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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vampire : 1 | 인스티즈

 

 

 

 

 

 

 

 

 

 

빛을 무겁게 덮은 암막 커튼이 창 끝으로 거칠게 밀렸다.

그 뒤에 숨어 몰래 햇빛을 받던 창문도 으깨질 듯 열렸다. 이어 각막을 뚫을 듯 쏟아지는 빛에 자동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강하게 내 턱을 잡고 다시 자신을 향하게 꺾었다. 눈에 직접적으로 들어오는 빛에 미간이 찡그려졌다. 햇볕이 쏘아 오는 피부가 따가우면서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지금껏 한 번도 내가 옆에 있을 때 창문을 연 적이 없다. 굵고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성이름. 장난해?

 

 

그의 행동과 몸짓과 표정에는 분명 강한 분노가 서려 있다. 하지만 뭐 때문에?

 

 

맹세코 요 근래에는 그의 심기를 건드릴 만한 일을 한 적이 적이 없었다. 오히려 복종적일 만큼 순종적이었다. 허락 없이 밖으로 나오지 말라기에 하루종일 암막 커튼으로 봉쇄된 방에 틀어박혀 있었고, 해 주는 음식 외는 입에도 대지 말라는 말에 밥과 반찬만 물리도록 먹었다. 사실 그가 먹이는 음식들은 대체로 맛이 좋은 편은 아니다-그런 생각을 입 밖에 냈다가는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르기에 그냥 다물고 사는 편이다- 게다가 지하실 쪽으로도 가지 않았다. 그는 쓸데없이 넓은 이 집의 지하실을 내게 보여주는 걸 몹시 꺼려했다. 그리로 통하는 계단 옆에 서 있기만 해도 불같이 화를 냈다. 그에게 있어 '화를 내다'의 개념은 조곤조곤 말로 해결한다거나 고함을 지른다거나 하다 못해 쌍욕을 퍼붓는 정도의 것이 아니었다. 가격을 가늠하기 힘든 양주병 두세 개가 박살나는 건 예사였고 형광등, 스탠드, 책, 노트북, 꽃병 등 손에 잡히는 물건마다 수억 조각으로 분쇄되곤 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리 화가 나도 절대 날 다치게 만들지 않았다. 이면지 몇 장을 던져도 내게 날아오게 하는 법이 없었다. 그가 내는 화는 모두 나를 겁주기 위한 것이었고, 그가 던지는 모든 물건은 허공이나 벽으로 와 부딪혔다. 내 눈에 이는 제발 자신의 말에 순응해 달라는 절박함으로 보였다. 나는 그가 화를 낼 때마다 오히려 가련히 여겨졌다. 이렇게 '비굴하게' '빌면서까지'나를 네 밑에 두고 싶은 이유가 뭐야?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나를 겁주기 위함이 아니라 정말 스스로의 분노를 못 이기고 행동하는 그는 처음이었다. 이제 그에게 두려움까지 느끼려 하고 있었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화나게 한 걸까.

 

 

"김종인!"

"성이름."

"……"

"이리 와."

 

 

굳게 잡힌 왼손을 축으로 몸이 틀어졌다. 김종인이 넘어뜨리듯 내 어깨를 밀었고 거실 간이침대 위에 갈 곳 잃은 등이 떨어졌다. 팔꿈치를 짚고 다시 일어서려 했지만 그의 억센 손에 의해 제지당하고 말았다. 단단한 팔이 내 가슴팍을 내리눌렀다. 허리를 백 도 쯤 굽히고 날 내려다보는 김종인의 눈이 타고 있었다. 내 눈까지 열기를 옮길까 두려워 애써 눈길을 피해 버렸다. 잘못한 게 없는데 왜 내가 피해야 하는 거지? 하지만 생각해 보면 정말 내가 '잘못'을 저질러서 김종인의 화를 돋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자기 집에 가둬 두고 손직 하나까지 억압하는 사람의 집에서 탈출할 계획을 세운다거나 방 밖으로 나가는 일은 결코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을 테니까. 사실 김종인이 화를 내는 부분이 어딘지조차 몰랐던 적도 많다. 순간 뭔가가 울컼 차올랐다. 최소한 책꽂이 하나는 엎어뜨릴 각오를 하고 힘주어 물었다.

