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봄 그리고 이별 - 01 첫 만남
춥다. 운행시간이 끝난 줄도 모르고 계속 기다린 버스정류장에는 종이컵 안에서 꽁꽁 얼어버린 커피와 누가 두고 간지 모를 가죽장갑 한 짝이 플라스틱 의자에 놓여있었다.
한 시간에 한 대씩 운영하면서 막차가 다섯 시라니, 참 갑갑한 곳이다.
눈 위에 가만히 서 있으니 발이 차갑게 굳어버려서 동상에 걸리면 어쩌나 싶어 애써 발가락을 움직였지만 근육들이 느리게 반응할 뿐이다. 오지도 않을 버스 기다려서 뭐하나. 빨개진 손을 호호 불어가며 일단 걸었다. 사람의 때가 타지 않은 눈 위로 뽀드득 뽀드득 발자국이 생긴다. 가면 갈수록 길은 좁아져 승용차 한 대가 겨우 다닐 수 있을 만큼의 넓이가 되었다. 인도도 없네. 가로등의 간격도 점점 멀어지는 것 같다.
도대체 여긴 어디지, 난 정말 맞게 찾아온 걸까. 막막해져갈 무렵 길 끝에서 따뜻한 색의 빛이 보였다. 집이다. 그것도 아주 큰.
이름도 없는, 조용한 집은 생각보다 대문이 컸다. 그러니까, 있는 힘껏 점프해도 어림없는 그런 크기다. 먼지가 그득하고 녹슬어버린 문과는 다르게 누구를 기다리기라도 하는지 말끔히 닦인 새하얀 초인종이 보였다. 이젠 따가울 정도로 얼어버린 손가락으로 벨을 누르고서 한참 후에야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밤에 잠긴 목소리.
"방 얻으러 왔는데요."
*
자는 도중에 깨웠는지 부스스하게 뜬 머리에 이제 막 붓기가 돌기 시작한 눈으로 나를 맞은 집 주인은 생각과는 다르게 젊은 남자였다. 아니, 어린 남자.
거실 전체가 환하게 되어 눈이 부시는게 싫었는지 혹은 그 덕분에 잠이 깨는게 싫었는지, 현관 복도에 멈춰선 남자는 천장이 아닌 벽에 붙어있는 작은 백열전구를 켰다. 덕분에 전구의 노란 불빛만이 남자와 나의 얼굴을 비춰주었다.
조곤조곤 도는 대화에 중요함은 없었다. 간간히 입을 가리고 작게 하품을 해대던 남자는 이제 더 이상은 무리인지 먼저 등을 져 걸었다.
"왼쪽 두 번째 방으로 들어가세요, 혼자 쓰기에 적당해요."
"아, 근데요…….식사는……."
"아.......따로 방까지 가져다 드리진 않는데. 대략 아침 7시, 점심 12시 드시고 싶으시면 부엌으로 오세요. 항상 그 때 먹으니까……."
이게 아닌데, 제대로 찍혔겠다. 만나자마자 밥 타령이라니. 오늘부터 내 이름은 오세훈이 아니라 오거지다 젠장.
끝 방에 이미 사람이 머물고 있다는 남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어두워서 방까지 안 다치고 갈 수 있을까 걱정을 했는데 아무래도 방금 현관에서 킨 전구는 집 안 곳곳에 이어져있는 듯 했다. 참 배려 좋은 집이네. 문 앞에 도착하니 작게나마 코고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옆방이다. 남자인가. 내심 여자가 있길 기대했는데.
부드럽게 열리는 문 앞에는 싱글 침대와 침대 옆 작은 서랍, 그 위에 창문, 그리고 하얀 책상과 욕실 문이 보였다.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방의 크기에 살짝 미소를 띠고 침대에 반쯤 걸터앉아 상체만 누웠다. 피곤하다. 이대로 잠들어버릴 것 같아. 그리고 나는 눈을 감았다.
*
꿈을 꿨다. 아주 뜨거운 불구덩이에 들어가 허우적대는 꿈. 평소와는 다르게 눈이 번쩍 떠지며 잠에서 깼고, 집이 아니라는 것에 몸을 일으켜 당황하다가 어젯밤 일이 생각나 천천히 누웠다.
"가만, 근데 나 어제 이렇게 잤나?"
