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비행기를 타면 말이야,
날고 있으면 내가 어디까지 왔는지 모른데.
내리고 나서야 내가 도착했구나, 하고 깨닫는다는 거야.
그래서 우리 엄마가 그러더라, 인생은 야간비행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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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비행
Night F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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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민이 만났어요, 피자 먹였습니다. 윤기는 석진에게 문자를 보냈다. 윤기의 앞에는 들뜬 표정으로 피자를 먹고 있는 지민이 있었다.
워낙 남의 일에 관심도 없는 윤기가 언제 그렇게 지민을 뚫어져라 보았겠냐마는,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지민만이 유일하게 윤기의 주의를 사로잡은 사람이었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윤기를 느낀 건지, 지민이 피자를 먹다 말고 윤기에게 눈을 맞췄다. 윤기의 눈이 커졌다. 도둑질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말이다.
"맛없어?"
"........."
"먹어, 많이."
맛없어? 하고 묻는 윤기의 물음에 지민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도 윤기가 왜 그렇게 저를 빤히 쳐다보는지 모르겠다는 궁금증도 담고 있는 표정이었다.
윤기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많이 먹으라며 지민을 다독였지만, 정작 그런 본인은 많이 먹지 못하고 있었다. 피자가 맛이 없는 건 아니었다. 윤기가 이 곳에서 제일 좋아하는 피자이기도 했고.
지민은 며칠을 굶은 사람처럼 -실제로 며칠을 굶긴 했다- 피자를 먹었다. 허겁지겁 체할 듯 서둘러 먹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준 사람이 뿌듯해질 정도 만큼은 먹고 있었다.
윤기는 그런 지민을 보며 천천히 올라가는 자신의 입꼬리를 눈치채지 못했다. 피자를 먹는 중간중간 윤기의 얼굴을 들여다 보던 지민만이 그 표정의 변화를 감지할 뿐이었다.
지민은 이렇게 편안하게 웃는 윤기의 모습을 본 적이 없던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첫째는 윤기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오래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고,
둘째는 실제로 윤기가 잘 웃는 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민과 윤기가 그다지 친하거나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고, 그렇다고 윤기나 지민의 성격이 서글서글하여 누구와나 잘 어울리는 편도 못되었다.
어쨌거나 사교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둘이었다. 하나는 사교적이지 못할 수밖에 없는 신체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었고, 하나는 타고난 성격 때문에 그러했다.
신체적이든 성격적이든 고치거나 변화하기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변화는 어렵고 애초에 인간은 잘 변하지도 않지만,
"다 먹었어? 더 먹을래?"
"..........."
그 만큼 변하기 쉬운 것도 인간이었다. 지금 박지민 앞에 앉아있는 민윤기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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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비행
Night F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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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에 선 석진이었다. 쉽지만은 않은 하루가 갔다. 몸의 힘은 다 빠져 너덜너덜한데 그래봐야 수요일일 뿐이었다. 이틀을 더 출근해야 하고, 토요일에는 자율학습 감독도 해야 했다.
친구들은 모두 저를 부러워했다. 어른들은 안정적이네, 좋겠네, 잘됐다, 이제 좋은 여자 만나서 결혼만 하면 되겠네, 라고 이야기를 했다.
저도 그런 줄만 알았다. 누구나 부러워 하는 업무 환경과 저가 크게 어떤 잘못을 하지 않는 이상 잘릴 일 없는 안정성 같은 것들이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가 느끼는 현실은 저가 꿈꾸고 바라온 이상과는 달랐다. 대학교 4학년, 교생 실습을 할 때만 해도 이러지는 않았는데, 이건 그것과도 분명히 달랐다.
아이들은 불안하고 위태로웠다. 청춘이란 원래 그렇게 불안하고 위태롭고, 아프다고 하지만 정말 불안하고 위태롭고 아프기까지 한 아이들은 너무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힘들었던 건 그러한 아이들 옆에서 저가 해줄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었다. 예전에는 선생님만 되면 뭐든 다 될 줄 알았는데, 아이들에게 뭐든 해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석진의 능력이 부족하고 역량이 안 되어서가 아니라, 그들을 둘러싼 환경, 즉 시스템의 문제였다. 이미 썩어 문드러진 체계에 대해서는 석진이 손 쓸 방법이 없었다.
