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이 온다
당신을 만났던 기억은 제 기억 속에서 지울 수 없는, 제가 죽을 때까지 가지고 있어야 할 기억입니다.
"아씨! 빨리 오셔야 합니다!"
저를 부르는 고함에 머리를 곱게 땋은 단새의 얼굴을 보며 조금만 기다리다며 웃어보였습니다. 오늘은 장터에 비단을 사러 나가는 길이어서 그런지 단새의 기분이 더욱 좋아보이는 듯 했습니다. 단새의 기분을 나쁘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저도 급하게 나갈 채비를 마치고 단새의 뒤를 따라 장터로 나갔습니다. 장터의 상인들은 소리를 치며 물건을 내다팔고 있었고 여러 양반들은 제 옆을 지나며 속닥거리기도 했습니다. 그럴때마다 저의 얼굴을 가리는 쓰개치마를 더 꽉 쥐어 잡았습니다.
평상시 장터의 요란함과 다르게 더 요란스러운 것을 보니 아마도 지금 이곳에 무슨 일이 터진 것 같습니다. 제 눈 앞에 수 많은 바구니가 왔다갔다하고 큰 목청을 뽐내는 목소리를 보니 아마도 누군가가 도망이라도 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일이 꽤나 비일비재한 장터였기 때문에 단새는 어느새인가 저를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괜찮다며 단새에게 말했지만 단새는 저를 더욱 밀착해 보호할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단새의 걱정과는 다르게 장터는 금세 조용해졌고 아무래도 사건이 해결된 것 같습니다.
"아무일도 없지 않더냐, 단새 너도 그만 걱정하고 비단이나 사러가자."
"그래도 아씨는 제가 보호해야 할 사람아닙니까! 어르신의 당부가 아니라 제가 모시는 아씨니까 보호하는 겁니다."
그제서야 저에게서 떨어진 단새는 저의 말에 진심으로 걱정하는 투로 저에게 말을 했고 그런 마음을 모를리없는 저는 단새의 발걸음을 더욱 재촉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상점에 도착해 얼마전에 청나라에서 건너온 비단을 보고 있었습니다. 저번에 산 비단보다 훨씬 색감이 화려했고 결도 더 고아 선뜻 기분좋게 비단을 구매하였습니다. 물론 사기전에 단새에게 비단이 너무 화려한 것이 아니냐며 한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그래도 오늘은 왠지 이 비단을 사고 싶었습니다.
단새가 비단을 받아들고 나서야 상점에서 발을 떼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누군가가 저를 잡아당겼고 순식간에 사람들을 피해 구석진 곳으로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지금 제가 납치를 당하고 있는 것인가 생각을 했지만 저를 끌고가는 인물의 행색은 누가봐도 도련님의 행색이었습니다. 그의 팔을 뿌리치자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저를 쳐다본 그 사람은 저의 팔을 잡고 자신에게 가까이 잡아끌었습니다.
"잠깐 실례 좀 하겠소."
저의 얼굴을 가리던 쓰개치마를 내리고 저의 볼을 잡은 그는 곧 입맞춤이라도 할 것처럼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입맞춤은 아니었지만 그 사람과의 거리는 온 몸이 대나무마냥 딱딱하게 굳게 만들기 충분했습니다. 어찌할 바를 모른채로 그 자리에 서 그 남자의 얼굴을 쳐다봤을 때는 긴 속눈썹이 저를 홀렸을 정도로 예뻤고 저에게 떨어진 그 사람의 얼굴을 처음 마주보았을 때에는 그 사람의 높은 콧대가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실례했소. 누가 계속 쫓아와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는데 한 여인이 내 맘을 홀리기에 이렇게 무작정 붙잡고 데려왔소."
웃는 모습은 왜 이렇게 사람을 기분좋게 만들 정도로 해맑은지 기분이 얼떨떨해졌습니다. 제가 그 사람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는 것을 느꼈는지 제 앞에 손을 휘적거렸습니다. 그제서야 그 사람에게서 시선을 떼고 제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그 사람의 볼을 제 손으로 치는 일이었습니다.
"어느 분의 자제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지금 굉장히 무례하신 행동을 하셨습니다."
