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은 우리팀이 야심차게 준비하던 프로젝트가 완전히 미끄러지는 바람에 팀원 전체가 스트레스를 정말 최대치로 받고 있었음
그래도 가장 무거운 짐을 지고 계신 차장님께서는 팀원들에게 내색 한 번 안하고 흔들림 없이 팀을 잘 이끌어나가심
여느때와 다름없이 차장님 차를 탔는데 넋이 나가셔선 시동도 걸지 않으시고 멍하니 계심
그런 차장님을 보는 내 마음이 편할리 없음. 기분전환을 시켜드리고 싶은데 누굴 위로하고 그런걸 잘 못하는 성격이라 나 자신이 답답해 죽을 지경
"한 잔 할까요?"
내 물음에 놀란 듯이 어? 하며 내 쪽을 쳐다보심. 아마 못 들은 듯 함
"한 잔 할까요~"
"집에 가지 그냥"
"기분 안 좋을 땐 술 도움 받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기분 안 좋을 땐 술 마시는 거 아니에요"
평소엔 인생의 동반자처럼 여기던 술을, 막상 모든 걸 털어버리고 싶을 때 안 마신다니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음
"왜요?"
"취하거든"
"네?"
"이상하게 꼭 이럴 때 먹으면 취한다고"
"아..."
그래서 결국 아무런 위로가 되어 드리지 못하고 집에 옴
-
혼자 누워서 티비를 보는데 진동이 울림
"여보세요?"
[이사원]
"누구시죠?"
[나야]
평소에 듣던 그 무뚝뚝 보이스가 아니었음. 목소리는 땅을 파고 들어갈 듯 낮았지만 반존대는 온데간데 없고 반말만 툭툭, 던지심
"술 안마신다고 했잖아요"
[어쩌다 그랬네]
"누구랑 마셨어요"
[친구]
"어디에요?"
[집 앞]
"얼른 들어가야지 뭐해요"
[잠깐 나와]
우리집이었다니... 아직 다행히 화장을 안지워서 옷만 갈아입고 잽싸게 나감
"어 이ㅇㅇ이다"
아마 저 때 처음으로 내 이름 석자를 완전히 부른 듯
"어휴, 얼마나 마셨어요"
"조금 마셨지"
"집에 가야지 여길 왜 와요"
"얼굴보러"
"에이, 맨날 보는데 뭐"
"고마워"
"뭐가요~"
"다 고마워"
"애인인게 제일 고마워"
"나도 그래요"
"앞으로 더 잘할거야"
"충분히 잘했어요"
같이 택시타고 집까지 데려다 놓고 난 다시 집에 옴
다음날 출근을 했는데 평소와는 다르게 숙취에 몸부림치시는 두 분이 보이심 = 차장님 이과장님
아마 두 분이서 과음을 하신 듯 함
점심시간에 차장님이랑 나가서 해장국을 먹는데 수저를 놔드리니까 '고마워요' 하시길래
"고맙다는 말 되게 잘하시네요"
하니까 난 니가 무슨말을 하는지 1도 모르겠어요. 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심
"제가 그렇게 좋으세요?"
