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이번 장은 백현이 외전이라 봐도 문제가 없을 듯 싶습니다ㅎㅎㅎ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w. Cla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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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거친 파공음을 수반한 불똥이 사방으로 튀고 있었다. 뜨겁잖아, 밖으로 나와. 제발, 경수야아, 찬열의 품에 안겨 움직임을 저지당한 백현이 안쓰럽게 손을 뻗으며 울었다. 불길은 점점 거세어지며 경수가 나올 수 있는 출구를 온통 에워싸고 있었다. 경수의 몸이 차차 가려지자 두려움으로 물든 백현이 찬열을 밀치며 오열했다. 이거 놔, 놓아줘, 제발! 경수야 나오란 말야! 서러운 울음에 백현이 딸꾹거리면서도 쉼없이 경수를 향해 손을 뻗는다.
ㅡ형, 백현이 형아. ㅡ그래 경수야, 나 백현이 맞아. 얼른 거기서 나와, 거기 뜨겁잖아……. 늦지 않았어, 제발! ㅡ나 솔직하게 말할게.
탈진 상태에 가까워진 백현이 금방이라도 쓰러지려는 몸을 늘어뜨리면서도 경수를 보겠다고 힘겹게 눈을 뜨고 있었다.
ㅡ형을 만난 순간부터, 형이 거짓말을 쳤다는 걸 알게 되고, 또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지금까지 나는,
나는 말이야, 불길에 흐려지는 백현과 찬열을 바라보던 경수가 눈물을 떨어뜨리면서도 입가를 끌어올려 웃었다. 모두가 좋아해주었고, 백현이 좋아하고, 그 사람이 좋아하는 얼굴로 웃었다.
ㅡ형을 좋아하지 않았던 순간이 없어. ㅡ경수……. ㅡ그렇지만 가야 해. 그 사람은,
경수가 말을 끝맺기 전에 가까스로 버티던 백현의 몸이 쓰러졌다. 찬열이 그 몸을 제게로 끌어당겨 단단히 안았다. 백현을 안고 경수에게로 시선을 돌린 찬열에게 비친 경수가 아쉽다는 듯 손을 뻗다가, 거두었다. 푸스스 웃음을 띈 얼굴이 백현과 찬열에게 손을 흔든다. 안녕, 그리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찬열의 품 안에서 백현이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흘려냈다. 중얼거린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 네가 나의 세상에서 살았었던 그 때로. 그럴 수 없다면 그냥 애초부터 너를 모르던 나로. 떨리는 하얀 손이 찬열의 어깨를 짚었다. 찬열이 고개를 끄덕이며 백현을 토닥였다. 한숨 자, 모든 게 좋게 끝나있을 거야. 낮게 울려퍼지는 목소리를 끝으로 백현의 혼이 백현의 내면 깊숙이 사라져버렸다. 밖을 피해 바삐 뛰어가는 영혼의 발놀림이 손놀림으로 이전되어, 백현은 자신을 닫아버렸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백현 외전
나는 아주 오래 전에 태어났다. 천사와 악마에 대한 경계도, 에오스와 네스토르에 대한 경계도, 에덴 자체가 뚜렷하지 않을 만큼, 상상하기 어려우리만치 오래 전에.
천근만근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올리는 데에 성공한 아이의 앞에는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낑낑거리며 힘을 주는 것 자체가 어색한 몸을 지탱해 일어섰지만 금방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무지의 혼돈 속에 놓여진 아이가 두려움에 떨었다. 자신을 보호하겠답시고 한껏 끌어안는 고르고스의 품에 거부감 없이 안긴다. 이리 오렴, 이리로 와. 문득 들리는 목소리에 고르고스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있던 아이가 흠칫 떨었다. 저런, 두려운 모양이로구나.
ㅡ겁 먹지 말고 고개를 들어봐. 여긴 예쁜 곳이니까.