한 손으로 볼을 매만지던 그 사람은 꽤 허탈하게 웃으며 저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자칫 내가 나의 아버지보다 높은 관직의 자제분을 때린 것은 아닐까하는 걱정도 앞섰지만 이미 저지른 일 되돌릴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혹시나 난폭한 사람은 아닐까하는 걱정으로 넘어가고 있을 때, 저의 예상과는 다르게 고개를 숙이며 저에게 사과를 건네는 그 사람의 모습에 그렇게 나쁜 인물은 아니었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과를 받고나서야 불안하던 마음이 어느정도 침착해졌고 그 사람은 숙였던 고개를 들며 바닥에 떨어져있던 쓰개치마를 잡아올렸습니다. 그리곤 저의 어깨에 둘러주었고 제 양손에 꼭 쥐어주었습니다. 그리곤 고개를 숙여 저에게 다가와선 저에게 어느 것보다 달았던 한마디를 건네었습니다.
"앞으로는 얼굴 잘 가리고 다니는게 좋을 것 같소. 뒷모습만큼 앞모습도 아름다워 다른 남정네들이 채갈까 두렵소."
숙였던 허리를 피고선 건넨 미소를 쳐다보자 인사를 건네는 그였습니다. 아쉬움이 가득한 저와는 다르게 그는 미련조차 남아있지 않았는지 뒤돌아 곧장 자신이 가야할 길로 걸어갔습니다. 저 남자에게 잠시나마 홀렸던 저의 마음을 애써 다잡았습니다. 그 남자의 모습이 사라지자 헐레벌떡 나타난 단새는 저를 보고 어디 있었냐며 소리를 쳤지만 그 목소리가 귀에 들릴리는 없었습니다. 그게 당신과 저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삼점에서 산 비단에 자수를 두던 손도 당신 생각에 자주 멈칫거렸습니다. 화려하다고 생각한 이 비단조차도 당신이 입으면 화려함을 잃고 어둡게 변할 것만 같았습니다. 그 생각을 떨쳐내려 마당으로 나와 아까보다 더욱 어두어진 하늘을 바라보며 멍청한 생각에 이 늦은 시간에 닭이라도 시원하게 울어주었으면 하는 더욱 멍청한 생각을 할 뿐이었습니다. 저의 행동에 이상함을 느낀 것인지 밥을 앉히고 나오던 단새가 저에게 다가왔지만 별 것 아니라며 애써 상황을 외면했습니다.
"단새야."
"예, 아씨."
"혹시… 혹… 아니다!"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떠난 단새를 뒤로하고 당신의 얼굴을 되뇌이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대문이 열리고 아버지가 들어오셨습니다. 어머니도 그 소리에 급하게 나가셨고 저도 그 자리에 서서 아버지에게 조심스럽게 인사를 건네었습니다. 아버지는 곧장 방으로 들어가셨고 아버지를 따라 안으로는 식탁 하나가 들어갔습니다. 평소에도 과묵한 아버지셨지만 오늘따라 아무런 표정도, 저의 말에 대답해주시는 것과 같은 말조차 없으셨습니다. 어머니와 저도 식사를 시작했고 불빛에 그림자가 져 보이는 아버지의 모습이 유난히 쓸쓸해 보이셨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식탁을 받으러 온 단새에게 귓속말로 남은 밥 아래 고기를 챙겨두었다는 말을 하고 방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어머니는 저에게 또 그런 일을 했냐며 저에게 화를 내셨습니다.
"단새는 제 동생이자 친구입니다. 단새한테 너무 뭐라고 하지 말아주세요."
제가 6살때 저의 집으로 들어온 5살짜리 꼬마아이였던 단새는 저에게 고개를 깍듯하게 숙이며 인사를 했습니다. 고작 5살이 무엇을 안다고 저에게 인사를 할 수 있는 것이며 저 어린나이에 자신이 저의 아랫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저에게 무릎을 꿇는 것인지도 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저는 단새보다 한 살이나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 이후로 단새의 모습에 신경이 쓰이고 남들보다 더욱 챙겨주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를 깍듯하게 대하는 모습은 제가 단새에게 신뢰를 쌓기 더욱 쉽게 만들어주는 행동이었습니다.