석진은 그러한 자신의 무능력함에 나날이 지쳐갔다. 내가 되고 싶던 건 이런 선생이 아니었는데, 이런 모습의 내가 아니었는데, 하는 생각이 석진을 괴롭혔다.
저보다 오래된 선생들은 그런 체계에 이미 닳고 닳아있는 것 같았다. 개중에는 석진처럼 안타까움을 가졌던 선생도 있었겠지만, 그건 그 때 뿐이었다. 지금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김우진 서울시 교육감님 모시고 이야기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김우진 교육감님, 안녕하세요?"
석진은 버스에서 흘러 나오는 라디오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게스트가 서울시 교육감인 모양이었다. 이전 교육감이 비리 때문에 자리에서 내려오게 되면서 바뀐 교육감이었다.
하지만 석진은 그에게 투표하지 않았다. 사실은 애초에 투표권을 행사하지도 않았다. 이미 굳어진 체계는 바뀔 줄을 몰랐다. 특히 서울은 더더욱 그랬다. 바꾼다고 하면 그 바꾸는 데에 대한 진통 때문에 변화가 절대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바뀌는 게 쉬웠더라면 일찍이 바뀌고 말았겠지, 석진은 새 교육감을 투표하라며 교장이 교내휴업을 선언하였을 때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 놈이나 저 놈이나 하는 꼴은 비슷했고, 그다지 효과적이고 성공적인 대안을 내놓지는 못했다. 이미 썩었는데, 석진은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을 보고 놀랐더랬다.
그리고 그 생각은 투표일 다음 날, 석진의 출근길에 더 공고해졌다. 학교 뒷문, 체육관 건물 뒷편에서 한 아이가 다른 대여섯 명으로부터 두들겨 맞고 있었다.
우두머리 -라는 단어는 좀 고전적이긴 하지만- 처럼 보이는 아이는 담배를 물고 있었고, 쥐어 터지고 있는 아이의 교복은 이미 많은 발길질을 당해 걸레짝이 다 되어 있었다.
석진은 순간 고민했다. 내가 저기로 가서 일을 귀찮게 만들어야 하는가, 아니면 못본 척하고 지나쳐 깔끔하게 무시하면 되는가.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 저에 대한 고민도 이어졌다.
내가 왜 여기에서 이런 고민을 하고 있지, 당연히 달려가서 뜯어 말려야 하는 것 아닌가. 왜 이렇게 겁을 내고 있지, 뭐가 두려워서, 뭐가 무서워서, 내가 왜?
그러면서도 석진의 걸음은 이미 교무실을 향해 가고 있었다. 가던 중에 마음을 고쳐 먹고 가던 길을 돌아와 결국 아이들을 말렸지만, 그걸 고민했던 자신에 대한 자책을 피할 수는 없었다.
겁쟁이. 석진은 자신을 그렇게 생각했다. 무엇이 너를 그렇게 겁 많은, 하릴 없는 남자로 만들어버렸는가. 답은 뻔했다. 겁을 내고 몸을 사릴 수밖에 없는 환경에 익숙해진 것이었다.
익숙함이란 게 무서운 거라고, 결국 사람을 만드는 건 환경이라고, 다 알고 있던 이야기였지만 새삼 이렇게 느끼니 정말 무서운 게 사실이었다.
석진은 앞으로 저가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 앞섰다. 걱정은 둘째 치고 저가 담임을 하고 있는 반 아이들을 볼 면목조차 없다고 생각했다.
평생을 담배를 몰랐던 석진인데, 심지어 군대에 있을 때도 그 하얗고 기다란 걸 손에 잡아본 적이 없는데, 처음으로 담배를 피워 보고 싶어졌더랬다.
그 만큼 무언가가 석진에게는 많은 고통과, 힘듦과, 상처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할 수 있을 만한, 딱히 정해진 어떤 것도 없다는 게 문제였다.