그득이 온기를 담은 목소리에 아이가 고개를 들자 초점이 흐릿해 뿌연 세상이 드러났다. 눈을 깜빡여봐, 지시에 맞춰 몇 번 더 눈을 깜빡이자 비로소 자신에게 팔을 벌리고 서 있는 누군가가 있었다. 착한 아이야, 이리로 걸어와. 고르고스를 힐끗 바라본 아이가 망설이자 고르고스가 냉큼 단단한 꼬리를 내밀었다. 끙끙거리며 그것을 짚고 일어서서 망설임 없이 밝은 빛이 가득한 곳으로 걸음을 떼어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이에게 안겼다. 영원한 우리의 동지가 된 것을 환영해, 백현아. 나긋한 목소리와 함께 등을 토닥여주는 손길이 그리 좋을 수 없었다.
에덴이 생성된 이후로 천사와 악마가 생겨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다. 5번째 악마로 태어난 백현은 모든 악마들에게서 예쁨을 독차지했다. 자신들의 둥지가 될 네스토르를 건립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을 이들도 유독 백현이 웃음을 달고 동네를 누비면 그게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며 다가와 꼭 한 번씩 통통하게 오른 볼살을 꼬집어보곤 했다. 백현은 네스토르에 있는 악마들 중 가장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어린 백현의 하루하루는 비슷하게 굴러갔다. 아침에 일어나면 장로님에게 눈을 부비지 말라는 꾸지람을 듣고, 괜히 돌아앉아 토라진 척 입술을 삐죽이면 사과의 의미로 달달한 크림과자를 받아냈다.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맛에 반해 아침도 잊고 도도도 뛰어나오면 공중에 떠 마력을 사용해 예쁜 성을 만들고 있던 악마 중 하나가 일어났느냐며 부드럽게 끌어안아주었다. 손에 쥐어진 크림과자를 다 먹고 나면 아마도 죄 없는 풀을 마구 뽑아대며 풀밭을 어지르고 있을 고르고스를 찾아 발걸음을 옮기던 아침 일상, 그 날도 다르지 않았다.
ㅡ너 또 풀 뜯고 있지?
뜯지 말라구 했잖아, 걔네 아파한단 말이야. 작은 입술로 쫑알대며 고르고스에게로 다가서면 갸륵거리는 소리를 내며 제게 잔뜩 애교를 부릴 고르고스가 어쩐지 조용하다. 기분이 안 좋나? 장로님의 호랑이한테 깝죽대다가 한 방 물리기라도 했나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서자 고르고스가 벌떡 일어나 폴짝거리며 손톱으로 머나먼 곳을 가리킨다. 저기에 뭐 있어? 시선을 돌리자 멀리 풀밭에서 펄럭이는 하얀 날개가 보였다. 날개가 왜 하얀색이지? 자신의 까만 날개를 떠올리던 백현이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펄럭대던 하얀 날개를 지나치자 하얗고 조막만한 예쁜 얼굴이 드러난다. 예쁘다, 백현이 눈을 깜빡였다. 저게 우리랑 다르다던 천사구나, 나이는 어렸지만 알아볼 수 있었다. 긴 머리를 휘날리는 천사를 보던 백현이 눈을 깜빡이다가 수면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고, 고개를 아래로 푹 숙였다.
ㅡ장로님, 나 오늘 천사를 봤어.
일이 바쁜 장로 때문에 어두운 밤 성에 혼자 남은 백현이 커다란 거울 앞에서 웅얼거렸다. 괜히 눈에 힘을 주고 날개를 꺼내자 눈이 무섭게 빨개졌다. 뼈와 가죽으로만 이루어진 너덜거리는 까만 날개를 손으로 만지작댔다. 생기를 담고 있던 백현의 눈이 차차 비어갔다.
ㅡ엄청 예뻤어, 나는 왜 안 그렇지?
거울 속 자신이 말하는 대로 입술을 달싹인다. 하얀 얼굴에 붉은 입술이 예뻤지만 날개와 눈은 보기에 무섭다. 한참이나 거울을 보고 있던 백현이 주먹을 꼭 말아쥐었다.
ㅡ악마이기 싫어.
