덫
Mark Lee / Jeno
N
최선의 선택은 과연 최선일까?
나랑 말 좀 해. 휘갈겨쓴 글씨체를 용케 알아본 건지 이제노는 내가 쪽지에 적었던 장소와 시간에 맞춰 내 눈 앞에 나타났다. 안녕. 자기가 했던 말들이 거짓으로 들통났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는 얼굴로, 손을 두어번 흔들어 인사를 건네온다. 왜 불렀어? 꺼내려고 준비했던 말들은 산더미인데 입 밖으로 꺼내지는 말 한마디가 없었다.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할까. 왜 거짓말 했냐라고 돌직구를 던지는게 나을까, 아니면 있잖아, 라고 떠듬떠듬 대화를 시작해야할까. 내가 널 얼마나 믿었는데, 이런 말은 삼류 드라마에나 나올 것 같은 대사고. 에라 모르겠다 눈 질끈 감고 벙긋대던 입 밖으로 목소리를 내었다. 야. 일단 이제노를 불렀다. 어. 왜? 무슨 용건인지를 묻는 간단한 물음이 우리 사이에서 소용돌이쳤다. 너 거짓말 했더라, 제노야. 말문 트는 게 어렵지 용건 말하는건 쉬웠다. 녀석의 슬리데린 뱃지를 쳐다보다 이제노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딱 그 얼굴이다. 들킬거라고 상상도 못한 얼굴.
“여주야.”
“마크 한국 이름 어떻게 알았어?”
“기숙사에서…”
“그거에 대해서 묻는거야. 어디에도 없는 이름을 네가 어떻게 아냐고.”
분명 차분하게 말하려고 다짐했었는데 질책하는 어조만 툭툭 튀어나왔다. 저번처럼. 그러나 이제노는 저번처럼 다른 말로 틀어막지도 않고 답도 없이 내 눈길만 피했다. 내 질문도 피했단 말이 맞겠다. 야, 이제노. 그 행동은 화를 돋구었다. 화 잔뜩 난 목소리에도 이제노의 굳게 닫힌 입은 열릴 기미도 안보였다. 얘 진짜 아무 말 안하기로 작정했나봐. 덕분에 일분 일초 시간도 흘러가고 내 혈압도 자연스레 올라갔다. 얘 진짜 뭐있나 싶었다. 호숫가에서 엿들었으면 엿들었다고 말을 하던지, 하다못해 투명망토 쓰고 옆에 앉아있었단 말이라도 하던가. 되도않는 변명이라도 해야 대화가 이어지는데 녀석은 입 뻥긋 하나 안했다. 너가 분명히 기숙사에서 봤다고 했잖아. 그런데 제노야. 마크는 그걸 적어놓은 적이 없대. 독촉하는 어조 대신 달래는 어조로 문장을 하나하나 뱉었다. 아무 말이라도 해, 제발. 너 내 친구잖아.
“미안.”
사과 한 마디가 퍽 짧았고 그걸로 끝이었다. 달라붙는 변명이라던지 상황 설명이라던지 그딴건 하나도 없는 너무나 깔끔한 사과였다. 말 못 한다는 소리인 것임이 분명한 사과기도 했다. 그게 끝이야?
“어.”
기가 차 뱉은 질문에 이제노는 수긍하며 지팡이를 꺼내들었다. 야, 너 지금 뭐하는거야? 물을 새도 없이 이제노가 내게로 지팡이를 들이밀었다. 미안해. 난 이 모든 상황이 황당하기만 해서 지팡이를 꺼낼 수도 뭘 할 수도 없었다. 이제노의 입술이 다시 달싹이려는 참이었다. 중간에서 튀어나온 손이 나에게 겨눠졌던 지팡이를 치웠다. 얼떨떨한 느낌밖에 들지 않는 이 상황에 고개를 어찌저찌 돌리자 언제 온 건지 딱딱하게 굳은 이동혁의 얼굴이 콱 박혀온다. 구할 때는 언제고. 이거 완전 웃긴 새끼네? 하여간 슬리데린 새끼들은…. 이동혁이 서슴없이 내뱉는 육두문자 포함한 말로 봐선 어지간히 빡친 모양이었다. 이제노의 지팡이를 가로챈 이동혁이 그걸 어깨 너머로 휙 던졌다. 굴곡진 지팡이 굴러가는 소리가 정적밖에 남지 않은 복도를 크게 울렸다. 예상치도 못한 일들의 연속이라 어안이 다 벙벙했다. 이게 다 무슨…. 이동혁이 내게로 시선을 주었다. 괜찮냐?