 

 

"왜 그러는데, 갑자기."

"……"

"이번엔 또 뭐길래!"

"성이름."

"……"

"이름아."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화 대신 부드럽게 이름을 부르는 게 이상했다. 평소 같았으면 물건 몇 개는 이미 박살이 나고도 남을 일이었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김종인은 부드럽게 내 손목을 잡고 천천히 위로 들어올렸다. 거칠던 아까와 확연히 달라진 몸짓. 나는 용기를 내어 김종인의 눈동자를 올려다보았다. 김종인은 집어올린 내 왼쪽 손목만 멍하니 보고 있었다. 왜 갑자기? 최근 들어 손목의 핏줄들이 도드라져 보이기 시작했지만 아마 살이 빠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 외에는 별다른 점도 없어 보였다. 김종인은 마치 세상에 딱 하나 존재하는 보석을 다루듯이 내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보여?

무슨…

 

 

김종인이 내 손목을 아프지 않게 돌리더니 다른 손으로 월상골 아래쪽을 가리켰다. 처음엔 잘 보이지 않았다. 햇빛에 손목을 비춘 뒤에야 겨우 그 형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내 왼쪽 손목 귀퉁이엔… 뭐라고 쓰였는지 모를 작은 글자가 있다. 무의식적으로 김종인의 손아귀에서 내 손을 빼냈다. 그리고 내 눈 바로 앞에 갖다 대었다. 글자는 옅은 홍색을 띄고 있었다. 분홍보다 주홍에 가까운 색이었다. 이런 게 왜 내 손목에… 이 집엔 손목에 칠할 물감이나 크레파스는 커녕 색볼펜 하나 없다. 무엇보다 내가 이런 걸 내 손목에 그린 기억이 없었다. 김종인이 내가 자고 있을 때 몰래 이런 장난을 했다는 건 더더욱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멀뚱히 김종인을 올려다보았다. 김종인은 왜인지 바짝 긴장해서는 입술만 혀로 축였다.

 

 

이제 보여?

…이게 뭐야?

뭐라고 써 있는지 보여?

 

 

고개를 저었다. 쓰인 글자가 한국어인지 영어인지 중국어인지 아랍어인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크기는 겨우 엄지손톱만했으며 알아보기엔 너무 옅고 흐릿했기 때문이다. 김종인은 깊게 한숨을 쉬더니 상체를 숙여 침대에 얼굴을 파묻었다. 몇 분이 지나도록 말도 없고 움직임도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인 걸 알면서도 혹시 죽은 건 아닐까 목덜미에 손을 조심스레 짚었다. 유월에 접어들어 후덥지근한데도 김종인의 목덜미는 시원했다. 다시 말해 온기가 조금도 없었다. 설마 정말 죽은 건 아니겠지. 잡아 흔들 생각으로 김종인의 어깻죽지에 손을 올렸다. 하지만 이내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미세하지만 김종인의 어깨는 위아래로 들썩이고 있었다. 숨만 쉬는 게 아니었다. 들썩임이 숨쉴 때보다 두세 배는 빨랐다. 침대에 묻힌 그의 얼굴을 잡고서 천천히 내 쪽으로 올렸다. 붉게 물든 눈 언저리가 방금까지 김종인이 어떤 상태였는지 전부 드러냈다. 놀랄 수밖에 없었다. 수억 번을 죽었다 새로 태어나도 김종인이 우는 모습만은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울었어, 너?

이름아.