나도 천사이고 싶어, 날개가 접어들어가고 눈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변함없이 예쁜 자신의 얼굴을 확인했지만 백현은 힘이 없었다. 모두는 예쁜 걸 사랑하는데 나는 예쁘지 못해, 나는 왜 이럴까? 넓은 성의 커다란 창문을 타고 들어온 달빛이 자그마한 등을 비추고 있었다. 나는 악마가 아니야, 나는 그냥 백현이야. 팔로 자기자신을 끌어안은 백현이 슬퍼하는 스스로에게 작은 위로를 건네고 있었다. 자신이 추하다고 생각했던 백현이 겪은 첫 번째 좌절을 비롯한 상처였다.
지루할 정도로 길 것 같았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어느덧 악마 중에서도 높은 지위를 거머쥔 백현의 옆에는 고르고스가 없었다. 고르고스의 존재를 묻는 다른 악마들을 백현은 무시로 응대했다. 악마의 모습으로 변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성 지하 깊은 곳에 제 손으로 직접 고르고스를 가둬버렸다는 말을 꺼내어 좋을 건 없었으니까. 감정을 교감하는 고르고스가 무기력함을 지닌 이상 백현은 악마로 변할 수 없었다. 더 이상 흉측한 날개와 보기 싫은 빨간 눈을 가지지 않아도 되었지만 어쩐지 백현은 생각 만큼 행복해하지 않았다.
에덴의 초반부터 절대적으로 우세했던 네스토르는 서서히 흔들리고 있었다. 애초부터 사그라들지 않는 생명에 의존해 얻어낸 우위였으니 가질 수 없는 것에 분한 천사들이 새로운 것을 개발해내는 건 당연했다. 능력 있는 천사들은 유토피아라는 연구소를 개발해냈고, 연구 결과는 비밀리에 에오스 정부로 넘어가고 있었으니 평생 동안 좋은 것을 누리고 싶어하는 탐욕스런 악마들이 괜한 불안에 떠는 것 또한 당연했다. 악마들에게서 마음이 떠난 백현은 일이 흘러가는 방향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악마들은 금세 강한 무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기계를 만들어냈고, 그 베아뚜스라던 기계의 실행을 위해, 그저 강한 무기를 위해 다음으로 태어날 악마를 무조건 실험체로 만들겠다고 선포했다. 그 수가 매우 협소할 때 악마인 자신의 탄생만을 손 꼽아 기다리고, 그저 악마라는 이유로 자신을 예뻐하던 악마들은 이제 태어날 아이를 그저 악마라는 이유로 3000년 동안 강제적으로 잠재우고 행복이라는 뜻의 베아뚜스를 가장한 무기로 삼겠다고 했다. 백현은 태어날 악마가 애잔할 뿐이었다. 그래서 찬열이 태어났을 때, 자신이 100년 동안 그를 돌보겠다고 나섰다. 귀찮을 법도 했지만 찬열의 반려동물인 매까지 손수 거뒀고, 어린 자신이 받았던 사랑을 찬열에게 전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어릴 적 자신처럼 작은 몸으로 여기저기 쏘다니고, 과자 하나에 입이 찢어져라 웃는 찬열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찬열은 충분히 걸을 수 있음에도 백현은 항상 찬열을 품에 안고 다녔다. 날개를 꺼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안 찬열이 얼마 가지 않아 날아다니느라 그 품을 스스로 벗어나긴 했지만.
ㅡ형은 왜 날개 없어? ㅡ버렸어.
왜? 눈을 동그랗게 뜨며 파닥이는 자신의 날개를 바라본 찬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렇게 좋은 걸 왜 버리지? 어떻게 버렸지? 백현의 입술이 열릴 때까지 찬열은 백현을 주시했다. 응? 어린 호기심에 슬쩍 대답을 촉구하자 어렵사리 그 입술이 대답을 뱉어냈다. 안, 예쁘잖아. 대답을 들은 찬열이 미간을 좁히고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백현이 찬열을 주시했다.
