츤데레 남사친과 능구렁이 남친 사이 2
24 (네 집으로)
'뭐, 어디서 하는 건데.'
'학교 근처 호프집….'
'아니 무슨…, 너희 과대 참 이상한 놈이네. 한 학기 다 지나간 마당에 이제와서 무슨 친목을 다져.'
'… 나도 이해가 안 되는데…, 왠지 스리슬쩍 빠지긴 눈치가 보여서….'
'…….'
'조금만 마실 거야. 어차피 나 술 잘 못 마시잖아….'
'잘 못 마시니까 아예 가지를 말아야지. 소주 몇 잔에도 헤롱헤롱거리면서 무슨.'
불과 몇 시간 전 김종인과 간단히 나눴던 대화의 내용을 떠올려 보았다. 예상대로 녀석의 목소리는 날카로웠고, 제법 정색을 해보이는 모습에 난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되는 양 고개를 푸욱 숙이고 있어야 했다. 사실 화를 내는 건 당연했다. 나도 어이가 없고 이해가 안 되는데, 김종인은 오죽할까.
며칠 전, 학과 대표에게서 문자 메시지 하나가 날아왔다. 첫 문장은 당연하듯 방학 생활에 대한 간단한 안부였고, 곧 있을 수강신청을 잊고 있을지도 모를 학생들을 위해 공지를 해주고자 보내온 문자 메시지겠거늘 아무 생각없이 문장들을 읽어내렸지만, 내 예상과는 완전히 빗나가 버리는 이상한 내용에 절로 인상이 찡그려졌다. 서로 얼굴만 알지 이름은 모르는 학생들이 대부분일 거라는 게 안타까워, 간단히 친목을 다지기 위해 이번 주 토요일 학교 근처 호프집에서 조촐한 모임을 갖자는 내용의 메시지였다. 이유는 제법 근사하고 디테일했지만, 분명 제가 심심하단 이유로 후배들을 불러내 술을 왕창 들이부을 속셈인 게 분명했다. 학과 대표인 그는 은근 독재자 같은 면을 지니고 있었다. 다른 이들의 의견은 조금도 반영하지 않은 채 무조건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제가 선호하는 쪽으로 문제를 해결하곤 했다. 과대라는 점을 이용해 알게 모르게 허세를 부리기도 했고, 다 아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저것 가르치려들며 은근슬쩍 시비를 걸어오기도 했다. 그에게 있어, 과대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은 가득 차고도 넘쳤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학과를 대표하는 학생으로 뽑혔는지가 가장 의문이었다.
되도록이면 모두 참석을 해달라, 개인적인 사정이 있어 참석을 할 수 없다면 꼭 연락을 남겨달라-. 제법 배려를 해주는 듯한 문장엔 의미 모를 위압감이 느껴졌다. 참석을 안 하는 사람에겐 왠지 불이익이 있을 법한…? 정말이지 짜증이 났다. 누가 뽑은 건진 모르겠지만, 학과 대표 참 잘못 뽑은 것 같다.
"……."
말했다간 분명 화를 내며 반대할 것 같아, 김종인에겐 쉽게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냥 몰래 갔다와 버릴까, 그냥 조용히 슬쩍 다녀와 버릴까 생각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좀 아닌 것 같아 황급히 마음을 고쳐 잡아야 하기도 했다. 그렇게 머뭇거리기를 며칠, 하는 수없이 김종인에겐 당일인 오늘 말을 꺼내놓았다. 그걸 왜 이제 말하냐, 또 뭐라 할까봐서 일부러 말을 안 하고 있던 거 아니냐- 라며 무작정 화를 내기보단, 그저 그 사실만을 중점으로 둔 채 정색을 해보이던 녀석은 당연하듯 완강히 반대를 했다. 술을 싫어할 뿐더러 그런 장소나 분위기를 꺼려하는 녀석이었기에, 그건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없이 참석은 해야 할 듯했다. 고작 술 모임 한 번 나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레 얻어 먹게 될 눈칫밥을 생각하니 제법 끔찍하게만 느껴졌다. 김종인은 반대를 했지만, 난 꿋꿋이 밀어붙였다. 무사히 다녀오겠다며, 술은 어차피 조금만 먹을 테니 신경 쓰지 말라며 말이다.