달이 모습을 보이고 점차 다른 방향으로 이동하고있는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언제나와 같이 제 앞으로 다가온 단새는 저를 걱정하는 듯 목소리부터 경직이 되어 있었습니다. 단새라면, 어쩌면 알 수도 있지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신의 잊을 수 없는 얼굴과 잊을 수 없는 미소를 믿고 싶었습니다.
"오늘 오후에 장터를 가지 않았느냐?"
"예, 가서 고운 비단을 사오지 않으셨습니까?"
"그 때 한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의 얼굴이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고있는데… 지금 이 감정이… 사랑이라는 감정인 것이냐?"
이 말을 하는 와중에 눈에 눈물이 고였습니다. 슬픈 단어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눈물을 고이게 할 만큼 슬픈 말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왜 눈에 눈물이 고였는지는 아직 알 수가 없습니다. 그냥, 단지 당신의 얼굴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벅차 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단새는 기뻐하는 표정이 아니었던 저에게 다가와 저의 등을 쓸어내렸습니다. 저의 마음은 이미 반신반의하며 단새에게 물었지만 단새의 한마디에 고여있던 설움이 모두 폭발하기라도 했는지 눈물이 주체할수도 없이 흘러나왔습니다.
"아씨의 사랑을 지켜드리겠습니다."
당신의 얼굴이 제 기억에 재가 되어 흩뿌려졌습니다.
아침이 밝은 날 아버지의 부름에 급히 밖으로 나가니 나갈 채비를 하시고 저를 기다리고 계신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어서 궁에 나갈 채비를 하라는 아버지의 말에 뛰어온 단새의 도움을 받아 급히 준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평소보다 더욱 고급스런 비단이 눈에 띌 정도였습니다. 대문을 열자 준비된 마차가 눈에 들어왔고 마차에 조심히 탑승했습니다.
"이번 관직에 너의 행동이 크게 작용이 될터이니 몸 조심하도록 하여라."
아버지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며 궁 안으로 들어간 저는 한 번도 보지못한 고급스러운 궁의 자태에 한껏 위축되었습니다. 장소를 옮기는 동안에 낯익은 모습에 자연스럽게 고개가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순식간에 사라진 당신의 모습에 제가 잘못 본 것이라며 고개를 저으며 발걸음을 더욱 재촉했습니다.
아버지를 따라간 곳에는 높은 관직의 사람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고 그 뒤에 그들의 자제들이 똑같이 줄을 맞춰 서 있었습니다. 모두가 고개를 숙이고 땅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 중에는 저도 속해 있었습니다. 전하께 인사를 건네고 다시 고개를 숙이는 순간 익숙한 얼굴에 다시 고개를 돌리려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급하게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아까와는 다르게 확신에 가까운 모습이었습니다. 고개를 들어 확인하고 싶었지만 결국은 눈으로만 그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도 저를 발견한 것인지 저를 쳐다보고 있었고 서로의 얼굴을 보고나서야 서로의 얼굴에 미소가 살짝 비추어졌습니다.
"어찌 웃고 있는 것이냐?"
옆의 사람이 저를 건드리고 나서야 전하의 말씀이 저에게 한 말임을 알아채고 급하게 운을 띠었습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던 순간 저는 두 사람과 눈을 마주쳤습니다. 하나는 저를 웃으며 쳐다보고 있던 당신과 저에게 압박을 주며 인상을 쓰던 아버지의 눈빛이었습니다. 저는 급하게 고개를 숙여 아버지의 말을 되새기며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습니다.
"궁에 처음 입궁하여 웃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누구의 자제이더냐?"
"호조판서의 자제 김노우라고 하옵니다."
다행스럽게도 저의 행동에 대한 상황이 잘 지나간 듯 다시 본론으로 돌아간 대화에 조용히 안도의 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을 때는 저를 만났을 때의 웃음과는 다르게 장난스럽게 웃는 얼굴의 당신이 보였습니다. 조용해진 분위기에 맞게 급하게 웃음을 멈춘 당신은 저를 슬쩍 쳐다보고는 다시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저희들이 할 일은 모두 끝이 났는지 밖으로 나가보라며 저희를 내보냈습니다. 저도 걸음을 떼어 나가려했을 때 전하께선 저에게 선심을 쓰시며 저를 포함한 모두에게 말을 하셨습니다.