아프니까 청춘인 것은 아이들만이 아니었다. 석진 스스로도 청춘이었기에 충분히 아팠다.
3포 세대, 5포 세대, 그런 이야기를 들어도 제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무척이나 가까이 다가와버린 현실에 할 수 있는 거라곤 고개를 숙이는 일 뿐이었다. 이겨낼 힘이 생기지 않았다. 그런 힘을 만들어낼 용기도 없었다.
하루하루, 제 인생을 살아가기만 해도 벅찬 석진이었다. 타탁, 하고 뜯기는 맥주 캔에 석진은 후우,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민이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반장인 윤기를 시켜 지민의 집에 가보라고 했는데, 아직까지는 소식이 없었다.
윤기는 아버님이 일찍이 돌아가시고 어머님과 저, 그리고 형과 같이 살고 있는데 형이 몸이 불편해서 저가 가족을 먹여 살려야 되는 상황이었다.
물론 윤기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는 아니었고, 윤기가 1학년 때 어머님이 딱 한 번 학교에 오셨는데, 그 당시 담임에게 한 이야기를 석진이 들은 것이었다.
지민의 경우는... 윤기와 마찬가지로 아버님이 안 계시다는 건 알고 있는데 이상한 건 어머님조차 어디 계시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일단 계시긴 하다는 건 지민이 가족관계에 엄마와 저를 써냈기 때문에 알고는 있었는데, 같이 살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정확한 사실은 아니었고, 들리는 소문이 그랬다.
어머니는 다른 곳에서 돈을 벌어서 그 돈을 지민에게 부쳐주고 있다고. 그렇지 않고서야 말도 못하는 애가 저 혼자 살만한 돈을 가지고 있을 수는 없을 거라고.
추측성이 다분했지만 전혀 터무니 없는 이야기는 아니어서 어느 정도는 믿게 됐다. 아무튼, 둘 다 평범한 -평범하다는 것의 의미가 참 모호하긴 하지만- 가족관계를 가진 아이들은 아니었다.
석진 자신이 알고 있는, 평범하지 않은 가족관계를 가진 아이들은 몇 안 되었지만,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찾아보면 훨씬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들 중 대부분은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석진은 탁상에 올려둔 맥주캔을 들어 제 입으로 가져갔다. 근본을 알 수 없는 정의감에 불탄다 해서 제게 돌아올 보상은 없었다. 위험을 무릅쓴다고 해서 누군가의 인정과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얇고 길게 가자, 자신도 모르게 이런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 제 자신을 바라보며 석진은 좌절을 느꼈다.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날이 갈수록 무기력해지는 모습에 석진이 할 수 있는 일은 고개를 떨구는 것이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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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비행
Night F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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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좀."
"알아서 뭐하게요."
쉽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정말 쉽지 않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남준의 생각 만큼 이 노란 머리가 만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노란 머리가 처음 본 사람에게 -남준의 기준으로는 처음이 아니었지만, 이 노란 머리의 입장에서는 처음이었다. 모르는 사람이었으니까- 제 번호를 쉽게 줄 만큼 상냥한 성격이 못 되었다.
하지만 남준은 오늘 만큼은 정말 간절했다. 윤기와 내기를 했기 때문이었다. 오늘 이 노란 머리의 번호를 꼭 손에 넣어야 윤기에게 피자빵을 안 사줄 수 있었다.
사실 피자빵을 안 사주고 싶은 것보다는 그냥 노란 머리의 번호를 알고 싶은 것이었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몇 주째 겉돌았더니 이제는 겉돌기만 하는 것도 지겨워졌다.
윤기한테 피자빵을 사주고 안 사주고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데 제가 이 노란 머리의 번호를 알게 되느냐 아니냐는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왜냐하면, 남준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혹은 저가 의식하고 있는 사이에, 노란 머리에게 잔뜩, 푹, 정말 푸욱,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제 번호가 왜 알고 싶은데요."
".....그야..."
