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준회의 마지막 밤에도 나는 준회의 품에 안겨 있었다. 준회는 여느 날과 다름 없는 밤처럼 내 머리칼을 쓸며 속삭였다. “언제 잘 거야?” 그런 준회의 말에 나는 터져나올 것만 같은 울음을 겨우 삼키고 답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있다가.”
내 말에 준회는 짧게 답을 했다. “그래.”
11시 반이 넘어가는 시간까지 우리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서로를 품에 안고,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그렇게 조용히 이별을 준비할 뿐이었다.
40분. 준회의 종료를 20분 남짓 남겨놓은 시간.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가 없어서 준회의 품에 안겨 준회의 잠옷을 축축하게 적셨다. 내가 우는 걸 느낀 건지 준회가 나를 품에 꼭 껴안았다. 내 머리를 제 가슴팍에 푹 묻히도록 껴안은 준회가 낮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주인님.”
“…….”
“대답 안 해줄 거야?”
“…왜 불러.”
“고마워.”
“뭐가?”
“날 좋아해줘서.”
준회의 말에 새어나오려던 흐느낌을 참으려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리고 준회의 품으로 조금 더 파고들었다. 그의 품에서는 익숙한 준회의 향기가 풍겨왔다. 지금의 내겐, 그것 마저도 아리게 느껴졌다.
말을 잠깐 멈춘 준회는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잠깐 뜸을 들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목소리로 말해왔다.
“고마워.”
내게 말을 하는 준회의 목소리가 떨렸다. 지금 준회의 목소리는, 준회는… 울고 있었다.
울음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준회가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말을 이었다.
“처음으로 인간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
“…….”
“내가 인간이었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더 행복하게 지내지 않았을까.”
“…….”
“휴머노이드라서 미안해.”
“…….”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치? 그럼 주인님을 조금 더 보고, 한 번이라도 더 입맞추고, 한 번이라도 더….”
“…….”
“미안해. 다 미안해.”
제가 뭐라고 하는 건지도 모르는 듯 답지 않게 두서없는 말을 뱉던 준회가 입을 꾹 다물었다.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은 채로 준회의 품에서 고개를 들어 준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준회의 표정은 참 묘했다. 울지 않았는데, 그는 울고 있었다. 그런 준회의 모습에 더욱 더 눈물이 새어나왔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준회는 가만히 날 내려다보았다. 그리곤 짧게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시간이 지나면 주인님도 다른 남자를 만나겠지?”
“…안 만나. 안 만날 거야.”
“만나도 괜찮아.”
“…….”
“정말이야.”
“…….”
“나는 주인님이 늘 행복했으면 해. 진심으로.”
저를 잊지 말라, 다른 남자를 만나지 말라, 그런 이기적인 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는 준회가 야속하다. 너무나도 야속하다. 원망스러울 만큼 착한 준회의 말에 누군가 가슴을 찢어놓은 것만 같이 아프고 아려왔다. 정말이지 구준회 너는….
시계의 긴 바늘은 11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지금 시간이 11시 55분임을 의미했고, 그렇다는 건 준회와의 시간이 겨우 5분 밖에 남지 않은 것을 의미했다. 조금 전 그 말을 끝으로 준회는 아무런 말이 없다. 나 또한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준회를 단 한 번도 부르지 않았고, 준회는 다시금 나를 불러왔다.
“…주인님.”
“…응.”
“다시 태어나면 주인님을 만날 수 있을까.”
“…….”
“울지 마.”
“…그래.”
“그리고 있잖아.”
“…….”
“사랑해. 아주 많이.”
준회의 말이 기폭제가 된 듯 나는 서러운 울음을 흘렸다. 준회야, 준회야, 하고 부르는 내 목소리에 준회는 응, 응, 하고 일일이 짧게 대답을 했다. “나도. 나도 사랑해.” 울음 섞인 내 말에 준회가 피식 웃었다. 그리곤 다시 나를 품 안으로 당겼다.
“조금만 잘게.”
“…….”