'장소 알려줘. 끝나면 데리러 가게.'
가지 말라며 말리는 제 말에도 끝까지 고집을 부리는 내 모습에 깊은 한숨만을 내쉬던 김종인이 딱딱하게 말했다. 표정은 딱 보기에도 어두웠다. 마지못해 허락을 해준 것이라 그런지, 녀석은 왠지 모르게 답답함과 찝찝함을 느끼고 있는 것도 같았다. 그런 녀석을 바라보며 웅얼거리듯 정확한 장소와 시간을 말해주곤, 다시금 안심시켜주듯 재차 강조해 말했다.
'절대 많이 안 마셔. 어차피 난 잘 못 마시니까….'
데리러 갔는데 엄청 취해 있기만 해. 벽 보면서 손 들고 있으라 할 거야. 분명 딱딱한 말투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멘트는 정말이지 귀엽게 느껴졌다. 새끼손가락을 걸어 약속까지 하고 나서야 조금은 안심이 된 건지, 김종인은 이내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잘 다녀와. 중간중간 나한테 상황 보고 좀 많이 하고. 헤어지기 바로 직전까지도 녀석은 신신당부를 해왔다.
멍하니 김종인에 대한 생각을 되짚고만 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정말 가기 귀찮다. 아니지, 귀찮은 게 아니라 싫은 거지. 가기 싫다, 정말. 걸음을 떼면 뗄수록 점점 커지기 바쁜 마음속 불평불만들에,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그리곤 제법 굽이 높은 하얀 샌들을 꺼내 발을 집어넣었다. 왠지 지극히도 피곤한 저녁이 될 것만 같았다.
*
"마셔라! 마셔라 마셔라!"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들려오는 목청 큰 소리에 살짝 미간을 좁히곤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언뜻 보기에도 사람은 많았다. 크나큰 사각 테이블 하나엔 대략 여덟 명의 사람들이 둘러 앉아 있었고, 이미 아까부터 마시고 있던 건지 빈 술병이 덩그러니 올려져있는 테이블도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술을 마시는 건 정말이지 별론데. 친한 사람들과 마시는 자리도 아니고 불편하기 그지없는 학과 선후배들이랑 마시는 자리라면 더더욱-. 불만 아닌 불만을 곱씹으며 그나마 한산해 보이는 테이블 쪽으로 가 살며시 자리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선배!"
"응? 어… 아, 안녕."
"우리 고전시가론 수업 같이 들었잖아요! 맞죠?"
자리에 앉아 뻘쭘히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바로 옆자리에 앉아있던 여학생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얼굴은 익숙한 것 같은데, 미안하게도 이름은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래, 그랬지…. 어색히 웃으며 최대한 아는 척을 해보이자, 생긋 웃으며 빈 잔에 소주를 채워준다. 굳이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과대 오빠 좀 웃기지 않아요? 친목 도모는 무슨…."
"… 그러게."
투명한 액체가 가득 채워진 술잔을 묵묵히 내려다보다 작게 대답을 했다. 내가 학과 모임을 가있는 동안 김종인은 오세훈의 자취방으로 가 저녁을 얻어 먹고 있겠다 했다. 지금쯤 아마 오세훈을 만났겠지. 나도 같이 있고 싶다. 나도 같이 밥을 먹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선배! 건배해요, 건배!"
제 맥주잔을 들어보이며 신이 난 목소리로 말을 해오는 여후배를 바라보다 어색히 잔을 집어 들었다. 조그마한 소주잔과 크나큰 맥주잔이 짠- 소리를 내며 허공에서 부딪혔다. 첫 잔은 원샷이에요, 선배-. 꽤나 당돌한 멘트를 뱉으며 꽉꽉 채워져있던 맥주를 단숨에 꿀꺽꿀꺽 들이키던 후배가 제 윗입술에 묻은 거품을 혀로 훑었다. 선배, 왜요? 넋 나간 얼굴로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다, 다시금 나를 불러오는 목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젓곤 억지로 소주잔을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그리곤 눈을 질끈 감은 채 절반가량 되는 양을 입에 머금었다. 아무래도 원샷은 무리지-. 쓰디쓴 술이 목구멍을 따갑게 만들었고, 식도는 불이라도 붙은 양 뜨거웠다.
