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발자국 더 내딛을까, 말까
이 한발자국만 더 내딛으면 자유로울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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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착하다, 우리 ㅇㅇ'
왜 박지민 너는 항상 이 한발자국을 내딛지 못하게 해서 죽지를 못하게 하는거야. 희미하게 들려오는 박지민의 목소리에, 결국 내딛으려던 발을 거두었다. 그리고는 난간에 걸터앉고는 발을 동동 굴러보고, 기지개도 한번 켜고, 선선하지만 나른하게 만드는 그런 바람에 하품도 한번 해주고, 그리고나서 밑을 바라보니 발밑으로 보이는 풍경은 무척이나 평화롭다.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정장을 차려입고 무리지어 지나가는 사람들도 있고, 서로 한시라도 떨어져있으면 안되는 사람들마냥 꼭 붙어서 지나가는 연인들도 있고. 일주일에 5일은 이곳에서 사람들의 일상을 보는것이 습관이 된 후로 느낀것은 나는 저 사람들 속에 섞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늘같은 하늘을 닮아 맑고 화사한 빛을 내는 그들사이에 내가 낀다면 불청객이라고 느낄것이다.
" ... 날씨 참 더럽게도 좋네 "
그래서 나는 비오는 날을 좋아했다. 아니, 맑은 날씨 빼곤 다 좋아했다고 해야 맞는 말일 것이다. 특히 비가 와서 먹구름이 잔뜩 껴져있는데 천둥번개가 치는 그런날을 제일 좋아했다. 그런날은 사람들이 밖에 잘 나오지 않고, 회색빛을 띄는 내가 그들사이에 껴도 티가나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최소한 그런날 만큼은 내 자신이 덜 비참해 보였다. 답지않게 햇빛이 쨍쨍 찌고 바람이 적당히 부는, 사랑하는 연인과 손 꼭잡고 소풍가기 좋은 그런날을 좋아했던 때도 있었다. 온갖 상처를 지닌채 살아왔으면서 구김살 하나없이 활짝웃는 그모습이 마치 햇살같았던 나의 애인이 자신을 닮은 그런날을 좋아했었으니까. 어쩌면 난 그것때문에 벌을 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회색빛을 띈 주제에 하얀색이 되기를 바랬다고.
정신없이 저 밑을 구경하고 있다가 예비종이 울렸다. 운동장 쪽과는 반대편으로 앉아있어서 학생들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여기까지 떠드는 소리가 들리는 걸 보면 아마도 많은 아이들이 수업듣기 싫다며 친구들과 불평불만을 늘어놓고, 떠들면서 반으로 향하고 있을것이다. 5교시 시작 5분전, 이시간이 하루동안의 학교생활중 가장 시끄러운 시간이기 때문에 나도 반으로 향해야 하는 이시간이 되면 수업을 쨀까, 이생각이 항상 든다. 갈등끝에 매번 자리에서 일어나 반으로 향하는 나이지만 오늘만큼은 정말로 5교시 수업을 안들을 생각으로 올라왔기 때문에 미동도 않고 계속해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학교에 딱히 내가 없어졌다고 해서 애타게 찾을 친한친구도 없을 뿐더러 교사 경력 20년인 게을러 터진 체육선생은 출석체크조차 하지 않는다.
딱히 주위 사람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는 편도 아니고, 오히려 관심조차 가지지 않지만 무엇을 하던 지루함뿐인 체육선생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행복도 익숙해질 수가 있구나.
체육선생이 어떤 과거가 있는지 상처가 있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게 보이는 그는 원하는 직업을 가졌고, 가정을 가졌고. 가장 평범하고 평화로운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그인데 항상 눈빛에는 지루함뿐이었다. 누구는 불행에 익숙해지지 못해 하루하루가 지옥같은데, 짧지만 가장 행복했던 그 기억을 붙잡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데. 그 기억마저 희미해져 가는 자신을 탓하며 그렇게 살아가는데.
" ... 그만하자 "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 이런 감정 가져서 뭐하냐, 그만 생각하자. 그러고 보니 수업종이 울리지 않는다. 한번 생각에 빠지면 깊게 빠지는 타입이라 시간이 많이 지났을 것인데, 아마도 울렸는데 내가 듣지 못했을 것이다 . 그 후로도 혼자 생각에 잠겨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머리만 아파 머리를 비울겸 발을 동동거리던 것을 멈추고 일어나 아까처럼 난간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오른편은 오직 물탱크와 보일러실이 있는 황량한 옥상, 왼편은 조금만 잘못 내딛으면 떨어질 낭떠러지. 꼭 삶과 죽음의 경계 같달까. 이렇게 난간을 걸을때면 수백번도 더 죽으려고 마음먹었던 나조차 조심하게 되고 생각또한 없어지고 오직 걷는것에만 집중하게 된다. 근데 오늘따라 왜이렇게 생각이 많은건지. 걸어도 생각이 없어지질 않았고, 아까전보다 세진 바람은 마치 나를 낭떠러지로 떠미는 것만 같았다. 아, 이러다가 발을 헛디디기라도 하면
죽겠지, 라는 생각을 하자마자 내 의도인지 아니면 실수인지 모르게 발을 헛디뎠고, 저 아래로 떨어질줄 알았던 나는 안타깝게도 누군가에 의해 붙잡혀 있었다. 그런데
" 야 "
목구멍이 턱, 하고 막힌듯 숨을 쉴 수가 없었고,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나를 보고있는 그 사람의 시선에도 나는 고개를 들어 그사람을 볼 수 없었고, 나를 놓으려던 그사람의 옷깃을 잡고는 놓을 수가 없었다. 수선화 향기, 나를 그렇게 만든것은 잔잔하게 나는 수선화 향기 때문이었다. 결코 흔하지 않은 그 향기는 이제껏 살면서 단 한사람에게서 맡아본 향기였고, 그렇기에 잊으려 해도 잊을 수가 없는 향기였다.