그야, 내가 너한테, 관심이 있으니까. 이 한 문장을 말 못해서 남준은 혀를 내밀어 아랫입술을 축이고만 있었다. 윤기가 평생 놀릴 흑역사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 용기를 내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찢어졌지만 큰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노란 머리였다. 노란 머리가 이렇게 저를 쳐다보면 한 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느끼는 남준이었다.
오늘은 목요일이었기에 오늘 노란 머리의 번호를 알아내지 못하면 다음주 월요일까지 기다려야 했다. 다음주 월요일을 맞기 위해서는 주말을 버텨야 했다.
안 되었다. 주말에는 꼭 이 노란 머리를 불러내어 같이 밥이라도 먹고 싶었다. 물론 될지 안 될지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남준의 계획은 그렇게나 야무졌다.
"...뭐야,"
말을 하려면 끝까지 하던가요, 노란 머리의 되바라진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과연 그 입 만큼이나 되바라졌다. 남준은 예의 없는 애들을 정말 싫어했다. 하지만 이 순간부터 남준의 이상형이 예의 없는 애가 될 것 같았다. 남준은 그런 기세로 노란 머리를 쳐다봤다.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해 벙 쪄있는 남준을 향해 노란 머리는 히이, 하고 웃어 보였다. 노란 머리의 미소는 남준에게는 크리티컬로 날아와 심장에 퍽, 하고 꽂혔고, 그대로 남준은 뒤로 발라당, 넘어갈 뻔 했지만... 뭐, 누구나 짐작했듯 그럴 일은 없었다.
남준은 바보처럼 더듬거리지 않기 위해 말을 아꼈다. 대신 눈으로 이야기하려고 애썼다. 되바라진 노란 머리는 답답해졌다. 최소한 세 번은 튕기려고 했는데 이렇게 되면 두 번으로 줄여야 할 것 같았다. 한 번 더 물어봐주지, 하는 마음이 들면서 그런 생각을 하는 제 자신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안 그래도 큰 눈이 더 커져 그 눈을 보고 남준마저 놀랐다.
"그럼, 요 앞에서 베이컨 토마토 디럭스 사주면요."
".....뭐?"
"베이컨 토마토 디럭스, 햄버거 사주면 알려준다구요, 번호."
노란 머리의 계획은 이러했다. 저가 한 번 튕기면 남준이 아, 알려줘- 하며 조를 것이고, 그러면 저는 아... 배고픈데, 하며 여운을 남기려 했다.
그럼 간절한 사람은 어차피 남준이었기에 먹을 것을 사주겠다고 할 것이고, 저는 그 때 베이컨 토마토 디럭스가 먹고 싶다고 하면 되었다.
이쪽도 남준 만큼이나 야무진 계획이 있었는데... 용기 없는 남준이 때문에 다 망했다. 살짝 자존심이 상한 노란 머리였지만 거기엔 큰 의미를 두지 않기로 했다.
어쨌든, 남준에게 햄버거를 얻어 먹을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밤 열두시의 맥도날드는 그다지 한산하지 않았다. 남준과 노란 머리 같은 밤의 아이들이 대거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네에 갈 곳은 마땅히 없고, 잘못 돌아다니다가는 돈 뺏기고 얻어 맞기 십상인데, 그러기에는 뺏길 만한 돈도 없고 맞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생각에 암묵적으로 뜻을 같이하는 아이들이 모인 곳이 여기, 밤의 맥도날드였다. 그런데 여기에서도 심심치 않게 자기들끼리 싸움이 벌어진다는 것은 자랑할 거리는 못되었다.
"......"
"........."
노란 머리는 걸신 들린 사람처럼 남준의 앞에서 햄버거를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말을 별로 안 해봐서 그런가, 입이 이렇게 큰 줄은 몰랐다. 그런데 큰 입마저 매력으로 느껴지는 걸 보니 정말 이 되바라진 노란 머리는 남준의 취향을 송두리째 바꿔 놓을 생각인가 보다. 남준은 이렇게 쉽게 바뀔 이상형이었으면 애초에 정해놓지도 않았을 걸, 하고 생각했다.
