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유 -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
(꼭 배경음악과 함께 들어주세요. 꼭.)
백현은 모든 일에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타인이 답답함을 호소하리만큼 느긋했냐고 묻는다면, 그것 또한 아니었다. 그저 늘 맑게 웃는 낯으로 상대와 상황을 유하게 다스릴 줄 알던 백현은, 요즈음 꽤나 경수의 신경을 긁고 있다.
둘은 한창 이성에 눈을 뜰 시기인 고등학생 시절 몇 달간의 마음고생 끝에 서로의 감정을 확인했고, 그로 시작된 관계는 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 잘 유지되고 있는 중이다. 이따금씩 그때의 일들을 이야기할 때면 주위에 널린 여자들이 아닌 동성인 서로에게 관심을 갖고 결국 만남을 시작한 저들이 우습기만 했지만, 어린 나이에도 결코 서툰 감정이 아니었음을 증명해 보이듯 여태 이렇다 할 마찰 없이 지내오던 그들이었다.
또래의 다른 연인들처럼, 어쩌면 그보다도 더욱 돈독하던 그들의 관계에 적색 신호가 켜지기 시작한 것은 급작스레 변해버린 백현의 영향이 컸다. 어떤 상황에서든 경수의 기분과 의견을 존중해주던 그였는데, 길을 걷다 문득 보인 슬프다고 소문이 자자한 영화의 포스터를 보고서 경수의 의견도 묻지 않고 영화관에 끌고 가 한바탕 눈물을 쏟는가 하면 배려 가득했던 그들의 행위가 그저 욕구를 채우기 위한 것인 양 혼절하기 직전까지 몇 번이고, 몇 시간이고 지속되기도 했고, 또 어느 날은 경수를 저의 무릎 위에 앉히고 목덜미에 입술을 묻은 채로 오랜 시간을 허비하기도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관계를 요구하던 백현 탓에, 주 중에 끝냈어야 할 일들이 아직까지 해결되지 못한 채 경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경수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무작정 그를 불러낸 백현은 속이 더부룩해 아무것도 먹기 싫다는 그에게 자꾸만 음식을 권하고 있다. 조용한 목소리로 그를 거부해봤지만 반복되는 백현의 이상행동에, 경수의 인내는 결국 한계치에 다다랐다.
"변백현."
"이것도…,"
"…백현아, 제발."
"……."
"요즘 나 잠도 못 자."
"……."
"바쁜 거 알잖아."
"…미안해."
제 앞에 놓인 접시로 시선을 떨군 한 남자와 그런 그의 움츠린 어깨를 응시하는 또 다른 남자. 저녁시간대의 소란스러운 음식점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광경이었다.
…가자. 길게 이어지던 침묵을 깨트린 건 의외로 백현이었다. 먼저 짐을 챙겨 계산대로 향하는 백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경수는 듬직하게만 느껴지던 그가 어쩐지 왜소해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지나 잘 챙겨 먹을 것이지. 의도치 않게 쓴소리를 한 것에 대한 미안함과 왜인지 모를 속상함이 경수의 머릿속을 잠식해나갔다.
* * *
그날 들은 모진 말 때문에 저를 불편해할 것 같다던 경수의 걱정과는 달리 백현은 아무렇지 않게 평소처럼 경수를 대했고, 이는 변해버리기 전 그의 태도와 다름없었기에 경수는 백현에게 품었던 불만을 모두 떨쳐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돈독해진 지금의 둘은, 근처 바닷가를 향해 차를 몰고 있는 중이다. 수년간 만남을 이어오면서 이곳저곳 많이도 다녔지만 유일하게 가지 못 했던 곳이 있다면 그건 인적 드문 한적한 밤바다였다. 경수와 백현은 공통점이 참 많았다. 그리고 그중의 하나가 바다를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물에 들어가면 저를 감싸 안아주는 듯한 아늑한 기분이 좋고, 굳이 들어가지 않더라도 모든 것을 수용해줄 것만 같은 바다의 장엄함이 좋다는 이유도 똑같았다. 그동안 저가 바빠서, 혹은 백현이 바빠서 무산되었던 여행의 행선지가 다름 아닌 바다라는 것이 기분 좋은 듯, 경수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이윽고 도착한 밤바다에서 둘은 어둠의 힘을 빌려 손을 맞잡고 그 주위만 한참을 거닐었다. 시원한 바닷바람과 철썩이는 파도소리, 그리고 제 손을 꽉 쥐고 있는 사랑하는 저의 연인. 경수는 너무 행복한 지금 이 순간, 이 감정이 영원하기를 소망한다.
