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한 김팀장 07
출장가기 위해 짐을 챙기는데 생각해보니 나는 출장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게 없었다. 아니, 사람을 출장을 보내려면 어디를 얼마나 오랫동안 가는지는 알려줘야 되는거 아니야? 백현씨에게 연락을 해봤지만 백현씨는 본인도 출장을 간다는 것만 알았을 뿐 정확히는 모른다고 했고 내 좁은 인간관계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된 이상 연락할 사람은 한명밖에 없는데...
카톡에 뜬 김종대의 이름을 보고는 한참을 망설였다. 김종대하고 카톡 해보는건 처음인데...고민하다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채팅 버튼을 눌렀다.
[야 김종대]
[그런데 도대체 이 출장]오후1:57
[얼마나 오랫동안 어디로 가는거야?]오후1:58
헐 1 없어졌어, 내가 보낸 메세지에 금방 숫자가 사라졌고 나는 우왕좌왕하다 카톡방을 나왔다. 곧 김종대에게 답장이 왔다.
[그걸 모르냐?]
[당장 내일인데]오후2:03
[너가 안알려줬잖아 ㅡㅡ]오후2:04
[그럼 물어봐야될거 아니야]오후2:04
[그래서 지금 물어보잖아]오후2:06
[말대답하지마라]오후2:07
[내가 왜]오후2:09
[노답...]오후2:10
아니 이새끼가...김종대와 한참을 의미없이 유치하게 싸우다 정신을 차렸다.
[됐고 알려달라고]오후2:!3
[부산, 2박 3일]오후2:14
[가서 정확히 뭐하는데?]오후2:!4
[뭐하긴, 일하지]오후2:17
[그니깐 정확히 뭐하냐고]오후2:18
[해외 관광객 대상 조사하고 부산 지사에서 회의 있을거야]
[별로 안 바빠]오후2:19
[아...그래]오후2:20
내 알겠다는 대답에 김종대는 한참 답이 없었다. 뭐야, 용건 끝났으니까 씹는건가? 나도 그냥 핸드폰을 내려놨는데 갑자기 다시 김종대에게 카톡이 왔다.
[내일 집 앞으로 갈까?]오후2:31
[우리 집?]오후2:33
[그럼 어디겠냐]오후2:34
[니가 우리집 앞을 왜 와]오후2:34
[니가 쓸데없이 짐 많이 들고 올까봐]
[원래 여자들 그러잖아]오후2:36
[필요 없거든요 ㅗ]오후2:38
[후회하지 마라]오후2:38
[후회 안해]오후2:39
[그리고 괜히 예쁜척한다고 짧은 옷 입지 마라]
[추워]오후2:44
[오 지금 걱정하는거?]오후2:44
[미쳤냐?]
[니 보면 내가 추워서 짜증나]오후2:46
[아]
[ㅇ]오후2:48
...ㅎ 그럼 그렇지 뭐...김종대가 나를 걱정해줄리가...
괜히 부풀었던 마음에 김이 빠져 힘없이 웃었다. 그나저나 2박 3일이나 되는데...아니 사실 해외가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다. 해외 가면 일주일 정도는 있을 텐데 김종대랑 단 둘이 해외출장가는거 상상하면...끔찍하다. 뭔가 불안하면서도 설레는 마음 때문에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
"헐, 미친 늦었어"
어제 밤을 설쳐서 그런지 늦게 일어나고 말았다. 급하게 핸드폰을 집어들어 시간을 확인해보니 급하게 준비해야될 시간이었다. 빠르게 씻고 나와서는 옷을 꺼내기 시작했다. 뭐 입지? 평소 회사를 갈때와는 다르게 옷을 이것저것 대보며 무엇이 더 나은지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다 이런 내가 어이가 없어 허-하고 웃었다.
무엇이 이렇게 들떠서 이러는걸까, 그게 설마, 김종대 때문은 아니길 바란다. 그냥 평소와는 조금 다른 특별한 날이어서 이런거겠지 뭐.
평소와 다르게 열심히 꾸미고는 어제 미리 싸놓은 짐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보니 촉박하다. 1층에 내려간 순간 차의 클락션 소리에 놀라 비명을 지르며 핸드폰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어쭈, 왜 이제 나와?"
"아씨...너 때문에 핸드폰 떨어뜨렸잖아!"
내가 알아서 회사까지 가겠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김종대는 기어이 우리 집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럴거면 말이라도 하지 왜 말도없이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정신없이 떨어진 핸드폰을 주워 여기저기 살피는데 김종대가 차에서 내려서는 내 손에서 핸드폰을 채갔다.
"...왜?"
잠시 내 핸드폰을 살피던 김종대는 다시 내게 핸드폰을 휙 던져주더니 내 캐리어를 트렁크에 실었다.