남준은 순간, 이름도 모르는 애한테 괜히 햄버거를 사줬다가 돈만 뜯기는 것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 사실 돈을 뜯긴다고 해서 크게 마음이 쓰이는 건 아니었지만, 월급날은 한참 남았는데 요즘 윤기랑 이 노란 머리를 걸고 너무 내기를 많이 해서 좀 많이 털렸기 때문에 쪼들리는 건 있었다.
물론 제가 돈이 없다고 하면 그대로 굶길 윤기는 아니었지만, 별반 다르지도 않은 상황에서 윤기를 떼먹는 건 못할 짓이라고, 남준은 생각했다.
"근데, 너 이름이 뭐냐?"
"..태형이여, 김태형."
아구아구, 입 안 가득 햄버거가 들어차 발음도 잘 되지 않는데 제 이름을 말하기 위해 애쓰는 태형이었다. 남준은 그런 태형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태형이, 태형이, 제 얼굴과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남준은 그렇게 햄버거를 흡입하는 -거의 마시는 수준이었다. 거짓말 안 하고.- 태형을 바라보다가, 문득 태형이 던지는 질문에 놀라서 눈이 커졌다.
"형은 이름이 뭔데요?"
"김남준. 너 내가 형인 거 어떻게 알았어?"
"그렇게 보이는데요."
늙어 보인다는 걸까. 성숙해 보인다는 걸까. 성숙해 보인다는 거겠지... 어떻게든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한 남준이 씨익, 잇몸을 드러내며 웃었다.
태형은 그런 남준을 보며 웃으니까 귀엽네, 하고 생각했다. 여태까지는 낮에는 학교에, 밤에는 주유소 일에 찌들어 말 그대로 '쩔어' 있는 남준의 얼굴만 봐와서 그런 모양이었다.
남준이 못생긴 얼굴인 건 아니었다. 윤기는 매일 남준에게 넌 사람이 못생겨질 수 있는 모든 조건을 타고났다, 며 놀리긴 했지만 남준이 봤을 땐 윤기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윤기가 그나마 하얘서 망정이지 까맸더라면 정말 망해도 그렇게 망한 얼굴이 없었겠다고, 남준은 항상 윤기를 공격했다. 윤기는 남준에게 너는 그나마 까맣게라도 태어난 걸 감사하게 생각하라고 했다. 그 얼굴에 하얀 게 더 소름이었을 거라며.
이제나 저제나 고만고만한 것들이 외모로 싸웠더랬다. 어쩌다가 이 이야기까지 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결론은 남준은, 그렇게 못난 얼굴은 아니었다.
"이제, 번호 알려줘."
"음..."
태형은 무언가를 고민하는듯 하더니 들뜬 표정으로 남준에게 신박한 제안을 해왔다. 태형의 제안을 들은 남준의 입에서는 또 한 번 미소가 흘러나왔다.
"내가 형한테 번호를 알려주면, 형이 나한테 카톡 보내놓고 기다려야 되잖아요.
근데 형이 나한테 번호를 알려주면, 내가 형을 기다리면 되잖아요.
기분이다, 형이 햄버거 사줬으니까 기다리는 건 내가 할게요. 형 번호 알려줘요."
근데 남준은 몰랐던 거다, 그게 태형이 만들어놓은 탈출구였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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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비행
Night F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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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와 지민의 사이가 가까워지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굳이 티를 내려고 한 건 아니었으나 윤기가 지민을 신경쓰지 않고 있다면 그것도 거짓말이었다.
윤기는 그 날부터, 정확히 말하자면 지민과 저의 입술이 부딪혔던 그 순간부터 지민이 신경쓰이기 시작했다. 의무감이나 책임감과는 다른 무엇이었다.
반장으로서의 의무감이나 책임감 때문이었다면 그 날 피자집에서 지민과의 시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일 때문에 바쁜 게 문제여서 그렇지 윤기는 학교 밖에서 지민을 만나는 데에 그다지 위화감이 없었다.
윤기 본인이 남들의 눈빛에 관심이 없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였지만, 윤기에게는 남들이 뭐라 하든 안 듣고 저가 듣고 싶은 말만 들을 수 있는 축복받은 귀가 있다는 게 더 큰 이유였다.
