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살의 웨딩
부제 : 이별
"......"
오세훈은 그대로 마시던 버블티를 뱉었다. 그리곤 내게 손을 내밀었다.
"면봉 있냐?"
"... 어?"
"내가 지금 뭘 잘못 들은 거 같은데. 아, 존나... 귀를 자주 안 파서 그런가."
"세훈아."
"면봉 없어?"
미친... 나는 파우치를 뒤져서 면봉 한 개를 건넸다. 오세훈은 미간을 찌푸리고는.
"두 개 줘."
나는 하나를 더 건넸다. 오세훈은 진지한 표정으로 귀를 파기 시작했다. 면봉 한 개에 귀 한 쪽 씩. 두 개를 다 판 오세훈이 다시 나를 바라봤다.
"아까 뭐라고 했었지?"
"... 나 결혼해."
"귀를 덜 팠나."
새끼 손가락으로 지 귀를 후비는 세훈이가 안쓰럽고, 미안해져서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나!!! 결혼한다고!!! 너 말고 다른 새끼랑!!!"
"......"
"야... 이해했어?"
오세훈은 한쪽 입꼬리를 올려 나를 비웃었다. 아, 이 새끼... 이거 상황 파악 못 하네.
"누가 너랑 결혼을 해준대?"
"있어. 정략결혼이라고."
"얼씨구. 지랄이 존나 풍년이다?"
"진짜라고."
"믿을 걸 믿으라고 해라."
"야, 미친놈아... 현실 부정 하지마. 니 여친 진짜 결혼해. 딴놈이랑."
"니가 현실 부정 하고 있는 거겠지. 대학 갈 생각하니까 막 세상이 막막해?"
"지랄."
"얘가 허언증이 있었나..."
"지랄... 야, 우리 엄마한테 전화해볼래? 진짜거든?"
"그래, 그래. 나중에 해볼게."
"진짜라니까?"
"그래, 결혼해라, 결혼해. 어디서 말도 안 되는 구라를 치냐."
나는 답답함에 머리채를 쥐어 뜯을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오세훈 머리채를.
오세훈은 정말로, 내 복장이 터지게도, 결혼을 믿지 않았다. 내가 추워서 미친 모양이라고 판단했다. 답답함이 고구마 백 개쯤 쳐먹은 것처럼 쌓였다. 오세훈한테 미안했던 감정들이 싹 사라질 것 같았다. 내 말은 쥐뿔도 듣지 않는다. 엄마에게, '세훈이한테 나 결혼한다고 말 좀 해달라' 고 했다. 엄마는 오세훈에게 전화를 했다. 오세훈은 '어머니 오랜만' 이라며 반겼다. 결혼 얘기를 꺼내자, '또 그 얘기냐' 며 질색을 하고는... '어머니 장난 그만 치시라' 며, '다음에 찾아 뵙겠다' 며, 끊었다. 엄마는 그 날 나의 고구마 백 개 쳐먹은 답답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오세훈, 이 새끼... 이렇게 답답한 놈이 아닌데."
"세훈이가 말귀를 잘 못 알아듣네."
"아, 어떡하지..."
"뭘 어떡해. 헤어져야지."
"아, 엄마!!!"
"왜 소리를 질러. 너 곧 결혼해. 결혼한다는 애가 다른 남자랑 사귀는 게 옳아? 어?"
나는 이를 앙다물었다. 할아버지랑 얼른 쇼부를 쳐야지. 근데 그게 되냐고. 할아버지는 결혼 얘기만 나오면 진저리를 치면서 날 방 밖으로 내쫓는데. 평소에는 무지막지하게 다정다감해도, 결혼하기 싫다는 얘기만 나오면...
"그나저나 사윗감 될 사람이 참 잘생겼더라. 사진 볼래?"
"됐어. 보나마나 늙다리겠지."
"스물 일곱한테 늙다리가 뭐야. 너 지금 엄마 놀리니?"
"엄마는 내가 거의 열 살 많은 남자한테 팔려 가게 생겼는데 농담이 나와?"
"팔려 가긴. 그 집이 좀 많이 잘 사는 집안이긴 해도, 엄마 아빠는 너 팔 생각 없어. 할아버지가 그렇게 고집을 부리는데 어떡하니. 그렇다고 니 오빠 백현이를 팔 수는 없잖아."
