고 찬열은 덧붙였다.

 

“아까는 진짜 여자 친구 짜증 받아주는 기분이었어.”

“라면 먹고 갈래?”

“넌 그 쪽으로만 상상이 되냐?”

“너라면 그럴 거 같아서. 너의 연애란. 카사 박찬열.”
“진짜 오해한다고, 네가 매번 그러니까.”

 

찬열이 한숨을 내쉬었다. 실실 얄밉게 웃어대던 백현이 찬열의 팔짱을 끼며 물었다. 야, 삐졌냐? 삐졌어?

 

“... 이걸 때릴 수도 없고.”

 

피식 웃은 찬열에게 백현이 꼼지락거리더니 만 원짜리 한 장을 건넸다. 야, 나 부탁 있는데.

 

“요 앞에 화장품 가게에서 화장 지우는 거 좀 달라고 해. 이거 마스카라 때문에 눈 가려워.”

 

나 진짜 이 꼴로는 여기 밖으로 한 발자국도 못 나가. 진지한 표정의 백현 때문에 찬열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몸을 일으켰다. 야, 됐어. 그냥 사다 줄게. 돈을 돌려준 찬열이 지갑을 챙겨들고 나섰다. 아, 갖고 가라고! 이게 나 무시하냐? 백현의 외침에 찬열이 대꾸했다.

 

“너 하루 종일 시달렸으니까 선물이라고, 백구야.”

“이걸로 때우려고 하지 말라고!”

“이거 너 생일 선물. 간다!”

“아, 그런 게 어디 있어, 야!!”

 

말은 저렇게 해도 또 생일 선물을 챙겨줄 것을 안다. 찬열은 굳이 누군가가 무언가를 요구할 때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아마도 다른 애들은 몰라도 같은 반 남자 애들 선물은 다 챙기고 다닐 녀석이었다. 물론 생일이 다가오기 한 달 전부터 SNS고 어디고 동네방네 생일임을 알리고 다니는 백현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론 쟨 왜 저렇게 피곤하게 살까, 싶은 백현이다.

 

“왜 이렇게 늦었어.”

“직원 누나가 이것저것 설명해주더라. 이건 눈 화장 지우는 거고, 이게 폼 클렌징 하기 전에 쓰는 거래. 이건 스킨, 로션, 그리고 이건...”

“가게 털어왔냐? 뭘 이렇게 많이 사. 한 번 쓰고 말건데.”

“에이, 내년에 또 대회, 아! 알았어, 알았어. 미안!”

 

화장품을 테이블에 하나하나 늘어놓으며 설명을 하는 찬열이 기가 막혀 백현이 타박을 늘어놨다. 분명 또 여직원이 사근사근 설명을 해준다고 귀가 팔랑거린 찬열이 덥석덥석 샀을 게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험도 덥석덥석 들겠어, 얜.

 

“... 뭐야, 스킨로션은 여자꺼네.”

“그럼 어쩌냐, 거기서. 여자 친구 선물이냐, 여동생 줄 거냐고 묻는데 친구가 여장을 해서 필요한 거라고 해?”

“그래도, 이건.”

“원래 화장품 여자 남자 따로 없대. 그냥 남자도 여자꺼 써도 상관없댔어, 피부에만 맞으면.”

“니가 내 피부를 어떻게 알아.”
“제일 순한 거 달라고 했어. 얼굴에 여드름 폭발이라고.”


끽해야 직원에게 한 변명이고, 농담일 거라는 걸 알지만 그게 저를 두고 한 소리라는 게 욱해서 백현이 찬열에게 발길질을 해댔다. 야, 그래도 나 여자들만 있는데서 나 혼자 사온 건데, 고맙지도 않냐? 찬열의 말에 그제야 백현의 발길질도 멈췄다.

 

“엉, 고맙다. 나라면 못 갈 듯.”

“오랜만에 여자 친구 선물 골라주는 기분이었어, 괜찮아.”

“자주 가봤냐? 헐. 대박.”

 

여자 친구를 사귀었을 때에도 차마 화장품 가게까지는 가보지 못했던 백현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음, 향수 사줬을 때? 찬열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리고 덧붙인 말에 백현이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여자 친구 성년식날 선물로.”

“....... 미쳤어. 연상?!?”

