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집에 원한이 많은 혼령들과 대화를 해, 그 혼령들을 잘 타일러 좋은 곳으로 보내준다는 아주 유능한 무인의 계집아이가 있다고 하네."
"아니 그것이 정말인가? 에이 설마, 그럴리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혼령이랑 대화를 하나?"
"이 사람이! 자네, 옥덕이네 딸 알지? 귀신이 붙어서 맨날 이상한 짓거리 하고 다니고 밤만 되면 시름- 시름,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이 앓고 그랬잖아! 얼마전에 이 계집아이가 옥덕이네 들러서 하룻밤 자고 오더니 그 다음날 옥덕이네 딸이 멀쩡해져서는 옥덕이보고 '어머니' 하는걸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니까, 이 양반아!"
"그 미친 옥덕이네 딸이 옥덕이보고 '어머니' 그랬다고?……. 나는 내 두 눈으로 보기 전까진 못 믿겠네!"
"허이구, 이 양반 답답한 소리만 하네. 정 못 믿겠으면 어디 한번 나랑 들어가서 점이나 봐달라고 하세!"
"그래, 그러자고!"
"아, 잠깐! 그 전에 한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다네."
"아 또, 뭔데 그러나?"
"이 계집아이는 태어나서 단 한번도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하네. 어째서인지 이유는 몰라도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야. 그 누구도 이 계집아이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하더군. 말을 하지 않으니 이름도 알 턱이 없지. 그래서 사람들이 그냥 '말을 하지 않는 아이'라는 뜻으로 '화무(話無)'라고 부른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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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는 각자의 능력을 부여받은 사람들로 가득, 아주 가득 차있다. 예를 들자하면, 검을 만드는 장인, 술을 파는 주막집 여인, 부정부패를 막는 암행어사. 그리고, 지민. 지민에겐 있어서는 안되는 능력을, 그는 지니고 있었다. 어린시절 지민은 제 어미를 따라 옆 집 순실이네 초상집에 갔다. 사람들의 통곡소리가 마치 산속에서 들려오는 메아리처럼 집안을 가득하게 매웠고 분위기는 무척이나 암울하였으나 이와 다르게 음식은 아름다울 정도로 형형색색의 빛깔이 고왔으며 기름기가 강물이 범람하듯 번지르르 넘처흘러 먹음직스러웠다. 지민은 그런 음식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음식들 사이로 쑤욱- 내밀어진 손 하나를 보았다. 그 손은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을 한 움큼 가득 쥐어 들어올렸다. 지민의 시선도 그 손을 따라 올라갔다. 그리고 지민의 눈 앞에 보인것은 다름아닌 어제 죽은 순실이었다. 순실의 얼굴은 매우 창백하고 입술은 하늘보다도 더 푸르댕댕하여 진짜 죽은 사람처럼 보였다. 아니, 순실은 진짜로 죽은 소녀이다. 그런 죽은 소녀가 어찌 음식을 한 움큼 집어, 그것도 제 입에 다 넣어지지 않을 만큼의 양을 집어 어찌 저리 맛있게도 먹는단 말인가? 지민은 의아했다. 그러나 지민은 어린 나이 탓에 알지 못했다. 순실이 죽은 소녀라는 것을. 그리고 그 소녀가 제 눈에만 보인다는 것을.
순실은 먹을대로 먹고 이제서야 배가 불렀는지 만족스러운 묘한 얼굴을 지으며 일어났다. 곱디 고운 하얀 비단 옷을 입고 치맛자랑을 바람에 살랑이며 어디론가 뛰쳐나갔다. 지민은 그런 순실을 몰래 따라갔다. 순실은 자신이 죽은 것을 아는건지 모르는건지 그저 헤실 헤실 웃어대며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얇은 제 몸을 겨우 지탱하는 민들레를 보고 살포시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지민도 순실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어느 그 누구의 소망을 받지도 않고 제 멋대로 자란 한 낱 길꽃에 불과한데 도대체 저 소녀는 뭐가그리 흥미로운지 저리도 빤히 쳐다보는가? 지민은 궁금했다. 한참을 지나도 순실은 그 민들레만 빤히 쳐다보길래 지민은 지루해져 그만 돌아가려고 몸을 일으켰다. 그때, 민들레를 쳐다보고 있던 순실은 고개를 훽- 돌려 지민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지민은 순실과 눈을 마주치게 되었다. 순실은 민들레를 훅 꺾더니 이내 제 손에 꽉 쥐고 지민에게 웃으면서 다가왔다. 그리고 그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지민에게 얼굴을 가까히 들이내밀었다.
"이 꽃의 이름을 너는 알고있니?"
따스한 어느 봄 날, 죽은 자의 형체를 보고 목소리를 듣게 된 지민이었다.
