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 할머니가 해주시던 견우 직녀 이야기나 옆집 순이 할머니네 우물에서 귀신이 나온다던가 하는 옛날 이야기 중에 끼여있던 스토리였다.
그냥 날때부터 회색빛에만 갇혀살던 손자가 안쓰러워 지어낸건줄 알았지. 누군가에게는 색을 가져다줄 반려자가 있다 라는 꿈같은 이야기는.
COLOR BUS
소울메이트를 만나기 전까지는 세상이 흑백으로 보이다가 만난후에 색깔이 보이는 세계.
세븐틴 [민규/지훈]
요즘 24년만에 나타난 얼룩덜룩한 세상때문에 눈이 돌아갈지경이었다.
방금도 일어나자 보이는 천장의 흰색도 노란것도 아닌 요상한 색에 정신이 팔려 한참을 누워있었다. 저게 아이보린가 뭐시긴가 던데...
듣기만 했었던 노란색이 저런 색이라는 것도 아이보리라는 색이 있다는 것도 얼마전 친구인 석민이놈이 알려준거다.
나름 미술 학도라고 심도있게 집중한 모습이 가찮기도 했지만 덕분에 적응은 꽤 빨라졌다.
날때부터 전색맹이었다. 전녹색약 뭐 그런것도 아니고 그냥 딱 검고 흰것만 구분할줄 알았다. 평생 그렇게 살아서 그런지 색이 보이기 전에도 이게 불편한건지 몰랐지만 한번 보이고 나니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기지개를 펴고 저번주에 입주한 원룸을 한번 둘렀다. 색맹인 아들내미 집을 이색 저색 조화롭게도 꾸며놨다.
복학생인 막내아들 학교 편하게 다니라고 어머니가 얻어준 오피스텔이었다.
대학생 혼자 살기에 상당히 큰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어릴때 부터 받아왔던 지원들이라 크게 신경쓰이진 않았다.
고등학교땐 귀찮기만 했던 박여사 치맛바람이었지만 요즘은 꽤 감사하며 산다. 덕분에 반려자를 찾았으니까.
새벽 5시.
어제만해도 아직 꿈속이거나 이제야 잠에 들었을 시간이지만 오늘은 달랐다.
시계를 보고 잠시 기다렸다가 가볍게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문구멍에 눈을 갖다대니 엘리베이터 앞에 조그마한 분홍색 머리통이 다소곳이 서있었다.
오늘은 타이밍이 좋네. 저번주에는 한시간을 기다려도 못만났는데.
현관앞에서 잠시 거울을 보며 상태확인을 하니 역시 잘생겼다.
"안녕하세요."
분홍머리가 살며시 돌아가더니 하얀얼굴이 나를 향했다.
무표정으로 찢어진 눈이 빤히 봐오는데 눈빛에 못마땅함이 잔뜩 서려 손에 땀이 흥건해졌다.
아무래도 첫인상이 잘못찍힌거 같은데...
"아,네."
단답으로 말을 짧게 끊고는 때마침 열린 엘리베이터에 작은몸이 얼른 사라졌다. 왠지 민망해졌지만 그의 안타냐는듯한 눈빛에 얼른 올라탔다. 무서워라.
그래도 대답도없이 경계하는것 같던 첫만남보다 많이 나아진듯해 만족하기로 했다.
안으로 들어와 벽에 기대자 그가 1층 버튼을 꾹누르는데 맨투맨 밖으로 삐져나온 손이 생각 이상으로 작았다. 하얗고
제 손의 반도 안 되는 조카손이 생각나 키득거리다 움찔거리는 빨간 맨투맨에 애써 숨을 골랐다.
170은 넘으려나....그러고보니 몸집도 작지만 키가 정말 작다. 내 어깨에도 안올거같아.
찬찬히 훑어 보는데 분홍색 머리칼 밑으로 보이는 새하얀 목에 눈길을 빼앗겼다. 뱃속이 간질간질해 지는 느낌에 헛기침을 하고 시선을 뗐다. 괜히 얼굴이 빨게진다.
색이보이고 깨달았는데 옆집남자의 연분홍색 머리는 결코 흔한색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예상대로 대부분 검거나 약간 밝은색이었는데 이 파스텔톤머리는 정말 찾기 힘들었다. 그것도 남자가.
아 좀 차별적인 생각이었나.. 근데 진짜 뭐하는 사람일까?
뭐 어쨌든 새햐안 피부랑 어울려 보기좋았다. 내가 색의 조화란걸 따지니까 좀 우습지만.
띵
1층에 내려오자 슬쩍 내눈치를 보더니 후다닥 뛰어나간다.