 

존나 범죄자. 아니, 그건 그 누나가. 백현이 얼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언제? 끝내 큰 소리로 물은 백현에게 찬열이 곰곰이 생각 끝에 대답했다.

 

“성년식 전후로 한 10일은 사귀었나? 고1 때. 뭐 여자 친구 같지도 않았어. 그렇게 금방 깨졌는데.”
“왜 깨졌어?”

“누나 친구들한테 들켜서. 창피하대. 내가 너무 어려서.”

 

잠깐 말을 고르느라 생긴 침묵 끝에 찬열이 엉덩이를 옮겨 백현의 곁에 바짝 붙어 앉았다. 백희야, 여기 봐.

 

“아, 싫어. 싫다고, 야!”

“아~ 한번만! 딱 한 장만, 응?”

 

카메라를 들이밀기에 백현이 머리를 뒤로 뺐더니 덩달아 따라붙으며 찬열이 애원을 했다. 투샷 안 찍었잖아, 아까. 찬열의 말에 백현은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너 같으면 이 몰골을 사진으로까지 남기고 싶겠냐?

 

“나 이것도 사다줬는데, 좀 찍자. 어? 제발!”

“...... 딱 1장만.”

“아싸! 그래!”

 

새침하게 머리를 정리한 백현이 환하게 웃으며 포즈를 취했다. 얼굴을 맞댄 찬열과 백현의 얼굴이 프레임 속에 가득 찼다. 하나, 둘, 셋! 숫자를 세기 무섭게 찍힌 사진을 확인한 백현은 애초와는 다르게 나왔다. 야, 다시. 나 이상하게 나왔어. 그렇게 만족스러울 사진이 나올 때까지 수십 장은 찍어댄 백현이 그제야 화장을 지우기 시작했다.

 

“나 창피해 죽는 줄 알았어.”

 

눈 좀 대봐. 솜을 리무버에 적신 후 백현의 감긴 눈 위로 꾹 눌러준 찬열이 말했다. 화장 지우는 법을 모르는 백현이니 찬열이 시킨 대로만 했다. 야, 이건 어떻게 알았대?

 

“사봤자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니까 물어봤지. 누나가 알려줬어. 근데 여자 친구가 더 잘 알 텐데, 라고 해서 완전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
“제가 직접 지워주고 싶어서 그렇다고 하니까 또 칭찬해주던데? 여자 친구 부럽다고. 야, 백현아, 네가 부럽대.”

 

아하하, 여자 친구가 좀... 눈 화장이 진해서요. 원래 눈도 예쁜데, 안 보려주려고 하더라고요. 이리저리 끌어댄 변명이 생각나 찬열이 혼자 웃음을 터트렸다.

 

 

 

*

 

 

 

“너 요즘 여자 친구 생겼냐?”

 

요즘 핸드폰은 늘 상 쥐고 있고. 언제나 자신이 찾기 전에 먼저 챙겨주던 찬열인데, 주말에 한 번도 연락이 없던 적도 있었다. 이건 조짐이 좋지가 않아. 박찬열이 여친이 생기면 간혹 나타나던 현상이군. 백현이 확신을 가지자마자 찬열의 집에 술병을 들고 놀러갔다.

 

“... 썸인가?”

“미팅?”
“아니, 동아리.”

“이열, CC. 야, 나보고 CC 별로라고 말할 땐 언제고.”
“어쩌다보니까. 근데 넌 니 복 니가 차놓고선. MT때 그 일만 아니었어도, 너-.”


헤이, 스탑! 거기까지. 찬열의 말을 막고서 술을 들이민 백현이 건배를 외쳤다. 그나마 오늘은 다행이네, 우리 집에서 먹으니. 찬열이 벌써 흥에 겨운 백현을 보고서 생각했다. 예뻐? 이번에는 넘어가나 싶었던 질문이 드디어 나왔다. 백현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찬열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예뻐.

 

“누군데?”

“영문학과 배우희.”

“... 헐. 걔랑? 걔 완전, ...”

“왜?”

 

손에 들고 있던 새우깡을 툭, 떨어트린 백현이 입을 다물지 못하고 감탄사만 반복해서 뱉어냈다. 와, 진짜 박찬열 능력자. 살면서 찬열이 부럽긴 해도 딱히 본인이 초라해진 적은 없었는데 이번만큼은 그래도 될 것 같았다. 백현의 침울한 표정을 살피던 찬열이 예의상 말을 던졌다.