ㅡ백현이 형은 뭘 해도 예뻐. ㅡ찬열아. ㅡ천사여도 예쁘고, 한낱 길가의 풀떼기였어도 무조건 예뻐. 그리고,
나랑 같은 악마일 때 제일 예뻐. 찬열이 그 말을 끝맺었을 때 백현은 마침내 울고 말았다. 사랑을 받으려면 예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강박감 때문에 여러 철없는 행동들을 했다. 진심으로 강박감을 덜어내 준 찬열이 너무 고마워서 백현은 공중에 떠 있는 찬열을 잡아끌어 안았다. 오랫동안 그와 함께 있고 싶었다. 오랫동안 나랑 있어, 되려 제 등을 토닥이며 말해주는 찬열에게 쉬이 그러마 할 수 없는 이유를 백현은 제대로 알았고, 찬열은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 백현은 나중에 닥칠 찬열의 슬픔을 덜어주고 싶어서 진실을 함구했다. 다만 모든 걸 숨긴 자신에게 꽂힐 찬열의 원망이 싫어서 끊임없이 불쌍하다는 말만 속삭여댔다. 그리고 베아뚜스 안으로 들어가 복잡한 기계선들에 얽혀 3000년의 잠에 빠질 찬열을 차마 볼 수 없어서 찬열이 성체가 되기 하루 전에 더딘 발걸음을 끌며 떠나버렸다.
ㅡ만날 수 있을 거야.
내일이면 자신의 손 만큼, 어쩌면 자신의 손보다 더 크게 성장할 손을 맞잡은 백현이 웃었다. 잘 자, 네가 일어나면 행복할 수 있길, 우리가 다시 만나길 바라. 보내고 싶지 않았던 이의 곁을 제 발로 떠나야 했던 백현의 두 번째 상처였다.
그대로 찬열을 떠난 백현은 오랜 시간 동안 부랑자 행세를 했다. 자신의 콤플렉스를 만들고 찬열을 앗아간 네스토르에 돌아가기 싫어서 에오스와 가이아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문득 태어날 이가 궁금해 가끔씩 드나드는 가이아에서 카이의 탄생을 보았고, 떠돌던 에오스에서 찬열의 모습과 겹치는 경수를 만났다. 일종의 데자뷰였을 지도 모른다. 자신을 예쁘다고 말해주고, 작은 것에 기뻐하고, 예쁘게 웃는 찬열을 닮은 아이, 경수는 백현의 시선을 한 번에 사로잡았다. 찬열을 닮은 천사를 얻어내고 나서야 비로소 백현은 정착할 수 있었다. 다만, 모든 게 똑같은 찬열과 경수에게 다른 점이 있었다면.
ㅡ형은 나는 거 싫어?
악마인 찬열에게는 솔직한 자신을 드러낼 수 있었지만,
ㅡ다쳐서 한 동안 날개 쓰면 안 된대서 그래.
천사인 경수에게는 솔직한 자신을 은닉해야 했다. 그럼에도 백현이 경수를 놓을 수 없었던 건, 일종의 동경 때문이었다. 내게 없는 삶의 끝을 가졌고, 내게 없는 예쁜 날개와, 내게 없는 맑은 눈을 지닌 경수가 부러워서 자신도 모르는 새 그를 삶의 모토로 삼았을 지 몰랐다. 200년으로 한정된 그 삶을 최고로 예쁘게 꾸며주고 싶고, 그 예쁜 날개와 맑은 눈을 간직할 수 있도록. 내가 없는 것들을 지닌 경수의 삶을 영원한 나의 이상향으로 만들자. 그래서 백현은 경수를 빼앗긴 세 번째 상처를 감추며 다짐했다.