"차라리 그 새끼를 파는 게..."
"너 내가 백현이 낳았을 때 할아버지한테 얼마나 욕을 먹은 줄 알아? 결혼 못 시키는 사내새끼 낳았다고. 어휴, 다른 집 시부모님들은 아들 낳으면 그렇게 잘 해줄 수가 없다는데. 내가 너 낳고 아버님 다시 봤어. 2년 동안 얼굴 한 번 못 봤다구. 너,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엄마 아빠한테 성질 부릴 생각은 말아. 따지고 보면 우리도 귀한 딸내미 생판 모르는 사람한테 시집 보내는 거야."
나는 엄마가 분통이 터지든지 말든지 거실에 배를 깔고 누웠다. 무료하다. 짜증난다. 거의 증조 할아버지 때부터 이어져 온 정략 결혼이다. 증조 할아버지와 사돈 될 사람의 증조 할아버지는 독립 투사였다고 한다. 두 분 모두 독립 운동을 하다 돌아가셨는데, 거의 형제와도 같은 사이 였다고 한다. 그래서 아들, 딸을 낳아서 결혼을 시키자고 약속을 했다나 뭐라나. 그러나 증조 할아버지는 사내 아이를 낳았고, 사돈 될 사람의 증조 할아버지도 사내 아이를 낳았다. 양 가의 다섯 형제가 모두 남자 아이, 즉 열 명이 남자 였다. 웃기게도, 그 열명이 전부 한두 명 이상의 아이를 낳았는데, 그게 또 모두 남자였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 아빠가 드디어 나를 낳았고. 증조 할아버지는 나를 낳았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직전, 할아버지에게 반드시 나를 상대의 증손자와 결혼시키라고 신신당부를 하셨단다. 상대방은 삼 형제였는데, 한 명은 서른 하나, 한 명은 스물 일곱, 한 명은 열 다섯 이었다.
"서른 하나가 아니라 다행인가."
"얘, 그 장남 될 사람도 엄청 잘생겼더라."
엄마의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결론적으로 대를 몇 번이나 이어져 내려온 이 정략 결혼은 나를 엿 먹이고 있다는 거다. 왜 하필 나야. 이 와중에 신기하게도 사촌들은 모두 남자다. 결국에 선택지는 나 밖에 없다는 거다. 오빠 새끼를 여장 시켜서 나 대신 결혼하라고 할까. 점점 골 때리는 상상까지 하게 됐다. 드디어 내가 미쳤나보네.
"이번 주 토요일에 상견례 해."
"뭐?"
"그 쪽에서 식장이며, 비용이며 일체 책임진다고, 너 몸만 오면 된다더라."
"... 진짜 팔려가는 기분 난다. 와, 신나고 좋네."
"행여나 해서 하는 말인데 이혼할 생각은 말어. 이혼녀 꼬리표 달고 오면 그때는 할아버지가 아니라 나랑 니 아빠한테 죽을 줄 알아."
"뉘예뉘예."
굼벵이처럼 기어서 내 방까지 기어가다가 기어코 엄마가 내 등을 지긋이 밟고 지나갔다. '꼴불견 짓 좀 그만해! 곧 결혼하는 지지배가.' 나는 억울함에 바퀴벌레처럼 빠르게 샤샤삭 방으로 들어갔다. 토요일이면 내일이다. 어? 내일이다. 생각해보니 내일이야. 아, 좆됐다. 오세훈은 내 톡도 다 안읽씹 중이고, 전화도 안 받는다. 또 롤이나 쳐하고 있겠지.
[나] 뭐함?
[까리뽕삼 정수정] 그러게
[나] ?
[까리뽕삼 정수정] 내가 뭐했으면 좋겠니
[나] 그걸 왜 나한테 물엌ㅋㅋㅋㅋㅋㅋ
[까리뽕삼 정수정] 할 게 없다; 심심해
[나] 야 정쑤 나 할말잇음
[까리뽕삼 정수정] 뭔데
[나] 나
[나] 내일
[나] 상견례함
[까리뽕삼 정수정] ?
[나] ??
[까리뽕삼 정수정] ???
