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사모님
이른 아침의 등교길은 고요했다. 소매 끝에 뭍은 얼룩을 연신 문지르고 있던 찬열이 발 끝에 걸린 돌멩이를 빤히 바라보다 있는 힘껏 발로 걷어찼다. 저 멀리 날아가는 돌멩이 하나가 그리도 가벼워 보였다. 짹짹거리며 지저귀는 새들 또한 전깃줄 위에 다닥다닥 붙어있었고, 스쳐지나가는 먼지마저 가벼운 그런 아침이었다.
저녁내내 전화를 받지 않던 변백현이 괘씸해 이를 바득바득 갈고 나온 학교였다. 어슴푸레한 새벽의 기운이 좋다. 밝게 비추어 모든 걸 꿰뚫어보는 것 같지도 않았고, 어둡고 어두워 제 존재감마저 숨겨버리는 밤 또한 싫었다. 보일 듯 말듯, 애틋하고 무언가 아련한 기분이 마음에 들어 늘 새벽에 홀로 등교하곤 했다.
교실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책상들 중 역시 눈이 먼저 가는 건 변백현 책상. 어제 제가 떨군 분필가루들이 여전히 뿌옇게 남아있었다. 쯧-. 짧게 혀를 찬 찬열이 긴다리로 휘적휘적 걸어가 가방을 대충 벗어 던지고 소매를 올렸다. 청소도구함에 쌓여있는 걸레들 중 하나를 집어들고 화장실로 가 물을 적시는데 거울 속에 비친 제 얼굴이 바보같아 보였다.
왜 내가 변백현 책상을 닦아줘야 하는건데-?
어제 그 새끼가 좆나 불쌍하게 가서 그런거야. 그래. 그런거야. 그 새끼는 오자마자 책상 닦아야하니까 좆나 불쌍해서 박찬열님이 대신 해주는 거라니까. 그렇게 중얼거리며 꾹꾹 야무지게 물기를 짜내고 교실로 돌아간 찬열의 앞에 그가 보였다. 하얀 손안에 들려진 손수건도 새하얗다. 사내새끼가 손수건이 뭐야. 게다가 하얀색? 그럴 틈도 없이 자꾸만 잦아드는 숨소리에 찬열의 손에 든 걸레가 초라해졌다.
"비켜."
"........"
"비키라고."
결국 백현에게 성큼 다가간 찬열이 그의 팔을 잡고 당기자 노려보는 백현의 눈이 매섭다. 뭘봐-. 어색한 공기가 버거워 억지로 헛기침을 몇번 콜록이자 그제서야 백현이 눈을 내리깔고 뒤로 두발자국 물러난다. 비켜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젖은 걸레로 미처 그가 닦아내지 못한 가루를 문지르자 뒤에서 지켜보는 눈길로 숨이 턱턱 막혀왔다.
"야."
"....."
"씨발 대답안하냐?"
"....왜."
"나 안때리냐?"
"뭐?"
황당한 찬열의 말에 백현은 기가 막혔다. 뭐 이런 미친놈이 다있나 싶었다. 괴롭힐 대로 다 괴롭혀놓고 다음 날 학교에 와보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깨끗했다. 걸레빤 물에 교복이 푹 젖은 건 당연지사였고, 새로 산 가방마저 더러워진 터라 교문으로 빠져나가기 전 소각장에 들러 가방을 밀어넣고 떠났었건만, 다음 날이 되자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여져 있는 가방에 의아했다. 그게 처음이었다.
어느 날은 제 체육복이 가위와 칼로 난도질을 당해 너덜해져있어 버렸건만, 사물함에 들어있던. 제게는 조금 큰 체육복 하나가 마음에 걸렸다. 누가 대체 이런 짓을. 늘 저를 괴롭히는 건 박찬열이였고, 그 패거리들이 했을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건만. 오늘에서야 알았다.
더럽혀진 책상을 닦아내려 손수건을 꺼내들자 땅에 떨어진 검은색 가방이 어딘가 모르게 익숙했다. 제 뒷통수를 후려갈기며 뛰어가던 박찬열의 가방이었다. 그는 이유없이 백현을 괴롭혔다. 단지 부잣집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모든 아이들이 백현을 우러러 볼때 그 혼자 백현을 괴롭혔었고, 차츰 말수가 적고 사교성이 없는 백현을 재수없게 생각하던 아이들마저 찬열에게 붙어 백현을 괴롭히기 시작했었다.
