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세자의 베필이 정해졌다 했습니다. 종친회에서도 결정된 일입니다. 더 이상 말씀 마세요."
"어마마마!"
찬열은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중전마마께서 찾으신다는 기별을 듣고 어머니의 처소로 향했다. 평소라면 자애로운 미소로 절 반겨주실 분이 무거운 표정을 하고 다과상에 앉아 계시기에 찬열은 의아해하며 자리에 앉았다. 한동안 아무말 없이 찻잔만 매만지던 그녀가 입을 떼지 못하고 주저하는 일이 계속 되자 참지 못한 찬열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무슨 걱정이 있으시냐는 찬열의 말에 큰 마음을 먹은 듯 조용히 흘러나오는 소리는 찬열을 경악케했다.
"체통을 지키세요. 세자."
"소자 아직 열아홉이옵니다. 고등학생에게 혼인이 요즘 시대에 가당키나 합니까. 아바마마께서 이리 정정하신데 아직은 이르옵니다."
"세자... 이 어미도 세자의 혼인이 이르다 여겨 몇번이나 주상전하께 말씀드려보아도 워낙 완강하셔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직 아이같기만 한 세자를 떠나 보내는 이 어미의 마음도 이해해 주세요."
눈물을 글썽이며 대답하는 어머니를 바라보는 찬열은 아직까지 화가 가시지 않은 듯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아바마마의 심중을 알 수 없지만 자신의 의견도 묻지 않고 종친회와 왕실 어른들끼리 내린 이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마마마의 계속 되는 설득에 아무 말 않고 앉아있던 찬열은 문 밖에 들리는 대비마마가 납시었다는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나 굳은 표정으로 인사를 드렸다.
"다들 앉아요. 그래, 세자는 조찬은 들었지요?"
"예. 할마마마."
"밖에서 들어보니 세자의 반대가 극심한 듯 한데, 왕실 어른들의 뜻이라 해도 정녕 안되겠습니까?"
"소자 아직 미령하옵니다. 할마마마께서 이리도 정정하신데 저의 혼인은 왕실의 군식구를 늘리는 일일 뿐입니다. 왕위를 받기 전에 유학을 다녀오도록 윤허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이제 와서 이렇게 되면..."
"세자... 아무도 세자더러 유학을 가지말라 하지 않았어요. 소중한 베필과 함께 간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을 것인데... 그렇지 않습니까, 중전?"
대비와 찬열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던 중전은 갑작스런 질문에 얼떨결에 그렇고마하고 대답하였다. 그 상황을 지켜본 찬열은 자신의 편은 아무도 없다는 생각에 무대포로 밀고 가기로 결정했다.
"왕실의 어른들이 무슨 말을 하셔도 전 이 혼인 안합니다. 더더욱 정략결혼이라뇨... 제 베필이 될 자는 제가 정합니다. 사랑하는 이와 혼인할 겁니다."
찬열은 어른의 앞이라는 것도 잊은 듯 인사도 없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서려 했다. 그때 대비의 나지막히 찬열을 부르는 소리에 찬열은 그 자리에 멈춰섰다.
"세자."
"..."
"이 할미가 많이 아파요. 중손주를 품에 안아 보고 떠나는게 이 할미의 소원입니다."
"..."
"큰 것도 아닙니다. 그저 우리 세자가 오순도순 가정을 꾸려서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죽으면 한이 없겠어요. 부탁해요. 세자."
찬열은 복잡해지는 머리에 무표정하게 인사를 올리고 방을 나섰다. 항상 따뜻했던 할마마마가 많이 아프다는 소리에 마음이 불편했고 부탁이라며 간절하게 말하시던 그 음성에 머리가 아파왔다.
중궁전을 나선 찬열은 등교를 위해 호위차량에 몸을 실었다. 보조석에 앉아서 오늘 일정을 읽어주는 김실장의 목소리가 하나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오늘은 오전 수업만 들으시고 오후에는 가례 준비를 위해 별궁으로 이동하실겁니다. 그리고 저녁은 주상전하와의 만찬을 가지..."
"김실장님.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네? 세자저하께선 저녁만찬을 주상전하와..."
"아니요. 앞에 말입니다. 제가 분명히 이번 혼인은 없을 것이다 말씀드렸는데요."
"그게... 대비마마께서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해놓으셨습니다. 내시관에 들려 가례준비에 세자저하가 소홀히 하지 않게 하라는 명이 있으셔서..."
"하... 알겠습니다."