[나] ............ㅋ
[까리뽕삼 정수정] 내가 아는 상견례가 그 상견례가 맞냐
[나] 아마
[까리뽕삼 정수정] 임신함?
[나] ㅁㅊ 아님
[까리뽕삼 정수정] 속도위반이 아니라면 보통 스무살에 결혼을 하진 않지
[나] 일반화 ㄴㄴ해
[까리뽕삼 정수정] 니네 사귄지 백일은 됐냨ㅋㅋㅋㅋㅋㅋ 뭔 결혼ㅋㅋㅋㅋ
[나] 사실 더 충격적인게 잇ㅅ음
[까리뽕삼 정수정] ???? 결혼보다 더?
[나] 신랑이
[나] 오세훈이
[나] 아님
[까리뽕삼 정수정] ? 니 바람핌?
[나] ㄴㄴ
[나] 정략결혼임
[까리뽕삼 정수정] ㅁㅊㅋㅋㅋㅋ 지랄하냐
[나] 진짜임
[까리뽕삼 정수정] ㅁㅊ 발닦고 잠이나 자라
[나] 진짜라고ㅡㅡ
[까리뽕삼 정수정] 미친년아ㅋㅋㅋㅋ 어디서 인소 읽고 와가지고;;
[나] 진짜라고ㅡㅡ 왜 안 믿는데ㅡㅡ
[까리뽕삼 정수정] ㅈㄹ ㄲㅈ 나 잔다 ㅃㅇ
정수정한테 까이고, 나는 침대에 누워 내 인맥의 비루함에 대해 한탄했다. 하긴. 나같아도 친구년이 정략결혼한다고 톡 오면 지랄하냐고 뭐라고 하겠지. 어떡하지. 어떡하냐. 어떡할래? 스스로에게 물어봤자 답은 안 나왔다. 내가 뭘 어떻게 하든 결혼은 진행된다. 내가 동의를 안 해도, 나는 신부가 된다. 내가 식장에 미친년처럼 뛰어나가면 혹시 몰라. 아마 할아버지랑 연을 끊고, 엄마 아빠한테 뒤지게 맞고, 집을 나와야 하겠지. 그러니까 이건 드라마처럼 달달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거다. 나는 신데렐라가 될 마음은 존나 1도 없다. 그냥 평범하게 연애하고, 평범하게 대학 다니면서 살고 싶다고. 내가 평소에 드라마를 많이 본다고 해서! 이런 일이 내게 벌어진다는 건 정말 있을 수가 없다. 그리고 말이야, 엄마는 말이야, 좀 일찍 말해주든가. 왜 하필 지금 말해서 사람을 더 힘들게 하냐... 차라리 세훈이랑 사귀기 전에 이야기 해 주지. 엄마는 혹시 수능 보기 전에 말하면 내가 동요할까봐 말을 안 했다고 하는데, 그럼 수능 끝나자마자 말해주든가.
이제는 엄마 아빠 원망까지 하고 있었다. 나는 나쁜년인가봐...
꿈에서는 괴물에게 쫓겼다. 얼굴에는 '스물 일곱', 가슴에는 '정략 결혼' 이라고 적혀 있는 뿡뿡이가 나를 쫓아왔다. 나는 어렸을 적 뿡뿡이를 존나 좋아했는데, 이렇게 배신 당하다니. 하... 인생. 땀에 쩔은 채 벌떡 일어났다.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오늘 저녁 7시에 상견례가 있다고 했으니, 한 시간 전 쯤 준비를 하면 되나.
"아, 그 전에 세훈이부터."
화장실로 곧장 달려가 샤워부터 했다. 머리를 탈탈 말리면서 전화를 하자, 잠에 잔뜩 취한 오세훈 목소리가 들렸다.
"집 앞으로 나와. 할 말 있어."
- 아, 나 지그음... 지금 일어났는데에...
"삼십 분 안에 갈게."
- 야, 나 어엄청 졸려어...