처음 입궁을 하여 궁금한 것이 많을텐데 많이 돌아보고 가거라.
전하의 말을 끝으로 밖으로 나온 저는 처음보는 궁의 모습에 입이 떠억 벌어지며 궁을 돌아보고 있었습니다. 정말 기와 한 장이 고급스럽고 바닥에 돌 하나 고급스러워 보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많은 곳을 돌아보며 살짝 지쳐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을 때 였습니다.
"아까는 꽤 재치있는 모습이었습니다. 호조판서분의 자녀였군요."
"놀라지 않았습니까!"
"조용히! 궁에서는 소리 이렇게 크게 지르면 안됩니다."
그 말에 급하게 입을 막으니 크게 웃음소리를 내며 웃는 당신이었습니다. 아마도 이번엔 당신의 장난에 제대로 넘어간 것 같습니다. 제 예상과 딱 맞게 당신은 고위관직의 자제였고 다행스럽게도 장터에서 보여주던 연극처럼 비극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 같은 느낌에 괜히 입에 웃음이 가득했습니다. 저의 웃음의 이유를 몰랐던 당신은 무엇을 이유로 웃냐며 물었지만 저는 고개를 저으며 아무것도 아니라며 대답을 회피했습니다.
"무예라도 하는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손이 아주 맵더구만…."
"그 때는 정말 무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오늘 여기 와야한다고 하시길래 아버지를 피해 열심히 도망쳤습니다. 헌데 그 쪽 행색을 보고 분명 관직을 가지고 있는 자제의 아가씨로 생각되어 도망친 의미도 없게 그 쪽을 찾기위해 이렇게 온 것 아닙니까?"
당신의 말은 저를 떨리게 만들기는 충분했습니다. 저를 찾으려, 저를 보기위해 이렇게 왔다는 말이 거짓말이라도… 그냥 저를 기분좋게 만들려는 말이라고 해도 당신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기 때문에 저는 전혀 그것에 대해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 때는 당신의 말이 너무 좋았을 뿐이었습니다. 저의 환해진 표정을 본 당신은 아까와는 다른 미소로 저를 지긋이 쳐다보았고 그 시선에 얼굴이 붉어져 고개를 숙이고 말았습니다.
"나는 김태형이라고 하오."
"… 아! 저는 김노우라고 합니다."
그제서야 늦은 통성명을 마치고 나서야 서로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웃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서로의 마음에 조금 더 가깝게 다가왔을 때 저를 부르는 다급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궁에서 나갈 준비를 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당신에게 인사를 건네고 발걸음을 재촉해 아버지의 뒤를 쫓아갔습니다.
집에 돌아오니 저를 반기던 단새는 궁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캐묻기 시작했고 단새에게 당신을 다시 만난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제 말을 들은 단새는 환호를 지르며 박수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행동에 저도 볼에 홍조를 달고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갑자기 나오신 어머니와 아버지의 행동에 놀라 급하게 미소를 멈추었습니다. 곧 아버지와 어머니가 방 안으로 들어간 후에야 우리 둘은 긴장을 풀고 다시 웃을 수 있었습니다.
새벽 밤 부엉이 우는 소리 가득하고 제 마음을 간지럽히는 귀뚜라미 소리에 잠을 뒤척이고 있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크게 떠오른 달빛을 따라 눈을 움직였지만 작디 작은 창문에 막혀 더 이상 옆으로 움질일 수가 없었습니다. 곧 창문을 울리는 귀뚜라미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나자 담 건너에서 저를 쳐다보고 있는 당신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어찌 이 시간에…!"
"여인이 보고싶어 실례를 범하고 이렇게 늦은 밤 찾아왔습니다. 혹 내일 정오에 장터로 나올 수 있겠습니까? 오지 않는다고 해도 기다리겠습니다."
"정오에 꼭 나가겠습니다."