가장 재수없는 새끼가. 병주고 약을 준다.
사양할게 박찬열. 너 진짜 토나오게 싫거든-?
황당해서 굳은 백현이 찬열에게 무슨 말이냐는 듯한 눈빛을 보내자 찬열이 멎쩍게 머리를 긁적인다.
"너 저번에 김종대 싸대기 후려갈겼잖아."
".........."
"그 새끼가 얼마나 빡쳤는 줄 아냐?"
"그래서."
"내가 그걸 말리느라고 아오-"
"니가 왜?"
당연히-. 하고 말을 이으려던 찬열이 잠시동안 머뭇거렸다. 목구멍에서 맴도는 그 말을 겨우 삼키고 백현을 게슴츠레 쳐다봤다. 당연히 변백현은 내가 물어뜯을거니까. 그 말이 여전히 입안에 남아있었다.
"당연히 김종대가 너 건드리면 그 새끼만 더러워지는 거잖아."
"........"
"하나뿐인 불알친구. 너랑 터치해서 더럽히고 싶지는 않더라고."
"그래서."
조금씩 떨리는 백현의 몸을 당황스럽게 바라보던 찬열이 깨끗해진 책상과 분노에 찬 백현의 얼굴을 번갈아봤다. 백현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눈가가 빨갛게 물들었고 깨문 입술은 파랗게 변하고 있었다.
"너도 한대 쳐달라고?"
"야-. 너 우냐?"
"꺼져."
"...뭐?"
"꺼지라고. 더럽다며."
"야."
"그만 가."
찬열을 작게 밀친 백현의 손에 힘없이 밀려난 찬열이 멍하게 서있었다. 백현은 자리에 앉아 교과서를 꺼내 코를 박았고, 찬열은 여전히 작은 그 뒷통수만 쳐다보고 있었다. 드륵- 거리며 열린 문으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렸고, 아이들이 하나 둘 들어오자 멍하게 서있던 찬열이 가방을 챙겨들고 제 자리로 돌아갔다.
코가 시큰거렸다. 백현은 책상에서 느껴지는 역한 걸레 냄새에 입을 틀어막고 눈을 질끈 감았다. 찬열의 손에 아직까지 들린 걸레를 힐끗보고 결국 참지 못하겠던지 뒷문으로 다급히 뛰쳐나간다. 그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던 찬열은 아직까지 축축히 젖은 걸레를 책상속으로 밀어넣었다. 웃으며 제게 다가와 장난을 치는 종대에게 미소지으며 괜시리 뒷문을 힐끔거렸다.
*
몸이 안좋아요.
변백현. 너 조퇴만 몇번 째인 줄 알아?
정말이에요.
어머님께 말씀드려도 되니?
...아뇨.
학교가 싫은 거야? 친구들하고 무슨 일 있니?
차마 대답하지 못한 말이 머릿속에서 두어번 뱅뱅 울렸고, 백현의 생활기록부를 보던 여선생은 백현의 어깨를 감쌌다. 화장품 냄새가 훅-하고 끼치자 백현이 조금 움츠러들었다. 때마침 매점으로 열심히 질주하던 찬열의 눈에 그 모습이 보였고, 달려가던 종대를 내버려둔 채 창문에 찰싹 달라붙고 귀를 댔다. 무슨 얘기하는지 알아먹을 수가 없다. 아-. 저 선생 좆나 목소리 작아. 화장 떡칠녀 주제에.
괜시리 마음이 찝찝하다. 아까 봤던 변백현의 빨간 눈가가 더 축쳐져보여 어딘가 속이 불편하고 체한 듯 답답했다. 변백현은 늘 그랬다. 그를 보고 있을 때마다 속이 답답했고, 모든 걸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죽은 사람마냥 지내는 변백현이 짜증났다. 눈에 거슬렸다. 감정없는 인형처럼 살아가는 변백현을 괜히 괴롭히고, 일그러지는 그의 얼굴에 저런 표정도 있구나-. 싶었다.
아-. 근데 왜 저렇게 달라붙어 있어. 둘아 사겨?
씨발. 저 선생 수업 좆나 못가르치는데.
변백현 싫어하는 거 안보여요?
