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나한테 왜이래? 2
정 교수님은 오티날 조차 수업을 하시는 분이신지라 어지간해선 정정일에도 출석을 채워야했다. 맨날 오후까지 늦잠자고 어기적어기적 일어나는 내가, 아홉시 수업 들으려고 새벽에 일어났다. 그니까 도무지 졸리지 않을 수가 없지. 그래도 오늘은 첫날이라 다행이지, 며칠만 더 지나면 난 정말 꾸벅꾸벅 조는 걸 넘어 나몰라라 엎어져 자고 있을지 모른다.
시선은 맨 앞자리에 앉은 오세훈을 향했다. 졸리지도 않은지 몸 빳빳히 고쳐세워선 열심히 오른손을 움직이고 있다. 말마따나 정말로 이번 학기엔 1등하겠네. 오세훈은 하는 것에 비해 성적이 그리 잘 나오지 않는 편이다. 저도 알고 있는지 오늘 우연히 전철에서 만났을 땐 그동안의 안녕을 묻다가 이번 학기 다짐까지 듣게 됐다. 꼭 1등 하겠다고 답지 않게 주먹까지 쥐여보였었는데. 그래, 네가 1등 다 해먹어라. 하루살이인 나는 3.0만 넘겨도.. 아니 재수강 과목만 없어도 진짜 교수님 감사합니다니까.
하품을 하다 교수님과 눈이 마주쳤다. 교수님은 급하게 고개를 푹 숙인 나를 오랫동안 쳐다보시더니 다시 수업을 진행하셨다. 강의실의 사람들이 교수님의 시선을 따라 나를 힐끔였다. 관심이 사그라들 즈음 천천히 고개를 들었는데, 오세훈이 나를 보고 소리 없이 피식 웃고 있었다. 하……. 정말이지 쪽팔린 순간이었다.
"어떻게 정 교수님 수업에 졸 생각을 다 하냐."
"이번 학기도 망한 듯. 이미 학점은 정해졌고 교수님은 다음 학기에 한 번 더 봬야할 듯."
"네가 있어 다행이다."
"닥쳐라, 오세훈."
이번 학기도 오세훈의 학점 거름이 될 것 같다. 나를 자양분 삼아 무럭무럭 자라렴 세훈 학점아.
3.0만 넘으면 본전은 건진거라는 말에서 눈치챘다시피 난 학점에 그리 목숨 걸지 않는 성격이다. 이런 나와 상극인 오세훈은 내가 수업에 거슬리는 행동을 했을 때마다 내 옆에서 그 알량한 입을 조물댄다.
"아프잖아."
그 입! 입 좀 다물라는 뜻으로 입술을 툭하고 치니 또 배실배실 웃는다. 나 놀리는 게 재밌지. 그지.
"오세훈 너 따로 팀플할 사람 없지? 그냥 적어 낸다?"
"한 명 더 구할까? 최대 3명이잖아. 세 명이 할일을 두 명이 나눠하면 조금 벅찰 것 같은데."
"벅차긴 무슨. 오세훈이 있는데."
아무렇지 않게 덤덤한 말투로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오세훈은 역시 그렇지? 하며 어깨를 들썩이더니 가방을 고쳐맨다. 야 표정 관리 하지 마라. 웃으며 아직 정리하지 않은 책상 위 공책 한 장을 북 찢었다. 그곳에 선여주, 오세훈을 적어내린 후 반으로 곱게 접는데 누군가 내 앞에 서 그림자를 만드는 것이다. 이건 뭔가, 싶어 고개를 드니 나보다 조금 크고 귀엽고도 날카롭게 생긴 남자가 나와 눈을 맞추고 씩 웃는다.
"보니까 두 분이서 하시는 것 같던데, 괜찮으시면 저도 껴서 같이 해도 될까요."
"아……. 성함이?"
슬쩍 오세훈을 보니 별로 이쪽에 관심 없는 표정이었다. 개의치 않고 성함을 물어보자 남자는 다행이라는 얼굴로 몸을 찰나 늘어뜨리더니 입을 열었다.
10학번 경영학부 김민석. 스물 다섯 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어려보였다. 스물한 살인 우리 사이에 끼어 있어도 전혀 위화감 없을 듯한 외모에 살짝 놀랐던 것도 잠시였다. 서로 다음 수업을 위해 빠르게 번호 교환을 마치고 난잡한 책상을 정리했다.
경영관까지 걷는 동안 배가 좀 쓰려 곰곰이 생각해보니 늦잠을 자느라 걸렀던 아침이 생각났다. 경영관 가는 길에 있는 매점에 좀 들리고자 아무 말 없이 옆에서 걷고 있는 오세훈을 먼저 보냈다. 오세훈은 아침 좀 먹고 다니라며 또 귀에 딱지 않게 휘황찬란한 잔소리를 늘어놓더니 먼저 경영관으로 향했다.