"야야, 새로 온 사람! 다들 출석체크 했어?"
정말이지 치밀하고 철저했다. 자기가 교수도 아니고 웬 출석체크야. 아니 그보다, 이게 중요한 행사를 위한 필수적인 모임도 아니고 그저 술 모임일 뿐인데 웬…. 아직 안 온 애들 연락 좀 때려 봐-. 제 옆에 앉아있던 부과대를 툭툭 치며 말을 건네던 과대가 이내 박수를 세 번 쳤다.
"자, 다들 집중!"
그의 크나큰 한 마디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원체 이런 분위기를 즐기는 듯 보이는 그는 이내 흡족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우리 과는 다른 과에 비해 선후배 간 이런저런 모임을 가졌던 적이 너무 없는 것 같아요. 원래 종강 날로 예정을 잡아 놨었지만, 예상치 못한 사정으로 인해 이렇게 방학 중간에 여러분들을 부른 겁니ㄷ…"
"개강 후에 모여도 괜찮았을 것 같지 않나요?"
"개강 후엔 다들 바쁘다는 핑계로 안 모였을 거잖아요. 여러분들끼리의 친목 도모와 우리 국어국문학과의 단합을 위해 어렵게 마련한 자리니, 불만 있으신 분들은 조용히 전과를 해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럼 이만."
저게 뭔 개소리냐. 개 짖는 소리 하네, 왈왈-. 여기저기서 장난 섞인 말들이 오갔다. 그럼에도 아랑곳 않은 채 싱글벙글 웃으며 테이블 위에 놓인 과자를 집어먹던 그는 이내 다시금 술게임에 집중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런 한심한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곤 애꿎은 휴대폰 홀드를 열었다 닫았다. 사실, 이런 자리가 내겐 너무도 어색하게 느껴졌다. 휴학을 하고 온 뒤라 친한 사람도 얼마 없을 뿐더러, 그나마 가깝게 지내던 여선배는 하필 해외여행 중이라 이 자리에 참석도 하지 않았다. 고로, 난 지금 대화를 나눌 상대가 없었다. 도경수 선배는 아예 안 나올 생각인 건지, 20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모습을 비추지 않았다. 그는 아니라 생각할지 몰라도 내겐 가장 친한 선배인데….
[선배, 오늘 술자리 안 나오세요?]
화면이 어두워질 때까지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전송 버튼을 눌러버렸다. 그나마 마음이 가장 잘 맞는 도경수 선배라도 있어야 조금은 편할 텐데-.
"야, 인마! 소맥은 그 비율이 아니라고! 황금비율 모르냐? 와씨, 네 놈은 인생을 존나 헛 사셨어요-."
친목 도모는 무슨, 그저 자기네들끼리 놀자판을 벌이고 있는 셈이었다. 시끌벅적한 바로 옆 테이블에선 술게임이 한창이었다. 마신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벌써부터 테이블 위는 엉망진창이었다. 술이 아직 반이나 넘게 남은 소주병은 테이블의 끝에 위태롭게 놓여있었고, 안주로 나온 과자들은 이미 그릇을 탈출한 채 누군가의 팔꿈치에 눌려 부스러기가 되어 있었다. 그 모습을 한심하게 지켜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눈칫밥을 먹어도 좋으니, 그냥 나오지 말 걸 그랬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 아."
누군가 내 앞을 지나감과 동시에 옅은 담배 향이 풍겨와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시선이 향한 곳엔 까만 야구모자를 푸욱 눌러쓴 도경수 선배가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걸음을 옮겨 내 맞은 편 자리에 털썩 앉은 그가, 제게 향해있는 내 시선을 느낀 건지 이내 나와 눈을 맞춰왔다.
"… 안녕하세요."
"문자 보냈었네."
"네? 아…, 방금요."
내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옆에 놓여있던 소주병을 들어 빈잔에 술을 가득 채우기 시작한다. 술 잘 마셔요? 의아한 듯 묻는 내 목소리에, 그는 애매모호한 답을 뱉었다.
"몰라."