 

“걔 친구들 소개시켜 달라고 해?”

“.....”

“좀, 그런가? 소개팅은 좀 그렇지?”
“고마워, 난 너밖에 없어. 내 셀카 좀 골라서 보내주라.”

 

찬열의 옆에 찰싹 들러붙어 온갖 칭찬을 늘어놓던 백현이 다시 잔을 들었다. 우리의 솔로 탈출을 위해!

 

영문학과 배우희는 진짜 유명했다. 사실은 연극영화과가 아니냔 소릴 들을 정도로 캠퍼스 전체에 자자한 소문과 또 착하기는 엄청 착하다는 칭찬까지. 특히 남자 선배들 중에서 우희 칭찬을 하지 않는 사람이 드물 정도였다. 와, 진짜 박찬열은 전생에 무슨 덕을 쌓았기에. 백현은 찬열이 꺼내준 훈제 오징어를 질겅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부러운 짜식.

 

“오늘은 안 취하네?”

“니가 물을 탔잖아.”

“어, 눈치 챘어?”
“누굴 속이려고 물을 타? 이게.”

 

알면서도 굳이 술병을 사수하지 않은 건 또 뒤처리에 애먹을 찬열을 위한 배려였다. 에헴. 굳이 입 밖에 내진 않아도 표정으로 갖은 생색을 내는 백현을 보고 피식거리던 찬열이 정리를 마치고서 자리에 앉았다. 그래도 이건 마셔봐.

 

“뭔데? 와인이 왜 여기 있어?”

“우희가 가져다 준 거.”

“...... 이걸 나랑 먹자고?”
“먹으라고 줬는데, 뭐.”

“이 병신은 어떻게 연애를, 아! 아파!”

 

이 입. 입 좀 어떻게 못하냐? 찬열의 말에 백현이 꼬집힌 입술을 잡고서 잔뜩 짜증이 난 표정을 지었다. 푸푸, 입술을 털어대던 백현이 슬쩍 운을 뗐다. 야, 이런 거 니가 생각 없이 주변에 나눠주니까, 진짜,

 

“진짜, 뭐?”

“... 욕먹는다고, 너나, 받은 사람들이나. 이런 거 의미도 모르면 막 주는 거 아니다.”
“의미는 무슨. 그냥 준 거라고 했어, 진짜. 걔 와인 좋아한다고.”
“좋아한다는데, 그걸 나랑 먹자고 덥석 깠냐? 으이구, 박찬열 진짜! 아, 답답해. 으아악! 답답해. 아, 나 죽을 거 같아. 누가 의사를 불러줘.”

“아, 그냥 먹어~. 먹자, 너도 술이라면 죽잖아. 걔 과실주도 직접 담근다고 했어. 다음에 또 준다고 했는데, 그것도 같이 먹자.”


하도 주변 여자들한테 선물 공세를 받는 게 일상이다 보니 찬열은 이렇게 나눔도 곧잘 했었다. 문제는 눈치 없이 그걸 받았다가 뒤에서 온갖 나쁜 말을 다 들어먹게 되는 친구들이었는데, 그 선상에 가장 자주 오른 것은 단연 백현이었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백현은 눈치를 살피느라 곧잘 거절했지만 아무 말 없이 챙겨준 것들 중, 나중에 알고 보니 결국 선물의 재활용인 경우도 종종 있었다. 다른 여자애들한테 준 것도 아니고, 썩히거나 버리느니 그냥 친구 준 건데? 이런 뻔뻔한 찬열의 반응에는 백현조차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런 거 생각 다 하면 피곤해. 나 진짜 피곤하다, 백현아. 그냥 먹자. 혼자 다 못 마셔.”
“... 놀고 있네, 말술이면서.”

“심심해서 혼자는 못 마셔. 치즈도 꺼내왔잖아. 봐.”

 

나름 분위기 있게 또 이것저것 꺼내온 안주들을 보며 백현이 심란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러다가 얘 진짜 굴러들어온 복을 아주 세게 걷어차는 거 아니야? 그것도 다신 못 돌아오게. 배우희잖아, 찬열아. 배우희라고.

 

“... 조금만.”