저의 말에 당신은 또 저에게 웃어보였고 당신을 따라 저도 다시 웃어보였습니다. 늦은 시간인지라 당신을 돌려보내야겠다는 생각에 들어가라며 손짓했지만 이내 몇 번이나 주저하는 당신이었습니다. 당신의 옷자락도 보이지 않을 때까지 당신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내일 당신을 볼 설렘에 저는 잠을 설친 것 같습니다.
당신과 약속했던 시간이 다가와 단새와 외출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마당으로 나가자 저의 외출에 대한 어머니의 물음에 장터구경을 하기 위함이라며 둘러대고 당신과의 약속에 늦을까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장터에 도착하자 익숙한 당신의 모습에 발걸음을 더욱 빨리하니 당신이 더욱 가까워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당신도 저를 발견한 것이었는지 미소를 짓다가 당신은 잠시 표정이 굳어지는 듯 했습니다.
갑자기 모습을 감춘 당신을 찾기위해 걸어가던 단새를 잠시 붙잡고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습니다. 설마 저의 모습이 벌써 식어버리신 것은 아닐까 걱정을 하고 있을 때 누군가 저의 손을 붙잡아 뛰기 시작했고 저는 순식간에 많은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당황한 단새의 표정을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리자 당신의 뒷모습이 보였습니다. 사람들이 줄어든 장소에 다다르고 나서야 속도를 줄인 당신은 거친 숨을 몰아쉬고선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그 아이에게는 미안하지만 그 아이가 있으면 재미있게 놀지 못할 것 같아 그랬소."
"단새가 걱정하고 있을터인데."
"그 아이도 저를 보았을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저를 걱정하고 있을 단새가 걱정되었지만 저를 보고있는 당신의 여유로움에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그 때 당신과 풀 밭에 누워있어도 즐거웠고 이야기하는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걱정하던 일도 모두 잊을 수 있을 정도로 즐거웠습니다. 당신과의 행복이 오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언제나 같이 새벽이 되어 나타난 당신은 미소와 함께 밤이 다가도록 저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장터에서 있었던 연극의 이야기도 당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도 모두 해주며 그렇게 밤을 보냈습니다. 당신과 보내는 새벽은 어느 아침보다 환했고 어떤 날씨보다 저의 기분을 좋게 만들었습니다.
자수를 두며 시간을 보내던 저를 어머니께서 방으로 부르셨습니다. 저를 한참을 쳐다보시던 어머니는 저를 자리에 앉히시며 혼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그 때서야 제 나이가 벌써 혼인을 해야하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병조판서 댁 자제와 혼인 이야기가 오가고 있는 중이다."
어머니의 말씀에 당신의 얼굴이 눈 앞에 아른거렸습니다. 당신과 저의 사이에는 장애물은 없을텐데 그 때 저는 왜 이렇게 주저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 때 아마도 당신에 대해 이름밖에 모르고 있는 저를 탓하고 있었겠지요. 어머니의 말씀에 언제나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였던 저는 이번에 당신을 생각하며 거절해보려 합니다.
"마음이 가지고 있는 사내가 있습니다. 높은 관직을 맡고 있는 집 안의 자제인 것 같습니다."
"인 것 같다니, 정확하지도 않은 정보로 어찌 혼인을 하려 하느냐?"
"아버지를 따라 입궁을 하였을 때 만났던 사내입니다. 전혀 문제가 될 것 없는 사내입니다."
저를 쳐다보는 어머니의 눈빛이 무서웠습니다. 행여나 당신과의 혼인을 반대하고 제 사랑을 떠나보내야 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걱정도 앞섰습니다. 용기를 내어 어머니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자 어머니는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시며 저에게 기회를 주셨습니다.
"어느 집 안의 자제인지 알아보고 결정을 하도록 하자."
아무래도 오늘 새벽에는 당신에 대해 알 수 있는 날이 될 것 같습니다.
새벽이 다가오자 떨렸던 마음이 더욱 두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이 언제쯤이면 저를 보러 찾아오실까 창문이 있는 벽에 기대어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달이 평소보다 어두워 혹 길이라도 잃어버리신 것은 아닐까 걱정을 할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창문을 열어보니 당신이 그 자리에 언제나와 같이 서 있었습니다. 저의 안부를 먼저 물어보던 당신은 저의 이름도, 나이도, 어느 분의 자녀인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어머니께서 저의 혼인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저는 어머니께 도령님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꺼내놓을 수 없었습니다. 도령님은 저를 아는데 왜 저는 도령님을 알지 못하는 겁니까? "
"제가 만약 천민의 자제라면 저를 떠날 생각이십니까, 제가 도망치고 있는 방랑자의 자제라면 저를 떠날 생각이십니까?"