단숨에 한 잔을 들이킨 그가 무심히 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자니 괜히 머쓱해지는 것도 같아, 내 앞에 놓인 소주잔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테이블에 놓인 그의 잔에 건배를 하듯 조심스레 내 잔을 맞대곤 어색히 쭈욱 들이켰다. 알코올이 안에 퍼지기 시작함과 동시에 몸이 뜨끈하게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
두어 시간이 지난 지금, 이 곳은 난장판이나 다름 없었다. 몇몇은 자꾸만 토악질이 올라온다며 수십 번도 넘게 화장실을 오갔고, 또 몇몇은 테이블에 엎드린 채 깊은 잠을 청하고 있었다.
"아, 미친…. 과대 지금 변기 앞에 잠들었다."
"야! 씨발! 휴지 좀 가져와! 이 새끼 의자에 토한다!"
"폰이 어디 갔나 했더니 변기통 속에 들어 있었어. 그저께 바꾼 폰인데…. 나 이거 울어도 되는 부분?"
시끌벅적한 옆 테이블을 흘끗 바라보다 맥주잔을 들어 입술을 적셨다. 지금 이 상황에 정상인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물론 나도 정상은 아니었다. 예상보다 술을 많이 마셔버리는 바람에 머리가 어지러웠고, 자꾸만 혀가 꼬여 발음을 제대로 하기조차 힘겨웠다. 많이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난 따라주는 술을 모두 받아 먹고 있었다. 김종인이랑 분명 약속 했는데, 많이 마시지 않기로-. 그러나, 어질어질한 머릿속에 김종인과 했던 약속은 이미 없어져 버린 지 오래였다.
"자, 손병호 게임! 나부터 한다! 여자들 다 접어!"
꽤나 비실비실하게 생긴 남자 선배가 안경을 고쳐 쓰며 큰 소리로 외치듯 말했다. 그의 한 마디에 안 그래도 어수선하던 주위는 더욱 시끄럽게 변했다. 그리곤 얼마 안 있어 슬슬 딸꾹질이 나오려는 것도 같아 입을 꾸욱 다물며 묵묵히 그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내 앞으로 물컵 하나가 놓였다. 슬쩍 시선을 들어 바로 앞에 앉아있는 도경수 선배를 바라보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는 조용히 소주를 홀짝이기만 한다.
"오오…, 내가 딸꾹질 참고있는 건 어떻게 알아써여? 고마어여, 선배."
물컵을 들어 차디찬 물을 쭈욱 들이켰다. 차가운 물이 지나간 자리는 정말이지 시원함이 느껴졌다. 마치, 가뭄으로 쩍쩍 갈라진 땅에 비가 줄기차게 쏟아져 내리는 듯한….
"아직 버진 못 뗀 사람 접어!"
변기 앞에서 잠이 들었다더니 도대체 언제 돌아온 건지, 과대가 손을 들며 큰 소리로 말했다.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이쪽저쪽에선 욕지거리들이 터져 나왔다.
"선배애…, 버진이 뭐예요? 버진을 떼는 게 뭐지요? 스티커 같은 건가…."
"몰라도 돼."
난생 처음 들어보는 단어에 인상을 찡그리며 도경수 선배에게 물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단호하기만 했다.
"그럼… 인터넷 검색 찬스!"
뭐 대단한 것이라도 꺼내 보이듯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을 쏘옥 꺼내 그에게 흔들어 보였다. 그러나, 그런 내 모습에 더욱 정색을 해보이던 그가 손을 뻗어 내 행동을 제지해오는 바람에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어야 했다. 몰라도 된다니까. 낮고도 딱딱한 어투에 입술을 삐죽 내밀어 보였다.
"아, 맞아. 저어-기 경수형 앞에 앉아있는 애, 쟤 남친 있는 것 같았어."
"그래, 그래. 저번에 남친이 학교 앞으로 데리러 왔던 것 같기도?"
"후배야! 네 연애 얘기 좀 해주라-. 원래 그런 건 같이 공유하는 거야."
"남친은 무슨 학과야? 자주 만나는 편이야?"
"야, 그런 식상한 질문을 왜 하냐."
"그럼 뭐가 안 식상하냐. 미친놈아, 네가 해 봐."
"남친이랑 관계는 일주일에 몇 번 가져? 남친 테크닉은 좋냐?"