애가 타 복도에 쭈그려 훔쳐보던 찬열의 두 발이 동동 굴렀다. 변백현은 미술을 전공한다고 그랬다. 그래서 손가락이 저렇게 하얀건가. 지나가는 여자애들이 속닥거리는 주요 화제도 변백현이었다. 여자처럼 생긴 곱상한 얼굴에 미술까지. 게다가 실력도 꽤 있어 고등학생 주제에 스카우트 제안도 꽤나 받았었다고. 근데 뭐가 불만이길래 저렇게 표정없이 살아. 욕심많은 새끼가.
"그럼 결국 집에 가겠다고?"
"엄마께는 제가 말씀드릴게요."
"..그래 알았다."
짧게 고갤 숙인 백현이 문을 열고 나오려하자 다급해진 찬열은 종대가 사라진 방향으로 다시 뛰었다. 결국 나 때문에 또 집에 가는건가? 자꾸 신경쓰이게 만드는 변백현이 또 짜증나 머리를 또 신경질적으로 긁어댔다. 아-드럽게. 앞에서 중얼거린 종대가 낄낄대며 쳐웃자 약이오른 찬열이 또 달리기 시작했다. 너 이새끼. 뒤졌다.
근데. 변백현 아픈 건 아니겠지?
*
학교에 나가지 않았다. 얼마 남지 않은 수시 걱정에 엄마는 하루 24시간 과외 선생을 붙여놓았고 그 중 한명은 물론 경수도 포함이였다.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끊임없이 전화해대는 박찬열 때문에. 제게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머리가 간질거리자 지끈거리던 머리에 두통약을 꺼내들었다.
똑똑-.
열린 문으로 부드럽게 들어온 경수가 미소지었다. 백현아 안녕-. 밖에 되게 더워. 땀냄새가 조금 나는 그를 바라보던 백현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손바닥 위에 올려진 두통약 한알을 보다 망설임없이 쓰레기통으로 떨궜다. 가방을 내려놓고 제 쪽으로 의자를 끌어당긴 경수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오늘은 왠지 두통약을 먹지 않아도 두통이 가실 것만 같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방안을 타고 흰 도화지 위에 흘러내렸다. 여기는- 순간 등에 확하고 느껴지는 온기에 놀라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더니 툭하고 떨어진 연필에 숨을 멈췄다. 놀랐어? 미안. 데구르르 굴러가던 연필이 이제까지 계속 신경쓰이던 손하나와 맞닿았다. 고갤 올린 그가 의자를 바로 세우고 앉으라며 톡톡쳤다. 조그맣게 한숨이 삐져나오고 포기한듯 주저앉은 제 눈에 하얀 그 손이 또 어른거린다.
“여기는- 이렇게. 응?”
“…………”
“넌 손이 섬세하니까 조금만 다듬으면-“
“선생님.”
늘 그렇듯 백현의 감정없는 목소리가 방안을 타고 나른하게 퍼졌다. 왜그러냐는 듯이 고갤 돌린 그 입술에 짧게 맞춰진 그 촉촉함에 경수의 몸을 뻣뻣하게 만들었다. 백현은 좀처럼 보이지 않던 미소를 활짝 지어보였고, 마주 닿았던 입술과 동공에 비친 그 미소에 경수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저 오늘-. 기분 되게 안좋은데."
"백현아..?"
"저랑 잘래요?"
툭- 하고 경수의 손끝에서 연필이 떨어졌다. 당황한 경수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사뭇 진지해진 눈동자로 백현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 모습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백현의 미소가 가셨고, 경수는 더이상 어벙벙한 미술 선생이 아니었다.
"백현아."
"....."
"고흐는 왜 귀를 잘랐을까."
"......"
"네게 주는 숙제야. 그 답을 찾으면."
"......."
"그 땐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평소처럼 맑게 미소지은 경수가 가방을 챙겨들고 나갈 때까지 백현은 멍하게 떨어진 연필만 바라보았다. 왜 박찬열이 생각나는지 모르겠고, 왜 괜히 눈물이 나는지도 모르겠다. 도화지 안에 그려진 해바라기는 까맣고 까맣다.
도경수는 이제 더이상 백현에게 선생님이 될 수 없다. 그가 떨어트리고 간 연필 한자루가 마음에 걸렸다.
고흐. 고흐라-.
에어컨 바람이 조금 차가워지자 백현은 리모컨을 눌러 껐고, 작동이 완전히 멈추자 고요해진 방안에 백현이 미소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