“어. 조금 어이없는거 빼고.”
“너 밥 먹으러 가.”
“…너는.”
“신경 쓰지 말고. 빨리 가.”
갑자기? 나 아직 할 말 남았는데…. 이제노 곁눈질하며 말을 이으려했지만 이동혁이 고개를 젓는다. 나중에 해도 안늦어. 이동혁이 내 등을 연회장 쪽으로 떠밀었다. 도대체 뭔 얘기를 할려고.
“뭔 얘기하게.”
“알 거 없어. 빨리 가라.”
아, 알겠다고. 밀지 마. 볼멘소리하며 밀려났다. 이동혁 뒤로 슬쩍 보이는 이제노 얼굴 흘기고 돌아섰다. 엿듣지도 못하게 이동혁은 내가 연회장으로 향하는 것까지 확인한 뒤에야 이제노를 향해 몸을 틀었다. 장면이 덧대어질수록 머리만 아픈 느낌에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연회장으로 향했다. 속으로는 이제노와는 다시는 말 안섞겠다며 다짐했다. 나는 그에게 변명이라도 할 기회를 줬고 이제노는 그걸 회피했다. 나름 제일 친한 친구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친구는 도리어 나에게 지팡이를 겨눴다. 그 입으로 뱉을 주문이 뭐였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은 명명백백한 사실이었다. 이제노가 나에게 지팡이를 겨눴다. 그건 변치 않는, 이미 일어난 사건이었다. 이제노는 좋아한다고, 주문까지 외워 지킨 나에게 상황 설명 대신 지팡이를 나에게 겨누었다. 지팡이까지 겨눠가면서 지키고자 한 이제노의 비밀이 도대체 뭐길래. 며칠간 하지도 않던 육두문자가 절로 짓이겨졌다.
*
여주가 연회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본 동혁은 다시금 고개를 돌려 제노를 마주 보았다. 야. 화 꾹꾹 짓이기며 동혁은 제노를 불렀다. 적당히 해. 너 벌써 이 짓도 두번째야. 제노는 두 눈을 꾹 감았다 뜬다. 좋아하는거 다 알고, 그 사실 숨기고 싶은것도 알겠는데. 적당히 하라고. 흐름대로 흘러가게 내버려 둬. 그런다고 숨겨질 문제냐 이게. 제노는 머릿속을 헤집을 것처럼 머리칼을 헤집는다. 여주에게 편지를 주기도 전에, 마크 리를 죽이기도 전에 시작부터 어긋난 것같은 느낌이었다. 동혁은 그런 제노를 빤히 쳐다보다 아씨오 지팡이라고 중얼거린다. 제노의 사시나무 지팡이가 동혁의 손에 잡혀왔다. 제노의 망토 주머니에 지팡이를 넣어준 동혁이 조용히 중얼거린다.
“그게 정해진 숙명이야. 김여주 기억 그만 지워.”
“거짓말 하는 너나, 걔 기억 지우려고 안달 복달인 나나.”
“…….”
“매한가지 아닌가.”
동혁은 아무 대꾸도 않았다. 그저 뒤를 돌아 연회장으로 향했을 뿐이다. 결국 제노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다. 덩그러니 남겨진 제노는 빨려들어가듯이 그 기억 속으로 침잠했다. 마치 펜시브 속에 머리를 집어넣은 것처럼 생생한 그 날의 풍경들이 제 눈 앞에 깔려있었다. 어리고 어렸던 자신이 눈에 익은 길을 제 앞에서 걸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 뒤를 현재의 자신이 따랐다. 눈에 익은 길 끝에는 제 신발으로 수없이 많이 디뎠던 여주의 집이 놓여있었다. 여주의 방에서 내려다보이는 뒤뜰로 곧장 향한 제노는, 준비했던 푸른 꽃잎들을 손바닥에 한아름 쥐고선 온 힘을 모아 날렸다. 빙글빙글 돌아가며 솟구치던 꽃잎 무리가 창문 앞에서 멈췄다. 얼마 지나지 않아 뒤뜰로 통하는 작은 문이 발칵 열리고 눈물 범벅된 얼굴이 뛰쳐나온다.