이런저런 말들을 건네오는 남자 선배들의 목소리가 어지럽게 섞였다. 복잡한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지는 것만 같았다. 정신이 헤롱헤롱한 탓에 그들이 던져오는 질문들이 무슨 의미를 담고있는 건지, 그들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물음들을 건네오는 건지 제대로 파악을 할 순 없었지만, 그다지 좋게 들리지만은 않았다. 좋지 않은 질문들이라는 건 분명한 사실인 듯했다.
"저어…,"
"뭐? 뭐라고?"
"종이니 만나러 가께여…."
"종이니? 종인이? 남친 이름? 후배야, 네 남친 종인이는 낮져밤이냐, 낮이밤ㅈ…"
"씨발."
낮게 울려퍼진 욕지거리에, 시끌시끌하던 주위가 순식간에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모두의 시선이 도경수 선배에게로 향했다. 제법 당황한 기색을 내비치는 그들과는 달리, 욕을 내뱉은 당사자의 얼굴엔 어떠한 표정도 걸려있지 않았다.
"……."
한참을 침묵으로 일관하던 그가 느리게 눈을 꿈뻑이는 듯싶더니, 이내 도톰한 입술을 뗐다. 나를 향해 이상한 질문들을 해오던 그들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수준 한 번 더럽게 낮다."
"……."
"여긴 무슨, 발정난 새끼들만 모아놓은 소굴인가."
"……."
"주둥이에 걸레 물었어?"
"……."
"나불거리는 수준 하고는."
"……."
"네 새끼들 머릿속엔 그런 생각밖에 없지."
"……."
"그딴 더러운 말들 주고받는 게 뭐가 그리 재밌다고 지들끼리 웃고 지랄인 건지, 난 이해를 못하겠다."
"……."
"성희롱이야, 그거. 듣는 사람 생각은 안중에도 없으신가 봐."
"……."
"같은 학교, 같은 강의실에서 같은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게 존나 쪽팔린다."
"……."
"테크닉? 낮져밤이?"
"……."
"씨발, 뭔 같잖은 소릴 지껄이는 거야."
"……."
"남의 남자 테크닉이나 조사할 시간에 니들 테크닉이나 길러, 좆 같은 새끼들아."
나와. 마지막으로 내게 한 마디를 건네던 그가 미련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호프집을 나섰다. 한 차례의 폭풍이 지나간 것도 같이, 주변은 몰라보게 조용해졌다.
"……."
슬쩍 눈치를 살피다 살며시 가방을 챙기곤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걸음을 떼는 것조차 힘겨울 만큼 몸이 휘청거렸지만, 애써 정신을 다잡으려 눈을 여러 번 꿈뻑이곤 호프집을 나섰다. 밖으로 발을 디딤과 동시에 숨이 탁- 트이는 것만 같았다. 빨갛게 달아오른 볼에 찬 바람이 스쳤다. 그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 보고만 있다 문득 고개를 돌려 보았다. 홀로 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그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아무렇지 않게 꽁초를 비벼 껐다. 잔뜩 짓이겨진 담배 꽁초를 대충 발로 밀어내던 그가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남자친구한테 연락해. 데리러 오라고."
"… 종이니…. 맞아, 종이니가 데리러 온다고 해써여-."
무뚝뚝하게 들려오는 그의 말에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곤 휴대폰을 꺼내 홀드를 열었다.
"도선배…, 이거가 왜… 안 열리죠? 자꾸 틀렸대…. 종이니 생일 1월 14일 맞는데, 휴대폰이 자꾸 아니라고 해여…."
칭얼대는 듯한 내 모습에 작게 한숨을 내쉬던 그가 내 손에서 휴대폰을 쏘옥 가져가 비밀번호를 대신 입력해 주었다.
"오오, 풀려써!"
잠금을 풀어주는 것도 모자라 아예 전화까지 직접 걸어 내게 휴대폰을 건네주는 그에게 잊지 않고 고맙다는 멘트를 건네곤,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 여부세여? 조닝아!"
휴대폰 너머로 김종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꽤나 취기가 어린 내 말투에 그저 빨리 데리러 오겠다는 말만을 건네오던 녀석은, 어디 가지 말고 거기 가만히 있으라며 재차 강조를 해왔다.