 

 

이름아, 우리 이제 어떡하지. 나는 당황스러움에 어쩔 줄 몰랐다. 김종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멸망해버린 세상의 끝에 홀로 버티고 있는 사람 같은 얼굴이었다. 푹 잠긴 목소리가 슬펐다. 당황해서였을까. 아니면 동정?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김종인의 볼에 흐르는 눈물 한 줄기를 닦아 냈다. 지금까지 내게 보여줬던 모습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잔혹하달 만큼 거침없던 그는 지금 불안한 아기새 같은 모습이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김종인이 나보다 작게 느껴질 때가 없었는데. 등이라도 토닥여 줘야 하나 고민할 무렵, 김종인이 다가왔다. 내 눈에 김종인만 가득 찼다. 입술에 닿은 부드러운 것이 김종인의 입술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내 입술을 머금고 있는 사람 또한 김종인이 아닌 것 같았다. 직감적으로 위험한 일이라는 걸 깨달았다. 여기서 멈춰야 한다. 부드럽게 나를 간이침대에 눕히는 김종인이 낯설었다. 더 낯선 건 이끌리듯 그를 받아들이는 내 모습이었다.

 

 

 

 

 

 

 

 

 

 

 


가지마.

 

 

모든 일이 끝난 뒤, 엎드린 채 숨을 고르는 김종인의 한 마디가 내 온몸을 감쌌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 왼쪽 손목을 잡은 채였다.
눈을 감았다. 검은색 투성이인 나의 시간 안으로 손을 뻗어 천천히 기억의 톱니바퀴를 돌렸다. 날짜는 정확히 작년 11월 5일로 맞춰졌다. 틈날 때마다 만지고 만져 이젠 닳아 버린 기억. 지금은 후회조차 휘발된 그 날의 무모함.

 

 

 

딱 반년 전이었다.
동시에 내 열아홉 번째 생일날이었다.

 

 

 

 

 

 

 

 

핏물이 지다 01

 

the vampire : 1 | 인스티즈

 

 

 

 

 


온통 연필소리였다. 일 초에 삼백 번씩 들려 오는 연필과 종이의 마찰음은 일 초에 삼백 번씩 내 신경을 건드렸다. 어찌나 크게 들리는지 빗방울이 유리창에 부딪히는 소리마저 묻혀버리고 밀았다. 수능 일주일 전. 교실 안의 모두가 짠 것처럼 똑같은 모양으로 연필 끝을 놀리고 있다. 자습 시간에 떠들거나 엎어져 자는 애들은 언제인가부터 찾아볼 수 없는 풍경이 되었다. 쉬는 시간만 되면 학교 옥상이나 양호실에 진을 치고 온갖 욕설과 쌍두문자를 뱉어내던 애들도 이젠 한 손엔 수특, 다른 손에 노트와 필기도구를 쥔 채다. 내 손엔 달랑 노트와 볼펜 하나뿐이었다. 아무도 볼 수 없도록 왼팔로 은근히 남의 시야를 막으며 노트 귀퉁이에 작게 그림을 그렸다. 체크 블라우스. 챙이 넓고 얇은 모자. 데님 바지. 독특한 패턴의 남방. 수능의 압박감에 그만 미쳐버린 게 아니다. 담배를 꼬나물고 왼손에 봉인된 흑룡을 깨우지 않으려 안간힘쓰는 양아치도 아니다. 나는 대학에 가지 못한다. 그 이유는 내 집에 잠들어 있다. 곧 큰 소리로 종이 쳤고 이어 담임선생님이 들어왔다. 수능의 압박은 학생들만의 것이 아니었나. 새벽 세 시에 억지로 일어난 얼굴을 한 아이들도 그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다. 쓰러져 가는 교실에서 혼자 멀쩡한 몰골을 하고 선생님을 올려다봤다. 그가 지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자, 모두 말 안 해도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겠지. 일주일 전이야. 미련하게 공부만 하지 말고 컨디션 조절 잘 하고. 종례 끝, 야자실로 이동해.