" 놔라 "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며 경고하는 그 목소리에도 옷깃을 놓을 수는 없었다.
진정해 김ㅇㅇ.
겨우 마음을 가라앉히고 내가 잡고있던 옷깃을 따라 시선을 조금씩 위로 올렸다. 입술, 코를 순서로 시선이 이동했고, 나를 보고있는 짜증이 담긴 눈에 내 시선이 머물렀다. 내가 기대했던 사람과 정 반대의 생김새에, 순간 가졌던 기대는 허탈한 감정으로 변해 밀려왔다. 뭘 기대했던건지, 이미 이세상 사람이 아닌 박지민일리가 없다는 걸 제일 잘 알면서 정말 뭘 기대했던건지. 정말이지 멍청하기 짝이없다. 앞에있는 이 남자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나혼자 희망고문을 당했다는 생각에 괜히 짜증이 나 눈가를 찌푸렸다. 그런 나에 기분이 나빠진건지, 옷깃을 잡고 있던 내 손을 더러운게 묻었다는 듯이 세게 쳐냈고, 내 손은 맥없이 옷깃을 놓고말았다.
![[방탄소년단/정국] 해피엔딩을 원하시나요 01 | 인스티즈](http://file2.instiz.net/data/cached_img/upload/2015062023/0a663531a88dee49a82191a79ed721a7.jpg)
" 뒤질거 살려줬더니 이딴 식으로 행동하네 "
" ...누가 살리래? "
어이없다는 듯이 하, 하고 허탈하게 웃는 눈앞의 남자는 분명히 낯설지만은 않은 얼굴이었고, 평소 남에게 관심이 없고 새학기라서 심지어 반아이들의 얼굴조차 잘 모르는 나는 그저 지나가다 한두번 봤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어차피 다시 마주칠 일도 없을것이고, 또 수선화 향이 나는 사람은 다시 마주치고 싶지도 않았다. 그 향기에 무척 잘어울렸던 그 애가 떠오르니까. 마음에 없어도 적어도 고맙다, 한마디 해줄 수는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저 남자는 잘못이 없고 오히려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얘기하면 대단하다며 칭찬받을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무시하고 일부로 더 삐딱하게 생각하였다. 날 그냥 떨어지게 내버려 두지 왜 붙잡아서 잠깐이지만 희망고문을 하게 만들었냐고.
" 내가 제일 싫어하는게 너같은 새끼들이야 "
" ...뭐? "
" 뒤지고 싶으면 아무도 없는곳에서, 혼자 조용히 죽어. 넌 뒤지면 끝이지, 근데 사람죽는 꼴 눈앞에서 봐야되는 저 밑에 인간들은 살아가야 된다고. 너같은 새끼들은 나 죽어요 하고 티내고 싶겠지, 역겹게도. 그래도 조용히 죽어. 이기적인 짓 하지말고 "
망치로 머리를 힘껏 내리친것 같은 느낌에 어지러웠다. 나에대해 아는 것 하나없는 사람이 나에대해서 뭘 안다고, 하는 마음이 들었다가도, 내 치부를 정확히 꼬집어 대꾸할 수가 없었다. 저 밑의 사람들의 평화가 나로인해 깨질수도 있다는걸 몰랐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마음 한구석에서 저들도 조금은 탁한 빛을 띄어도 되잖아, 하고 이기적이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이기적인 내 자신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 들킨것이 창피했고, 그런 마음을 품고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 씨발 자려고 왔더니, 별 개같은게 기분 더럽게 하네 "
그렇게 나에게 혼란을 준 그 남자는 욕을 내뱉고 나를 짜증난다는 듯 쳐다보고는 그대로 뒤를 돌아 문을 세게 닫으며 나간다. 나가는 뒷모습을 보면서도 고맙다는 생각은 결코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다시는 여기에서 죽으려하지 말아야지, 하는 다짐과 다시는 수선화 향이나는 저 남자와 마주치지 않길 바라는 그런 마음 뿐이었다.
