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현이 경수네 집에서 경수의 육아를 도운 지는 생각보다 꽤 흘렀다. 백현이와 경수가 애를 같이 키웠다고 해도 무방했다.
아무리 조숙하고 자립심이 컸던 경수지만, 아직 그는 19살 남자애일 뿐이었다.
해외로 직장을 다니시는 부모님 사정상 집에 혼자있는 일이 잦았던 경수는 자신의 집에서 일을 치루고,
아이가 태어난지 1년만에 여자가 경수네 집에 아이를 두고 간 모양이었다.
외동으로 자란 경수는 아기를 달래는 법을 몰라 안절부절하다가 결국 백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날이 아마 수능이 끝난날이었지?
'백현아아-흑'
-'야, 너 뭐야. 왜 울어 수능 망쳤어? 아깐 잘도가더니만.'
'애기가, 나 애기. 애기 어떻게 해애-'
-'애기 뭐? 야, 알아듣게 좀 설명해.'
경수가 애를 안고 울면서 백현에게 전화를 했던 게 아마 찬열이가 2살 때니까..
그당시 그들의 나이는 19살. 고작 19살의 나이에 경수는 애 아빠가 됐다. 경수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했었다.
그런데 그 꿈을 일단은 접어야만 했다. 16살, 그러니까 중학교 졸업식 때.
경수는 어떤 여자애를 짝사랑하다가 졸업식이 다 끝나고 고백했더랬다.
여자를 순수하게 사귀었으면 사겼지. 생긴건 순진하게 생겨서 발랑까져가지고..
"..왔어?"
"어, 반찬사왔다. 내가 아직 반찬 할 실력이 안되서."
"사온 것 만해도 고마워."
경수는 동그란 안경을 벗으며 안방에서 나왔다. 잠옷차림에 얼굴이 부어 부스스한 걸 보면 밤새 글을 쓰다 늦게 잠든듯 했다.
경수는 내가 사온 반찬이 들어있는 검은 봉지를 뒤적여 반찬 내용물을 확인하더니 백현을 보곤,
"잘 사왔네."
하며 부스스 웃었다. ...사람 심장 떨리게.
*** ***
경수는 백현이 사온 무말랭이를 밥 숟갈에 얹어 우물우물 씹었다. 백현이 김치찌개를 한 숟갈 떠서 막 먹으려던 참이었다.
경수가 밥 먹다 말고 백현을 뚫어져라 쳐다보는거다. 왜..그러지? 하고 백현이 의문의 눈길을 보내자 경수는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뭐야, 도경수? 강아지처럼 말똥 쳐다보다가."
"..아니야, ..진짜루."
"아 뭔데"
"아니래도."
경수는 다시 숟가락을 들어 밥을 퍼먹기 시작했다. 오후 5시. 오늘 하루도 낮은 다 갔네. 곧 준이가 학교갔다가 올거고...
난 다시 마저 글 마감 해야겠다. 경수는 시계를 보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밥그릇을 다 비웠다. 잘 먹었어. 하고 경수가 먼저 일어났다.
원래는 백현이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려줬던 경수지만 글 마감일이 다가올 때면 먼저 일어나서 곧장 작업실로 들어갔다.
백현은 경수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말 없이 지켜보다가 저도 경수를 따라서 싱크대에 밥그릇을 넣었다.
경수는 뒤늦게 꿈을 이뤘다. 대학교도 백현의 도움으로 1학기만 간신히 다니다가 휴학계를 내고 알바를 다니면서 찬열이를 키워왔다.
학생 때라 용돈은 많이 받았지만 먹는데하고 문제집 값에만 용돈을 써왔던 우리는 세뱃돈 까지 합해 모아뒀던 먼지쌓인 돈들을 이때 다 썼다.
그렇게 2년이 흘러야 경수에게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안 부모님은 먼저 퇴직을 하신 경수 어머니가 오셔서 찬열이를 봐주셨다.
처음엔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셨다고 했지만, 경수의 어머니 답게 곧 차분하게 현실을 인지하셨다.
경수의 차분함은 아마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듯하다. 그동안 일이 바빠 경수에게 미안하던 참이라고. 이런 일도 다 자신의 탓일지도 모른다면서.
"경수야. 과일 먹을래?"
"아, 난 됐어. 이따 열이 오면 열이나 줘."
"..어엉-"
백현은 손에 든 과일 봉지를 들고 냉장고에 다가가 냉장고를 열고 과일통에 과일을 정리해두었다.
딸기가 얼마 안 남았네. 과일을 즐겨먹지않는 경수가 유일하게 자주 찾는 과일은 딸기였다.
백현은 냉장고를 뒤적거리다가 정리를 마치고 닫았다. 흐음- 이제 나도 서류정리를 해보실까.
백현은 아버지를 따라 경영을 시작했다. 중위권 대기업이긴 하지만 그래도 사장집안이라 부자소리 들으면서 풍요롭게 살았다.
식탁에 반찬 국물을 행주로 닦아내고 그 위에 서류를 펼쳤다.
***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집 안엔 백현이 넘기는 서류가 스치고 만년필이 무언갈 쓰는 소리, 경수가 머리를 부여잡고 노트북 두드리는 소리만 들렸다.
백현이 막 다음 서류를 넘겨보려고 할 때 였다. 도어락이 띠릭 하고 풀리더니 경수의 큰 눈을 닮은 키 큰 형체가 들어왔다.