ㅡ경수는 고작 200년만 살기에는 아까운 아이야. ㅡ너, 설마……. ㅡ경수는나와 영생을 누리게 될 거야, 방해하려 하지 마. ㅡ닥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경수의 영생을 막아야겠다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6장
회의가 끝나기도 전에 찬열의 손목을 붙들고 나온 백현이 멈춰섰다. 그리고 뒤돌아서 찬열을 올려다보았다. 아무 것도 모르고 새근거리던 찬열의 손을 잡고 혼자 울먹이며 그를 등지던 과거가 아직도 생생한데, 찬열은 크게 성장했다. 이제 백현이 찬열을 끌어안기보다 찬열이 백현을 끌어안는 모양새가 맞을 정도로. 백현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찬열이 하려던 말이 있는지 입을 벌렸다가, 한숨과 함께 다물며 백현을 당겨 안았다. 둘은 서로에게 말을 아꼈다. 잔잔한 숨소리만이 오갔다. 서로를 끌어안고 눈을 감고 있다. 오랜 시간을 잘 보내준 서로를 격려하고 다독이다가, 백현이 천천히 품에서 떨어졌다.
ㅡ찾아야 할 게 있어. ㅡ천사 하나?
되묻는 찬열에게 고개를 끄덕인 백현이 돌아서 어딘가로 걸어갔다. 찬열은 그 자리에서 멈춰서 백현의 등을 훑다가 걸음을 따랐다. 백현이 찾아야 한다는 걸 빨리 찾았으면 좋겠다, 그럼 온전히 백현이 자신만을 볼 수 있을테니까. 급속히 변해버린 자신에 비해 과거와 같은 백현을 보며 찬열은 향수에 젖어있었다.
백현이 낡은 문을 열자 괴기스러운 소리를 낸 문이 천천히 열렸다. 일어나는 먼지에 콜록댄 백현이 짜증을 부렸다. 왜 가는 곳 마다 먼지야! 지켜보던 찬열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찬열이 방에 발을 들여놓음과 동시에 쿵, 하고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시선을 돌린 찬열이 놀라움으로 눈을 커다랗게 떴다가, 반가움으로 웃었다. 백현이 까치발을 들고 높이 매달려있는 철장을 열자마자 파닥이며 날아온 찬열의 매가 찬열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매가 찬열의 머리통에 몸을 부벼대는 꼴이 그렇게 웃길 수가 없었다.
ㅡ할 거 많아, 얼른 와.
어느 새 문밖으로 나가 선 백현이 찬열에게 손짓했다. 복도로 나와 백현의 걸음을 따르는 동안 찬열이 처음 보는 것들이 신기해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3100여년을 살아왔지만, 실로 살아온 기간은 100년에 그쳤기 때문에 따지자면 찬열은 이제 막 성체가 된 것이었고, 그를 배제한다 해도 3000년 만에 일어난 자의 눈에 신기하지 않을 것이 없었다. 다시 괴기스러운 소리를 내는 문을 열어젖힌 백현을 따라 방으로 들어간 찬열이 방을 둘러보았다. 커다란 크기의 선반에 온갖 색깔의 상자들이 빼곡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백현, 백현, 중얼거리며 백현이 상자의 뚜껑에 쓰인 이름들을 훑고 있었다. 찬열은 백현이 아주 빨리 태어났다는 걸 알았다. 깊숙이 들어간 찬열이 백현의 이름이 쓰인 5번째 상자를 들고 나왔다. 찬열의 뒤를 쫓아온 백현이 하얀 색의 상자를 받아들었다. 그만 나가는 게 맞을텐데 백현은 여전히 상자들 주위를 기웃댔다. 여기저기를 살피던 백현이 팔을 뻗어 검은색 상자 하나를 더 집어들었다. 위에 새겨진 다른 이의 이름을 본 찬열이 그건 왜 잡느냐고 물어보기 전에 백현이 잽싸게 말을 가로챘다.
ㅡ얼른 나가자, 들키면 망해.