 

 

짧은 종례가 끝나자 마자 교실 안의 모두가 책가방을 들고 공간을 나선다. 모두의 발은 윗층으로 향한다. 야자실이 있는 층. 나는 스트링 치즈의 결 하나가 갈라져 나오듯 아래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밟았다. 하나로 묶은 머리가 한 계단 밟을 때마다 좌우로 움직였다. 신발장에서 신발을 갈아신고 넓은 운동장을 가로질렀다. 비는 안에서 본 것보다 훨씬 강하게 내렸다. 내 머리를 가를 작정인지 굵고 빠른 빗물이 세차게 떨어졌다. 가을날에 비라니. 언제나 그랬듯이 우산은 없었다. 아마 엄마가 들고 나갔을 것이다. 스스로 일터라고 부르는 그곳에. 후문을 빠져나와 생각없이 계속 걸었다. 묶은 머리와 교복, 책가방. 하나씩 비에 젖어 무거워진다. 기분은 최악이었다. 나는 비를 온 몸으로 고스란히 맞으며 근처 편의점에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경쾌한 종소리와 함께 편의점 점퍼를 입은 아주머니가 중얼거리듯 말씀하셨다. 네. 대답하며 삼각김밥 진열대를 찾았다. 남아 있는 건 두 종류뿐이었다. 선택의 여지 없이 다른 종류로 하나씩 손에 쥐었다. 냉장보관된 삼각김밥의 차가운 기운이 손목까지 퍼지는 듯 했다. 계산을 빠르게 끝내고 유리문을 잡았다.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펄럭이는 흰 종이. <아르바이트 구합니다. 새벽 두 시부터 다섯 시> 나는 홀린 듯 뒤돌았다. 천천히 아주머니께 걸어가 카운터 앞에 섰다.

 

 

고3인데, 지금도 아르바이트 받나요?

 

 

 

 

 

 

 

 

 

 

 

 

 

 


트럭이 가게 앞에서 멈췄다. 짐칸 바깥벽엔 집채만한 과자와 아이스크림 광고사진이 붙어 있었다. 배달원 아저씨를 도우러 나가면서 손목시계를 훑었다. 3시 52분. 하늘엔 몇 개 없는 별이 흐릿하게 빛났다.

 

 

오셨어요.

어, 사람 바뀌었네. 그 키 큰 남학생은 어디 가고 다른 학생이 왔어?

네. 오늘부터 이 시간엔 제가 나올 거에요.

 

 

그래? 아저씨가 웃으며 운전석에서 내리셨다. 큰 소리와 함께 짐칸이 열렸다. 과자 봉지들을 기대하던 내 눈앞엔 전혀 다른 것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가지각색의 초콜릿들. 오백원짜리 싸구려부터 시작해서 금색 포장지에 소중히 싸인 것, 금방이라도 뜯어질 것 같은 레이스 달린 바구니 안에 든 것, 흰 종이가방에 담긴 것 등 종류는 다양했다. 아니나 다를까 편의점 유리창엔 포스터가 대문짝만하게 붙어 있었다. '수능대박기원' '초콜릿 선물세트 20% 할인' 아저씨와 난 한참이나 편의점 안 창고와 트럭을 왔다갔다하며 초콜릿 뭉치를 날랐다. 마침내 깨끗이 비워 내고 트럭 벽면밖에 보이지 않게 되자, 아저씨는 다시 차문을 열었다.

 

 

아르바이트 하는 거 보면 3학년은 아닌가 보네. 내일 학교 앞에서 선배들 응원하고 그러니?

네. 아, 아니. 잘 모르겠어요.