어쩐지 머리는 베개에 이불은 몸 위에, 게다가 침대가 몹시 뜨겁다. 저녁에 푹신해서 못 느꼈는데 밑에 전기장판이 깔려 있나보다. 누가 날 이렇게 얌전한 자세로 옮겼지, 힘은 좋은가보네.
붕 떠버린 뒷머리를 쓸듯 털어냄과 동시에 문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쿵쾅쿵쾅 아주 큰 발소리, 혹은…….
"야! 일어났냐? 밥 먹어 그지야."
내가 앞으로 고생할 소리거나.
*
아까부터 귀가 따갑다. 이 인간은 쉬지 않고 떠들어대는 게 취미인 것 같다.
"야, 물 좀 줘봐. "
"죄송한데 초면에 왜 야라고 부르시는……."
"물."
"실례지만 몇 살이세요."
쳐진 눈꼬리에 키도 작고 순하게 생긴 것과는 다르게 입은 엄청 거치네, 딱 봐도 나이가 나온다.
"스물다섯. 물 줘."
"……여기요. "
젠장.
*
밥은 맛있었다. 솔직히 집에서 먹는 것보다 더 맛있었다. 남자 혼자 차렸다고 하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리고 겨우 한 번의 아침 식사로 왜인지 앞으로의 고생길이 다 보이는 것 같았다.
식사 후에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앉아 멍하니 있었는데, 문이 벌컥 열리고 곧 시끌벅적해졌다.
변백현. 나이는 스물다섯 살. 생긴 것과는 다르게 입이 엄청 거칠다. 이 새끼 저 새끼 욕을 섞어가며 쉴 새 없이 떠들어 댄다. 아침부터 나한테 오거지, 거지야 하는데 아무래도 어젯밤 저 어린 집 주인에게 무슨 말을 들은 듯하다. 보나마나 오자마자 밥 타령 했다고 그랬겠지.
그리고 그 옆에 항상 있는 사람은 박찬열. 변백현과 동갑인 것 같다. 식사 중에도, 통성명을 할 때도 말은 많지 않았다.
"박찬열."
"오세훈입니다."
그게 끝이었다.
"너 몇 살이냐?"
"스물 셋이요."
"조까 어리네. 학교는?"
"대학생인데 복학해야 되요."
그래봤자 두 살 많으면서 어른인척 개폼 똥 폼은 다 잡는다.
"앞으로 형이라 불러. 따라 해봐. 백현이 형~"
"변백현."
"네네, 알겠습니다. 우리한테 뭐 물어보고 싶은 건 없어?"
어느 정도의 선을 넘었다고 생각을 했는지, 아니면 상황 자체가 맘에 안 들었는지, 낮은 저음으로 짧게 변백현을 부르는 박찬열 덕분에 다행스럽게 아직 형 소리는 안하게 생긴 것 같다.
그리고 궁금한 것이 있냐는 말에 잠깐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집 주인에 대해 잘 몰라서요. 그렇다고 방까지 찾아가긴 좀 그렇고......"
"아, 쫑인? 김종인이야. 너보다 한 살 많아. 그러고 보니 네가 막내하게 생겼다."
김종인. 나이는....그래 이런 곳을 운영하는데 나보다 어린 게 더 이상한거지. 그래.
"걔 그렇게 무뚝뚝하고 말 없어 보여도 사실은 낯가리는 거야. 마주치면 네가 먼저 말도 걸고 그래. 사실 우리도 여기 들어 온지 얼마 되진 않아서 자세한건 몰라. "
"아, 네."
"이제 없지? 아, 참."
뭔가 떠오른 듯 박찬열 손을 붙잡고 나가려다가 고개를 돌린다.
"쫑인이가 나보고 그러더라고, 새로 들어온 분은 식탐이 많은 것 같으니까 밥은 꼬박꼬박 먹여야겠다고 아침에 꼭 깨워 달라 그러더라. 내가 아침잠이 좀 많아서 그런데 네가 시간 맞춰서 알아서 잘 일어나라? 응? "
그래 나는 김종인에게 잘못 찍힌 게 틀림없다. 그래.
*
안녕하세요. 밤빛이에요.
초반엔 빠른 스토리 전개를 위해 짧게짧게 글을 이어가려고 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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