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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볼때면 느껴지던 설레임이 사라졌다. 네가 다른 여자와 같이 있을때 나던 질투도 어느순간 사라졌고, 너의 사랑에 대한 갈망도 느끼지 못한지 오래다.
그럼에도 너를 놓지 못하는건 내 멍청한 이기심일까. 아니면
이것또한 사랑일지도.
"우현아"
널 부르는 내 입술에 너도 익숙한 듯이 뒤를 돌아본다. 익숙한 얼굴이 내 얼굴을 마주할 때면, 날 반기는 것은 한때의 설레임이 아닌 편안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어느샌가 너는 나에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존재가 되버린 것은 아닌지.
"조금만 천천히 걸으면 안될까?"
"영화시간 얼마 안 남았어. 빨리와."
애초부터 나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걸 알았기에 그저 발걸음을 조금 재촉하는 것으로 너의 말에 동조한다.
너를 처음 만나고 관계를 이어온지 어연 5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동안 변한건 내마음 뿐만이 아니다.
항상 내 말이라면 모든 걸 이해하고 받아들이던 너는 5년이 지난 지금, 내 말은 안중에도 없는듯이 너의 뜻만을 고집한다. 나 역시 너에게 더이상 투정을 부리지 않는다.
이것도 사랑이라면 우린 조금 지겨운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지겨운 관계처럼 지루하고 싱거운 영화가 끝이났다. 쉼없이 올라가는 엔딩크레딧을 뒤로한채 우리는 같은 방향을 따로 떨어져 걸어가고 있다.
그래, 더이상 너도 나의 손을 잡을 만한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겠지.
그럼에도 비어있는 손가락 사이사이가 오늘따라 어색하게 느껴지는건 우리가 함께한 시간에 대한 흔적일까 아니면 아직 너에게 남아있는 감정의 잔해들일까.
때론 함께 엉켜있던 손가락들과 맞대고 있던 손바닥이 그리워질때가 있다. 너도 그런 감정을 느낄때가 있으려나.
문득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저런 생각을 뒤로한채 걷다보니 어느새 너와 예전에 자주 오던 식당에 도착했다. 변함없는 내부와 종업원들, 그리고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가 나를 반겼다.
익숙한 듯 반가운 느낌이 나를 감싸안는다. 이곳에서의 지난 우리는 서로에게 설레는 감정을 감출 수 없던, 어린 사랑을 하고 있던 풋풋한 연인이었다.
눈만 마주쳐도 어색한 듯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웃었고 어쩌다가 닿는 발끝에도 화들짝 놀라며 발을 피하기 급했었다. 물론 지금도 너와 나의 관계에는 변함이 없다.
여전히 우리는 마주앉아 있고 나는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너의 앞에 조용히 젓가락을 내려놓는다.
변함없는 곳에서의 변함없는 우리의 관계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이토록 달라졌을까.
너는 날 여전히 사랑하는 것일까. 혹여나 따로 만나고 있는 여자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근래에 오지 않던 식당에 네가 날 데려온 이유는 무엇일까.
끊임없는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파고 든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너는 내게 무언가 할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별을 통보하려는 것일까.
너와 나의 마음이 변했을지라도, 그렇다 할지라도,
아직은 널 놓고싶지 않다.
서로 말없이 밥먹는데에만 집중하고 있다. 조용한 우리의 테이블은 달그락거리는 소리들로만 가득하다. 신경쓰인다. 달그락거리는 젓가락 소리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내가 신경이 쓰이는 건 다름아닌 너와 나의 관계, 그리고 지금 우리의 모습. 그뿐이다.
"우현아"
"왜"
"얘기해"
"...뭘?"
"아까부터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굴었잖아. 오랜만에 이 식당을 찾은것도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그런것 아니야?"
망설인다. 입밖으로 꺼내기 어려운 말인 것일까. 너는 젓가락질도 멈춘 채 가만히 그저 식탁만 바라본 채로 멈춰있다.
