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년동안 내가 솔로인 이유를 대보자면, 딱히 남들만큼 연애라는 것에 대한 로망따위나 그것에 대해 간절히 꿈 꿔본 적이.
그렇네, 한번도 없네. 코찔찔 유치원생때 같은 반 남자 아이 한번 짝사랑했던 거 빼고. 물론 자랑은 아니지만 19년동안 나에게 접근해왔던 남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였다. 이래봬도, 나같은 애가 뭐가 좋다고 달콤한 말로 나를 꼬득이거나 아닌 척 하며 은근 내 주변을 맴도는 아이들도 몇 몇 보였다. 그리고 이건 평생, 죽을때까지 비밀로 가져가려 했는데. 중학교 3학년땐 전교생 앞에서 그 좆같은 프로포즈도 받아봤다. 사귀어라, 사귀어라. 하여튼 남들 시선이 무서워서 내 손으로 직접 연락하라며 전화번호까지 건네주면서 환호성까지 잔뜩 받아왔지만 미안하게도 그건 내 친오빠 전화번호였다는거. 주변에서 돌부처라느니, 연애 세포가 다 죽었다느니. 이젠 그런 소리를 하도 들어서 나까지 동요되는 느낌이였다. 정녕 내가 이 시대에 살아있는 돌부처란 말인가. 나도 내 스스로가 의심스러워지려던 찰나, 그 시점에.
“ … 집중 안 하냐 … ”
나른하면서도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 나보다 더 하얘보이는 피부에, 심지어 5살이나 연상인. 전혀 예상치도 못한 순간에, 내 인생에 깊게 침투해버린 사람이 있었다. 지금도 문제나 풀라며 내 뒤쪽 침대 시트 위에 앉아서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는, 말만 과외선생님인 민윤기라고. 어느 순간 집중이 깨져서 뒤돌아 힐끔 힐끔 쳐다보는 것을 용케도 알아채셨는지 그는 여전히 핸드폰에 시선을 둔 채로 경고 아닌 경고를 건넸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문제집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분명 그가 가르쳐준 문제와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머리가 돌아가질 않는다. 이게 다 민윤기 때문이야. 분명 고3이 되고나서야 위기감을 느끼고 시작한 과외 수업이지만. 이러다 안 그래도 바닥인 성적, 더 바닥을 기게 생겼네. 그렇다고 과외 수업을 시작한 것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지만 …
내가 한동안 집중을 못하고 습관처럼 샤프를 손 위에서 굴리자, 그가 결국 주머니에 핸드폰을 집어 넣었다. 문제 안 풀려? 깊게 한숨을 내쉬며 다가오는 그의 발걸음과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살짝 어깨가 위축된다. 봐 봐. 다정한 듯 까칠한 저 말투에 나는 가만히 풀다 만 문제 하나를 가르켰다. 사실 모르는 게 아니라 집중이 너무 안되었던 거였는데. 아까 알려준 문젠데 왜 모르냐며, 내 손에 쥐어진 샤프를 가져가 다시금 천천히 하나 하나 알려주는 그가 너무 좋아서 나는 그냥 입 다물고 고개만 무한으로 끄덕거렸다. 이해 돼? 그럼 네가 다시 한번 풀어봐. 그가 다시금 내 손에 건네준 샤프에, 그리고 옆에서 지긋이 내 손만 응시하는 시선에. 긴장이 되어 아득해지는 정신을 애써 부여잡고 나는 그가 알려준 방식대로 천천히 문제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 … 옳지, 잘하네. ”
“ … ”
칭찬은 고래도 춤 추게 한다고. 민윤기의 칭찬은 나 김탄소를 춤추게 한다. 잘했죠?! 금방 기분이 좋아져선, 어깨를 으쓱이며 해맑게 외치자 그는 살풋 웃으며 밑에 문제를 가르켰다. 응, 이것도 풀어봐. 저 살짝 올린 입꼬리도, 어찌나 매력적인지. 한참동안 그의 얼굴을 보며 멍을 때리다 나는 그가 가리킨 문제로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순간, 내가 너무 변태같이 느껴졌어. 항상 느끼는거지만, 내가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내는 것 같아서. 들켜버린 것 같아 무서우면서도 불안하면서도 … 참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안 그래도 쓸데없이 눈치가 빠른 것 같던데. 다행히 아무런 내색 안하는 그였지만 말이다. 나는 옆에서 지켜보는 그의 시선을 어느 정도 의식하며 그가 가르킨 문제를 그 어느때보다도 열심히 풀어보였다. 그 칭찬 한번 다시 받아보겠다고. 살면서 들어본 말과 행동 중에, 가장 달콤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