"… 저는 괜찮습니다. 천민이라도, 방랑자라도 저는 괜찮습니다."
"저는 이조판서 '김지태'의 자제 김태형이라고 합니다."
당신의 정체를 그제서야 알았는데 왜 저는 그 자리에서 아무말도 할 수 없었을까요. 그렇게 바라고 바라던 당신이었는데 왜 당신은 이조판서의 자제입니까. 물어보고 싶은 것도 투정하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당신의 한마디에 저는 창문을 닫아버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저와 혼인을 하시겠습니까?"
제 나이 12살 오라버니가 죽고 마음에 묻은지 겨우 몇 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하필 죽음의 원인이었던 그 사람을 지금 만난 것인지… 마음주고 사랑을 준 당신이 왜 그런 사람인지 저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끝까지 저의 편은 없는 것인지 무거운 짐을 덜어낼 틈도 없이 몇 개의 짐이 높은 담을 쌓아가고 있었습니다. 새벽의 빛에 비춰진 당신의 그림자가 오늘따라 무섭습니다.
그 날 밤은 잠을 한숨도 자지 못했습니다. 당신의 모습이 사라져도 그 자리에서 움질일 수 없었고 날이 밝아올 때까지 갑자기 찾아온 슬픔에 눈물을 감출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단새의 부름에도 한마디도 꺼내지 못하자 단새가 결국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저를 보고 놀란 단새가 저를 껴안았고 아무런 말없이 단새의 품에 기대어 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너는 오라버니의 죽음에 대해 유일하게 알고 있는 아이이다."
"갑자기 그건 왜 꺼내시는 겁니까."
"그 자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느냐."
"복면을 쓴 사내라 정확한 얼굴은 모르나 눈매와 콧대가 뚜렷한 사내였습니다."
그 자를 만났다, 저의 말에 단새의 표정이 굳어가고 나를 쳐다보는 눈빛에서 연민이 느껴졌습니다. 단새를 밖으로 내보내고 난 이후로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습니다. 당신의 얼굴이 눈 앞에 아른거렸고 오라버니의 모습이 겹쳐져 더욱 아른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미운 당신이 오지않는 새벽은 이상하도록 쓸쓸했고 더욱 어두웠습니다. 당신에게 주기위해 준비한 자수도 이제 더 이상 필요가 없어졌고 또한 저의 혼인도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떠나고 병조판서 댁의 자제와 몇 차례 만나보았지만 그 때마다 당신과 비교되는 모든 것이 눈에 밟혔습니다.
평소와 같이 맞이한 새벽은 조금씩 추워오고 있었습니다. 푸른 잎들도 조금씩 밝은 색을 내며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며 당신에 대한 기억도 조금씩 지워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며칠만 더 지나면 당신을 잊을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헌데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저의 생각을 송두리째 바꿔놓고선 당신에 대한 기대감이 당신과 저의 거리만큼이나 가까워졌습니다.
"사랑받는 느낌이 좋았습니다. 낭자가 저를 바라봐주는 것이 너무 좋아 차마 입을 열 수 없었습니다. 저는 낭자를 속일 생각이 없었습니다. 저의 죄이니 받아들이겠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으니 그냥 그 자리에 머물러 줄 수는 없습니까?"
당신의 그림자와 눈을 마주쳤습니다. 보이지않는 검은 그림자일뿐인데 왜 당신의 마음이 눈에 밟히는지, 잊으려했던 기억이 왜 문을 두드려 들어오려하는지. 당신은 기억하십니까? 그 때의 달빛은 어느 때보다 더욱 밝았다는 것을.
창문을 열자 당신의 야윈 얼굴이 보였습니다. 저에게 다가온 당신은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제 볼을 조심스럽게 감싸며 더욱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며칠동안 그리웠던 당신의 눈이 마주쳤습니다. 고개를 내려 당신에게 다가가 입을 맞추었습니다.