멈춰져 있다. 지금 너와 나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처럼. 가만히 있는 너의 모습도 내게 큰 의미로 다가오는것은 그만큼 내가 너와의 관계에 신경이 쓰인다는 것이다.
네가 그토록 망설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도대체 네가 꺼내려던 그 말이 무엇이길래. 정말로 우리 사이를 끝내려는 것일까.
언제든지 끝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괜시리 불안해지는 것을 보니 내 생각이 틀렸나 보다.
"없어. 그런거"
"우리 함께한 시간이 몇년인데 아무리 우리가 식었다 해도 나도 그 정도 눈치는 있어."
입밖으로 꺼내어 버렸다. 둘 중 누구도 먼저 식었다 따위의 말들을 꺼낸적은 없었다.
그 무엇보다 현재 우리의 상황을 잘아는 서로임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그 말을 꺼내지 않았다는 것은 쉽게 끝나버릴 수 있는 우리의 관계에 겁을 먹었던 것일지도.
"뭘 바라는 건데"
"바라긴 뭘 바래. 하고 싶은말...있잖아."
"너 지금 바라고 있잖아."
"응?"
"내가 끝내자고 하길 바라는 것 아니냐고."
"..."
"네가 지금 무슨 말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는 알지만 난 그럴 생각 없어."
끝내자고 말하는 너의 목소리를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너의 목소리에 무언가에 맞은 것처럼 머리가 멍해진다.
그리고 이어서 들려오는 너의 말은 내 머릿속을 다시 복잡하게 만든다.
너도 나와 같은 이기적인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인가. 네가 내뱉은 저 말에 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가.그 전에 저 말에 나는 안도하고 있는가. 아니면 불안해하고 있는가.
"성규야"
오랜만이다. 내 이름을 저리도 다정하게 부르는 네 음성을 듣는것이.
"어쩌면 이기적이라고 할지도 몰라."
"..."
"난 아직 널 놓을 수 없어."
"..."
"너의 말대로 어쩌면 우린 식었을수도, 서로에 대해 많이 싱거워졌을지도 몰라.
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 그냥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편안하고 익숙한 그런 존재가 되버린 거라고 생각하고 싶어."
"..."
"...넌 아니니, 성규야?"
너의 말에 어떠한 대답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갑자기 솟구쳐오는 생각들,여태껏 네 감정과 태도에 대한 나의 착각들 때문에 머리가 아파온다.
너는 날보며, 아니 우리를 보며 매일 어떤 생각을 했던 것일까. 너의 말처럼 서로에게 너무 익숙해져 버려서 너에 대한 감정을 쉽사리 사랑이라 하지 못했던 걸까.
그래. 우린 서로에게 너무 깊이 스며들어 있던 것이다. 지금의 감정을 잊을만큼 너무 깊이. 소중함을 잃은 것이 아니라 잊었다는 것.
잃은 것은 쉽게 되찾을 수 없지만 잊은것은 다시 되새겨 기억하면 된다.
쉽게 되돌릴 수 있는 우리의 감정과 가슴 떨렸던 관계를 왜 난 그토록 어렵게만 생각했는지.
"...고마워"
"응?"
"5년동안 변함없이 내 곁을 지켜준 것도, 널 떠나고 후회할 뻔한 내 마음 지켜준것도"
"..."
"여전히 날 사랑하고 있는것도"
"..."
"사랑해,우현아."
"...나도"
멈춰있던 관계는 다시 앞으로 나아가면 되는 것이고, 식을뻔한 사랑도 다시 열을 가하면 된다.
이토록 쉬운 사랑을 그토록 헷갈려 했던 이유는 우리의 오랜 시간이 준 부담감이 아니었으려나. 그 부담감을 이긴 우리는 이제 더 성숙한 사랑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설레임만을 쫓는 사랑이 아닌,누구보다 서로를 믿고 바라볼 수 있는 진정한 사랑.
사랑의 권태기를 이겨낸 연인에게 더 이상 무슨 장애물이 있을까. 서로에 대한 마음만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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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토스 당첨 잘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