 

 

아저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트럭과 함께 가 버리셨다. 나는 한참이나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저것들, 내일 아침이 되면 많이 팔릴까? 나는 뭘 잘못한 사람처럼 어깨를 구부리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내 생일은 이미 네 시간 전에 지나갔다. 선물과 케이크는 기대도 안 했다. '생일 축하해' 감정 없는 다섯 음절도 못 들었다. 쿨하게 지나가고 싶은데, 아직 덜 자란 걸까. 빈말이라도 생일 축하한다는 말이 듣고 싶었다. 텔레비전에서는 쉬지 않고 광고가 나왔다. 15초짜리 광고가 백 번은 더 바뀐 것 같다. 맑게 웃으며 우유나 새로 나온 초콜릿 등을 들고 나오는 연예인들. 쟤들은 저기 나와서 음식 한 번 먹어주는 걸로 얼마나 벌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중, 갑자기 열리는 문에 몸이 움찔거렸다. 들어온 흰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은 남자였다. 남자는 주류 진열대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맥주 두 캔을 들고 왔다.

 

 

신분증 보여주시겠어요?

남자는 지갑에서 능숙하게 신분증을 꺼내 내 앞에 내밀었다. 1994년생. 괜한 호기심에 아닌 척 신분증 속 얼굴을 확인했다. 사진이랑 똑같다. 신분증을 공손히 다시 내밀었다.

오천원입니다.

남자가 말없이 만원짜리 한 장을 내밀었다. 오천 원을 거슬러 주려 현금칸을 열었다. 천 원짜리 다섯 장을 포개려 하는 순간, 계산대 위에 얹은 내 손에 무언가 차가운 게 닿았다. 뒤따르는 남자의 말. 나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생일 축하해.

 

 

온몸이 소름이 돋았다. 고개도 들지 못했다. 얼마 뒤 남자가 가게를 나가는 소리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머릿속에 남자의 얼굴을 대충 그려 보았다. 짙은 피부색과 짙은 쌍커풀. 내 손등에 닿게 맥주를 밀어 놓은 손은 큼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안면 없는 사람이다. 누굴까. 누군데 내 생일을 알고 있지. 내게 친척이 있다는 소린 들어본 적이 없다. 정신병자, 아니면 무당? 무당이 사람 생일도 맞추나? 손등에 닿은 캔을 집어 들었다. 작은 맥주캔. 이건 선물인 듯 했다. 당혹스러웠다. 고등학생 생일 선물로 맥주라니. 내 생일은 아는데 내 나이를 모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시 진열대에 꽂아넣을까 했지만 결국 책가방 안쪽 깊숙이 밀어넣었다.

 

 

그 남자를 마지막으로 손님은 한 명도 더 오지 않았다. 새벽 알바는 처음부터 사람 채우기용이었나 싶을 정도였다. 하늘 끝에 붉은 물이 들어 올 때에야 다음 알바가 들어왔다. 일단 누구든 사람이 왔다는 게 반가워 하마터면 손을 휘저을 뻔 했다. 저, 다음 시간 담당이에요. 조끼에서 명찰을 떼어 내고 여자에게 넘겼다. 가방을 한 팔에 걸쳐 들고 밖으로 나왔다.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좁은 길가의 오르막길을 올랐다. 하늘은 아직 어둡지만 구름 없이 깨끗했다. 언제 비가 왔냐는 식이었다. 손을 니트 가디건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내달이면 해가 가장 짧다는 12월이다. 새벽 공기가 차가우면서 깨끗하다. 계속 거리에 서 있는 게 좋았지만 내가 갈 곳은 이미 정해져 있다. 사라져 가는 별들 대신 가로등 불빛이 총총하다. 학교 뒷편 작은 주택로의 맨 꼭대기 집. 한 사람을 제외한 모두가 잠들어 있을 터였다. 그리고 유일하게 잠들지 않은 한 명이 내뿜는 담배 냄새가 가득할 것이었다. 문 안에 발을 들여놓지 않으려 늘 애쓰지만 결국 어떻게 해서든 들어가게 되는 집이었다.

 

 

 

 

대문 너머에 한 발만 들여놓았다.
그 남자가 가게에 들어왔을 때부터, 그 남자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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