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XX년 8월 26일
한 1주일간 전정국이랑 마주치지 못했어. 청소하는 곳에서 내내 기다려도 전정국은 보이지를 않고, 도서관에서 죽치고 있는데도 안보이더라구.
그러다가 오늘 처음 마주쳤어. 도서관에서.
"정국아...."
"숙제 펴"
예상외로 아주 멀쩡했어. 마치 잠시 전까지 본 것처럼.
"그 전에..."
"바빠. 이제 곧 9월 모의평가인거 알잖아."
"어떻게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책 펴."
내가 자기를 탓하려는 것도 아니고, 무슨 말을 할 지도 모르면서 이렇게 모든 상황을 덮어버리려는 거...
근데 내가 화를 내는 것도 어색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나도 자세한 정황을 모두 아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전정국이 하자는 대로 따라서 공부를 했어.
분위기는 어색했는데 시간은 잘 지나가더라구.
일주일만에 다시 본 전정국은 분명 달라지진 않았지만 어딘가 느낌적으로 되게 초췌해 보였어.
피로해 보이기도 했고...
그 일주일동안 무성히 뜬 소문만을 주워들었는데 뭐 별의별게 다 있었어.
그 중에 귀기울여 들었던 것은 전정국이 이사장실에 가서 한참을 안나왔다는 것.
이번 일주일동안 계속 이사장실을 드나들었다는 것..정도였어.
20XX년 9월 1일
오늘은 너무 피곤해서 기록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의아한 것만 쓸게.
사환들의 업무는 보통 분기별로 1년에 4번씩 재배치를 해.
크게 달라지는 건 별로 없지만, 자신의 구역에서 실수를 했다거나 업무를 소홀히 한 게 적발되면 다른 구역으로 배치가 되고 그래.
징벌식 배치라고 보면 되니까 난 이번에도 별로 변화가 없었지.
그런데....
이번에 다른 사환들이 경악할만한 배치결과가 나왔어.
보통 사환도 고3들은 사환으로 보내는 마지막 해이기 때문에 업무를 가볍게 주는 편인데...
전정국에게 자그마치 7개의 시설을 더 관리하라는 배치결과가 나왔어.
원래 전정국은 1개학급, 도서관, 체육관 이렇게 3개의 관리를 맡고 있었는데,
이번에 1개 학급, 도서관, 체육관, 기숙사 계단, 본관 계단, 음악실, 조소실, 조리실, 정보실, 운동장. 이렇게 10개의 시설을 관리하라고 했어.
모든 사환들이 경악했지. 이건 분명히 잘못나온 것이라면서 전정국에게 항의하라고 부추겼지만 전정국은 가만히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어.
"이건 민윤기 도련님한테 대들어서 보복성으로 배치된거야. 말도 안되는 배치인데."
"이게 하루 안에 관리할 수 있는 시설이야? 10개를? 그냥 아예 이 학교를 통째로 관리하라는 거랑 다를 게 없잖아"
"게다가 전정국은 우리 중에 유일하게 공부하는 사환이잖아. 저정도 관리하라는 건 공부를 하지 말라는 이야기같은데..."
역대로 가장 경악스러운 배치표가 나온 후 여기서 가장 평온한 사람은 당사자인 전정국 뿐이었어.
20XX년 9월 6일
수시 원서를 접수하기 시작했어.
아가씨들, 도련님들 중 절반 이상은 외국의 학교로 진학을 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국내에서 먼저 학업을 마치려고 하기 때문에 다른 고3학생들처럼 선생님들의 조언을 바탕으로 원서를 접수하고 있었어.
물론 사환들은 이 수시 지원 분위기에서 예외였지.
왜냐하면...
첫째, 돈이 없어. 수시 지원하려면 원서비를 내야 하는데, 전에도 말했다시피 사환들에게 봉급은 전혀 주어지지 않아.