작은몸이 빨빨거리는게 아무리 생각해도 올해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조카가 자꾸 생각난다. 아 귀여워 진짜.
오늘 출근하는 얼굴 봤으니 목적은 이뤘다. 대충 주차장 입구에서 담배나 피다가 그의 차가 떠나는걸 보고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나보다 분명 몇살은 어릴텐데 차도 운전한다. 그것도 자기처럼 쪼꼬만 폭스바겐 비틀. 청록색.. 맞나 아무튼 작은 풍뎅이.
나처럼 학생은 아닌거 같고 회사원이라기엔 집에 자주들어오지도 않고... 몇주간 지켜본 바로는 일주일에 한번들어올까 말까다. 게다가 오늘같은 수요일엔 아침일찍 나가고 말이다.
뭔 연예인인가. 아이돌? 머리색도 그렇고.
근데 능력좋아 보이던데 나좀 개이득인건가.
"야!"
"......!"
갑자기 들려오는 고함에 앞을보니 시야 한가득 이석민이다.
"아 시발! 놀래라."
"뭔 생각을 그래하냐?"
"뭐야.비번은 또 어떻게 뚫은거야"
"니새끼 생각이 거기서 거기지. 너 폰이랑 똑같잖어."
지 집처럼 부엌한번 화장실 한번 기웃대다가 소파에 앉아있던 내 옆자리에 털썩하고 눕는다. 내 츄리닝은 또 언제 꺼내입은거야.
발로 내 옆구리를 슬금슬금밀더니 기어이 소파에서 쫒아내곤
어제 드라마 막방을 못봤다며 뻔뻔하게 vod 결제까지 맘대로 한다. 나도 모르는 결제 비밀번호도 알고있네. 기가찬다. 진짜.
말해봤자 들을 새끼도 아니고 내가 돈내는 것도 아니고해서 그냥 아침에 그 남자본다고 못먹은 밥이나 먹기로했다.
라면물을 올리는데 거실에서 드라마 여주인공 욕을하던 이석민이 소리친다.
"난 라면 싫은데에"
"너 설마"
"당연히 밥안먹고왔지. 아침사줭"
아 저 쓸모없는 새끼 진짜
"그 분홍이에 대해서 좀 알아냈어?"
"분홍이가 뭐야. 참 좆같다. 친구야"
"니새끼가 훨. 대답이나해"
"뭘 알아내. 뭔가 잘못 찍혔는지 인사 안피하면 다행이다"
와 김민규가 얼굴로 안먹힐때가 다있네
석민이는 국밥을 한입가득먹고는 우물대며 말했다. 입맛떨어지게 안에 내용물도 다보인다. 그래도 그런거 따지면서 밥먹는스타일은 아니라 나도 크게 한술뜨고 쩝쩝대며 삼켰다.
걔는 국밥좋아할라나. 이런거 싫어하게 생겼던데. 나중에 같이 살때 식성이 안맞으면 어떡해.
"근데 분홍이는 남자라도 좋대?"
어? 이석민이 툭던진 한마디에 움직이던 숟가락이 순간 멈췄다.
"아니이 반려자라며. 그럼 결혼은 나중치더라도 일단 둘이
그렇고그런사이라는거잖아. 근데 남자라도 괜찮대냐고"
"....."
"하긴 니가 그런생각을 했을리가 없지"
"...."
"아니 그 반려잔가 뭐시긴가 그거 진짜 있기는 하냐?"
이..있거든! 내가 생각해도 목소리에 자신감이 일도 없었다.
멍청한 내 반응에 석민이놈은 한숨을 한번 쉬더니 다시 고개를 박고 밥을먹었다.
아니 그래도 24년동안 색맹이던 사람이 한순간에 고쳐지는건 말이되냐고. 태생적인 건데. 근데 지금은 김치위에 빨간 고춧가루까지 풀 hd, 완전 선명하게 보인다고.
몇주전 처음 색을 보게된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분홍색 머리카락을 기점으로 바로 밑의 하얀 피부를 거쳐 회색빛 세상이 수채화처럼 물들어 점점 알록달록하게 변하는 그 관경은 정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날정도로 황홀경이었다. 그가 나의, 내가 그의 평생의 짝이라는 것에 일퍼센트의 의심도 없다. 그냥..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근데 나이도 몰라?"
집에 돌아와서 거실한가운데 멍하니 누워있는데 석민이가 내 배에 털썩 앉고는 쭈쭈바를 쭉쭉빨며 물어본다.
나이라.. 앳된 얼굴과 작은 몸집의 그가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디이게 어려보이던데. 키도 쪼매나고."
"뭐야.고딩이야?너 철컹철컹?"
