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필요한 시각 00:00
w.시린
"글로스,"
회색 머리의 남자 앞으로 푸른 눈의 늑대가 그르렁대며 천천히 걸어왔다. 보름, 달이 가득 차 희게 빛나는 밤에 느릿느릿 걸어오는 그 늑대는 그야말로 신과 같았다. 안개와, 밤과, 그리고 모든 늑대들을 관장하는, 신. 그런 그 앞에서도 은발의 남자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그 빤한 시선으로 신비로운 늑대의 걸음만 좇을 뿐이었다. 흰 달빛 아래, 하얗게 서 있는 남자는 그야말로, 차가웠다.
「너는 왜, 인간으로 태어나려 하는 거지?」
"..."
「인간이 되기 위해 너를 버리고,」
"...조용히 해"
「자살한 네 어미와 아비를 」
"닥쳐"
「원망하지 않았나 」
늑대 앞에 서있는 남자는 조용히 마른세수만 할 뿐이었다. 늑대의 낮은 그르렁거림이 멎자,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렸다. 아니, 머리카락의 방향대로 바람이 부는 건지도 몰랐다. 한숨을 내쉰 남자가 입술을 깨물었다. 나의, 부모. 이해하지 못했다. 왜 인간이 되려 하는가.반은 인간이지만, 그 본질은 늑대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웨어울프들은 가지고 있었다. 웨어울프들이 죽었을 경우, 늑대로서의 영예로운 죽음을 안을 수도 있지만, 늑대의 속성을 버리고 인간으로 환생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그들의 능력이었다. 대신, 이전의 삶에 대한 잔상은 남아 그들에게는 '희미한 과거의 기억' 정도로 인식되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으로 환생한 늑대들은, 다시는 늑대의 숲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변절자'로 분류된다.
글로스, 라고 불린 사내의 부모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는 인간을 미워했고, 인간으로서의 일이 끝나면 바로 늑대의 모습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랬던 그가,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변절자의 길을 택하다니.
"지켜야 할 게 생겼을 뿐이야"
「,,,허 」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씨발"
「네가 돌아간다고 해서, 그 애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은가」
",,,뭐?"
「너의 기억은 잔상만 남을 뿐이야, 한낱 꿈과 같았던 그 아이와의 시간을 기억해낼 수 있다는 거냐, 글로스.」
늑대의 충고 아닌 충고에 글로스가 피식, 하고 웃었다. 푸른 눈의 늑대가 뭐냐는 듯 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완벽한 망각이란 없어"
「...」
"적어도 내 손 끝이나 지문 하나 쯤은 그 애를 기억하고 있겠지"
「...」
"그리고 그 애라면"
충분히 내가 또다시 걔를 좋아하게 만들거야, 분명. 기억이 잔상만 남는다 해도. 내가 나라면 그 애를 다시 좋아할 거거든, 하며 남자가 쓰게 웃었다.
「...못 말리는군」
"..."
「떠나라, 인간의 삶으로」
"...간다"
은발의 남자가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밝은 달만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푸른 눈의 늑대는 그의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본 후, 느릿하게 나무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유난히 밝은 밤, 보름달이 뜨는 밤이었다.
-
그냥, 그저 그런 날이었다. 군대에 다녀와 복학해서 같은 학년의 애들보다 2살이 많았던 윤기는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도, 본인이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 갖지도 않는 타입의 사람이었다. 그저 강의 듣고, 어딘가로 사라지는 사람. 조용한 사람, 그리고 이상한 사람. 지민이 윤기에게 가지고 있던 인상이었다. 딱히 눈에 띄지도 않고 강의만 듣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리는 사람이라 윤기는 강의실이나 학교 내에서도 그렇게 눈에 띄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흔치 않은 은발 머리에, 나른한 것 같기도 하고, 무기력한 것 같기도 한 그 묘한 분위기 때문에 이상한 사람, 이라고 느낀 것 같다.
지민이 윤기에게 흥미를 갖게 된 건, 정말 특별한 계기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냥, 그저 그런 날 그가 눈에 띄었을 뿐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날'이 아니라 '날들'이었다. 언젠가부터 자신에게 향하는 빤한 시선의 느낌에 지민이 놀라 고개를 돌리면, 그 곳에는 무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윤기가 있었다. 그는 여태까지 시선이 느껴질 정도로 쳐다봤으면서, 정작 자신과 눈을 마주치면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후드를 올려 쓰고서 황급히 자리를 떠나는 것이었다. 한두 번은, 왜 저렇게 급하지..?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지민이지만, 언젠가부터 그도 눈치채기 시작했다. 아, 저 사람이 나에게 관심이 있구나.
제가 흥미가 생긴 사람이 남자라는 것은 지민의 흥미에 대해 큰 걸림돌이 아니었다. 어렸을 적 외국에서 지낸 터라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며 굉장히 개방적 사고를 하는 지민이었고, 그저 자신을 뚫어져라 보는 신기한 사람이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말을 거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저를 바라보기만 하는 사람. 그 사람이 지민은 무척이나 궁금했다. 그렇게 지민이가 눈치챈 줄 모르고 홀로 윤기가 하던 숨바꼭질은, 뜨거운 여름날, 끝을 맺게 된다.