“이제 꿈에서 만나, 주인님.”
내 등을 토닥이는 준회의 손길에 내 울음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리고 겨우 목소리를 짜내서 “그래.” 하고 대답을 할 때 즈음, 나를 토닥이던 준회의 손길이 멈췄다. 겨우 멈춘 울음이 다시 새어나오고, 나는 그의 품에 안긴 채로 밤새도록 울고 또 울었다. 내 몸에 있는 모든 수분이 다 빠져나갈 것만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아주 서럽게.
그렇게 준회는 종료되었다.
이 넓은 집에 나를 혼자 남겨둔 채로.
32(完)
일상으로 돌아오기까지는 너무나 많은 시간이 걸렸다. 집에 있는 준회의 물건을 하나 둘 정리하면서 나는 또 한참을 울었다. 가장 나를 울게 만들었던 건 구준회의 노트북 속 저장된 소설이었다. 내게 보여주지 않았던 글을 꾹 눌러본 나는 글을 읽는 내내 가슴이 아려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이야기는 우리 이야기였다. 로봇, 그리고 그런 로봇과 사랑에 빠진 인간. 준회와의 추억이 떠올라 슬펐지만 무엇보다도 날 슬프게 했던 말은 소설의 마지막에 쓰여진 말이였다. 희망이 적을수록 나의 사랑은 더 뜨거워지도다. 준회야, 우리의 사랑은, 희망이 적은 만큼 뜨거웠을까….
겨우 그 짐을 다 박스에 정리해 넣었을 때 즈음, 그 상자를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준회의 방이었던, 지금은 비어버린 방의 침대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방의 문을 꼭 닫았다. 준회와의 추억을 그 방 안에 다 봉인한 것 처럼, 새어나오지 않도록.
그 다음으로는 뭘 해야할까…. 쇼파에 앉아 천장을 바라보며 잠깐 고민을 하던 내 머리에 문득 무언가가 스쳤다. 142857. 작은 숫자 하나도 기억하지 못 했던 나는 준회의 번호를 잊지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꼭 귓가에서 준회가 속삭여 주는 것만 같이 또렷한 숫자에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몸을 일으켰다.
밖으로 나오자 준회와 걸었던 거리가 나를 맞고 있었다. 새어나오는 눈물을 꾹 누르며 나는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걸어 내가 향한 곳은 타투를 하는 곳이었다. 낯선 문 안으로 들어가자 내 상상보다는 밝은 조명 아래 몇 명의 남자들이 나를 보고 인사를 해왔다. “어서오세요.”
그들을 향해 살짝 고개를 꾸벅이곤 입을 열었다.
“숫자도 새길 수 있나요?”
“물론이죠. 어디에 하실 거에요?”
“팔이요.”
“이 쪽 방으로 가시면 됩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저희 직원이 새겨드리러 갈 거에요.”
남자의 안내에 따라 작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의자에 앉아 테이블 위로 팔을 올려놓고 주위를 둘러보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키가 큰 남자 한 명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던 내 시선이 남자에게 닿고 그 순간 내 눈이 조금 커졌다.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분명 저 사람은… 준회였다.
놀란 내 표정을 못 본 건지 남자는 익숙하게 내 맞은 편에 앉았다. 그리고 그제야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보았다. 놀란 나와는 다르게 남자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씩 웃으며 인사를 해왔다.
“안녕하세요. 죄송합니다, 점심 식사가 조금 늦게 끝나서.”
“아….”
“어떤 걸로 새기실 건가요? 크기는 어느 정도?”
웃는 얼굴, 목소리, 말투까지 구준회와 닮았다. 아니, 분명 구준회였다. 하지만 저 사람이 구준회일 리가 없었다. 그건 불가능하잖아…. 혼란스러운 내 시선이 남자의 앞치마 위에 닿았다. 검은 앞치마 위로 달린 하얀 명찰에는 ‘정찬우’ 하는 이름이 적혀있었다. …그럼 그렇지. 그냥 닮은 사람이었구나. 그제서야 나는 놀란 눈을 풀고 왠지 모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안도의 한숨이 아닌 아쉬움의 한숨이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남자는 대답 없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 남자가 “손님?” 하고 부르는 소리에 그제야 정신이 깼다. 고개를 살짝 젓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숫자를 새기고 싶어요. 여기 이 쪽에, 이만하게.”