“그래, 이거 향 맡아봐. 걔가 와인 잘 알아서 그런지, 진짜 장난 아니야.”
“....... 와, 와인이 이런 거구나. 우리 집에 보관해둔 와인은 그냥 포도주스에 소주를 섞은 게 분명해. 와, 진짜.”

 

그러나 백현은 평범한 인간일 뿐이었다. 그래, 조금만 눈치 없는 척 하고 살면 이렇게 편한데? 에라, 모르겠다. 눈을 감고 잔을 비운 백현이 찬열에게 반짝거리는 눈으로 신호를 보냈다. 야, 콜!

 

 

 

설정된 작가 이미지가 없어요
대표 사진
독자1
자까님ㅠㅠㅠㅠㅠㅠㅠㅠ 드디어 로그인을ㅠㅠ 휴휴 ㅠㅠㅠㅠㅠㅠㅠㅠ오구 귀여워ㅜㅜㅜㅜㅜㅜㅜ 오구오구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10년 전
대표 사진
gonna
헣... 벌써 12일전이네요 ㅠㅠㅠ 늦어졌습니다.. 컴백일에 맞추려고 했는데 ㅠㅠ 아무튼 감사해요 ㅠㅠㅠ
10년 전
대표 사진
독자2
ㅠㅜㅜ둘이 왜 둘만 모르는 썸을 몇년동안..ㅠㅜㅜㅜㅜㅜㅜㅜㅜ
10년 전
대표 사진
gonna
아직도 갈길이 멉니다 ㅠㅠ 흐유 ㅠㅠㅠ
10년 전
비회원도 댓글 달 수 있어요 (You can write a comment)

확인 또는 엔터키 연타


이런 글은 어떠세요?

전체 HOT댓글없는글
[짧은글] 살인2
05.25 22:30 l 미인령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 40
05.25 21:48 l 구글뷔글
[비투비/육훈] 육성재가 냥줍했는데 그 고양이가 정일훈을 닮은글 12
05.25 20:57 l 쇼금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 23
05.25 20:46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 84
05.25 20:42 l 불건전
[EXO/찬백] 꽃이 피는 가학심 - 11 25
05.25 18:25 l 백라
[위너/송진] memento 1
05.25 18:12 l true or false
[EXO/세훈] 연하의 묘미란 - 특별편 (부제 : 사극 ver. 3)30
05.25 17:37 l 룸파둠파룸
[EXO/세준] 밤에 사랑한 소년 : N 42
05.25 16:43 l 공화국
[EXO/찬백]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나 심심풀이용인 찬백픽. 084
05.25 16:18 l gonna
[인피니트/너뚝] 울림고등학교 인피니트&나.facebook0312
05.25 15:33 l 뺭뀨쁑
[EXO/세훈] 연하의 묘미란 - 특별편 (부제 : 알바생의 일기)55
05.25 15:11 l 룸파둠파룸
[방탄소년단] 탈출구는 존재한다_11
05.25 14:59 l 탈출구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 51
05.25 14:38 l 반문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 60
05.25 14:09 l 마당쇠
[EXO/민석찬열경수세훈종인백현]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 여인이 탄생되는 날이구나10
05.25 13:59 l 쏘크라테스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 56
05.25 13:12 l 조각만
[줄로] Salvation (교도소 조각글)22
05.25 00:34
LABYRINTH-A PLANNED PLOT
05.25 02:05 l Careta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 67
05.25 02:03 l 쿵덕떡
[EXO/박찬열] 짝사랑의 깊이 上10
05.25 00:39 l 너의 세상으로
[EXO/김민석] 길가다 사람 도와줬을뿐인데 내가 황태자비랰ㅋㅋㅋㅋㅋㅋㅋㅋpro33
05.25 00:04 l 꽃바퀴A
[EXO/도경수] 변호사 X 비서 2125
05.24 23:49 l 반했다
[EXO/찬백] 육아탐구생활 (부제; 이현의 돌잔치)28
05.24 22:46 l 치킨..먹고싶다.
[EXO/김종대] 봄, 첫사랑, 그리고 피터팬 1
05.24 21:27 l 어여삐웃자
[다각] 향기(香氣) 016
05.24 20:31 l 백란
로그인 후 이용해 주세요 13
05.24 20:00 l


처음이전201202203204205다음
전체 인기글
일상
연예
드영배
7: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