*
금방 오겠다던 김종인은 약속대로 정말 순식간에 모습을 비추었다. 녀석이 올 때까지 묵묵히 내 옆에서 밤하늘을 올려다 보고만 있던 도경수 선배는, 저 멀리 익숙한 차 한 대가 보여옴과 동시에 방방 뛰며 좋아라하던 내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저 없는 동안 챙겨 주셔서-."
간단히 그와 대화를 나누던 김종인이 내 어깨를 감싸안곤 조수석 문을 열어 조심스레 나를 태웠다. 술 기운에 머리는 어질어질, 속은 울렁울렁-. 정말이지 미칠 것만 같았다. 그리곤 얼마 안 있어 녀석이 운전석에 올라탔다. 차 안의 탁한 공기가 나를 짓눌러오는 것만 같아, 작게 인상을 찡그렸다. 바로 옆에선 김종인의 그윽한 시선이 느껴졌다.
"아가씨."
"……."
"술 조금만 마시겠다더니, 왜이리 취했어."
"… 미아안…."
"미아안?"
"네…."
"얼마나 마셨어. 몸도 제대로 못 가눠, 혀도 꼬여-. 난리났네."
"난리나따~"
제 말을 따라하며 웃어보이는 내 모습에 덩달아 피식 웃음을 짓던 김종인이 내게 가까이 다가와 볼에 입을 맞춰왔다. 자세한 얘기는 내일 하자. 낮게 중얼거리던 녀석이 이내 시동을 걸곤 운전대를 잡았다. 나름 크게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예상 외로 녀석은 평온하기만 했다. 그저 안전벨트를 꼬옥 잡은 채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다, 슬쩍 고개를 돌려 녀석에게 시선을 옮겨놓았다.
"운전하는 모습도 잘생겼대여~"
"……."
"조니야, 지금 어디 가? 조니네 집?"
"너희 집."
"우리 집? 조니도 우리 집?"
"난 내 집 가야지. 너 재우고."
"나도 조니 집 같이 갈게."
"어쭈."
"어쭈!"
"같이 자려고?"
"네에-."
"우리 집에서 자면 불편하잖아. 네 집에서 편하게 자야지."
"불편하다니…. 하지만 종이니랑 헤어지기 싫어서, 어쩔 수없어."
"나랑 헤어지기 싫어?"
"네!"
"미치겠다."
"미치게써? 종이야, 미치면 안 되는데에-."
"너야말로 자꾸 그렇게 귀엽게 나오면 곤란해."
푸스스 웃으며 유연히 핸들을 돌리던 김종인이 슬쩍 고개를 돌려 내게 시선을 주었다. 너랑 같이 자면 내가 밤에 잠을 설쳐-. 의미 모를 말을 중얼거리는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지만, 온몸을 지독히 지배하고 있는 술 기운 탓에 금방 잊어버리게 되었다.
"아, 깜짝…."
"종이니는 얼굴도 잘생겼고, 몸매도 좋고, 성격도 좋아여-."
무심결에 손이 김종인의 허벅지 쪽으로 향했다. 허벅지를 톡톡 치며 낯간지러운 말을 웅얼거리자, 갑작스러운 내 손길에 살짝 놀란 건지 녀석이 이내 얼떨떨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 손."
"손."
"그, 뭐냐. 손이…"
"이건 손이고, 이건 손꾸락이야아-."
"… 운전에 집중 좀 할 수 있게 해줘."
그저 앞 유리에만 시선을 둔 채 더듬거리듯 말을 내뱉던 김종인이 작게 인상을 찡그려 보였다. 설마 화가 난 건가 싶어 입술을 삐죽 내밀곤 울상을 지어보이자, 녀석이 한숨을 길게 내쉰다.
"종이니가 화가 나따…."
술에 취하면 난 영락없이 어린아이가 되어버리곤 했다. 그것도, 아주 철이 없는 꼬마아이로 말이다.
*
결국 김종인의 집에 도착하고야 말았다. 굳이 같이 가겠다며 떼를 쓰던 내 모습을 녀석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싶은 창피한 마음이 뒤늦게 밀려오는 것도 같았다. 그 뜻은, 슬슬 술에서 깨어나 정신이 맑아지고 있다는 증거겠지. 그러나 머릿속은 여전히 어지러웠다.
