낡은 빌라에선 쿱쿱한 냄새가 풍겨졌고, 살짝 젖어든 머리를 털며 미간을 찡그린 경수가 밖으로 나오자 민석의 머리를 꾹 누르며 낄낄대는 찬열의 모습이 보였다. 너 왜 왔어? 퉁명스러운 경수의 목소리에 찬열이 비위 상한다는 듯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네 뒷구멍이나 후벼파줄까 해서. 물론 절대로 깨끗한 답은 아니었다. 찬열다운 답이었다. 경수는 대꾸하기 싫다는 듯 하얀 민석의 손을 잡고 앞장섰다. 김준면은? 찬열의 물음에 경수가 홱 고개를 돌렸다.
“네가 직접 기어들어가서 불러 김준면 어딨는지. 201호니까.”
“겁나 차갑게 구네. 오늘도 김종인한테만 오빠 오빠하면서 살랑댈 거야?”
“알 필요 없는 것 같은데. 민석이 앞에서 지저분한 얘기 하지마.”
경수는 차갑게 대꾸한 뒤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민석의 표정에 안심하고 학교로 향했다. 이슬이 내려앉듯 내리는 빗방울이 거슬렸다. 내리려면 제대로 내리고, 안 내리려면 제대로 안 내리던가. 괜한 하늘에게 꾸중을 하며 경수는 서둘러 학교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틀이나 종인의 얼굴을 못 봤더니 입에 가시가 돋힐 지경이었다. 찬열은 무슨 짓을 해도 미워보이는데, 종인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온갖 음담패설과 낯간지럽고 지저분한 말을 짖껄이고 자신의 몸에 어떤 짓을 해도, 하나도 미워보이지 않았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의 행위같아서 그저 기뻤다. 물론 이건 경수만의 착각이었지만.
“경수는 친구가 되게 많네. 준면이랑은 같이 살구, 찬열이도 있구…… 참. 종인이도 있지?”
“친구라니…. 넌 절대 저 애들하고 어울리지마 민석아. 알았지?”
“응?”
“약속해.”
경수의 말에 빙긋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민석이 참 예뻐보여서 경수는 그런 민석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무난히 선도부원들의 시선을 피해 교문을 통과하자 후덥지근한 공기가 피부에 와닿았다. 학교다. 드디어 실감이 났다. 지긋지긋한 월요일이라도 경수에겐 그저 종인의 얼굴을 볼 수있는 좋은 기회일 뿐이었다. 경수는 민석에게 안녕이라는 인사를 끝으로 방방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도도네. 바보 도도새, 바보 도경수.”
나른한 두 눈에 자신의 얼굴이 담기는 게 눈물이 왈칵 터질 정도로 좋았다. 가쁜 숨을 내쉬는 경수에게 슬금슬금 다가온 종인이 느긋히 목덜미를 핥아올리며 말했다. 야 어떡하냐, 네가 그렇게 색색거리니까 진짜 꼴리네. 아침부터. 경수는 그런 종인을 살짝 밀쳐냈다. 물론 그 상대가 박찬열이었다면 반항의 정도는 무척이나 달라졌겠지만, 지금의 상대는 종인이었다. 종인은 경수의 바지 버클을 만지작거리다 아침이라 참는다며 미소 짓고는 세훈을 데리고 복도로 나가버렸다.
허무해…. 오랜만에 봐서 혼자 너무 기대에 부풀어있었던 것 같았다. 경수는 한숨을 털어내며 자리에 앉아 가방을 열어 필통을 꺼내 올려놓았다. 벌써 학교에 도착한건지 준면의 목을 조르며 장난치던 찬열은 경수를 발견하자마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마도 종인이 있나 없나를 살피는 것 같았다. 둘은 그런대로 사이가 안 좋기로 유명했으니까. 경수의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인지한 찬열이 후다닥 달려와 경수의 볼을 잡고 조물락거렸다. 아이구, 이쁘다 우리 경수.
“너 좋다는 김준면하고 놀지 왜 굳이 와서 심통이야. 나 자습해야되니까 얼른 가.”
“야… 어쩜. 넌 이렇게 툴툴대는 것도 귀엽냐 도도?”
“야! 도도라고 하지 말랬지!”
“김종인한텐 아무 소리 안 하잖아. 너 은근 차별한다? 구멍은 무차별하게 다 대주면서.”