"혼인이 보름도 남지 않았습니다."
"혼인이 있는 새벽에 낭자를 데리러 오도록 하겠습니다. 그 때까지 낭자를 데리고 올 수 있게 준비를 해 놓겠으니 저와 같이 떠납시다."
그렇게 저를 찾아올 당신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설레는 마음으로 보내고 있었습니다. 당신과 이곳을 떠나기로 한 그 날 아침이 찾아왔습니다. 처음에는 즐겁고 설렜던 마음이 점차 무거워지면서 저의 현실을 바라보았습니다. 당신이라면 가능할 것만 같은 이야기라고 생각을 했지만 여전히 눈에 밟히는 것이 주변에 많이 있었습니다. 제가 이곳을 떠날 때 남겨질 단새와 저를 걱정할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저를 어딘가에서 보고있을 오라버니의 모습까지 밟혔습니다.
혼인준비를 하던 단새가 굳어진 저의 표정을 보고선 바쁘던 손을 조금씩 멈추고 있었습니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단새를 쳐다보았을 때 몰래 먹으려 했던 떡이라도 들킨 듯 놀란 저는 단새의 시선을 황급히 피했습니다. 하지만 같이 보낸 세월이 말해주듯 단새는 이미 저의 표정을 읽은지 오래였습니다.
"엿들으려 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씨가 원한다면 딱히 말리지 않겠습니다."
"… …."
"전에 말하지 않았습니까. 아씨의 사랑을 지켜드리겠다고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너는 어찌하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리고 나의 오라버니는."
단새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갔고 제 표정도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했습니다.
"선택은 아씨 마음에 달렸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씨의 결정에 대해 그 뒷 일을 맡을 뿐입니다."
모두가 잠이 든 이 시간에 저 혼자 잠에 들지 못하고 밤을 지새우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오기 전까지 수많은 고민을 하고 걱정도 했지만 결론이 나지는 못했습니다. 잠자리를 봐준 단새의 마지막 눈빛도 잊을 수 없었습니다. 저희 혼인에 기뻐하시던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도 아른거릴 뿐입니다. 제가 만약 당신과 떠났을 때의 가장 큰 걱정은 이곳을 버티고 있을 단새와 혹은 저를 미워하고 원망하고 있을 오라버니일 것입니다.
새벽이 왔습니다. 당신이 창문을 두드렸고 저는 당신의 그림자를 매만지며 가만히 앉아있었습니다. 당신의 해맑은 목소리가 들려왔고 당신의 그림자가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저의 그림자는 당신의 그림자와 반대로 더욱 작아지고 있었고 그렇게 조금씩 우리의 끝이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문을 열어주시오. 왜 문을 열지 않는 것입니까? 새벽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대로 혼인을 하여 저를 버리실 것입니까? 창문을 열어 손만 내주어도 낭자를 데려가겠습니다. 그러니 어서 문을 여세요."
당신의 담담했던 목소리가 조금씩 거세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목소리를 외면하며 당신의 마지막 그림자를 매만지고 있었습니다. 당신과 만났을 때면 밝았던 달이 구름에 가려 어두운 빛을 내어 그림자가 점점 흐려지고 있었고 당신의 갈라진 목소리가 제 맘을 찢어놓는 듯 했습니다. 구름에 달빛이 모두 가려졌을 때 당신의 말소리가 점차 줄어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제발… 모습만 비춰주어도 됩니다. 제발… 열어주십시오. 한 번이면 됩니다… 마지막으로 얼굴 한 번만 볼 수 있게… ."
흐느끼는 목소리가 마음을 녹여 저의 손을 몇 번이고 움직였습니다. 당신의 흐릿해진 그림자가 점차 움직이며 당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나서야 소리내어 울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만나지 못할 당신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당신의 뒷모습을 보면 소리내어 당신을 부를까 무서워 애써 외면했습니다.
당신이 없는 새벽이 오고 있습니다.
단편으로 찾아온 탄다이아입니다.
아련한 사극물을 쓰기위해 이렇게 찾아왔는데… 참으로…
우리의 모남은 다음 주에 찾아오겠습니다!!!
오늘은 새벽이 온다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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