"백현아."
"응."
"사랑해."
"……."
"사랑해, 백현아."
"……."
"아주 많이."
"…나도."
뒤늦게 대답을 한 백현이었지만 그마저도 좋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안겨오는 경수를 감싸 안은 백현은 그의 등을 작게 쓰담는다.
"요즘 바빠?"
"응, 조금."
"왜 이렇게 말랐어."
"너보단 아닐걸."
키득대며 저의 머리를 헤집는 백현의 손길을 느끼던 경수는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비비적거리며 더욱 깊숙이 안겨왔다.
"우리 나중에 바닷가에서 살자."
"응, 그러자."
"매일매일 바다도 보러 오자."
"바다가 그렇게 좋아?"
"좋지, 그럼. 난 죽어서도 바다에 뿌려지면 좋겠어."
"……."
"내가 먼저 죽으면, 꼭 바다에 뿌려줘. 알겠지?"
"…응."
백현은 바닷가라서 유난히 바람이 시린 것 같다고, 그래서 눈까지 시려오는 것이라고 자신을 위로했다.
* * *
정확히 2주 째다. 바다에 다녀온 그날 이후로 백현과는 2주 째 연락이 되질 않는다. 매일같이 보내는 카톡과 문자에 대한 답장도, 부재중 기록에 대한 답전화도 전혀 없었다. 사촌이라는 명분으로 찾아간 백현의 직장에서는 한 달 전쯤 돌연 사직서를 내고 일을 그만두었다고, 유능했는데 아쉽다는 말 밖에 들을 수가 없었고, 경수의 생년월일로 설정되어 있던 현관 비밀번호도 다른 것으로 바뀌었다. 미칠 노릇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등학교 동창들에게 연락을 해보아도 모른다는 대답이 돌아오기 일쑤였다. 주말까지 반납해가며 이른 새벽부터 백현이 갈만한 곳을 찾아다니는 일에 몰두해있던 경수에게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변백현?!"
-…아, 나 박찬열인데.
백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급히 전화를 받았지만 들려오는 목소리는 백현의 것과는 달리 한없이 낮은 찬열의 것이었다. 박찬열, 분명 그는 저와 백현을 지독히도 싫어하는 사람들 중 하나였다. 고등학교 졸업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빈 교실에서 입 맞추고 있는 모습을 그에게 들켜버렸고 더럽다고 욕을 하며 자리를 떠난 찬열은 졸업 후 동창회에서까지 노골적으로 싫은 티를 내며 저의 감정을 숨기지 않았었는데, 그런 그가 갑자기 왜.
-…너 변백현 어디있는지 모르지.
"……."
-걔 많이 아픈 건 알아? 입원했던데.
"…아파? 변백현이?"
-…애가 반쪽이 됐던데, 몰랐어?
"……."
그저 요즘 너무 바빠서 밥을 챙겨 먹지 못한 탓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직장을 그만둔 상태에서 그 정도로 빠진 거면, 아파서 입원까지 한 거면,
-오죽하면 내가 너한테 연락했겠냐.
변백현이,
-…사람이 다 죽어가는데 가만 둘 수가 있나.
사랑하는 내 백현이가,
-병원 주소 보내줄게. 힘내라.
…죽기라도 하는걸까.
'큰아버지 병문안 갔다가 봤는데 며칠이 지나도 아무도 안 오더라. 약 먹는 거 보면 큰 병이라도 걸린 것 같던데. 간호사들도 아직 젊은데 안쓰럽다고 하고.'