“어떤 숫자요?”
“142857이요.”
내 대답에 의외라는 듯 날 바라보던 남자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장갑을 낀 남자가 내 팔을 잡고 조금씩 숫자를 새겨가기 시작했다. 하나 둘 씩 숫자가 새겨지고, 어디에 시선을 둬야 할 지 몰라서 방 안의 글귀에 시선을 물끄러미 두던 중 아무 말도 없던 남자가 갑작스레 내게 말을 걸어왔다.
“이 숫자에 무슨 추억이라도 있으세요?”
“네? 아… 네.”
“신기하네요.”
“뭐가요?”
“이 숫자, 참 신기한 수잖아요.”
잠깐 뜸을 들인 남자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2를 곱해도, 3을 곱해도, 4를 곱해도, 자리만 바뀔 뿐 숫자는 그대로인 신비의 수.”
“…….”
“신기해서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걸 새기는 분은 처음 봤네요.”
“…어떻게….”
“네?”
“어떻게 알아요, 그걸?”
“아, 예전에 책에서 봤었어요. 베르나르 베르베르 소설 책에 나오거든요.”
차가운 얼굴과는 다르게 예상보다 남자는 말이 많았다. 웃으며 말하는 남자를 잠깐 바라보던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142857은 신기한 수야.’
‘신기한 수?’
‘이 수에 2를 곱해도, 3을 곱해도, 4를 곱해도 나오는 숫자는 142857, 여섯 개야.’
‘어?’
‘142857, 각 자리의 숫자들이 자리를 옮긴 것과 같다는 말이야.’
예전에 준회와 나누었던 이야기가 머리 속을 어지럽혔다. 그 때의 준회 목소리, 그리고 지금 이 남자의 목소리. 같은 목소리, 같은 얼굴, 그리고 같은 내용까지. 자꾸만 저 남자가 준회와 겹쳐보였다. 다시 한 번 남자의 명찰을 바라보며 나는 겨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저 남자는 준회가 아니야.
타투가 끝나고 남자가 내 팔을 얇은 면으로 덮으며 말했다.
“끝났습니다. 설명은 나중에 카운터에서 다 해드릴 거에요.”
웃으며 말하는 그 모습에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바라만 보는데, 남자가 몸을 일으켜 섰다. 내게 가볍게 인사를 한 남자는 몸을 일으켜 방 밖으로 나섰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일어선 모습마저 자꾸만 준회와 겹쳐보였다. 아니야, 아니라니까, 이 멍청한 머리야…. 나는 그렇게 또 내 마음을 다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설명을 듣고 계산을 마친 뒤 몸을 돌려 들어왔던 문을 향해 걸었다. 타투를 새긴 팔이 조금씩 따끔거렸지만 그래도 그 숫자를 새긴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142857, 새겨진 숫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문을 나서려는 그 때, 내 귀에 무언가 낯익은 이름이 들려왔다.
“준회야, 너 내 앞치마 입었어?”
“엉.”
“야아, 네 꺼 좀 입으라니까.”
“뭐 어때.”
준회?
무의식적으로 그 이름에 반응한 내가 걸음을 멈추었다. 고개를 뒤로 돌리자 조금 전 내 팔에 타투를 새겨주었던 남자와 처음 보는, 어리게 생긴 남자 한 명이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빨리 내 꺼 내놔. 네 꺼 입어.”
“알았어.”