“오빠가, 우리 오빠가…”
죽었다는 걸 알고 있어. 범인은 나의 아버지라는 것도 알고있어. 오래토록 계획해서 벌어진 살인이란것도 알고 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김여주는 덤스트랭 간다고 그 전날 모진 말 했던 저에게 울며 달려온다. 저와 마찬가지로 조그마한, 그러나 저보다 훨씬 작은 몸을 안아 달래주었다. 너는 알고 있을까. 이렇게 우는 널 달래주는 것이 마지막이란 걸 알고 있을까. 문득 제 품에 안긴 몸 따라 저도 목놓아 울고 싶어졌다. 우리 둘을 둘러싼 비참하기 짝이 없는 상황들과 뒤이어 제가 행할 파렴치한 짓 때문에 그저 울고 싶었다. 연신 들썩이는 등을 쓸어주다 어깨를 잡고 품에서 떨어트렸다. 그리고, 숨겨두었던 제 지팡이를 꺼내들었다. 여주야. 나봐봐. 눈물로 얼룩진 어린 여주의 얼굴을, 그 앞에 서있는 어렸던 자신의 얼굴을 제노는 관망한다. 그리고 제가 했던 거짓말을 되새긴다.
“덜 슬프게 해줄게.”
“……어떻게?”
“오블리비아테obliviate.” (: 기억을 수정하거나 지우는 마법)
꿈꾸는 것처럼 몽롱해지는 그 얼굴을 들여다보다 제노는 떼어지지않는 발걸음을 옮긴다. 남은 자리엔 기억을 뺏기고 기억이 바뀐 김여주만 남았다. 앞으로 못 볼 몇 년 동안 김여주는 제가 손댄 기억들을 품고 살아갈테다. 그녀의 오빠는 죽지 않았다고, 그저 먼 여행을 떠났을 뿐이라고. 그리고, 너에게 모진 말을 하며 매몰차게 대했던 이제노는 오늘 여기 오지 않았다고. 그래, 그 날 나는 너의 기억을 수정하고 지웠다. 이유는 간단했다. 덜 상처받았음 해서, 날 원망하지 않았음 해서. 그래서, 그래서 그랬다. 그리고 이제노는 자신의 아버지를 오러 사무국에 신고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김여주가 한평생 제 얼굴 안보고 살 것 같아서. 오러 사무국 전화번호 누르고 할 말 고르고 골랐었다. 「오러 사무국입니다.」 차가운 여자의 음성이 수화기 너머로 응답하고, 자신은
“어제 살인 사건….그거, 우리 아빠가 그랬어요. 내가 들었어요.”
제 아비를 사지로 몰아넣었다. 그게 자신의 최선이었다. 최선의 선택이라 여겼는데 어린 아이의 판단은 미숙하기 짝이 없어 후에는 최악의 선택이 되었다. 어리고 어린 이제노는 멍청했다. 멍청해서 그랬다. 그 기억 속에 서있다 빠져나온 이제노가 도출한 결론이었다. 그 결론에, 어렸던 이제노처럼 현실의 이제노도 문득 울고 싶어졌다. 잘못 답한 문제만 산더미라.
*
여주가 연회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본 동혁은 다시금 고개를 돌려 제노를 마주 보았다. 야. 화 꾹꾹 짓이기며 동혁은 제노를 불렀다. 적당히 해. 너 벌써 이 짓도 두번째야. 제노는 두 눈을 꾹 감았다 뜬다. 좋아하는거 다 알고, 그 사실 숨기고 싶은것도 알겠는데. 적당히 하라고. 흐름대로 흘러가게 내버려 둬. 그런다고 숨겨질 문제냐 이게. 제노는 머릿속을 헤집을 것처럼 머리칼을 헤집는다. 여주에게 편지를 주기도 전에, 마크 리를 죽이기도 전에 시작부터 어긋난 것같은 느낌이었다. 동혁은 그런 제노를 빤히 쳐다보다 아씨오 지팡이라고 중얼거린다. 제노의 사시나무 지팡이가 동혁의 손에 잡혀왔다. 제노의 망토 주머니에 지팡이를 넣어준 동혁이 조용히 중얼거린다.
“그게 정해진 숙명이야. 김여주 기억 그만 지워.”