짜증나. 내가 이러니까 널 싫어하지. 경수는 진심으로 짜증이 가득 묻어난 표정으로 찬열을 밀어냈다. 도도는 종인이만 부를 수 있는 별명인데. 뒷문에서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찬열을 부르는 준면을 향해 그대로 찬열을 밀쳐낸 경수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내려앉은 콧잔등을 쓸어낸 뒤 교과서에 집중했다. 요 근래 민석이 자신의 직업에 대해 알아버릴까 신경 쓰는 탓에 수업시간에 하나도 집중하지 못했다. 거기다 종인이 바로 제 앞자리니, 듬직한 어깨를 볼 때마다 이리저리 뽀뽀해주고 싶은 욕구가 통통 튀어올라 경수에게 학업에 집중하기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려웠다.
“너 김종인 좋아해?”
언제 온건지 새초롬히 자신을 내려다보는 준면을 발견한 경수가 넌 박찬열한테나 가시지 하고 대답했다. 아침부터 돌아가면서 경수를 귀찮게 할 작정인 건지, 경수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교과서를 덮었다. 준면은 찬열이 졸라 빨개진 목을 슥슥 문대며 비아냥거렸다. 걸레년 주제에 심장은 살아있나보다? 근데 어떡해, 너같은 애는 김종인 눈에 안 들어차. 뭐라 말대꾸 할 수 없었다. 맞는 말이었으니까. 특출난 게 있다면 그저 요부마냥 허리를 살랑대는 것과 야실스러운 신음성이 다분한 소리를 내뱉는 것 뿐이었으니까. 결국엔 김종인한테나 박찬열한테나, 도경수는 성 노리개에 그치지 않았다. 준면은 늘 그렇듯 제 할말만 하고 뒤돌아 나가버렸다. 그게 또 지독하게 얄미워서 경수는 신경질 적으로 빨개진 두 눈을 벅벅 문질렀다. 창피함보다 앞지르는 감정은 속상함이었다. 난 왜 이렇게 못났을까. 하루하루 납작하게 고개를 숙이며 위축되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싶지 않았다.
[ 도도 ]
담임 선생님의 앙칼진 목소리로 시작된 조례시간, 종인이 뒤늦게 들어와 앉아 경수에게 건넨 쪽지였다. 도도. 저 두 글자, 바보새라는 의미의 별명조차도 너무나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망상에선 1등이 아니라면 섭섭할 정도의 경수는 어느덧 불그스름 해진 볼을 찰싹 내려치며 슥슥 글씨를 써 내려갔다. [ 왜? ] 물음표를 붙여야 하나, 떼어야 하나 몇 번을 고민했는지 모르겠다. 사랑이 이렇게 유치하다 해도 불만은 없었다. 누가 뭐라든 경수는 종인과의 시간이 행복했으니까.
[ 박찬열이 너 괴롭히는 거 싫지. ]
[ 응 싫지 당연히. 왜? ]
[ 걔가 너 좋아해서 그래. 나두 싫다. ]
몇 번이나 해석해보려 노력했지만 어려운 답이었다. 찬열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 또한 이해되지 않았지만, 나두 싫다 라니…. 머릿속이 뱅뱅 돌아가는 것 같아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쪽지를 필통 안에 구겨넣었다. 원숭이 모양 필통을 슥슥 쓰다듬었다. 보들보들한 느낌이 마음의 평안을 되찾아주는 것 같았다. 박찬열이 자신을 좋아하는 것도, 그 사실이 싫은 김종인도, 결국엔 자신을 걸레로밖에 보지않을 거란 생각에 괜한 희망은 다시 움츠러들었다. 괜히 웃음이 터져나온다. 뭘 기대한 거야 경수야.
“경수야….”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경수의 반에 찾아온 민석을 발견하고 놀란 경수가 서둘러 민석의 손을 붙잡고 창가로 향하자 이내 민석은 눈물을 뚝하고 떨어트렸다. 왜 그래 민석아?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열 여덟살인 나이에 비해 정신연령이 조금 낮은 민석은 경수가 건넨 휴지로 두 눈을 닦아내며 대답했다. 준면이가 자꾸 너보고 지저분하대, 놀지말래…, 난 너 좋은데. 민석을 달래기도 전에 당장 달려가 준면의 얼굴을 때리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않았다. 민석아 울지마. 어쩔 줄 몰라하는 경수의 품에 안겨 울음을 토해내던 민석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나 준면이 좋아했단 말야. 되게 좋은 애 같았어, 우리반 반장이구, 공부도 잘하고….”