매점은 역시나 인산인해였다. 아침을 거르고 온 사람이 이렇게나 많았나 싶다. 차라리 수업 중간에 나와 빨리 해치우고 들어갈 걸 그랬다. 줄을 서서 차례로 샌드위치와 우유를 집었다. 열일하는 알바 언니 덕분에 줄은 금방 당겨졌고 물건 값을 내려는 그때 누군가 카드 쥔 내 손을 밑으로 내렸다.
"팀플 껴줘서 고맙다고."
민석 선배였다. 어, 뭐 이렇게까지 안 해주셔도 되는데……. 살짝 머쓱하기 했다. 지갑에 카드를 꽂으시는 선배 간식까지 내 품에 한아름 들었다. 매점을 나가며 선배는 내게 안겨있는 초코우유를 가져가셨다.
학관에 가신다기에 동아리 들으셨나 물어보니 여행동아리 회장이라며 은근슬쩍 영업까지 하셨다. 학교 생활 관심 없는 나로썬 여행이든 뭐든 관심 없는 주제인지라 자연스럽게 정 교수님 팀플로 화제를 돌렸다. 만난지 채 얼마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선배는 퍽 사교성이 좋아 나와 오세훈의 첫인상을 읊으셨다. 오세훈 보고 굉장히 의욕적인 애라 생각하셨다는데 그래서 팀플 세 개나 되는 수업을 듣는 건가 싶으셨단다. 그 말을 듣고 난 벙찔 수밖에 없었다.
미쳤다. 팀플이 세 개라니. 아무리 사전 정보 없이 강의명 따라 무작정 신청하고 본 거라지만 이러면 얘기가 좀 달라지지……. 얼빠진 내 얼굴을 보고 크게 웃던 선배는 그래도 걱정 말라며 본인이 정 교수님 수업 팁을 다 알아왔다고 애써 나를 다독였다. 괜찮아요 선배. 위로해주지 않아도 돼요, 그냥 저는 염치없이 드랍하면 되니까…….
"설마 드랍할 건 아니지? 우리 이미 팀원 다 적어냈는데. 졸업반 즈음 되면 남한테 피해주는 애가 무엇보다 제일 그렇드라."
"아, 선배……."
선배는 기가막히게 내 심중을 파악했다. 날 더 머쓱하게 만들어 드랍따윈 꿈도 꾸지 못하게 만드는 거다. 아무리 그래도 팀플을 위한 학기라니. 정 교수님 마케팅 수업 아니더라도 다른 전공 팀플이 몇 갠데.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어쩐지 수강신청 전날 꿈을 이상하게 꿨다 싶다. 강의실에 오세훈과 나만 둘이 남아 무어라 굉장히 웃긴 대화를 나눴던 것 같은데.
"보니까 너랑 세훈이 둘다 집순이, 집돌이에 알바만 하는 거 같은데 대학생 때 여행 안 가면 언제 가겠어."
"여행 동아리요?"
"생각해봐? 먼저 갈게?"
학관으로 뛰어들어간 선배가 뒤를 돌아보더니 인사차 손을 흔드셨다.
"어? 선배!"
소시지 두고가셨다.
오세훈은 뭐가 그렇게 늦었냐는 표정으로 탐탁찮게 날 바라보더니 이내 내 손에 가득 든 간식을 보고 알만하다는 얼굴로 끄덕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책상에 간식을 후두두 내려놓았다. 그중 오세훈은 소시지를 집어들었다.
"그건 안돼. 민석 선배 거야."
"뭐?"
뜻밖의 이름이 나오자 조금은 어처구니 없다는 듯한 얼떨떨한 표정을 짓던 오세훈이 소시지를 내려놓았다. 선배에게 연락하고자 휴대폰을 꺼냈다.
"갑자기 그 선배 이름이 왜 나와?"
"……."
[그랬어? 그거 되게 맛있는 건데. 너가 먹어줘.]
"헐 대박."
"뭔데."
[헐 그래도 돼요!?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엄지)]
"선배가 소시지 나 먹으래."
음흉하게 웃으며 소시지를 깠다. 뚱하게 날 바라보는 오세훈에게 먼저 먹으라고 소시지를 들이밀었는데 안 먹는다고 몸을 뒤로 무른다. 이거 되게 맛있다고 칭찬을 해도 고개를 젓는다.
"그 선배는 어떻게 만난 거냐니까."
"그냥, 매점에서. 내 거까지 계산해주셨다? 짱이지."
"얼마나 된다고."
"가격이 문제냐~"
옛말에도 먹을 거 주는 사람 누구보다 착하다고 그랬다.