“거짓말 하는 너나, 걔 기억 지우려고 안달 복달인 나나.”
“…….”
“매한가지 아닌가.”
동혁은 아무 대꾸도 않았다. 그저 뒤를 돌아 연회장으로 향했을 뿐이다. 결국 제노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다. 덩그러니 남겨진 제노는 빨려들어가듯이 그 기억 속으로 침잠했다. 마치 펜시브 속에 머리를 집어넣은 것처럼 생생한 그 날의 풍경들이 제 눈 앞에 깔려있었다. 어리고 어렸던 자신이 눈에 익은 길을 제 앞에서 걸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 뒤를 현재의 자신이 따랐다. 눈에 익은 길 끝에는 제 신발으로 수없이 많이 디뎠던 여주의 집이 놓여있었다. 여주의 방에서 내려다보이는 뒤뜰로 곧장 향한 제노는, 준비했던 푸른 꽃잎들을 손바닥에 한아름 쥐고선 온 힘을 모아 날렸다. 빙글빙글 돌아가며 솟구치던 꽃잎 무리가 창문 앞에서 멈췄다. 얼마 지나지 않아 뒤뜰로 통하는 작은 문이 발칵 열리고 눈물 범벅된 얼굴이 뛰쳐나온다.
“오빠가, 우리 오빠가…”
죽었다는 걸 알고 있어. 범인은 나의 아버지라는 것도 알고있어. 오래토록 계획해서 벌어진 살인이란것도 알고 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김여주는 덤스트랭 간다고 그 전날 모진 말 했던 저에게 울며 달려온다. 저와 마찬가지로 조그마한, 그러나 저보다 훨씬 작은 몸을 안아 달래주었다. 너는 알고 있을까. 이렇게 우는 널 달래주는 것이 마지막이란 걸 알고 있을까. 문득 제 품에 안긴 몸 따라 저도 목놓아 울고 싶어졌다. 우리 둘을 둘러싼 비참하기 짝이 없는 상황들과 뒤이어 제가 행할 파렴치한 짓 때문에 그저 울고 싶었다. 연신 들썩이는 등을 쓸어주다 어깨를 잡고 품에서 떨어트렸다. 그리고, 숨겨두었던 제 지팡이를 꺼내들었다. 여주야. 나봐봐. 눈물로 얼룩진 어린 여주의 얼굴을, 그 앞에 서있는 어렸던 자신의 얼굴을 제노는 관망한다. 그리고 제가 했던 거짓말을 되새긴다.
“덜 슬프게 해줄게.”
“……어떻게?”
“오블리비아테obliviate.” (: 기억을 수정하거나 지우는 마법)
꿈꾸는 것처럼 몽롱해지는 그 얼굴을 들여다보다 제노는 떼어지지않는 발걸음을 옮긴다. 남은 자리엔 기억을 뺏기고 기억이 바뀐 김여주만 남았다. 앞으로 못 볼 몇 년 동안 김여주는 제가 손댄 기억들을 품고 살아갈테다. 그녀의 오빠는 죽지 않았다고, 그저 먼 여행을 떠났을 뿐이라고. 그리고, 너에게 모진 말을 하며 매몰차게 대했던 이제노는 오늘 여기 오지 않았다고. 그래, 그 날 나는 너의 기억을 수정하고 지웠다. 이유는 간단했다. 덜 상처받았음 해서, 날 원망하지 않았음 해서. 그래서, 그래서 그랬다. 그리고 이제노는 자신의 아버지를 오러 사무국에 신고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김여주가 한평생 제 얼굴 안보고 살 것 같아서. 오러 사무국 전화번호 누르고 할 말 고르고 골랐었다. 「오러 사무국입니다.」 차가운 여자의 음성이 수화기 너머로 응답하고, 자신은
“어제 살인 사건….그거, 우리 아빠가 그랬어요. 내가 들었어요.”
제 아비를 사지로 몰아넣었다. 그게 자신의 최선이었다. 최선의 선택이라 여겼는데 어린 아이의 판단은 미숙하기 짝이 없어 후에는 최악의 선택이 되었다. 어리고 어린 이제노는 멍청했다. 멍청해서 그랬다. 그 기억 속에 서있다 빠져나온 이제노가 도출한 결론이었다. 그 결론에, 어렸던 이제노처럼 현실의 이제노도 문득 울고 싶어졌다. 잘못 답한 문제만 산더미라.