"왜이러나"
"어제 막~ 이렇고 저렇고 뭐 그렇고-"
"글쎄, 한번 취하면 아예 지워버리는 타입이라. 술먹고 한소리니까 너무 담아두진 말고"
완전히 시치미를 떼시길래 나도 두손 두발 다 듦
사실은 좀 담아두고 싶었는데.. 뭐 아니라니까
ㅡ
하루는 친한 친구 생일파티를 한다고 했음. 나랑은 그리 친하지 않은 '클럽'에서 생일파티를 하게 됨
제일 친한 친구(정수정.25)가 너는 클럽에 출근하러가냐고, 잔소리를 해대서 정말 25살 같이 입고 감
워낙 사교성이 좋고 활발한 친구인 건 알았는데, 가보니까 대학다닐 때 알던 남자애들도 있었음. 워낙 낯을 가려서 말은 거의 섞지도 않았음
피할 건 적당히 피하고 술도 안 취할 만큼만 마시면서 그냥저냥 보내고 있었음
그러다가 어떤 남자애를 만났는데 다른 애들과 달리 순수해 보였고, 얼핏 조별과제를 함께 했던 기억도 나는 것 같았음
성격이 워낙 밝아서 재밌고 편하게 해주길래, 낯을 많이 가리는 나도 어느정도 마음을 풀고 신나게 놀게 되었음
술을 별로 먹지도 않았는데 굳이 집까지 데려다준다고 해서 같이 택시타고 집까지 갔음
나를 내려주고 안녕~하고 친구를 보냄
아파트 정문으로 들어오는데 엄청 큰 콜라 인형을 들고 서있는 차장님하고 마주침
"어"
같이 내리는 걸 본건지, 못 본건지 내 옷을 보고는 표정이 살짝 굳으심
다가와서 인형을 툭 건네시고는 말 한마디 꺼내기도 전에 다시 차에 타셔서 그대로 시동걸고 나가심
아. 뭔가 꼬였구나 뒤늦게 알아채고 휴대폰을 보니 부재중전화와 메세지가 쌓여있음
차마 겁이나서 전화는 못하고 문자만 덜렁 하나 보냈는데 역시나 답장은 안 옴
집에가서 애꿎은 인형만 때렸음
다음날 출근을 했는데 다른분들에게 인사하시다가 눈이 마주침. 평소와는 조금 다른 톤으로 안녕하세요 이ㅇㅇ씨. 하심. 그 뒤로는 업무관련 대화말고는 말 한마디 안 나눔
점심시간이 되니 하나둘 자리를 비우시고 나 혼자 사무실에 남아 그냥 엎드려서 시간을 보냄
그렇게 회사를 일주일을 그렇게 다님. 밥도 일주일을 거름
팀 회식을 또 하게 됨. 당연히 나는 빠지려고 했는데 (밥도 안 넘어가는 판에 회식이라니) 박대리님께서 ㅇㅇ씨는 우리 팀 아니냐고 하도 재촉하셔서 결국 같이 감
안주는 손도 안대고 술만 들이부었는데 아무도 내 몸 챙겨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씁쓸했음
옆에 앉아있는 차장님이 나를 보지도 않고 오히려 평소보다 술을 더 잘 마신다는 것도 외롭게 느껴졌음
식당에서 나와서 집에 가려는데 항상 차장님과 장난치며 함께 걸어가던게 너무나 익숙했는데 여전히 나와 눈조차 마주치지 않는 차장님에 순간 울컥했음
대리님들과 담배 태우러 가시려는 것 같길래 내가 먼저 붙잡았음
"저기요"
"할 말 있어요 이ㅇㅇ씨?"
내 이름 세자를 저렇게 차갑게 부르면서 존댓말로 선을 그으시는데 나도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짐
대리님들 못보게 내 팔목을 잡고 골목으로 들어가서 놓아주심
"왜 우는지 설명좀 해줄 수 있을까요"
"내가 뭘 잘못했나요?"
"잘못은 내가 했는데요"
"했는데요"
"들어보지도ㅠㅠㅠㅠ 않았으면서ㅠㅠㅠㅠㅠ 알지도ㅠㅠㅠ 못하면서ㅠㅠㅠㅠ"
"울지마"
아랑곳않고 훌쩍훌쩍뎀
"안 그치면 진짜 화낼건데"
"들어볼게, 말해봐요"
계속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기에만 정신이없었음
"아무것도 아니다"
"그냥 친구다"
"아무 감정 없었다"
"내가 오해한거다"
내 속마음을 쭉 늘어놓고 마지막에 맞아요? 하고 묻는데 심장이 철렁 하면서 고개를 끄덕임
"뭘 잘못했는지는 알겠고?"
끄덕끄덕
"아직 혼나야 할게 많은데"
"옷, 내가 싫어하는 거 알잖아요"
"밥 거르는 것도 제일 싫은데"
"빈속에 술 먹는거라고 배웠나"
대답 못하고 그냥 내가 다가가서 안아버림. 그랬더니 피식하고 웃으심
"이런다고 해결이 되나"
피하는 듯이 손을 떼시더니 되네. 하시고 마지못해 하시며 따뜻하게 안아주심
"젊고 잘생긴 남자애를 보니까 조금 불안하기도 하고"
"회사 아니니까 내가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더라고, 내가 이사원 남편도 아니고"
"자꾸 이러면 진짜 데리고 살아야 해 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