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탄소년단/김남준] 그가 쓰려던 이야기 00 | 인스티즈](http://file2.instiz.net/data/cached_img/upload/201509050/fa3a1647cadb8a4842ec496ae0964505.jpg)
비가 한참이나 쏟아집니다. 누추한 이곳까지 몇 번이고 찾아와 문을 두드리셨을 때는 조금의 틈 조차 열지 않던 제가 이제야, 이렇게 글로 얼굴을 뵙고자 함은, 시간이 충분이 흘렀다는 생각에, 그 누구도 더이상 그를 그저 그런 일이 있었지, 하는 흐릿한 느낌 이상으로 기억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제가 이 작은 방에 스스로를 수 많은 눈들로부터 지켜내야 하는 때가 지났는 지도 모릅니다. 어째서인지 당신만큼은 나와 그를, 우리를 잊지 않았는지 모르겠어요. 시간은 빠르게 달려가고, 세상은 그보다 빠르게 변합니다. 이미 떠난 그도, 남은 저도 미디어에 의해 과거에 묶인 사람들인데 말이죠. 모두가 더이상 돌아보지 않을 과거에서 천천히 색이 바래 채도가 낮아질 대로 낮아져 배경과 그다지 다를 것도 없는 그런 사람들인데 말입니다. 그런 우리들을 잊지 않은 당신에게 과거의 이야기를 좀 풀어볼까 합니다. 처음이지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이야기들 입니다.
처음으로 돌아가기 전에 그가 새 이름을 받은 날의 이야기를 먼저 하고 싶습니다. 평생 불렸을 이름 석자를 대신할 숫자 여섯자가 그는 쉽게 적응이 되지 않는다 했습니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여 말 없이 두어번 쯤, 가슴팍의 숫자가 적힌 빨간 명찰을 쓰다듬었어요. 그가 쓰다듬을 때마다 그의 가슴에도, 제 가슴에도 씻을 수 없는 생채기가 남았습니다. 그리고는 한참을 울다 지쳐 눈이 잔뜩 짓무른 내게 마치 새로운 학교라도 들어간 듯 교도소 생활을 참 가볍게 이야기 했어요. 하지만 그의 눈 밑으로는 며칠이고 잠을 설치며 곱씹었을 그 날이 그늘로 걸려있었습니다. 며칠새 야위어 푹 꺼진 볼과 깊어진 눈매가 그 깊이의 곱절만큼 가슴께를 짓눌렀지만 저 또한, 못 본 새에 더 섹시해졌다며 마주 웃었어요. 분명 웃고 있는 제 얼굴로는 눈물 줄기가 내내 흐른 것 같지만 저는 더이상 눈물이 특별한 일이 아니었고, 그는 제 눈물에 함께 짓무르는 마음을 숨겨두었습니다. 우리에겐 그다지 시간이 많지 않았어요. 그래도 별 다른 이야기를 하진 않았습니다.
"머리에 철가루 올라왔다, 뿌리염색 해줘야 되는데"
"아무리 봐도 은색은 양아치 같아"
"취향이야, 협조 좀 해줘"
"얼씨구, 알았네요"
"야채가게 김할매가 젊은 총각 안 데려오면 콩나물 서비스 안 준대"
"왜? 그런게 어딨어"
"그러니까"
"할매 그렇게 안 봤는데 치사하네"
"그치?"
"응"
"그러면서 조금 있으면 냉이 들어온다고 너무 늦지 않게 오래"
"응, 그럴게"
"너무 늦지 않게 와"
"응, 그럴게"
그가 아무리 늦어도 돌아올 수 없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었어요. 그래도 그는 대답했습니다. 응, 그럴게. 오지 않을 미래라는 것을 너무 잘 알아서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혹은 서로에게 이루어질 수 없는 미래라도 말로 내뱉어 헤어짐의 순간을 잠시라도 잊고 싶었는지도 몰라요. 우리는 그렇게 한동안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들과, 절대 오지 않을 미래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심지어는 배낭여행을 가자는 이야기까지 했어요. 어디서 출발해서, 어디를 거쳐서,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들. 그런 이야기들이 마약처럼 잠시나마 짓무르고 곪아터진 속을 잊게 해주었습니다. 물론 약에서 깨면 그보다 더 가중된 통증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괜찮았어요. 시간이 별로 없었으니까. 몇 마디 쯤 나누었을까, 버저가 울리면서 교도관이 의자 끄는 소리와 함께 일어났습니다. 그의 팔을 억세게 잡고 일으켜 세웠어요. 그때 쯤엔 더이상 눈물로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지만, 우리는 마주 웃었습니다. 그리고 입모양으로 말 했어요.
'남준아, 너무 늦지 않게 와'
'응, 그럴게'
그게 그와 내가 나눈 교도소의 첫 기억입니다. 교도소 문을 뒤로 하고 겨울 바람을 크게 들이마신 순간 저는 그대로 의식을 잃었습니다. 의식을 잃기 직전 거대한 파도처럼 몸을 덮친 시멘트 바닥의 냉기는 그를 처음 만난 날의 그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어요.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저 안에 있어야 하는 건, 역시 '해방촌 연쇄살인마' 김남준이 아니라 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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