*
여주가 연회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본 동혁은 다시금 고개를 돌려 제노를 마주 보았다. 야. 화 꾹꾹 짓이기며 동혁은 제노를 불렀다. 적당히 해. 너 벌써 이 짓도 두번째야. 제노는 두 눈을 꾹 감았다 뜬다. 좋아하는거 다 알고, 그 사실 숨기고 싶은것도 알겠는데. 적당히 하라고. 흐름대로 흘러가게 내버려 둬. 그런다고 숨겨질 문제냐 이게. 제노는 머릿속을 헤집을 것처럼 머리칼을 헤집는다. 여주에게 편지를 주기도 전에, 마크 리를 죽이기도 전에 시작부터 어긋난 것같은 느낌이었다. 동혁은 그런 제노를 빤히 쳐다보다 아씨오 지팡이라고 중얼거린다. 제노의 사시나무 지팡이가 동혁의 손에 잡혀왔다. 제노의 망토 주머니에 지팡이를 넣어준 동혁이 조용히 중얼거린다.
“그게 정해진 숙명이야. 김여주 기억 그만 지워.”
“거짓말 하는 너나, 걔 기억 지우려고 안달 복달인 나나.”
“…….”
“매한가지 아닌가.”
동혁은 아무 대꾸도 않았다. 그저 뒤를 돌아 연회장으로 향했을 뿐이다. 결국 제노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다. 덩그러니 남겨진 제노는 빨려들어가듯이 그 기억 속으로 침잠했다. 마치 펜시브 속에 머리를 집어넣은 것처럼 생생한 그 날의 풍경들이 제 눈 앞에 깔려있었다. 어리고 어렸던 자신이 눈에 익은 길을 제 앞에서 걸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 뒤를 현재의 자신이 따랐다. 눈에 익은 길 끝에는 제 신발으로 수없이 많이 디뎠던 여주의 집이 놓여있었다. 여주의 방에서 내려다보이는 뒤뜰로 곧장 향한 제노는, 준비했던 푸른 꽃잎들을 손바닥에 한아름 쥐고선 온 힘을 모아 날렸다. 빙글빙글 돌아가며 솟구치던 꽃잎 무리가 창문 앞에서 멈췄다. 얼마 지나지 않아 뒤뜰로 통하는 작은 문이 발칵 열리고 눈물 범벅된 얼굴이 뛰쳐나온다.
“오빠가, 우리 오빠가…”
죽었다는 걸 알고 있어. 범인은 나의 아버지라는 것도 알고있어. 오래토록 계획해서 벌어진 살인이란것도 알고 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김여주는 덤스트랭 간다고 그 전날 모진 말 했던 저에게 울며 달려온다. 저와 마찬가지로 조그마한, 그러나 저보다 훨씬 작은 몸을 안아 달래주었다. 너는 알고 있을까. 이렇게 우는 널 달래주는 것이 마지막이란 걸 알고 있을까. 문득 제 품에 안긴 몸 따라 저도 목놓아 울고 싶어졌다. 우리 둘을 둘러싼 비참하기 짝이 없는 상황들과 뒤이어 제가 행할 파렴치한 짓 때문에 그저 울고 싶었다. 연신 들썩이는 등을 쓸어주다 어깨를 잡고 품에서 떨어트렸다. 그리고, 숨겨두었던 제 지팡이를 꺼내들었다. 여주야. 나봐봐. 눈물로 얼룩진 어린 여주의 얼굴을, 그 앞에 서있는 어렸던 자신의 얼굴을 제노는 관망한다. 그리고 제가 했던 거짓말을 되새긴다.
“덜 슬프게 해줄게.”
“……어떻게?”
