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침대에 가만히 누워 생각해 보았다. ㅇㅇ누나는 원래 이렇게 말투가 차가우신가, 아니다. 분명 언제나 웃는 모습으로 밝게 안녕하세여, 하고 인사를 건네던 누나인데,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건가, 아니면 초면에 누나라고 말을까서 불편한가, 아니면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건가. 그래서 철벽을 치는건가.
머리를 싸매고 생각해보아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카톡을 해봐야만 내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
도대체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누나가 아니라니.
*
마땅히 할 말이 없었다. 솔직히 ㅇㅇ의 말이 다 맞는 말이었다. 나 혼자 착각하고, 나 혼자 좋아하고, 나 혼자 누나라고 칭하고, 툭까놓고 나 혼자 지랄한거다, 시발.
ㅇㅇ의 말을 마지막으로 며칠간 연락이 끊겼다. 할 말도 없었고 우리 둘 사이에는 어떠한 연결고리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같은학교도 아니었고, 같은 동네에 사는 것도 아니었고, 그냥 피시방 주인 의 딸과 그 피시방 단골,
딱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도 더이상 이렇게 찌질하게 굴면 안될 것 같았다. 애써 딴 번호 애써 딴 기회인데, 이렇게 허무하게 날릴 순 없다. 전정국, 눈 한 번만 딱 감자, 딱 감고-.
" ... "
" ...여보세요? "
" ... "
" ... 저기. "
" ... "
" ... 전화를 걸었으면 말ㅇ... "
" 야 ㅇㅇㅇ "
" ... "
" ... 그 "
" ... "
" 시간 있어? "
" ...어. "
" 지금, 만날래? "
*
오늘따라 세상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워 보인다.
저저귀는 새소리, 푸른 나무들, 뛰노는 아이들, 그리고 저멀리 보이는 ㅇㅇㅇ.
*
지금 시각 6시, 만난지는 꽤 지났지만 정작 아무것도 한 게 없었다. 한거라곤 고작,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누거나 피시방 아저씨의 뒷담화를 한다거나.
" 야 ㅇㅇㅇ"
" 어? "
" 떡볶이 먹으러갈래? "
분식집 안은 후덥지근했다.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는 주방의 열기에, 저 멀리 앉아 열띤 토론을 펼치는 아저씨들의 열기에, 에어컨은 고장이었다, 한마디로 개판이었다. 곧이어 얼마 지나지않아 떡볶이가 나왔고, 맛있게 먹는 ㅇㅇ의 얼굴을 보며 저절로 입가에 웃음이 지어지곤했다. 누굴 닮아서 저렇게 예쁠까, 아마 ㅇㅇ는 어머님을 닮았을 것이다.
내가 아는 ㅇㅇ의 아버님은,
아니다. 더이상 얘기하지 않겠다.
*
" ... "
" ... "
" ...날씨가 많이 덥다. "
" ... "
" ... "
" ...야. "
" 어? "
" 너 내가 진짜 좋아? "
" ···응. "
" 왜? "
순간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동안 내가 ㅇㅇ 이를 많이 좋아한다- 라는 것을 당연시하게 생각해버리면서, 내가 도대체 왜 ㅇㅇ 이를 좋아하는지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왤까, 내가 왜 ㅇㅇㅇ를 좋아할까.
" ...몰라. "
" ... "
" 그냥... 처음에 피시방에서 너 보고, 일부러 표 뽑는것도 모르는 척 하고, 일부러 피시방도 몇 번 더 가고, 화장실 안 가도 되는데 일부러 너 얼굴 보려고 키 받으러 가고, 형들이랑 피시방 갔을때도 일부러 컵라면 시키고, 되도않는 연기하면서 너 관심끌고... "
" ... "
" 그냥. 너 보고싶어서 피시방 문앞에서 기웃거린 적도 있고, 너희 아버지가 계실때는 게임 안 하고, 너 찾기도 하고, 번호도 따고 먼저 연락도 하고 ···. "
" ... "
" 그냥 어쩌다보니까, 내가 너를 엄청 좋아하더라. "
" ... "
" 근데 너는 나 별로 안 좋아하잖아. "
" ...왜? "
" 카톡 답장도 느리고, 대답도 잘 안해주고, 말투도 차갑고, 그냥 나 싫어해요- 관심 없어요, 티내고 있잖아. "
" ... "
" 버스왔다, 너 이거 타고가는 거 맞지? "
" ...응, 어떻게 알았어? "
" 그냥 한 번 찍어봤어. 버스 가겠다, 잘가. "
" ... "
*
오글거려 죽는 줄 알았다. 생전 고백이라곤 안해본 내가 도대체 무슨 말을 지껄였는지, 기억조차 잘 나지 않는다, 사실 말하는 중간중간 앞에있는 ㅇㅇㅇ의 멱살을 잡을 뻔 하기도 했다. 남자가 사랑을 하면 성격이 바뀐다는데, 지금 내 모습을 보니 얼추 맞는 말 같기도 하다. 비록 사랑이 아닌 짝사랑이긴 하지만.
