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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잔향
W. 우잔향
어디서 부터 잘못된 일인지 모르겠다. 처음엔 증오였고, 마지막은 그리움이었다. 그 사이에 존재했던 것이 사랑이었는지는 이제 나도 확신할 수 없다. 사랑이었다면 아픈 사랑이었고 사랑이 아니었다면 스쳐지나는 아픈 기억이겠지, 뿌옇게 흐려가는 연기 속에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비가 온다. 너에 대한 기억들도 물밀듯 오는 것은 추억에 젖은 상념 때문일까. 목을 타고 흐르는 독한 것이 가슴에 뜨겁게 스며들었다. 이쯤에서 너도 왔으면 좋겠다. 정말 우습게도 나는 너를 추억한다.
*
훈련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음울한 분위기를 풍겼다. 두서없이 덧칠된 아치형 회백색 벽이 끝없이 이어져있고 바닥엔 먼지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잡동사니가 여기 저기 굴러다닌다. 습기로 가득 찬 텅빈 공간을 가득 메운 것은 사람에 대한 증오와 복수심. 훈련이 끝나고 돌아오는 이들의 감정이 먼지와 한 데 엉겨 있다.
지민도 이 길을 지나오는 수백 어쩌면 수천일지 모르는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훈련이 끝난 뒤 저에게 주어진 볼품없는 감자 덩어리를 꽉 쥐며 이 모든 일의 시발점인 그 날을 생각했다. 그것은 어쩌면 14살 그의 인생에서 가장 잘 지켜지는 하루 일과일지 모른다. 지민은 말라비틀어진 감자의 조직이 뭉게지는 느낌을 느끼고서야 손에 쥔 힘을 풀었다.
도화지에 물이 스며들듯 지하 통로에 소란스러움이 갑작스레 스며들었다. 이번에 훈련을 같이 한 남준 무리일 터다. 지민이 이 조직에서 누구와도 정을 나누지 않는 반면 다른 이들은 쉽게 서로에게 정을 주는 편이었다. 그 속에 믿음은 없다하더라도. 조직은 무리로 이루어진 집단이었고, 지민은 그 속에서 혼자였다. 외롭다는 생각은 가져본 적이 없다. 빠른 속도로 제가 있는 곳까지 다다른 무리 중 한 명이 말을 걸어왔다.
"어이, 지민. 네가 보기엔 우리 훈련 어땠어?"
호석, 이었나. 무리에 속해줬으면 하는 속내를 비추며 말을 걸어오는 이들 중 하나였다. 무리의 크기가 곧 힘을 의미하는 조직에서 자연스러운 일이다. 지민은 심드렁한 얼굴로 호석을 보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럭저럭. 호석이 맥없이 끊어진 대화를 이어보고자 했지만 그게 끝이었다. 무리에 섞일 마음이 없는 지민이 빠른 걸음으로 그들을 앞질러 갔다. 뒤에서 저를 향한 욕짓거리가 들려왔지만 신경쓰지 않았다.
통로를 끝없이 걷다 보면 막다른 곳에는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신형 엘리베이터 두 대가 설치되어 있다. 지옥으로 가는 문 마냥 검고 흉흉한 그 곳에는 저승사자처럼 검은 옷을 입고 무장한 사내 둘이 지키고 섰다. 지민은 그들에게 가볍게 목례를 건넨 뒤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버튼은 단 하나, 굶주린 짐승들의 사육장으로 향하는 것이다. 꽤나 오랜 시간동안 올라갈 것임을 알기에 지민은 손에 든 감자를 베어 물었다. 오랫동안 열지 않은 입에 이물감이 전해진다.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감각이었지만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반복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꾸역꾸역 집어 삼켰다.
말라 비틀어진 감자가 목구멍에 남기는 더러운 감각을 안다. 지민은 그 느낌을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에 느껴본 적이 있다. 오늘은 비가 왔고, 그 날도 비가 왔다. 제 생일날이었고 누구보다 행복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날이었다. 그래, 나는 그 날을, 그 날이 내게 남긴 메이는 느낌을 안다. 제게 손을 뻗어왔던 어른들의 목소리도.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과거가 남긴 잔상에 허덕이느라 멍하니 서있었던 것이 못내 바보스레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제가 서있는 곳을 보았다. 번듯한 건물 고층에 위치한 짐승 사육장. 지민은 느릿하게 손을 쥐었다 폈다. 배고픔에 주린 짐승들이 서로를 뜯고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곳이다. 과거가 남긴 쓰라린 감각들을 씻어내는 방법은 저 곳에서 살아남는 것 뿐이었다. 끼익 소리를 내며 열리는 육중한 철문을 열고 들어갔다. 빛으로 다가오는 아찔한 감각이 제 눈 신경을 타고 들었다. 길지 않은 또 하나의 하루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