“오블리비아테obliviate.” (: 기억을 수정하거나 지우는 마법)
꿈꾸는 것처럼 몽롱해지는 그 얼굴을 들여다보다 제노는 떼어지지않는 발걸음을 옮긴다. 남은 자리엔 기억을 뺏기고 기억이 바뀐 김여주만 남았다. 앞으로 못 볼 몇 년 동안 김여주는 제가 손댄 기억들을 품고 살아갈테다. 그녀의 오빠는 죽지 않았다고, 그저 먼 여행을 떠났을 뿐이라고. 그리고, 너에게 모진 말을 하며 매몰차게 대했던 이제노는 오늘 여기 오지 않았다고. 그래, 그 날 나는 너의 기억을 수정하고 지웠다. 이유는 간단했다. 덜 상처받았음 해서, 날 원망하지 않았음 해서. 그래서, 그래서 그랬다. 그리고 이제노는 자신의 아버지를 오러 사무국에 신고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김여주가 한평생 제 얼굴 안보고 살 것 같아서. 오러 사무국 전화번호 누르고 할 말 고르고 골랐었다. 「오러 사무국입니다.」 차가운 여자의 음성이 수화기 너머로 응답하고, 자신은
“어제 살인 사건….그거, 우리 아빠가 그랬어요. 내가 들었어요.”
제 아비를 사지로 몰아넣었다. 그게 자신의 최선이었다. 최선의 선택이라 여겼는데 어린 아이의 판단은 미숙하기 짝이 없어 후에는 최악의 선택이 되었다. 어리고 어린 이제노는 멍청했다. 멍청해서 그랬다. 그 기억 속에 서있다 빠져나온 이제노가 도출한 결론이었다. 그 결론에, 어렸던 이제노처럼 현실의 이제노도 문득 울고 싶어졌다. 잘못 답한 문제만 산더미라.
비디오 태그를 지원하지 않는 브라우저입니다
*
목구멍으로 음식이 어떻게 넘어가는지도 모르겠어서 절반 넘게 남겼다. 음식이랄 것도 없었다. 그냥 앞에 놓여져있던 딸기 몇 개 집어먹었을 뿐이다. 새하얗게 질린 내 얼굴을 빤히 보던 이민형은 어디 아프냐며 내 손을 매만졌고, 난 뭐라 말해야 할지 그렇담 어디서 시작해야할지 모르겠어서 건드리지도 않은 쿠키는 포크로 부숴 이리저리 흩어놓았다. “Sweetie, stop. 말해줘, 무슨 일인지.” 걱정 가득 담은 눈길 표정 모두 머릿속에 들어찬 혼란을 가중시키는 것 같아 포크 쥐고 있던 내 손을 덮은 이민형의 손만 만지작댔다.
“Honey. 마크야. 민형아.”
“Why, sweetie. 왜 여주야.”
그의 손을 끌고 연회장을 벗어났다. 빈 교실로 들어와 벽에 붙어있는 책상 위에 걸터앉아 그저 이민형의 어깨죽지에 얼굴 푹 파묻었다. 그리고 웅얼거렸다. 일련의 상황들을. 이제노가 네 이름을 알아. Mark Lee, 이 이름 말고, 이민형이란 이름. 그리고, 걔가 나한테 지팡이를 겨눴어. 나한테. 이동혁도 뭘 알고 있는거 같아. 나만 잊어버린 느낌이야.
“Sweetie.”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 그 불안감에 입술을 물어뜯었다. 피 나. Don't do that. 그렇게 말한 이민형을 쳐다보다 그의 얼굴을 가깝게 끌어당겼다. 불안해. 그냥 다. 입술을 맞붙힌 상태로 웅얼대자 이민형은 그대로 내 아랫입술을 물어온다. 저번과는 다르게 내가 어딘가에 걸터앉은 채로. 그의 목에 팔을 두르자 익숙한 일인만큼 그의 손이 내 등허리에 올라왔다. 조심스레 입술을 겹쳐오던 그는 이윽고 더 깊게 입을 맞췄다. 그 움직임에 뒤로 밀려 벽에 닿을라 치면 이민형이 나를 더 세게 안아왔다. 불안감을 상쇄시키려는 것처럼 깊고 진하게. 교복 셔츠 위로 느껴지는 검지가 읽을 수 없는 글자들을 그린다.
It'll be alright.
입맞춤 끝에 이민형이 아랫입술에 입맞추며 흘린 문장과 같을 것이다.
/
오랜만이에요 :D
적어놓은 글이 싹 다 날아가서...겨우겨우 멘탈 부여잡고..쓴 2부의 첫시작입니다..
구상 글도 싹다 날아가고...슬퍼죽겠네요.....잘들 지내셨나요?
갈수록 줄어드는 댓글 보고 접을까, 하다가 그래도 뱉었던 말 지킬까싶어 들고왔습니다.
5월에도 이렇게 건강 조심하라는 말을 하게 되네요. 몸 조심하세요 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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