*
" 에이 에이 비 ! "
" 아 시ㅂ.. "
" 빨리 손대, 빨리. "
" ... "
짝 !
" ... "
" 에이 에이 씨 ! "
" ... "
짝 !
" ... "
" 에이 에ㅇ...! "
쾅 !
" 다 닥쳐요, 시발. "
" 저 새끼는 요즘 싸가지는 어디다가 빼먹고 다니냐? "
" 그냥 둬요. 요즘 사춘기라 그래요. "
" 남준이형은 자기 고딩때는 생각도 안나나봐요? "
" 나보다는 정호석이 훨씬 심했어, 여자에 빠져가지고, 한심한 새끼. 이제 정신 차렸냐? "
" 왜 잊을만하면 얘기 꺼내고 지랄이야, 안그래도 요즘 새벽마다 생각나서 미치겠는데. "
" 왜요? 무슨일 있었어요? "
" ...왜, 걔 있잖아. 호석이 첫사랑. "
" ... 첫사랑이요 ? "
" 내가 아직도 걔 생각만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그래도 가끔 보고싶기도 하고. 그냥, 그렇다. "
" 왜요, 자세히 좀 얘기해봐요. "
" ... 그니까. "
*
아마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쯤이었을 것이다.
반에 남학생이 여학생보다 훨씬 많았던탓에 ' 여자 ' 라는 사람과 얘기를 나눌 여력이 잘 되지 않았다, 그 때 소문이 돌기 시작했었다. 전학생이 온다는 소문, 그것도 존나 예쁜 여학생. 사실 18살 가장 이성에 관심이 많을 나이였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 푹 빠진거겠지. 이게 뭔 개소리냐면 -
*
" 그래서 전학생 오는거 확실해 ? "
" 확실하다니까. 오늘 교무실에서 얘기하는 것 까지 봤다니까? "
" 예쁘냐? 가슴은, 커? "
" 존나 예뻐, 가슴은 ··· 봐줄만 해 "
수준떨어져서 도저히 같이 못있겠다. 이름도 모르는, 아니, 얼굴도 잘 모르는, 어쩌면 전학생이 아닐지도 모르는, 아니, 전학생이라고해도 그냥 아무 상관없는 여학생일 뿐인데, 어쩌면 저렇게 수준낮은 말들을 서슴없이 내뱉을 수 있는지, 참 신기했다.
" 야, 닥쳐 새끼들아. 뒤에서 그런 말 하면 좋냐? "
" 정호석 니가 웬일로 남한테 신경을 쓰냐? "
" 비꼬지마 병신아, 무식하면 가만히라도 있는게 상책이야. 꼭 그렇게 나 무식해요- 입에 걸레물었어요, 하고 티를 내야 직성이 풀리냐? 너 설마 남들 헐뜯으면서 희열을 느끼냐? 너 성적 취향이 그런 쪽이었구나, 몰랐네. "
" ... 얘 지금 뭐래냐. "
" 그냥, 입 털지 말라고, 존나 듣기 거북하니까. "
*
" 다 자리에 앉고, 전달사항 있다, 주목. "
저 영감 또 하염없이 인생얘기를 펼칠 게 뻔하다, 잠이나 자야지.
" 오늘 전학생이 왔다. "
" 여자 ? "
" 그래 이 새끼들아. "
그 순간 교실이 떠나갈 것 처럼 소란스러워졌다.
" 지금 밖에 서있는ㄷ.. 아, 들어오자. "
" ... "
" ... "
" ... "
" 어··· 이름은 ㅇㅇㅇ, ㅇㅇ다. 인사 좀 할까? "
" ... "
" ... "
" ... 어, 안녕하세요. 어, ㅈ, 잘 지냈으면 좋을거같아요, 아니, 아, 잘 지내요...! "
그 순간 아이들은 뭐가 그렇게 재밌다고 교실이 떠나갈듯이 웃어댄다, 저 여자애 표정이 꽤나 볼만했다.
방금 전까지 하얗다못해 창백해보이기 까지 했던 얼굴은 어느새 홍당무처럼 달아올라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고, 정신없이 굴러가는 눈동자, 어쩔 줄 모르고 꼭 쥐고있는 두 손, 조금 귀여웠다.
하필 내 옆자리가 비어있던 탓에 드라마처럼 전학생은 내 옆에 앉게되었고, 그 덕에 얘기도 몇 마디 나눌 수 있었다. 이름이 뭐고, 어디에서 왔고, 아는애는 있냐고, 교실 위치는 잘 아냐고,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나누다보니 시간이 꽤 많이 흘렀고, 조례가 끝났다는 담임의 말과 동시에 종이 쳤다. 친구들과 함께 반을 나왔을 때 혼자 어쩔 줄 몰라하던 ㅇㅇ의 모습이 눈에 밟혔지만, 친구들이 재촉을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그냥 가야했다. 아, 1교시부터 체육인데, 걘 어쩌지. 나오고 있으려나, 어딘지 모르는 거 아냐? 이렇게 ㅇㅇㅇ에 대해 나홀로 열띤 토론을 펼치고 있었을 때, 어느새 나는 교실 앞에 도착해 있었다.