찬열의 말을 곱씹으며 차를 몰던 경수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에 연신 물을 들이켜야만 했다. 백현은 분명 요 근래 저의 앞에서도 약을 자주 챙겨 먹었었다. 무슨 약을 그렇게 많이 먹느냐는 저의 물음에 비타민이라고 둘러댄 그의 변명을 믿어서는 안됐었다. 비타민을 그렇게 많이, 또 자주 먹을 리가 없는데. 찬열이 보내온 문자에는 서울과 꽤나 떨어진 지방 도시의 대학병원 주소가 적혀있었다. 저를 피해 가려면 아주 멀리 떨어진 시골이라도 가던지, 얼마나 아프면 대학병원을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이제는 눈시울까지 붉어진 경수는 눈을 벅벅 닦으며 흐려진 시야를 다시금 정리했다.
겨우 도착한 병원의 접수처에서 백현의 호실이 적힌 종이를 받아들자 그제야 그가 입원을 했고 저는 그런 그를 찾아온 것이 실감이 났다. 백현의 이름이 적힌 병실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다 겨우 문을 열고 들어서자,
"…변백현."
잔뜩 말라버린 팔로 입에 약을 털어 넣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당황한 낯빛으로 급히 약을 삼킨 그는 침대에서 내려와 저의 앞에 마주 섰다. 그 과정에서 보게 된 발목은 뼈가 잔뜩 도드라진 게 보일 정도로 가죽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고 그를 숨기려 슬쩍 바짓단을 끌어내리는 모습을 보고 마침내 참던 눈물이 터져버렸다.
"…너 어떻게…."
"나쁜 놈아."
"……."
"…나쁜 새끼야."
"……."
"너, 내가…, 내가,"
울컥 치미는 설움을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엉엉 우는 저를 어색하게 끌어안은 백현은 늘 그래왔듯 저의 등을 작게 쓰다듬는다. 그 익숙하고도 다정한 행동에 더욱 서러워진 경수는 백현의 옷깃을 꽉 그러쥔 채 하염없이 눈물로 그의 옷을 적시고 있었다.
백현의 담당 의사를 찾아가 그의 정확한 상태를 전해 들은 경수는 그대로 기절해버리고만 싶었다. 잠에서 깨면 악몽을 꿨냐고 다정하게 저를 안아주는 백현이 옆에 있었으면 좋겠고 그런 그는 지금처럼 야윈 모습이 아니라 살이 적당히 붙은, 딱 1년 전의 그 모습이기를 바랬다. 위암 말기 판정을 받은 백현은, 병이 너무 악화되어 살 날이 이제 겨우 한 달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아, 그래서 그렇게 갑자기 살이 많이 빠진 거구나. 저와의 식사에서 속이 쓰리다고 밥을 거르던 것도 그동안의 이상행동들도 전부, …암 때문이었구나. 이제야 맞아떨어지는 과거의 상황들은 경수를 더욱 미치게 만들었다.
"……."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백현의 얼굴은 마치 시체의 그것처럼 핏기가 전혀 없었기에 아직 때가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몇 번이고 호흡을 확인해야만 했다. 만일 저가 시한부 판정을 받았더라면, 저도 백현처럼 그에게 사실을 숨기고 어디로든 몸을 숨길 것이다. 하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시간을 허비한 그가 그저 서럽고 원망스럽기만 할 뿐이다. 한 달. 한 달 뒤면 정말 그를 보내야 한다. 닿지도 못할 아주 먼 곳으로. 이불에 고개를 파묻고 숨죽여 울던 경수의 머리 위로 커다란 손이 조심스레 내려앉는다. 잠에서 깬 뒤에도 한참을 망설이던 손이 경수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헤집는다.
"…울지마."
다정히 제 이름을 불러주던 그의 목소리는 볼품없이 갈라진 채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에 속상한 마음이 더욱 치밀어 이제는 어깨까지 들썩이며 흐느끼는 소리를 내자 이불에 박혀있던 얼굴을 들게 한 백현이 저의 손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준다.
"울지마, 경수야."
"……."
"…내가 다 미안해."
"……."
"내가 다 잘못했어."
니가 울면 나는 더 아파. 힘 없이 흩어진 목소리를 끝으로 병실에는 경수의 울먹이는 소리만이 가득 퍼져나갔다. 분명 백현의 얼굴을 본 이후로 계속해서 눈물을 흘린 것 같은데, 아직까지 울 수가 있다는 게 신기하다. 지금 경수는 억울함과 슬픔, 그리고 안도의 눈물을 흘리는 중이다. 적어도 죽은 백현의 앞에서 우는 게 아니라서, 한 달이라도 더 그의 얼굴을 볼 수가 있으니까.
