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운은 이른 아침 잠에서 깨어났다. 부쩍 신경이 바짝 서 있었다.
사실 택운은 요즘 제정신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버텨 온 것만 해도 용했다.
지금 상태로서는 가끔 밤하늘을 보며 멍하니 있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었다.
재환과의 이별과 재향의 죽음을 바로 눈 앞에서 지켜본 충격도 채 추스리지 못 한 상태에서 원식의 집에 들어오게 되었다. 아주 급작스럽게도.
이러한 상황에서 받는 안주인과 단하의 멸시와 비난은 그 효과가 배가 되어 고스란히 택운에게 꽂혔다.
강해지기로 했는데, 나는 아직도 약해빠져있구나.
택운의 하얀 얼굴이 더욱 창백했다. 이젠 허옇다 못해 푸르딩딩한 몸을 이끌고 휘청거리며 바깥께로 나왔다.
햇빛 하나 들지 않는 방에 더 있으면, 정말로 미쳐버릴것만 같았다.
방문을 열자마자 상혁의 얼굴이 보였다. 저를 향해 웃어 보이는 상혁에 택운은 얼굴이 굳었다.
가슴이 저릿했다. 이 순간 재환이 생각나는 이유는 무엇인지, 대체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재환이 나를 내치고 뒤돌아 가던 그 순간, 택운은 알았다.
사람을 믿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고 바보 같은 짓이라고.
나는.. 버려진 채로 죽어 간 어머니 같은 삶은 절대로 살지 않을 것이라고.
천박한 신분이라는 이유로 저의 어머니와 자신을 벼랑 끝으로 내 몰던 사람들을 절대로 잊지 않을 거라고.
상혁도 그와 다를 것이 없다.
저 해맑은 미소와 다정한 말투, 자신을 믿으라던 그 말들.
전부 재환과 똑 닮아있었다. 모든 것이.
처음 자신이 이 곳에 오던 날, 상혁은 자신과 원식의 대화를 밖에서 모두 듣고 있었다.
하지만 그 대화의 내용에 나의 출생에 대한 것은 없었다. 그저 상혁은, 원식이 어디선가 낳은 아이를 이제서야 찾아서 양자로 들였다는 것으로만 알고 있겠지.
...
핏줄기로 모든 것을 가르는, 비열한 진실들.
택운은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고 있었다. 상혁은 그런 택운이 걱정스러워 다가갔다.
오늘따라 안색이 더욱 안좋아보이는 택운이 안쓰러웠다.
그리고, 어젯밤과는 달리 자신에게 차가운 저 눈동자가 낯설었다.
"택운.. 도련님."
'도련님' 자를 어색하게 붙이며 제게 다가오는 상혁에 택운은 눈동자를 돌려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택운의 행동에 상혁도 택운을 마주보았다.
묘한 기류.
"..괜찮아."
그 기류를 깨고 나온 것은, 택운의 여릿한 목소리였다. 괜찮다는 말의 내용과는 달리, 그 목소리는 깨어질듯이 위태했다.
자꾸만 휘청거리는 택운의 걸음걸이가 눈에 밟힌다.
"대감님이 편찮으셔."
상혁은 어렵사리 그런 택운에게 말을 꺼냈다.
오늘 새벽달이 뜰 즈음, 무엇 때문인지 원식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다. 의원을 불러 진맥을 시도했으나, 번번히 실패였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병명. 의원은 그렇게 밖에 설명 할 수 없다고 했다.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택운은 상혁의 말에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앞으로 걸어 나갔다.
상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택운의 팔을 잡아 챘다.
"대감님이 위중하시다고."
상혁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택운은 뒤를 돌았다. 그리고 상혁의 팔을 거칠게 쳐냈다.
서슬 퍼런 택운의 표정에 상혁은 더는 택운에게 다가 갈 수 없었다.
..대체 뭐가 너를 그리 상처 받게 한 것이란 말이냐.
어느 새 사라져 가는 택운의 뒷모습에 상혁은 낮게, 그리고 서글프게 한숨을 쉬었다.
당장 택운을 품에 안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
두 인영이 재빠르고, 긴박하게 마당을 가로지른다.
"어머..니."
".."
"진정.. 그런 것 입니까...?.."
".. 마음 단단히 먹거라."
구석 후미진 곳에서 두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단하, 그리고 그의 모친, 박연옥.
"너의 아비가 사라져줘야, 모든 것이 뜻 대로 되는 것이야."
"어..어머니. 하지만."
"의원들의 실력으로는 절대로 밝혀 낼 수 없는 독이다. 드러 날 염려는 없어."
"..."
"너도 택운이, 그 년을 내 쫓고 싶지 않더냐?"
"..."
"니 애비만 없어진다면야, 그 다음 일은 아무 것도 아니지."
비밀스러운 대화. 그에 몰입한 두 여자는, 그 자리에 있는 또 다른 한 사람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
연옥은 원식이 혼례 후 자신을 위해 지어준 별채에 앉아 손톱을 깨물며 초조히 떨었다.
절대로 자신을, 그리고 단하를 사랑 해 주지 않는 원식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의사는 묻지도 않은 채 택운이라는 천한 아이를 이 집에 양자로 들였다.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은 원식의 정실이었다. 대접도 이런 푸대접을 받을 수는 없었다.
원식도, 그리고 자신도 원해서 치른 혼례가 아니었기에, 서러움은 더욱 컸다.
원식만 죽어 준다면, 모든 재물들이 자신과 단하의 손에 들어 올 것이다.
하지만 발각 되지 않게 수를 써 놨음에도 불구하고, 불길한 예감이 온 몸에서 떠나 가지를 않았다. 기분 나쁜 느낌이 전신을 휘감았다.
눈동자를 도륵 도륵 굴리며 마음의 평정을 찾기 위해 애써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 독이었습니까."
여릿한 목소리.
"..악!"
연옥은 놀라 작게 고함을 지르며 부들부들 떨리는 눈꺼풀을 들었다.
언젠가 들었던 목소리.
옆을 바라보기가 두려웠다.
그는, 택운이었다.
"독을 쓰면서까지, 아버지를 죽이고 싶으셨던 겁니까."
"..."
더 이상의 말은 없었다.
택운은 딱, 그 말만 남긴 채 멀어져갔다.
연옥은 그제서야 뻣뻣이 굳은 고개를 돌려 택운이 가는 쪽을 보았다.
택운이.. 엿들은건가. 아까의 대화를.
"저.. 요망한....."
연옥의 잇새로 터지는 분노에 찬 신음소리가 별채의 공기를 뒤흔들었다.
연옥의 눈에 살기가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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