백현이 동작을 멈추고 찬열을 보고 반겼다.
"왔어?"
"응."
"야 넌 응이 뭐야 응이."
"엉."
"이쉭ㅎ-"
"아드을-"
백현이 말대답을 하는 찬열에게 헤드락을 걸려던 순간 어느샌가 방에서 나온 경수가 나이에 비해 커다란 찬열의 등에 매달렸다.
경수의 표정은 마치 엄마에게 안긴 새끼강아지같았다.
백현은 장난을 치려다가 저지당해 당황스러웠지만, 피로에 잔뜩 풀어진 경수의 표정을 보자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찬열은 경수가 매달렸는데도 불구하고 가방을 태연하게 내려놓고 방으로 걸어갔다.
저새끼 저거 누굴 닮아서 키가 저렇게 큰거야.. 중2인데 175인게 말이돼? 나랑 비슷해..
"삼촌, 나 밥."
"......"
"삼촌?"
"ㅇ,아! 어,,어!"
저 아빠를 닮아 길을 지나가다보면 여자들이 한 번쯤 뒤돌아볼 외모를 가지고 있어 삐딱하게 엇나갈 수도 있었는데,
찬열은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아빠를 지켜봐와서 그런가 그렇지는 않았다.
어릴 적 경수처럼 냉정한 면이 지 아빠보다 더 했으면 더한 찬열이었지만, 여자를 대할 때만 그렇고 은근 다정한 면이 있었다.
예를 들어 지금처럼 경수의 급작스러운 어리광을 받아준다던가 하는 것들.
백현은 서류들을 쇼파 옆에 치워두고 식사준비를 했다.
찌개를 데우고 아까 넣어놓은 반찬들을 차렸다. 찬열은 학교에서 저녁을 먹지않고 종합학원에 가서 공부를 하고 11시에 돌아온다.
백현이 저녁 안 먹으면 배고프지 않냐고 물어보자 주머니에서 에너지바 봉지를 내미는 거 보면 간단히 때우나보다.
아직 중학생인데도 일찍이 철이 들어버린 찬열은 공부에만 매진한다. 아빠한테 빚을 갚는다나 뭐라나.
"찬열아, 밥 먹어."
"엉"
"대답 진-짜 성의있다 우리 찬열이."
"그치."
"그치는 무슨 그치.. 빨리 밥 먹어."
찬열의 엄마가 능글맞았나, 성격은 저리 무뚝뚝한데 대답은 능글맞다. 너무 모순적인가?
저 아빠는 능글맞은 구석은 없는데 말이다. 백현은 밥 먹는 찬열을 흐뭇하게 지켜보다가 거실로 가서 쇼파에 앉아 서류들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후루룩- 집 안은 다시 찬열이 찌개를 떠 먹는 소리와 경수가 타자치는 소리만 들려왔다. 역시 남자들이 사는 집이란..
찬열이 밥을 다 먹고 반찬뚜껑을 닫고 있을 때 경수가 스멀 스멀 방에서 나왔다.
주방에 있는 찬열을 한번, 쇼파에 앉아있는 백현을 한번 쳐다보다가 발을 질질 끌며 쇼파에 풀썩 앉았다.
워낙 마른 몸인터라 폭신한 걸 좋아하는 경수를 위해 백현이 얼마 전에 사온 일명 '폭신이' 쇼파였다.
경수는 동그란 안경을 벗어 쇼파 팔걸이에 올려놓고 무릎을 모아 감싸안고 눈을 붙였다.
"아빠, 들어가서 자."
"......"
"깨우지마. 눈 피곤한가봐."
"..후, 맨날 저렇게 자니까 허리아프다고 하지."
식탁을 다 정리한 찬열은 고개를 저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백현은 찬열의 방문을 쳐다보다가 동그랗게 말고 조용히 잠든 경수를 바라보았다.
경수야- 사근하게 불러봐도 답이 없다. 벌써 잠들었나.
백현은 또 얌전히 바라보다가 이내 결심한듯 일어나서 경수의 앞으로 다가갔다.
경수의 등을 받치고 무릎 뒤에 손을 넣어 으쌰-하고 들었다. 경수가 깨지않게 조심조심하면서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가 침대 왼편에 뉘였다.
침대의 스프링소리도 작게 들릴 만큼 조심히 내려놓고 이불을 끌어 덮어주었다.
그리고 흐트러진 경수의 갈색 머리를 세심하게 정돈해줬다.
머리를 정리하니 이젠 경수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남자답게 짙은 눈썹과 높지만 동그란 코 끝, 그리고 붉고 도톰한 입술까지..
백현은 무언가에 홀린듯이 바라보다가 길고 가느다란 손끝으로 코 끝을 건드렸다. 살짝 경수가 찡그리자 백현은 낮게 웃었다.
미소를 지우지않고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이고 경수의 입술에 입맞췄다.
서로가 알지만 정의하지않았던 서로의 마음. 딱히 말하지않았고, 굳이 말해야된다는 생각은 없지만.
언제부터였을까. 언제부터 우리의 죽고 못살았던 우정이...
정말 둘이 없으면 못사는 감정이 되었을까..
*작가의 말*
첫 글이여서 서툴지 몰라요 '-'
그래도 재밌게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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