“……민석아 걔는―”
“전학 처음 왔을 때, 나한테 맨 처음으로 말 걸고 웃어줬어…. 그래서 좋았는데, 경수랑 준면이 사이 안 좋아?”
좋을래야 좋을 수가 없겠지. 아버지가 다른 둘이 18년이 지난 후에 만났는데, 누가 형이고 동생이라 따지기도 머리가 지끈거릴 만큼 타이밍은 기가 막히게 잘 맞춰서 같은 해에 떡하니 낳아버렸는데… 사이가 좋을 수가. 경수는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민석의 뺨을 쓰다듬었다. 민석아 어떡해. 너가 김준면 좋아하는 건 상관없는데 그자식은 박찬열 좋아한단 말야. 기가 막혔다. 아무리 남고라지만 어떻게 동성애자들이 이렇게 들끓을 수 있지. 하지만 더럽다는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자신만큼 더러운 사람은 없을테니까.
“민석아, 울지마. 괜찮아…. 김준면 얘기 다 무시해. 네 눈에도 정말 내가 더러워보여?”
“아니. 절대 절대 안 더러워. 경수 깨끗해, 깨끗해….”
“…그럼 된 거야 민석아. 괜찮아. 괜찮아, 다 괜찮아….”
괜찮아. 어떤 드라마의 명대사처럼, 괜찮은 척 하다보면 언젠가는 괜찮아지겠지. 경수는 말없이 민석을 끌어안고 토닥였다. 머릿속이 엉키고 또 엉켜서 오늘밤 잠들고 나면 다음날 일어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까지 치밀어올랐다. 지갑을 열어제끼자 몰래 복도에서 주운 종인의 학생증 사진이 활짝 웃으며 경수를 반겼다. 경수는 민석을 올려보내고 한숨을 토해내며 자리에 앉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종인을 위해서라도 꿋꿋하게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었다. 종례가 끝나자마자 달려가 누군지도 모를 사람들에게 몸을 내줄 생각에 한숨부터 나왔지만 그래도 참아내야했다. 이게 도경수의 운명이라면 받아들이는 게 지극히 정상일테니까.
꽤 오랜만에 찾아뵙는 것 같아요 독자분들 ㅎㅎ! 컴퓨터가 워낙 느려서 글 한번 써서 올리기도 힘드네요
다각이다 보니 커플링 구조가 굉장히 복잡해요.. 뭐 이것도 초반에만 이럴테지만.
민석이는 준면이를 좋아해요. 경수를 좋아하는 것 같지만 그건 친구로서.. 밖에 되지 않아요 ㅎㅎ
근데 준면이는 찬열이를 좋아하고, 찬열이는 경수를 좋아하고, 경수는 종인이를 좋아하고
제대로 꼬였죠 죄송해요..
저도 커플링 때문에 머리 빠개지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아직 종인이가 좋아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곧 풀리겠죠.. 네..
제 나이를 너무 궁금해 하시는 것 같아서 열 네살이라고 밝혔는데, 오히려 너무 놀라셔서
작품의 몰입도를 떨어트리는 게 아닐지 조금 조심스러워져요ㅠㅠ 제 나이는 그냥 음.. 신경쓰지 말아주세요 ㅎㅎ
종대필통 일화도 제 친구가 푼 게 있는데 그건 사실이예요!
그 친구가 저한테 생일선물로 준 원숭이 필통이 있는데 제가 이름을 김종대라고 붙여줬거든요 ㅎㅎ
![[EXO/다각] 그대와 이 봄을 그리다 02 +종대 | 인스티즈](http://file.instiz.net/data/cached_img/upload/9/8/2/982c2014ac74625cd341ae8432fe9c28.jpg)
우리 종대예요 ㅋㅋㅋㅋㅋ 귀엽죠!
오늘은 과외 때문에 암호닉 목록을 준비하지 못 했지만 다음편은 꼭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ㅠㅠ!죄송해요
신알신 암호닉은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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