다시 마주칠 수 밖에 없는 사람이란걸 알아챈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
5교시 수업이 끝나는 종소리에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섰다. 저 밑의 사람들을 쳐다보다 미련없이 뒤돌아 옥상을 빠져나왔다.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오는 반으로 향했다. 계단과 복도를 지나는 내내 했던 생각은 우연이라도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생각 뿐이었다. 그렇게 낯설지 않은 얼굴이었기 때문에 불안했지만, 최소한 같은 반은 아닐테니 반에만 붙어 살면 남은 1여년 학교생활에서 절대 마주칠 일이 없을것이라고 단정지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마조마하면서 반에 들어갔지만 그 남자는 없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자리에 앉았고 이윽고 수업이 시작됐다.
5,6,7교시가 이렇게 시간이 느리게 간적은 처음이었다. 항상 정신없이 수업을 듣느라 시간이 빨리 지나갔었는데, 오늘은 수업보다는 얼른 집에 가서 쉬고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그저 박지민과 같은 향이 나는 남자를 만났고, 단 몇마디 했을 뿐인데 뭐가 이렇게 심란한 건지 모르겠다. 물론 그 몇마디에서 나의 치부를 보였지만. 그렇게 기다리던 종례시간이 다가왔고, 허겁지겁 가방을 싸고는 선생님을 기다리는데 왠일인지 오늘따라 늦게 들어오시는 선생님에 마음만 급해진다. 한 십분쯤 지났을까, 그제서야 선생님이 들어오셨고 내일은 무슨 일이 있고, 수업이 뭐가 변경되었고 하는 말들을 늘어놓으시다가 내쪽을 보시며 얘기를 꺼내셨다.
" 김ㅇㅇ, 오늘 상담인거 알지? 나 따라서 내려와 "
아 , 오늘 상담이 있는 날인걸 까먹었었다. 하필이면 오늘이라니. 일단 내려간다음 오늘은 못하겠으니 다음으로 미뤄야겠다며 선생님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교무실에 도착했고, 선생님 자리로 향하는 도중에 발걸음을 멈추게 되었다. 선생님자리에 서있는 낯설지만 낯설지않은 그 남자 때문이었다. 그 남자도 나를 발견했는지 눈이 마주쳤고, 동시에 눈을 찌푸리며 나의 눈을 피했다. 덩달아 기분이 나빠졌지만 왜 따라오지 않냐는 선생님에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뗐다. 옆으로 가면 또 수선화 향이 날텐데, 하고 순간 걱정한것이 무안하게 수선화향은 전혀 나지 않았고 고약한 담배냄새만이 그 남자에게서 날 뿐이었다.
" 전정국, 이제 가봐 "
전정국, 이라고 불린 그 남자는 마치 내가 없다는 듯이 뒤를 돌아 갔으며 나역시 신경쓰지 않았다. 전정국이 간 이후에도 남아있는 담배냄새가 고약해 코를 막을 뿐이었다.
" 김선생, 전정국이가 이번에 김선생반이야? "
" 네, 한선생님. 아주 미치겠어요 새학기시작한지 한달도 안돼서 담배에 폭력에 무단결석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라니까요 "
" 얼른 한건 잡아서 강제전학시키거나 퇴학시키는게 답이야 저런 애들한테는. 시간끌수록 힘들어지는건 김선생이다? "
" 네,알아요. 저도 얼른 그랬으면 좋겠어요 "
물론 나도 전정국을 좋게 생각하지 않지만, 선생님 두분, 아니 님이라는 존칭을 쓰기에도 아까운 선생 두명의 대화는 정말 가관이었다. 사실 충격받지는 않았다. 중,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느낀것은 학생을 올바른 길로 선도하는 선생이라느니, 진심으로 학생을 사랑한다느니 그딴거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그저 선생들은 그들이 편하면 끝이고 그들이 이익을 보면 학생따위는 개나주는 그런 인간들이었다. 나는 지금 집에가서 쉬고싶었고, 이런 대화따위 듣고싶지 않았다.
" 선생님 "
" 아, 미안해 ㅇㅇ야. "
" 저 오늘 몸이 좀 안좋아서 상담은 나중에 하면 안될까요? "
" 아, 그래 그럼. 근데 그거 말고도 선생님이 할말이 있어서 불렀거든. 금방 끝낼테니 앉아봐 "
" 네. 말씀하세요 "
" 선생님이 부탁이 있거든, 아주 사소한거야. 아까 걔 봤지? 전정국. 같은반이잖아 "
같은반이라니, 적잖이 당황했다. 왜 최소한 같은반은 아닐거라고 생각했을까. 아, 머리아파.
" 별거는 아니고, 선생님이 가끔 부르면 내려와서 전정국이 뭘했는지, 어떻게 지내는지, 무슨일이 있었는지 얘기해주면 되는거야. 쉽지? "
뭐야, 딱봐도 꼼수가 보인다. 이 선생은 딱봐도 뭐라도 트집잡을거리 하나 캐내려고 하는게 뻔하다. 대답을 망설이지도 않고 바로 네, 하고 대답했다. 분명 저선생은 자신의 꼼수를 모를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나는 그저 학생이 걱정되어서 신경쓰는 선생님에게 친구의 안부를 전하는 착한 친구가 되면 끝인것이다. 굳이 싫다고 해서 밉보이면 좋을것도 없고.
아, 머리아파. 빨리 집에나 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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