가끔 아가씨들 심부름해서 남는 잔돈정도? 그런 돈을 가지는 것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일이라 각자 가지고 있는 돈은 정말 없다고 보는게 맞아.
그러니까 최소 4만원에서 최대 10만원까지 하는 원서비를 사환이 내고 지원할 수 있을리가 없지.
둘째, 성적이 안돼. 이것도 전에 말했는데, 사환들은 전정국을 제외하고는 정말 성적이 낮아. 그래서 갈 수 있는 대학이 없어.
그래서 지원조차 못하지.
하지만 괜찮아! 어차피 욕심도 없었고, 미련도 없어 ㅋㅋㅋㅋ
근데 내 옆자리에 앉아있는 이 남자애는 야망이 있지.
돈도 없을테고, 수치상 성적도 낮을텐데, 어떻게 대학을 욕심내는거지?
근데 물어보기가 그래서 그냥 전정국을 돕기로 결정했어.
"나 이제 수업 그만할래"
"갑자기 왜"
"난 너처럼 공부랑 일 같이 못하겠어. 하고 싶지도 않고."
"너.."
"근데 나는 너가 대학을 갔으면 좋겠어"
"..."
"그래서 생각해봤는데..."
"..."
"내가 그동안의 수업료 대신으로 너 구역 관리해줄게. 수능 전까지"
"됐어. 그냥 듣지 마"
"너 설마 저거 관리도 하면서 공부도 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차라리 못하는게 나아. 너 시킬 바엔."
"내가 스스로 하는 거야. 너가 시켜서 하는게 아니라. 내가 무슨 셔틀이니?"
"끝까지 거절할 수 없는 내가 밉다"
정말 힘들었었나봐. 평소같았으면 그놈의 존심때문에 거절했어야 하는 건데.
전정국 표정이 급격하게 슬퍼졌어. 툭 건들면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울보였어 울보.
뭐 그렇게 해서 내가 두 달 간 전정국 대신 관리하기로 했어. 대신 사감선생님께는 비밀로 하고.
20XX년 9월 7일.
이렇게 일기를 금방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일단 전정국이 벅차하던 이유를 알겠어.
정말정말 하루종일 하는데도 너무 힘들어. 이걸 전정국은 오후시간 새벽시간만에 끝낸거였잖아. 오죽했겠어..
그것보다 더 쇼킹한 일은...
"너희를 이렇게 불러모은 이유는....이 재단을 신고하기 위해서야"
"예..?"
다들 깜짝 놀랐어. 사감선생님이 우리를 한 방에 모아놓고 말씀하셨거든. 10명이 한꺼번에 놀랐어.
"너희는 지금 착취당하고 있는거야. 이 학교에 의해서."
"...."
"상담도 하고, 관찰도 해서 증거도 다 확보했어."
"...."
"너희가 이 문서에 서명만 한다면, 당장 다음주에 언론에 퍼뜨리고 이 재단을 고소할거야"
"..."
우리는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건지 잘 모르겠고, 선생님이 왜 갑자기 이런 행동을 하는지도 잘 모르겠어서 벙쪄있었어.
"저희에게 시간을 주세요. 최소한 내일까지라도. 경황이 없어서 바로 서명하긴 힘들겠네요."
"그래. 내일 아침까지 나에게 와서 한명씩 서명하도록 해"
사감선생님이 나가고 전정국이 우리에게 말했어.
"다들 절대 싸인하지마."
"왜?"
"해봤자 우리한테 좋은 건 한가지도 없어. 오히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고 바로 쫓겨날거라구. 어차피 우리는 몇개월만 있으면 이 학교를 나가게 되어있어. 저 사람이 하는 말에 휩쓸리지마"
전정국은 바로 교실로 올라갔고, 우리는 웅성웅성대다가 각자 구역으로 흩어졌어.
이게 또 무슨 일이야...마지막 학교생활이 왜 이렇게 복잡한거야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