"여기는 김조닌 집입니다아-."
현관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김종인의 허리를 뒤에서 꼬옥 끌어안은 채 히죽히죽 웃음을 지어보이며 말하자, 녀석 또한 웃음을 터뜨려 버린다. 들어가자. 제 허리에 둘러진 내 팔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천천히 안으로 발을 디디던 녀석이, 이내 무릎을 굽히고 앉아 내 발에 신겨진 샌들을 벗겨 주었다.
"발톱에 분홍색 매니큐어 뭐야, 귀엽게."
"종이니에 대한 내 마음도 분홍색이지여-."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워왔어."
"독학~"
배싯 웃어보이며 까치발을 들어 도톰한 입술에 여러 번 입을 맞추었다. 그런 내 행동에 살짝 굳어있던 김종인이, 이내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왔다.
"이런 모습 보려면 매일 술을 먹여야 하나."
"이런 모습이 뭐야아."
"귀여운 모습."
"에엥."
"네가 술 마시는 건 싫은데, 취한 모습은 보고 싶어."
"……."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
"네에…."
"마실 거면 내 앞에서만 마시란 소리야."
"네, 그럴게여!"
눈을 크게 떠보이며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그런 내 모습에 연신 웃음을 짓던 김종인이 이내 나를 꼬옥 끌어안아왔고, 넓디 넓은 녀석의 품에 갇힌 난 조용히 바동거리기만 했다.
"좋은 냄새 나, 종이니한테서."
"너한테선 술 냄새."
"… 술을 마셨기 때문이야!"
"그치."
"우웅-."
"그래도 좋아."
그래도 좋다는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부드럽게 박혀왔다. 그 한 마디에 괜히 기분이 좋아져, 입술을 동그랗게 모아 넓은 가슴팍에 입술을 맞대었다. 맨살이 아닌 셔츠의 위였던 탓에 원하는 쪽- 소리가 나지 않아 조금은 아쉬웠지만, 아무렴 상관은 없었다.
"… 안 돼, 자꾸 이러면."
"왜! 나도 종이처럼 뽀뽀 귀신이 될 거야아-."
살며시 김종인의 품에서 빠져나와 헤실헤실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리곤 다시금 까치발을 들어 녀석의 볼과 입술, 턱에 입을 맞추었다. 그런 내 행동에 녀석은 제법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지만, 그럼에도 아랑곳 않고 난 자꾸만 뽀뽀를 퍼부었다. 다가올 일은 조금도 생각지 않은 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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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은 불 마크입니다. 비회원 독자분들도 보실 수 있도록 메일링을 하거나 텍파를 첨부할 생각인데요. 여러분의 의견을 따르고 싶어요. 메일링은, 제가 댓글을 확인하는 대로 직접 보내야 하는 것인 만큼 속도가 느리겠죠..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요.. 느린 걸 감안하고 그냥 메일링을 할까요, 아님 텍파를 첨부할까요? 여러분들이 선택해 주세요! 전 아무거나 상관 없으니까요 :)
벌써 또 한 주가 마무리 되어가네요.. 남은 일요일 알차게 잘 보내시고, 행복한 일주일을 맞이하시길 바라요 ;-)
* 암호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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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 핫초코 / 해피 / 햄버거 / 행쇼 / 허니잼 / 형광등 / 호이호잇 / 훈훈 / 희망 / 히밤
[영어] DB /dprth8391 / HaMo / YUNE
[숫자] 0408 / 0616 / 0618 / 0622 / 1226 / 3관왕센 / 500원 / 84니니
[특수문자] #두근
분명 암호닉을 신청한 것 같은데 목록에 내가 없다, 하시는 분들 몇몇 계실 거예요. 그런 분들은 아마 암호닉 정리할 때 자기 암호닉 언급을 안 해주신 분들이거나, 제 실수로 누락되신 분들입니다.
난 분명 15화에 암호닉생존신고or신청을 했는데 누락됐다, 하시는 분들 계시다면 꼭 말해주세요 :)
당분간 암호닉 신청은 받지 않을 생각이에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