예상대로 ㅇㅇㅇ은 교실에 홀로 앉아있었고, 내가 왜 그때 교실에 들어갔는지는 사실 아직도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
*
" ...너 안나오고 뭐해? "
" ...아, 시간표는 아는데 어디로 가야하는지 잘 모르겠어... "
" ... 너 친구 없어? "
" ... "
" 여자애들이 말 안걸어주냐? 짝수 맞는다고 좋아할 거 같은데. "
" ... "
" 뭐해, 나와. "
" ...어? "
" 체육복은, 있어? "
" 응... "
" 다 갈아입고 나와, 복도에 있는다. "
그냥 몇 마디 던진 것 뿐이었다. 짝꿍이니까, 오늘 전학 첫 날인 전학생인데, 그것도 내 짝꿍인데. 챙겨주는게 사람의 도리다. 그래, 그냥 전학생 한 명 도와주는 셈 치는거다.
이미 종이 쳐버린 시점에서, 기합을 받을 게 불보듯 뻔했지만, 왜인지 기분이 썩 나쁘진 않았다.
*
야자까지 모두 끝마친 후 집에 가려고 교문을 나서는 순간, 누군가가 내 팔을 살짝 당겼다, 놓았다.
" ... ㅇㅇㅇ? "
" 어... 저기 호석아, ㄱ,그, 혹시 어디살아? "
" ...나 탄소아파트 사는데. "
" 저기, 그... "
" 뭔데, 빨리말해. "
" 혹시 집에 같이갈 수... 있어? "
" ... "
" ...아, 내가 너무 오바했지, 미안해. 잘가 호석아. "
" 같이가자 그럼 "
*
ㅇㅇㅇ과 하교를 하는 길은, 표현할 수 없을만큼 어색했다. 공기의 흐름마저도 어색했다. 꽤 많이 걸어온 것 같은데도, 우리사이엔 어떠한 단어조차, 심지어 기침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차라리 김남준과 함께 하교를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 저기... "
" ... "
" 아까... 왜 나 도와줬어? "
" 그냥, 전학생이니까. "
" ... 그렇구나. "
" ... "
" ... "
그 이후로 어떠한 얘기조차 나누지 않은 채로 서로의 집에 도착했다, 아. 헤어질 때 인사정돈 한 것 같다.
엘레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그러고보니 내가 왜 ㅇㅇㅇ을 챙겨주었을까.
그동안 수많은 전학생들이 내 학창시절을 거쳐갔지만, 그 누구와도 엮이지 않았었다. 특히 작년의 그 여자전학생과는 반년 남짓한 시간동안, 그 어떠한 얘기도 나누지 않았었다. 몇개월동안 심경의 변화라도 생긴 것인지, 아니면 그냥 진짜로, 전학생이니까 도와준 건지. 내 마음이지만 나로썬 알 턱이 없었다.
*
" ...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는데. "
" 갑자기 뭔 말같지도 않은 소리에요? "
" 내비둬. 하루 이틀이냐. "
" ... 아니, 내 얘기 좀 들어봐. "
오늘 전학생이 왔다? 근데 막 친해졌어. 왜 친해졌는지는 모르겠는데,
근데 체육시간에 걔가 생각이 난 거야. 혹시 어딘지 모르는 거 아닐까? 이러면서.
그래서 병신같이 교실까지 가서 걔랑 같이 나갔다? 그리고 나서 야자 끝나고 집에 갈 때,
얘가 갑자기 집에 같이가자는거야. 그래서 알았다고 했지.
" ...그래서요? "
" 뭘 그래서야. 그랬다고. "
" 너 지금 이걸 무슨 의도로 들어보라고 한거냐? "
" 왜요, 나름 연애상담인ㄷ... "
" ... "
" ... "
" ... "
*
" 아, ㅇㅇㅇ 보고싶다. "
" ... 썸타냐? "
" 아니요, 썸 그 이상인데요. 곧 사귈지도 몰라요. "
" ... 좋겠네, 난 좋아하는 여자애랑 얘기도 많이 못 해봤는데. "
" 사실, 나도 좋아ㅎ... "
" ㅇ, 아. "
" ㅇ,야, 너네, 나 연애상담 비슷한 거, 그런 거 좀 해줄 수 있냐? "
열흘 동안,, 글을 쓰지 못했어요,, 쓰차가 방금 풀리는 바람에ㅠㅠ 혹시 제 글 기다리신 분 계세요...? 아마 안계실거에요ㅎㅎ... 아무튼 기다리신 독자분들 계시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오늘부턴 다시 많이 쓰도록할게요,,,ㅠㅠ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