이미 절반은 진행된 이 혼례가 혼인의 주인공인 자신이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어이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이 난관을 극복할 수 있을지 고민을 하다보니 이미 학교에 도착한 후였다. 찬열이 다니고 있는 왕실고등학교는 국회위원 자제들과 각종 기업 후계자들이 거쳐가는 곳이었다. 왕실 유치원부터 시작하여 고등학교까지 대부분의 학생은 변함이 없었고 찬열은 항상 의도치 않게 우두머리 역할을 하고 있었다.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내며 도착한 교실엔 아이들이 한 곳에 모여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때 마침 대통령의 손자이며 찬열과 오랜 친우인 종인이 장난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세자저하. 장가 드신다면서요?"
"뭐? 누가그래."
"모른척 하지마 새끼야. 신문 헤드라인에 떡하니 있구만. 근데 좀 이르다?"
"..그 신문 어딨어."
"저기. 애들이 보고있는 거."
말이 끝나자마자 찬열이 아이들을 헤치고 걸어간 곳엔 각 신문사의 신문이 놓여있었다.
[ 25년 만의 왕실결혼. 왕세자의 베필은 누구?]
[특종. 박찬열 왕세자 혼인.]
[왕실의 급작스런 결혼발표... 그 이유는?]
찬열은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혼인 날짜까지 나와있는 신문을 찢듯이 움켜쥐곤 자신의 자리도 돌아왔다. 아이들은 찬열의 무서운 분위기에 다들 눈치를 보며 자기 할 일을 찾아갔고 종인만이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찬열에게 다가왔다.
"언제부터 정해졌냐? 나한테 얘기도 안하고...싱거운 새끼. 결국에 희주랑 하는거지?"
"..."
"뭐... 주상전하 많이 편찮으셔...? 갑자기 결혼한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왕실에 무슨 일 생긴거 아니냐고 걱정이 많다. 암튼 니가 일등했네."
"...랑 아니야."
"뭐?"
"희주랑 하는거 아니라고. 나도 모른다고."
찬열은 종인에개 소리치고 자리를 박차고 나와 화장실로 향했다. 복잡한 머리를 식히기 위해 세수를 하고 옥상에 올라가 담배를 물고 연달아 한숨을 쉬고 있었다. 자신에겐 왕실 중학교에서 부터 함께한 연인이 있었다. 평생을 함께 할 사람이라고 정해두었는데... 찬열은 세자빈이 되면 자유를 잃은 새가 되어버릴 희주를 위해 유학을 가장한 도피를 계획하기도 했다. 그런데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박찬열."
"..."
"신문에... 이거 무슨 뜻이야?"
옥상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발걸음 소리가 자신을 향해 오고 있었다. 발걸음 소리를 듣고 희주를 알아챌 만큼 찬열의 희주에 대한 애정도는 높았다. 목소리에 울음이 섞인 희주의 물음에 찬열은 그저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우리나라 왕세자가 너말고 또 있어? 이거... 오보지?"
"..."
"무슨 말이라도 해봐..."
눈물을 흘리는 희주를 품에 안은 찬열은 그저 토닥일 뿐이었다.
"이거... 안하면 안돼?"
"왕실 어른들이 정한거야... 따를 수 밖에 없어... 미안하다..."
"지금 세상에 정략결혼이 어디있어..."
"나도 안한다고 말씀도 드렸고 소리도 질러봤는데, 내가 이 나라의 왕세자인 이상 뜻에 따를 수 밖에 없다. 희주야."
희주는 찬열의 품에서 더 서러운 눈물을 흘렸다. 찬열은 그녀의 울음이 자신의 가슴을 찢는 듯 했다. 그리곤 그녀에게 자신이 힘이 생겨 그녀를 데리러 올테니 기다려 달라고 속삭였다. 이 혼인은 허울뿐이라고 곧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했다.
안녕하세요. 해밀을 완성시키지 못하고 새로운 작품을 가져오게 된 점 정말 죄송해요ㅠ 제가 해밀에 손을 놓고 최근 다시 이끌고 가려다 보니 해밀이라는 작품이 많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해밀의 연재재기는 이번 연말로 미루겠습니다. 더 나은 실력으로 돌아오겠습니드아.
그 대신 작품 텀이 길것으로 예상되는 새작품을 들고왔어요.
뭐... 제 작품이 다 그렇죠... 백현이 고생하고... 찬열이 나쁜놈이고... 뻔하지만 제 취향인걸요. 앞으로 자주는 아니지만 꾸준하게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