그리고, 그냥, 그저 그랬던 더운 여름날에, 지민은 도서관에서 윤기를 마주쳤다. 일부러 들어가지 않고, 열람실 입구에 기대 서서는 그가 자신을 쳐다보던 느낌을 살리려고 노력하며 윤기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때는 평소와 반대의 상황이었다. 지민이 윤기를 바라보고, 윤기는 제 할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다 시선이 느껴졌는지 고개를 든 윤기가 지민과 눈을 마주쳤고. 후우- 하고 숨을 내뱉더니 후드를 쓰고 급히 열람실을 나갔다. 그걸 본 지민이 오늘은 기필코! 를 속으로 연신 되뇌이며 윤기를 빠르게 뒤쫓아갔다. 그리고 비상 계단에서 겨우 그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지민이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저기요"
"...아"
"왜 자꾸 도망가요"
"그런 거, 아닌ㄷ.."
아니라고 대꾸하려다 자신을 보며 생긋 웃는 지민을 보고 입술을 깨물며 눈을 아래로 내리까는 윤기였다. 과하다싶을 만큼 푹 눌러쓴 후드를 괜히 툭툭 매만지며 윤기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다 고개를 똑바로 들고는 저기,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하고 큰 결심한 듯 지민을 빤히 바라보며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에, 뭐가요?"
"그냥 뭐.. 쳐다본 거 말입니다"
"아, 괜찮아요!"
"아, 다행이네요"
"그러면 저기, 우리 좀 이따가"
"..."
"점심 같이 먹으러 가요!"
네? 네? 하면서 좌우로 고개를 까딱이는 지민이 귀여워 윤기는 굳은 표정을 풀 수 밖에 없었다. 아 그리고, 제가 더 어린데 말 놔요! 형이라고 불러도 되죠? 좀 이따가 여기 앞에 버거왕 먹으러 가요! 거기 점장님이랑 나랑 친해요! 예전에 알바 했었거든요! 등등 이런저런 말을 조잘조잘 해대는 지민과 그걸 묵묵히 들으며 그를 예의 그 빤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윤기는 꽤나 대조적이었다.
어떻게 보면, 지민의 필사적 노력으로 둘의 사이는 많이 가까워졌다. 강의 끝나면 바로 짐을 챙겨 나가버리던 윤기가 느리게 짐을 챙기는 지민을 기다렸고, 지민은 그런 윤기를 보며 이상한 뿌듯함을 느꼈다. 그렇게 한동안 약간은 달달하고, 약간은 평범한 관계가 1년간 지속되던 중, 지민이 그에게 고백했다. 나 형 좋아하는 것 같아요, 하면서.
"형도 나 좋아하죠,"
"..."
"형은, 아니에요?"
자신의 고백에 대답 없이 한숨을 내쉬는 윤기에 지민의 동공이 흔들렸다. 아, 너무 급했던 건가,
"...지민아"
"...네, 형"
"오늘,"
"..."
"보름이지,"
제 고백에 대한 대답은커녕, 갑자기 보름이냐는 질문에 지민이 또 에? 하면서 윤기를 쳐다봤지만, 제발 대답하라는 눈빛으로 간절히 저를 보는 윤기에 지민은 벌린 입을 다물었다. 뭔가, 뭔가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았다. 지민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보름. 보름 맞아요.
"오늘 밤 11시에, 너희 집 뒤편에 산으로 와줘"
"거긴 왜요?"
"...부탁이야"
윤기의 입에서 나온 '부탁'이라는 말에 지민이 걱정된다는 듯 작게 한숨쉬었다. 알았어요, 11시에, 산 입구로 가 있을게요. 윤기가 고마워, 하고 푸스스 웃었다. 아니,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윤기가 지민의 작은 등을 끌어안았다. 윤기는 속으로 계속 불안감을 곱씹었다. 지민이가, 혹시라도, 나를 보고, 떠나버린다면,
나는 정말 죽어버릴지 모른다. 나의 전부가 되어버린 그가, 나를 보고 겁에 질린다면.
-
밤 11시, 사람이 사라진 여름밤에, 산 입구에 지민이 서 있었다. 아니 이 형은, 오라면서 왜 안와, 하며 지민이 괜히 가디건의 소매를 매만졌다. 어제 비가 와서 그런가, 제법 스산한 밤이었다. 조금 커서 소매가 남는 가디건으로 손장난을 치며, 지민은 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뒤에서 지민아,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윤기의 낮은 목소리였다. 지민이 뒤돌아 보려는 순간, 윤기가 안돼, 돌지 마. 하고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지민이 돌다 말고, 왜 그래요 형, 하며 윤기를 불렀지만, 윤기의 숨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조금, 그르렁대는 듯했다.