"먼저 가지 말고 기다려."
문제는 지민이었다. 아니, 정국이라고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어떻게 이야기를 하는 게 좋을지 잘 모르겠지만, 윤기는 저에게 허용된 틈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랜 시간 정국은 지민에게 말을 걸어주는 유일한 사람으로 존재해왔다. 다른 누군가가 지민에게 말을 걸면 그건 특이한 일이었지만 정국이 지민에게 말을 걸면 그건 평범한 일이었다.
사람들의 인식이나 선입견 같은 게 안 중요하다고 할 수가 없는 게, 윤기가 지민에게 말을 걸면 아이들은 그것을 왕따에 대한 반장의 책임감이라고 생각했는데,
정국이 지민에게 말을 걸면 아이들은 그것을 정국의 오래된 일방적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정국이 지민에게 장난을 치는 모습을 최소한 2년을 보며 지내온 아이들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학교 안에서 지민에게 말을 걸고 지민을 괴롭히는 것은, 모두 정국의 몫이었다.
그래서, 그러한 이유로, 윤기는 그 사이에 제가 어찌 할 틈이 없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
"..........."
윤기가 일을 하지 않는 날이었다. 이번주에 이틀을 쉬는 대신 다음주에는 쉴 수 없기 때문에 오늘 학교 밖에서 지민을 만나고 싶었다.
지난 번처럼 피자를 먹기 보다는 밥을 좀 먹이고 싶었다. 며칠 지켜본 결과, 지민이 밥을 먹는 모습을 못 보았기 때문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남의 일에 왠 오지랖이냐고 자책을 했을 테지만, 아니, 아예 누군가를 쳐다보지도 않았을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이 가고 마음이 갔다.
저가 생각해도 참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윤기는 지민에게 다가갔다. 어쨌거나 하고 싶은 건 해야 했다. 학교 밖에서 지민에게 밥을 사주는 것, 그게 바로 저가 하고 싶은 것이었다.
"야, 박지민. 가자."
지민과 윤기의 거리가 5m 이내로 가까워진 순간이었다. 가방을 매고 지민이 있는 곳으로 온 정국이 지민의 뒷통수를 탁, 치곤 어깨동무를 했다.
지민은 얼굴을 찌푸리며 뒷통수를 어루만졌고, 정국은 그런 지민의 머리를 쓱싹, 하고 쓰다듬었다. 윤기는 멀어져 가는 그들을 보며 시선을 거두었다.
생각이 많아졌다. 복잡한 건 싫었다. 하고 싶은 건 하는 게 제 성격에 맞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윤기는 혀를 내어 제 아랫입술을 달싹였다. 신발 앞 코로 죄 없는 바닥을 두어 번 내리찍은 뒤 걸어간 곳은 교실 창가였다.
"........."
등에는 저의 가방, 가슴팍에는 정국의 가방을 매고 걸어가는 지민의 옆에서 지민의 머리를 툭, 툭, 때리며 장난을 치는 정국이 보였다.
윤기는 주머니에 넣어둔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씨발, 갑자기 담배가 존나 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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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후... 이번 편 석진이랑 윤기 짠내... 어쩜 좋아여.... 2. 독자님들이 써주시는 '찌통'이란 말... 찌찌통증이라면서요? 들을 때마다 너무 귀엽고... 뭔가.... 가슴이 저릿해지는 기분이에요! 이런 게 찌찌통증인가요?! 3. 성의 댓글 달아주시는 분들 정말 항상 감사합니다. 암호닉 신청해주시면 제가 꼭 기억하고 항상 찾고 감사 인사 드릴게요ㅎㅎ 4. 확실히 평일에 글을 쓰기가 주말처럼 쉽지가 않네요.. 그래도 성실연재하려고 노력하겠습니다! 5. 이번 편 처음으로 불마크가 없는데, 과연 어떤 반응이 올지.... 기대 반 걱정 반이지만 용기를 내보겠습니다.. 하하. 많은 사랑 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하는 이십삼 되겠습니다. 평안한 밤 되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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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유 의외로 악필이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