평소에는 틱틱대는 말투여도, 졸리면 말끝이 늘어지는 게 존나 귀여웠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오세훈이 잘 때 전화를 하기도 했고. 헤어지자는 말을 하려는 판국에, 또 저게 존나 귀여워서 마음이 아팠다. 비련의 여주인공마냥 전화를 뚝 끊고 화장대 앞에 앉았다. 아마 돌아오는 길에 펑펑 울 테니 화장은 얇게 해야지. 원래도 화장을 잘 하지 않지만, 그래도 마지막인데 예뻐야지. 비장하게 에어 쿠션을 꾹꾹, 립밤을 발랐다. 내 화장은 이게 전부다. 이제부터 배워가야지. 그 생각을 하니 웃음이 나왔다. 오세훈이 하도 화장 안 한 얼굴을 좋아해서, 선크림 바르는 것도 뭐라고 했었는데.
"엄마, 나 나갔다 올게."
"어디?"
"세훈이 만나러."
"......"
"헤어지러 가는 길이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말아주시죠."
"힘 내, 딸."
"노력은 해 볼게."
우울해지지 말자!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문을 나섰다. 날씨가 우중충했다. 내 마음도. 아, 흔들리지 말자. 오세훈이 잘생겼어도, 오늘도 여김없이 나는 두근거려도, 흔들리지 말자. 그렇게 헤어지러 가는 버스에 올라 탔다. 나는 당장이라도 뛰어 내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눈 좀 떠봐."
"진짜... 나 너무 졸려어... 좀 봐주라."
"어제 몇 시에 잤어?"
"네 시이..."
오세훈은 그대로 나한테 기대왔다. 커다란 몸을 지탱하기가 힘들었지만, 손을 들어서 등을 토닥토닥 쓰담았다. 넓은 등. 오세훈의 넓은 등은 늘 사람을 설레게 하는 그런 게 있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세훈이를 떼어냈다.
"나 진짜 진지하게 할 말 있어."
"......"
그제야 오세훈은 덜 떴던 눈을 조금 크게 뜨고 나를 뚱하니 바라보았다. 졸려서 입술이 뾰로통하다.
"나 오늘 상견례 해."
"......"
"그 때 결혼한다고 했던 거, 진짜야. 나 진짜로 결혼해. 나도 몰랐어. 저번 주에 알았어."
"......"
"집안끼리 하는 정략 결혼이야.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이 결혼 안 하려면 나 집안이랑 연 끊어야 돼."
오세훈의 눈에 날이 서렸다. 내가 제일 무서워하는 표정.
"집안이랑 연 끊는 건 어렵고, 나랑 연 끊는 건 쉬워?"
"그런 말이 아니잖아."
"정말 말도 안 되는 말이길래, 진심으로 장난 치는 줄 알았어. 언제 또 어머님까지 가담하셨나, 엄청 웃었는데. 진짜라니까 더 웃음이 나네."
"......"
"......"
"결혼 못 깨. 미안해. 나는... 나는..."
말을 잇지 못한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당장이라도 무슨 짓을 벌일 것 같은 세훈이의 표정에, 나는 아무 것도 못 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래서 어쩌라고 나보고."
"세훈아."
"헤어지자고?"
"그런 말이 아니라..."
"그런 말이 아니야? 너 나랑 안 헤어질 거야?"
이렇게 차가운 모습은 싸울 때나 봤던 얼굴인데.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너 바람 피게?"
"......"
"내가 바람 피는 거 얼마나 혐오하는 지 몰라서 그래? 우리 엄마 바람 피워서 집 나간 거. 너 몰라서 그래?"
"세훈아..."
"가."
"......"
"너 가."
나는 그 말을 끝으로 집에 들어가 버리는 오세훈의 등을 바라보았다. 아까랑 같은 등인데, 이제는 설레기보다는 슬퍼 보였다. 아니. 내 마음이 그렇게 바뀐 거겠지. 그저께 까지만 해도 버블티를 입에 물고 서로를 해맑게 바라보던 연인 사이에서, 남보다도 못한 사이가 됐다.
"미안해."
끝내 전하지 못한 사과가 밖으로 나왔을 때는 사과의 당사자가 자리를 뜬 후였다.
* 재밌게 읽어주세요 8ㅅ8 세훈이가 가라고 했지만... 세후니 마음은 그게 아닌 걸... 8ㅅ8
* 제목 수정했습니다. 비슷한 제목이 글잡에 있어서요ㅠㅠ
모든 시리즈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최신 글
위/아래글
공지사항

인스티즈앱
기괴한 리뷰로 가득한 서울의 어느 치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