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한 멜로디 05
태형이와 사귀고 난 뒤 하늘을 찌를 듯이 좋았던 내 기분이 지금 바닥을 기고 있다. 원래 내가 문자를 보내면 늦게라도 꼭 답장을 해주던 태형이었는데 요즘은 내가 세 통, 네 통을 보내도 답장이 오지를 않는다. 결국 기다리다 못한 내가 전화를 한 적도 몇 번 있었지만 태형이는 그것조차 받지 않았다. 처음에는 무슨 일이 있나, 하는 걱정을 먼저 했는데 주말 내내 이 상태니 이제는 그게 아니구나, 하고 깨달았다.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니라 이제는 내가 싫어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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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 도착하자 마자 먼저 든 생각은 태형이를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주말 내내 연락도 안되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꼭 알아야겠다. 급한 마음에 걸음이 빨라졌다. 태형이는 자리에 앉아 노래를 듣고 있었다. 조금 망설이다 태형이에게 다가갔다.
" 태형아, "
" 어, 탄소야. "
" 주말에 무슨 일 있었어? 연락이 안되길래 무슨 일 있나하, "
" 김태태!!! 어제 진짜 재밌었다! 다음에는 우리 계곡갈래? "
우르르 몰려온 태형이 친구들인 듯 보이는 무리가 내 말을 끊고 태형이에게 말을 걸었다. 나 말하고 있었는데.. 하고 중얼거려보지만 소용 없는 일이었다. 안그래도 소심한데 더 소심해진 나는 떨어뜨렸던 고개를 들어 태형이를 보았다. 태형이는 어느새 그 무리와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태형이는 주말에 친구들과 재미있게 논 것 같다. 그래, 무슨 큰 일이 난 건 아니였구나. 나는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발길을 돌렸다. 답답했던 아까보다는 괜찮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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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열었던 사물함에는 줄넘기가 없었다. 또 집에 두고 왔나보네. 체육선생님은 태도 채점에 은근히 까다로워 줄넘기를 한 번 안가져가는 것도 성적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누구에게 줄넘기를 빌려야하나 생각하다 태형이의 반으로 향했다. 이것을 기회 삼아서 태형이에게 줄넘기를 빌리고 싶었다. 그렇게 도착한 삼반에는 태형이가 없었다. 태형이 앞자리의 아이는 태형이가 누군가의 부름을 받고 반에서 나갔다고 했다. 아직 칠분이나 남은 쉬는 시간에 태형이를 찾는데는 무리가 없겠다고 생각한 나는 태형이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몇 분 되지 않아 학교 뒤의 벤치에 앉아있는 태형이를 찾을 수 있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크게 이름을 부르려다가 태형이의 옆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처음 보는 귀엽게 생긴 여자아이였다. 명찰색을 보니 같은 학년인 것 같다. 그나저나 지금 이 상황은 누가 봐도 사랑고백이 오갈 것 같은 상황이다. 당연히 태형이가 고백하지는 않을 거고, 그럼 저 여자아이가 지금 태형이한테 고백을 하려는 건가.
" 미안. "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여자아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태형이에게 좋아한다며 사귀자는 고백을 했다. 하지만 태형이는 단칼에 거절했다. 괜스레 내 마음이 뿌듯했다. 여자아이는 울상이 되어 태형이에게 물었다.
"..왜? 이유가 뭐야..? "
" ... "
" 좋아하는 사람 있어? "
나는 여자아이가 한 질문에 태형이를 바라보았다.
" ..아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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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아팠다. 태형이가 여자아이에게 했던 대답은 나에게 큰 충격을 되었다. 태형이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사실 나는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처음보는 여자애가 한 고백을 받아준 것도, 친구들에게 나를 여자친구라 소개하지 않은 것도, 이름조차 몰라 내 명찰을 보고 안 것도, 연락을 먼저 하지 않는 것도. 처음부터 태형이는 나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그걸 알면서 애써 모르는 척하려 했다. 그저 자신을 좋아한다며 당돌하게 고백해 오는 여자아이가 재미있는 장남감처럼 보였던 걸까.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아마 태형이는 내가 지금 이렇게 아프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휴대폰을 들어 태형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
" ..태형아, "
신호음은 얼마 가지 않았다. 들려오는 담담한 태형이의 목소리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 우리, "
" ... "
" ... 헤어질까? "
" ... "
" ..아니, 헤어지자. "
건너편에서는 아무것도 들려오지 않았다. 제발 태형이가 아무말도 하지 않아줬으면 했다. 헤어지자고 하는 나의 말을 들어주기만 했으면 좋겠다. 나의 짐작을 확신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나는 서둘러 화면에서 종료버튼을 찾았다.
" ... "
태형아, 제발.
" ..그래."
종료 버튼을 누르려던 내 손가락보다 태형이가 더 빨랐다. 태형이는 그래, 라고 했다. 그래, 그렇구나. 너는 내가 너에게 헤어지자 고하는 이유조차 궁금하지 않구나. 김태형은 끝까지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통화가 종료되었음을 알리는 화면에는 여전히 -태형이♥-로 저장된 번호가 반짝거렸다. 눈 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그렇게 나의 1학년 2학기는 한여름 밤의 꿈처럼,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