* * *
경수가 병원에 머무른지 며칠 지나지 않았을 때, 밀려오는 토기에 몰래 화장실로 달려간 백현은 새빨간 피를 토해내었고 이를 본 경수의 눈물 섞인 애원의 영향으로 그는 얼마 전부터 서울의 큰 병원으로 이송된 상태이다. 요즈음의 백현은 약기운 때문인지 깨어있는 시간보다 잠들어있는 시간이 더욱 길었고 미동 없이 누워있는 그의 숨결을 확인하는 것은 경수에게 있어 일종의 버릇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모든 걸 뒤로 제친 경수의 지극한 간호에도, 백현의 건강은 나날이 악화되어만 갔다.
신을 믿지 않던 경수는 하루가 멀다 하고 여러 신에게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정말로 존재하신다면 제 연인의 아픔을 모두 제가 대신 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적처럼 그의 병이 완쾌되게 해달라고.
너무 그리운 맑간 웃음을 다시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제발 백현이가 죽지 않게 해달라고.
"…경수야."
잔뜩 갈라져 엉망이 된 목소리가 경수의 귓가에 닿는다. 지루함에 괜히 냉장고를 정리하던 경수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본다. 며칠 만에 내는 목소리가 어색하기만 한 듯 인상을 쓰며 목을 고르는 백현의 모습이 시야에 담긴다.
"경수야."
"……."
눈가가 뜨거워진다. 이제 그에게는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제게서 정을 떼게 하려고 한동안 고의로 저를 무시하던 그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안다. 내심 속상하면서도 덤덤한 척 했던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나."
"……."
"한번만 안아줄래."
"……."
"…한번만 꽉 안아줄래."
그런 그가 이렇게 먼저 손을 뻗어와서, 경수는 무엇인가 울컥 차오르는 기분이 든다. 울먹이며 다가가는 저의 느릿한 행동에도 백현은 힘없이 웃으며 저에게로 뻗은 팔을 내리지 않는다. 경수의 도움으로 몸을 일으킨 백현은 도리어 저가 경수를 가득 끌어안는다. 듬직했던 그의 품이 너무나 초라해져있다. 형편없이 야위어버린 탓에 세게 끌어안지 못한 채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는다.
"사랑해."
"……."
"말 못하면 후회할 것 같아서."
숨통이 막혀온다. 그의 어깨가 저의 눈물로 축축이 젖어간다.
"고마웠어. 지난 몇 주 동안은 특히."
"그런 말, 하지…, 마."
"사랑해, 경수야."
"……."
"아주 많이."
숨을 쉴 수가 없다. 바다에서의 대화를 똑같이 재연해내는 그의 말에 떨려오는 몸을 주체할 수가 없다. 옷자락을 움켜쥐고 소리 내어 우는 저의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너무 따스하다. 조용한 병실 안이 경수의 울음소리로 가득 채워진다. 우는 것에 지친 경수를 어르고 달래 편히 쉬고 오라며 집으로 돌려보낼 때까지 백현은 끊임없이 사랑을 속삭였다. 마치 평생 해야 할 말을 대신하는 것처럼.
그리고 백현은 그날 새벽 조용히 눈을 감았다.
* * *
그가 죽은 지 일주일이 지났다. 장례식장에는 가지 않았다. 까만 띠를 두른 백현의 사진을 보면 그 순간 정말 미쳐버릴 것만 같아서. 그 어떤 외출도 하지 않고 집에만 있던 지난 일주일의 끝자락에는 그의 형이 저의 집을 방문했었다. 평소 안면을 트고 지냈던 형은 그의 일기장을 전해주며 저를 위로하곤 금방 자리를 피했다. 아마 마치 시체의 그것처럼 일말의 감정이 담겨있지 않은 저의 표정 때문이었으리라. 경수는 일기장을 받고 나서도 쉽사리 그것을 펼치지 못 했다.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리는 백현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증폭될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경수는 며칠 만에 드디어 그의 일기장을 펼쳐본다. 심플한 까만색의 표지를 넘기자 두 달전 바닷가에서 찍었던 저들의 사진이 꽂혀있다. 말라버린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 차올라 시야를 흐리게 만든다. 사진 속의 백현을 한참 매만지던 경수는 이내 정신을 다잡고 페이지를 넘긴다. 연초부터 시작된 일기는 저들의 추억을 가득 기록할 예정이었는지 저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반 년을 겨우 채웠지만 그 한편 한편이 길고 정성스러워서, 이미 노트는 거의 끝까지 그의 글씨가 빼곡하게 쓰여있었다. 앞의 내용을 외우다시피 꼼꼼히 읽던 경수는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최근의 일기를 펼쳐본다.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회사도 그만두고 계속 집에 있었다.