그렇게 죽은 자와 대화를 하게 된 지 십 년. 십년동안 수 많은 사람들과 수 많은 혼령들을 만났다. 사람들과 죽은 자들에게는 각각의 인생 이야기가 있었다. 슬프기도 했고, 행복했기도 했고, 어쩔때는 가슴이 미친듯이 아려왔으며, 또 어쩔때는 죽은 자의 인생의 끝이 너무나도 아름다워 웃기도 했다. 하지만 지민은 이 감정들을 겉으로 들어내지 않았다. 오로지 속으로만 생각하고 속으로만 느끼고 모든지 속으로만 해온 지민이었다. 겉으로 들어낼 법도 한데 어찌 자신의 감정을 숨기며 속으로만 느끼는가. 지민은 사내아이였기 때문이다. 계집아이가 혼령들과 대화를 하고 길을 터주는 것은 옳은 일이오나, 사내아이가 혼령들과 대화를하고 길을 터주는것은 아니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지민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어주지 않았다.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말 하는 순간 자신이 사내라는 것을 들키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민은 십년간 다홍빛의 천으로 얼굴을 전부 가려버리고 단아하고 고운 치마를 입어 계집아이 행세를 하였다. 그렇게 지민은 십년을 지내왔다.
오늘도 여느때와 다름없이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사람들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지민의 바람대로 사람이 찾아왔다. 지민은 다홍색 천 사이로 보이는 사람의 형체를 보았다. 보아하니 꽤나 높은 곳에 앉아있는 사람같았다. 오색깔이 뒤엉켜있는 옷을 입고 옆구리에는 자신의 다리길이만한 칼을 찬 이 자는 지민의 앞에 앉았다. 그리고는 지민에게 말을 건냈다.
"그대가 화무입니까?"
지민은 아무 말 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서 화무, 그대를 궐 안으로 들여오라 명하셨습니다."
뜬금 없는 소리에 지민은 몹시 당황하였다. '예? 어찌 저를 부르신단 말입니까?'라고 물어볼 법도 한데, 차마 그러할 수가 없었다. 지민은 사내라는 것을 숨기고 계집아이 행세를 하는 몸이었으니. 지민은 아무 말 없이 치맛자락을 들고 일어났다.
"궐 안에서 잠시 지내는 동안 잠자리를 내어주고 옷을 내어주고 먹을 거리를 내어줄 것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금 바로 들여오라는 명을 받았으니 아무것도 들지 말고 그저 몸만 따라오시면 됩니다."
지민은 이 자를 수상하게 여겼다. 어찌 전하가 자신을 알 뿐더러, 궐에 들이라 명까지 내리실까. 하지만 전하의 명이라니 어쩔 수 없이 지민은 이 자의 뒤를 따라 터벅터벅 길을 나섰다. 지민은 다홍색 천 사이로 보이는 이 자의 뒤를 스윽 훑어보았다. 칼을 차고있는 것을 보면 무사일 것인데, 전하의 명을 받고 날 데리러 온 것이면 전하의 무사란 말인가? 그렇게 의심을 품은 체 한참을 걷다보니 어느새 궐에 와있었다. 난생 처음보는 궐의 외부와, 그리고 들어가서 보이는 궐의 내부에 지민은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자신이 사는 세상과는 다른 세상같았다. 주변을 둘러보면 꽃들이 만개했고 자신이 사는 세상의 지저분한 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사람들과는 달리 단정하게 머리를 묶어 돌아다니는 궁녀들이 보였다. 그렇게 궐 내부를 둘러보며 이 자를 따라갔다.
"전하, 화무를 데리고 왔습니다."
"들라."
문이 열리고 지민은 저 멀리 앉아있는 자를 보았다. 주상전하, 태형이었다.
"윤기야, 수고했다. 이제 그만 나가도 좋다. 모두 나가거라. 이 자와 단 둘이 말을 나눌 것이 있으니."
윤기. 자신을 데리고 여기까지 온 자의 이름은 윤기였다. 이름과 맞지 않게 윤기의 얼굴은 꽤나 날카로웠다. 그래서인지 첫인상이 무척이나 좋지 않았다. 지민은 자신을 지나쳐 나가는 윤기를 다홍색 천 사이로 힐끔 쳐다보았다가 이내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뒤로 문이 닫히고 한 공간안에 태형과 지민 둘 만이 남았다. 어색한 기류와 어찌할 줄 모르는 지민의 속마음만이 방안을 나돌 뿐이었다.
"이리와서 앉거라."
지민은 고개를 살포시 끄덕이며 태형의 앞에 다소곳이 앉았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말을 안하는 것은 알고 불렀을까. 혹, 모른다면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무례한 짓이 되지는 않을까. 태형의 심기를 잘못건들여 자신이 죽음에 처하게 되지는 않을까. 별의 별 생각이 왔다갔다했다. 태형은 이런 지민의 마음을 아는건지 모르는건지 그저 지민을 빤히 쳐다보았다. 다홍빛 천 사이로 보이는 태형의 얼굴은 큼직큼직하고 훤찰했다. 허나 무서웠다.
"네 능력이 신통하다하여 궐로 들인 것이니 안심하거라. 내가 너를 부른 이유는 요새 밤마다 한 여인의 통곡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서이다. 이 통곡소리 때문에 잠을 청할 수가 없어 눈을 뜨고 밤을 지새우니 낮에도 비몽사몽하여 도통 무언가를 할 수가 없구나. 그러니 네가 밤에 내 옆에서 이 여인이 어찌 그리도 통곡하는지, 왜 내 옆에서 슬피 우는지 물어보고 보내거라."
지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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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연재할 목적으로 자세하게 썼더니 눈이 침침해지네요. 약간 판타지 고전물이에요!
허구의 요소가 많이 들어가 있으므로 역사와는 무관함을 알려드립니다 8ㅅ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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