꺼림칙함에 눈을 찌푸린 찬열이었지만 백현의 말을 따랐다. 네스토르 정부를 빠르게 벗어난 백현이 한참이나 걸어 으슥한 골목으로 숨어들었다. 찬열의 품으로 검은 상자를 안긴 백현이 자리에 주저앉아서 하얀 상자를 열었다. 망글거리는 하얀 안개를 백현이 손으로 움켜쥐어 마셨다. 부르르 몸을 떨며 숨을 몰아쉰 백현이 찬열에게 손을 내밀자 찬열이 검은 상자를 건넸다. 놀라지 마, 나 좀 많이 아플 것 같아. 찬열을 토닥인 백현이 망설임 없이 상자를 열어젖히자 아까와는 다른 검은 액체가 부글거렸다. 또한 망설임 없이 손으로 퍼낸 백현이 액체를 목으로 넘겼다. 남은 액체를 상자를 뒤집어 엎어버리고 나서 백현이 주저앉아 식은땀을 흘렸다. 찬열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백현의 등을 쓸어주고 있었다. 애써 힘들 백현에게 설명을 재촉하지 않았다. 한참이나 숨을 할딱이던 백현이 이제 괜찮아, 말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번에도 백현의 걸음을 찬열이 쫓았다. 3000년 전 마지막 날 밤 자신이 잠들었던 성과 똑같은 성에 다다르고, 찬열을 돌아본 백현이 입술을 뗐다. 들어가자.
백현을 따라 백현의 방으로 올라온 찬열이 백현을 벽으로 밀쳤다. 침대 시트를 펼치고 있던 고르고스가 광경을 보고 으르렁댔다.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찬열은 직감할 수 있었다. 백현이 자신에게 보여주지 않은 백현의 반려동물이라고, 서서히 날개가 돋아나는 백현을 찬열이 내려다 보았다.
ㅡ왜 이래, 놔. ㅡ보여줘.
주어가 빠진 말이었지만 백현은 이해할 수 있었다. 이로 입술을 깨물려는 백현을 찬열의 손가락이 저지했다. 백현의 입술을 대신해 깨물린 손가락에서 피가 났다. 이윽고 완전한 날개가 돋아나고, 백현의 눈이 붉어졌다. 옆에서는 백현의 고르고스와 찬열의 매가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찬열을 바라보지 못하고 눈을 떨어뜨린 백현의 턱을 찬열이 잡아올렸다.
ㅡ숨기려고 들지 마. 이게 내가 본 모습 중에, ㅡ……. ㅡ최고로 아름다워.
떠오르는 과거의 목소리.
[백현이 형은 뭘 해도 예뻐. ] [찬열아. ] [천사여도 예쁘고, 한낱 길가의 풀떼기였어도 무조건 예뻐. 그리고, 나랑 같은 악마일 때 제일 예뻐. ]
백현이 숨을 들이쉬며 울음을 참았다. 울보가 됐네, 웃은 찬열이 백현의 날개를 어루만지며 따스하게 끌어안았다. 재촉하지 않을게, 베아뚜스처럼 나중엔 다 알게 될테니까. 굳센 믿음을 담은 낮고 거친 찬열의 목소리가 백현에게 그렇게 보드랍고, 따스할 수 없었다. |
s2감사하신분들s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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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님, 모바일님, 니포님, 독자7님, 노루님, 빛나리님, 꼬부기님, 미카엘님, 조닌님, 김미원님
ㅇㅇ방에 제 글 추천을 보고 오셨다는 분들을 보고 감동먹었어요ㅠㅠㅠ부족한 글인데 읽어주시는 분들에게 항상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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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맨 앞에 등장했던 부분은 미래의 장면 중 하나입니다. 나중에 똑같은 걸로 하나 다시 볼 수 있으실 거예요ㅋㅋㅋㅋ 2. 백현 외전의 포인트는 어린 백현과 어린 찬열이를 보는 백현이, 경수를 향한 백현이의 자세한 마음입니다. 3. 이번 장을 보고 아셨을 수도 있고, 다음 장을 보시면 알게 되겠지만 백현이는 지금 범죄를 저지른 거예요ㅋㅋㅋㅋ 4. 백현이가 훔친 상자는 '봉인된 능력' 이 담겨있는 상자입니다. 다음에 자세한 설명이 드러나겠지만, 백현이는 능력을 찾았어요.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은 댓글로 달아주시면 제가 확인하자마자 답해드리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s2
+늦어서 죄송합니다ㅠㅠㅠ7장까지 미리 써두긴 했지만 지금 다소 내용이 많이 변화하고 있어서 수정이 정말 많아요.. |
암호닉, 신알신은 항상 받고 있습니다s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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