영화에서만 나오는 일인 줄 알았는데.」
며칠의 텀을 둔 일기는 전의 것들과는 달리 겨우 두 줄로 끝이 나있었다.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을 보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래서 무작정 경수를 끌고 들어간 영화관에서 계속 울기만 했다. 내 마지막 영화 제목이 뭐였더라.」
그때 흐르지 않았던 눈물이 이제야 나오는 것일까. 잠시 눈앞이 뿌예지더니 이내 뜨거운 물이 볼을 따라 아래로 흘러내렸다.
「뭐든 더 해주고 떠나고 싶었다. 그런데 그게 경수를 힘들게 한 것 같다. 그 애가 처음으로 화를 냈다. …경수야, 미안해.」
'…백현아, 제발.'
'…….'
'요즘 나 잠도 못 자.'
'…….'
'바쁜 거 알잖아.'
「매번 미루기만 하던 약속을 드디어 이뤄주었다. 경수는 자기가 먼저 죽으면 바다에 뿌려달라고 했다. …그럴 일은 없을 거다.
나는 산에 묻히고 싶다. 도경수는 산을 싫어해서 날 찾아오지 않을 테니까.」
'바다가 그렇게 좋아?'
'좋지, 그럼. 난 죽어서도 바다에 뿌려지면 좋겠어.'
'…….'
'내가 먼저 죽으면, 꼭 바다에 뿌려줘. 알겠지?'
'…응.'
과거의 기억이 차례로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비록 장례식장에는 가지 않았지만, 까만 띠를 두른 백현의 사진을 본 것도 아니지만, 힘을 주어 꾹꾹 눌러 쓴 마지막의 일기는 경수를 주저앉게 하기에 충분했다.
「내가 죽은 후에 이 일기가 경수에게 전해졌으면, …아니 전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아마 엄청 힘들어하겠지. 그 애 앞에서는 괜찮은 척 했지만 사실 많이 아프고 많이 힘들다.
…죽기 싫다. 도경수랑 평생 같이 살고 싶었는데.」
애써 참고 있던 슬픔이 한 번에 밀려왔다. 겨우 버티고 있던 경수도, 결국 무너져버렸다. 보고 싶다. 백현이가 보고 싶다. 사실 나도 평생 같이 살고 싶었는데.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 제대로 된 호흡을 하기가 힘들다. 이럴 때면 그 큰 품으로 저를 끌어안고선 몇 시간이고 가만히 등을 쓰다듬어 줬었는데. 이제는 평생 그럴 일이 없다고 생각하니 더욱 미칠 것 같았다.
…그냥, 먼저 떠나버린 그가 많이 그립다.
"……."
몰아치는 바람이 매섭다. 사진 속의 그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선 경수는 제 몸을 겨우 지탱하고 있다. 계속 손에 쥐고 있던 탓에 사진 귀퉁이가 구겨져있다. 보고 또 봐도 변백현이 보고 싶었다. 자꾸만 저를 재촉하는 바람에 못 이긴 척 바다를 향해 한 발자국 내딛는다. 두 눈 가득 담기는 바다는 오늘도 넓고 또 장엄했다.
'사랑해.'
도경수는 간절히 바란다.
'사랑해, 경수야.'
저 바다가 정말 모든 것을 수용해주기를,
'아주 많이.'
저를 수용해주기를.
경수를 삼킨 바다는 금새 다시 잠잠해졌고 공중에 휘날리던 사진은 이내 바다 위에 조용히, 아주 조용히 내려앉았다.
_
언젠가 한 번쯤은 이런 분위기의 아이들을 그려내고 싶었어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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