내 팔에 숫자를 새겨준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제가 입고 있던 앞치마를 벗었다. 그리곤 제 앞의 어린 남자에게 앞치마를 내밀었다. 잠깐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옆에 걸린 주인 없는 앞치마를 제 어깨 위로 걸쳤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그들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저기요, 저기요!” 한 걸음, 또 한 걸음 걷던 내가 그들의 앞에 닿자 그들은 뭐라고 장난을 치려다 말고 날 힐끔 바라보았다. 내 부름에 남자가 조금 전 보았던 그 다정한 웃음을 지으며 내게 답했다.
“왜 그러세요?”
“이름!”
“네?”
“이름이 뭐에요?”
“이름이요?”
“네. 이름이요. 그 쪽 이름.”
“갑자기 그런 건 왜….”
의아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남자의 팔을 잡자 남자가 물끄러미 날 내려다보았다. 내 눈에서 간절한 무언가를 읽은 건지 남자가 피식 웃으며 제 가슴팍에 달린 이름표를 바라보았다. 뒤집어진 이름표를 발견한 남자가 얼레, 하는 말과 함께 내게 잡히지 않은 한 쪽 손으로 이름표를 똑바로 세웠다. 내 시선이 이름표에 닿고, 나는 나도 모르게 울컥하는 기분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름표가 제대로 위치한 것이 만족스러운 듯 남자가 예쁘게 웃으며 말했다.
“여기 있네요, 제 이름.”
“…….”
“구준회 입니다.”
휴머노이드, K 完
♡
해피일까요? 새드일까요? 사실 잘 모르겠어요, 읽으면 눈물이 나는 글이긴 한데, 해피 같기도 하고 새드 같기도 하고 아리송한 글? 이렇게 오랜 시간을 달려왔던 휴머노이드도 완결이 났습니다! 따로 후기는 없고, 여기에다 몇 마디 끄적끄적 쓸 생각이에요 *.*
휴머노이드는 음, 어쩌다 보게 된 영화 her과 이런 저런 것들에서 모티브를 얻어 쓰게 된 글이에요! 휴머노이드와 사랑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주제를 놓고 고민을 해본 글인데 저는 아무래도 사랑을 할 수 있다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서 ㅎ.ㅎ 그래서 우리 준회를 로봇으로 만들고.. 오프를 시키고.. 나란 여자.. 나쁜 여자..
저번 편에서 눈물 흘리셨다는 분들이 많은데, 이번 편에서도 한 방울 즈음 눈물을 흘려주셨으면 하는 바람 (ㅠ_ㅠ) 저는 이번 편이 더 아련한데, 여러분은 안 그래요? 그래요 안 그래요? 나 맨날 이렇게 여러번 묻고.. 음..?
텍스트 파일은 다음 글이 오는 날 함께 오겠습니다! 비회원 분들께 너무나도 죄송해요 (ㅠㅠ) 불마크 같지 않은 불마크 때문에 중간에 흐름이 뚝 끊겨서 읽지 못 하고 계시는 분도 있으시더라구요 엉엉 마음이 아파 (찡찡) 얼른 가지고 올게요! 얼른! 뭐, 불마크 편의 중요한 내용이라면 둘은 함께 밤을 보냈고, 준회가 사랑한다고 말을 한 것 정도..? 그리고 그 뒤를 읽으시면.. 이해.. 안.. 되시려나..? 어휴 이런 몹쓸 표현력이란ㅋㅋㅋㅋㅋㅋㅋㅋ
아무튼 참 즐거웠습니다! 휴머노이드도 이렇게 안녕이네요! 한빈이, 동혁이, 지원이, 준회까지! 벌써 네 명을 완결했어요 *.* 다음은 누가 되려나~ 다음 편에서도 즐거운 얼굴로 만나길!
암호닉은 아가씨 때의 암호닉 그대로 쓰셔도 무관합니다! 언제나 신청 받고 있으니 제게 한 발짝 다가와 주세요 (수줍)
아 목이 간질간질해요.. 아까 엄청 톡 쏘는 캔디 하나를 먹었더니 ㅠ.ㅠ 얼른 양치하고 자야겠어요 안 자고 있는 이쁜이들이 있으려나? 오늘도 잘 자요 ♡
휴머노이드 준회,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