"지민아,"
"..."
"너는 내가,"
내가, 까지 말하고 윤기가 말을 멈췄다. 두려운 듯 했다. 제가 처음으로 마음에 둔 이 사람이, 저를 보고 떠나갈까 봐. 마침 부는 바람이 윤기의 머리칼을 흩뜨렸다. 마찬가지로 윤기도 그에 맞춰 흔들렸다. 흔들, 흔들. 가장 불안하고 가장 두려운 순간. 제 모든 것을 내려놓고, 껍데기를 벗은 알맹이만 가지고 연모하는 자를 마주해야 하는 순간.
"너는 내가 어떤 모습이라도,"
"..."
"사랑할 수 있어?"
웨어 울프로서의 삶. 윤기는 긍지를 갖고 있었다. 자연을 지키고 인간으로부터 신의 섭리를 보호하며 수호하는 존재. 그런 종족의 후손으로서 윤기는 큰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것은 어린 자신을 두고, 둘의 행복을 위해 떠나갔던 제 부모에 대한 원망을 승화시키는 방법일 수도 있었다. 윤기는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에 이렇게 큰 모멸감을 느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니, 그 이전에, 인간을 사랑하게 될 줄이야. 그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네"
"..."
"어떤 모습이라도,"
"..."
"다, 형이면 다 좋아요."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쉰 윤기가 마른세수를 했다. 15초만 세고, 뒤 돌아봐. 그 전은 절대 안돼. 네, 알았어요. 지금부터 셀게요. 15, 14, 13, 12, 11,
10 ... 7 ... 4 ... 2 ... 1 ...
땡.
지민이 뒤를 돌자, 그에 따라 바람이 그를 휘감았다. 지민은 침을 꿀꺽 삼켰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 내뱉지 못했다. 숨을 멈췄다. 그의 막힌 숨을 대신 쉬어 주려는 듯, 바람이 다시 한 번 불었다.
"윤기형?"
"..."
"형, 맞죠"
제 앞에는 은빛 늑대만이 깊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둘은 서로를 마주보며 서 있었다. 바람이 불었고, 잎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늑대가 시선을 떨구자, 지민이 숨을 작게 내쉬었다. 그리고, 늑대에게 달려가 그를 꼭, 안았다. 늑대도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안심하는 듯한, 그르렁거림이었다.
-
둘의 관계가, 연인이라는 말로 정의된 후, 윤기는 많이 살가워졌고, 지민은 그런 윤기를 자주 보듬어 안았다. 인간에게 다가가기 꺼렸던 이유를 윤기에게 다 듣고 나자, 상처가 많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지민의 습관이었다. 윤기가 서 있을 때면, 그를 뒤에서 껴안곤 했다. 처음에는 무슨 짓이냐며 윤기가 안절부절 못해하며 그를 떼어내려 했지만, 끈질기에 엉겨오는 지민에게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이렇게 많은 것이 변했는데도 변하지 않는 것은,
윤기가 후드를 절-대로 벗지 않는 것.
"형, 근데 왜 나만 보면 후드 써요?"
"아, 그게..."
"아 왜 써요? 알려줘요!"
그.. 하면서 섣불리 말을 하지 못하는 윤기에게 지민이 말해달라며 계속 졸라댔다. 아 비밀이야! 하고 윤기가 나름 소리를 지르자, 지민이 오 윤기 형 목소리 중에 제일 컸어요! 하면서 까르르 웃었다. 그리고는 아 설마 머리 안감은 거에요? 하면서 말해달라고 보챘다. 한참을 실랑이를 벌인 끝에, 윤기가 못 이기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 습관이야"
"에? 무슨?"
"부끄러우면,"
"..."
"귀가 튀어나온단 말이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지민이 그의 후드를 휙, 하고 벗겼다. 아니나 다를까, 은빛 머리 속에 회색 귀가 조그맣게 올라와 있었다. 윤기가 아! 하면서 손으로 덮으려 했으나, 그 손은 이미 지민에게 제지당해 있었다.
"아 형 너무 귀엽다"
"아, 진짜, 아"
가오나시라도 된 듯, 아, 아, 만 남발하며 눈을 꼭 감는 윤기를 지민이 더 세게 안았다. 형, 진짜 누가 잡아가면 어떡해요? 누가, 나를. 아 너무 귀엽잖아요, 형. 누가 누구보고 할 소리야. 형 꼭 모자 쓰고 다녀야 돼요! 이 귀 나만 볼 거에요! 알았어, 알았어...
-
독방에 있던 부족한 글을 사랑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용기 내어 글잡으로 왔습니다. 여러분의 응원이 많은 힘이 되었어요 감사합니다.
잠시 후, 10시 30분 경 수정된 네필사 01:00AM과 공지사항이 업로드 될 예정이니 궁금한 점이나 질문사항이 있으시면 댓글에 남겨 주세요! 공지사항과 함께 답 드릴게요.
슙민 만만세~ ♡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