"아, 세훈아."
오세훈은 늘 그렇듯이 대답없이 고개만 튼다.
"동아리 안 들래? 여행 동아리. 너 맨날 여행 떠날거라고 그랬잖아."
"뭔데."
"'역마'라고, 찾아보니까 중앙동아리래. 괜찮은 덴가 봐."
오세훈은 매번 여행 다짐만 세운다. 충분히 구체적인 계획을 짤 수 있는 놈임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생각에서 그치는 걸 보면 그리 여행에 큰 욕심은 없는 것 같기도 하다.
"갑자기 무슨 동아리?"
"민석 선배가 추천했어. 우리한테 잘 어울릴거래."
"안 해."
입을 삐죽 내밀었다. 단칼에 거절하기 있기 없기.
"여행 다니고 싶다며. 너 맨날 생각만하고 실제로 움직인적 지금까지 한 번도 없잖아."
"단체로 뭐 하는 거 싫어."
"…어련하겠냐."
그래도 난 들어갈 거다.
"너."
오세훈은 뒷말을 잇지 않더니 잠깐동안 침묵을 유지했다. 그리고 그 정적을 깨며 묻는다.
"할 거야?"
두말할 것 없이 호쾌한 대답을 내놨다. 그러자 오세훈은 인상을 조금 찌푸린다. 왜? 하고 묻던 오세훈에게 나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재밌을 거 같아."
여행이잖아. 당근 재밌겠지. 멀뚱이 눈만 끔벅하자 오세훈은 한숨을 내쉰다. 야, 웬 한숨?
"성비는."
"몰라? 잘생긴 사람 많대."
"야. 하지 마."
오지라퍼. 남이사요. 신경 쓰지 마삼. 남친 사귈 거임.
"하지 마라?"
"왜. 그럼 너도 들던가."
내참 어이가 없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러자 오세훈은 역시나 "안 해."라며 단호한 대답을 뱉는 거다. 너 맘대로 해라 새끼야.
"교수님 오신다."
슬쩍 고개를 드니 여전히 변한 것 없이 중후한 임 교수님이 인사하시며 강의실로 들어오신다.
[근데 여주야. 활동하는 애들은 남자밖에 없는데 괜찮겠어?]
헐, 선배…….
그건 좀
개이득!!
방실방실 웃으며 선배에게 온 카톡을 오세훈에게 보여줬다. 무표정한 얼굴로 보던 녀석의 안색이 점점 굳어갔다.
"미친. 너 미쳤어?"
"원랜 우리랑 같은 학번인 여자애 한 명 있는데, 연애중이라 활동 잘 안 한대. 근데 선배가 나 들어오면 그 애 어떻게든 꼬득여서 여행 때마다 데리고 가겠다는대?"
"그걸 어떻게 믿어. 구두계약은 믿는 거 아니야."
"안 오면……."
"안 오면."
"개이득이지."
엄지척하자 또 작게 한숨을 내뱉는다.
"그럼 나랑 같이 가."
"응?"
"같이 들자고, 동아리."
오세훈은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듯하다. 네가 그 동아리 사람들과 비교할 때 나를 더 잘 알고 보다 친한 건 알겠지만, 너도 내 남사친이다. 남자라고. 부모님처럼 내 보호자 역할을 하겠다고 나서는 건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경영학개론을 들은 학생이라면 아마 회계원리도 이수 했을 텐데 따로 통계학을 들은 학생은 없나요?"
9월. 추곤증인가. 졸려 죽겠다. 칠판 위에 걸린 시계의 초침은 숫자 1을 가리키고 있다. 점심 시간이네. 수업에 집중이 안 돼 창밖을 구경했다. 9월 말쯤은 되어야 긴팔 남방을 하나 더 걸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여전히 강의실 밖은 햇살이 내리쬐었고 사람들은 짧은 옷을 입으며 캠퍼스를 걸었다. 간간이 손부채질을 하는 사람들은 물론 저 말고 나란히 걷고 있는 제 연인에게 부채질을 해주는 사람들도 있다.
"뭐야."
순간 시야를 가린 오세훈의 손 탓에 공상에서 깨어났다. 대수롭지 않게 손을 치워내고 다시 캠퍼스를 구경하는데, ……박경리. 박 선배가 있다. 분수대 옆 벤치에서 남자친구와 나란히 앉아계신다. 눈치채지 못하게 슬며시 오세훈을 곁눈질했다.
묵묵히 교수님을 바라보지만 어딘가 굳어있는 얼굴. 박 선배를 본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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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 틈에서 여주 지켜낼 세훈이 인생이 험해 보여 여자 투입! 경리와 세훈이는 무슨 사이일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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