"아냐. 차끌고다녀.폭스바겐"
"이야 김민규. 봉잡았네"
"돈은 우리집에도 많아. 난 그런건 신경 안쓰는 순수..."
달칵.
어?
지랄 염병을 사방으로 뿌리고 있다며 궁시렁대는 석민이 목소리 뒤로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집말고. 분명 옆집 소리다. 남들과 약간 다른 눈덕분에 청력이 다른사람들보다 더 예민한 편이었는데 참 요긴하게 써먹는거 같다. 그나저나 시계를 보니 이제 9시였다. 집을 나선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의 생활패턴상 지금 돌아올리는 없었다.
뭘 두고간건가...?
"야 옆집사람 돌아왔나봄"
"엉?"
"도어락 소리 들렸어"
"어우 역시 김개새끼. 청각이 아주그냥...엌!"
몸을 일으키자 배위에 누워있던 석민이가 데구르르 굴러 떨어졌지만 신경은 오롯이 현관문 넘어 옆집을 향해있었다.
꿍시렁 대던 석민이도 집중하는 내모습에 금방잊고 호기심 어린 눈빛을 해왔다.
"ㅇ..왜 뭐..뭐가 들려?"
침을 꼴깍삼키면서 무슨 귀신영접하는것 마냥 물어온다.
반짝이는 눈으로 커다란 손을 꼬옥 맞잡는게 김이 팍새서 그대로 털썩 누워버렸다.
아 그사람이 들어오든 말든 내가 할수있는건 없잖아...큽
이석민은 우울해하는 날 잠시 보다가 무언가생각난듯 사부작사부작 움직여댔다. 냉장고를 열고는 또 사부작사부작 찬장안에서 또 사부작사부작. 그러길 몇분 쇼핑백 하나를 손에 들고는 뿌듯한 표정으로 내앞으로 걸어온다.
"이거 갖다주고와"
"뭐냐"
"너네집 반찬"
쇼핑백안에는 얼마전 본가에서 보내준 반찬들이 얌전히 놓여있었다. 이런거라도 주면서 말이라도 붙이고 친해지라는 지론이었다. 나는 그냥 졸졸 따라다니고 몰래 엿보는것 밖에 생각 못했기에 지금의 내눈엔 이석민이 전설의 헬 교양과목인 심리학속 철학 교수님보다 몇배는 대단한 전문가로 보였다.
감동 하며 쇼핑백을 찬찬히 살펴보는데
"....장조림은 없네"
"내가 좋아해"
"..."
"너네집 한우쓰자나."
안어울리게 부끄럽다는듯 몸을 베베꼬는 모습이 못봐주겠다.
역시 그냥 이석민은 이석민이었다.
"저..저기요"
윗도리를 세번째 갈아입다 이석민한테 쿠사리먹고 급하게 나온다고 마음의 준비도 못했더니 너무 떨렸다. 이미 땀으로 축축한 손으로 초인종을 꾹누르고 땀을 바지춤에 싹싹닦았다.
혹시 우리 미래의 동반자님과 악수라도 할지모르니까.
우리집 반찬 맛있다니까. 일하는 아주머니 솜씨지만.
근데 인기척은 분명 나는데 문은 열릴 생각을 안한다.
뭐지 인터폰으로 보고 씹는건가. 아니야 못들었을거야 티비소리가 크다던가.. 샤워를 한다던....가..? 응?
샤워생각에 또 그 하얀 뒷목이 생각나 얼굴이또 빨게졌다.
그래도 입대전엔 꽤 이름날리며 여자고남자고 꼬셔댔는데 요즘따라 왜이렇게 쑥맥처럼 구는지 모르겠다.
분명 운명이 섞여서 그래. 암.
"저기요"
히죽히죽 웃고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툭툭친다. 그것도 귀찮다는듯 손등으로 툭툭. 뭔가해서 뒤돌아보니 아무것도 없다.
조금더 시야를내리니
"헐"
그토록 찾던 분홍머리통이 나를 올려다보며 인상짓고 있었다.
아닌데? 분명히 집안으로 들어갔는데. 뭐지? 축지법인가? 요정?분홍요정인가?
거대한 몸뚱이가 혼란에 빠져 대답을 않자 얼굴이 더 험학하게 변한다.
"아니. 그쪽이 왜 여기서.."
"누구세요?"
곧 싸울기세의 말투에 얼른 손사래를 치는데 이번에도 등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것도 앞에 사람과는 상반되는 상큼한 목소리로.
또 놀라 현관문 쪽으로 몸을 홱 돌리니 이번에는 노란머리통이다.
"엉? 김밍구?"
"순영이 형!"
그것도 엄청 익숙한 머리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