"떨어뜨려서 짜증나면 핸드폰 바꾸든가"
"니가 돈 대줄것도 아니면서-"
"돈 대줄테니까 바꾸고싶음 바꾸라고"
"...뭐야, 갑자기? 팀장이라고 돈지랄 쩌시네요"
그 말에 김종대가 아무 표정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순간 내가 너무 나댔나 싶어 김종대 눈치를 슬슬 보았다.
"아니...그게..."
"아무한테나 이러겠냐?"
"...응?"
"못알아들었으면 됐어"
"..."
"나는 가치가 있는 거에만 돈 투자해"
...? 뭔 개소리야? 김종대는 가치가 있는 사람한테만 돈을 투자한다. 그런데 나보고 핸드폰 바꾸고싶으면 자기가 돈 대줄테니까 바꾸라고 했다. 한마디로 나한테 돈을 투자한다는거지. 고로 나는 김종대한테 가치 있는 사람...?
순간 읭? 스러웠지만 뭔가 기분이 좋아 실실 웃으면서 김종대를 쳐다봤다. 김종대는 왠지 내 시선을 피했다.
"야, 내가 너한테 가치 있는 사람이었어?"
"..."
"그런데~ 김종대는 가치있는 사람한테 막 최악이라는 말 하고~~"
내 약올리는 말투에 김종대는 인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한숨을 푹푹 내쉬던 김종대는 내 놀림에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다 작게 김종대가 뭐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뭐? 잘 안들려, 크게 좀 말해봐"
"미안...하다고..."
"...응?"
"미안하다고..."
"...? 너 지금 미안하다고 한거야?"
"아씨, 한번 들으면 좀 알아들어라, 좀!"
나한테 짜증을 낸 김종대가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고는 갑자기 차에 속도를 높혔다. 순간 피식 웃음이 나왔지만 왠지 김종대를 놀리고 싶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너 왜 나한테 짜증내...?"
"...어?"
"그냥 너 목소리 작아서 그런건데...내가 그렇게 싫어...?"
"ㅇ,아니 그게 아니라...아...진짜 미치겠네..."
김종대는 당황한 표정으로 운전을 하면서도 안절부절하며 내 얼굴을 살폈고 내가 결국 웃음을 못 참고 큭-하며 웃자 정색을 했다. 김종대가 치사해, 거짓말쟁이, 나쁜놈 같은 말들을 중얼중얼거리는데 못들은척 하고 핸드폰을 꺼내서 페이스북을 켰다.
오랜만에 미국 친구들 근황도 좀 확인하고 할겸 들어간 페이스북은 마침 내 친구들이 많이 접속해 있었다. 친구들이 내가 접속해 있는걸 보고서는 계속해서 나에게 메세지를 보내왔다. 당연히 친구들과 오랜만에 연락하니까 기분이 좋았다. 조만간 한번 미국을 가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참동안 김종대도 까맣게 잊고 친구들이랑 댓글달면서 놀고 있는데 김종대가 옆에서 힐끗힐끗 쳐다보며 말을 걸었다.
"...누구랑 연락하는데 그렇게 기분이 좋아?"
"어? 그냥 친구들"
"...친구 누구"
"미국 애들"
"..."
나도 모르게 미국 애들이라고 말하고는 깜짝 놀라 김종대 눈치를 봤다. 김종대에게 미국은 참 예민할 단어일텐데...나는 정말 바보다. 입을 다물고는 이번에는 애가 김종대를 힐끗힐끗 보자 김종대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눈치 보지마"
"..."
"이미 지나간일을 어떻게 하겠어"
"..."
"대신 내 앞에서는 걔네랑 연락하지 마"
"..."
"나랑 있을 때는 나한테만 집중해"
김종대가 확실히 오늘은 조금 이상하다. 평소같이 틱틱거리기는 하지만...뭔가 약간 다정함이 베이스에 깔려있다고 해야하나? 뭐라 표현해야할지 모르겠는데 확실히 평소와는 다르다.
"김종대 너 무슨 일 있어?"
"뭐래, 아무 일도 없거든"
"...근데 오늘 왜 이래?"
내가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김종대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김종대는 한참 아무 말이 없었다. 나도 김종대가 조용해지자 덩달아 조용해졌다. 그러다 김종대가 나를 보며 말했다.
"부산까지 가려면 한참이니까 잠이나 자"
"...이럴거면 그냥 김해공항까지 비행기타고 가면 될걸를 왜-"
"ㄱ,그게 마음대로 되냐! 빨리 잠이나 자라고!"
갑자기 왜 저러는지 모르겠는데 김종대가 비행기 타면 될걸 왜 굳이 차를 타냐는 내 질문에 발끈하며 소리를 빽 질렀다. 왜 저래...?
"너 왜 갑자기 소리질러? 뭐 찔리는거 있어?"
"없거든! 전혀! 하나도!!!"
"알겠어, 알겠어. 뭐 난리야, 진짜"
시끄럽게 구는 김종대를 살짝 노려보고는 창가로 몸을 돌려 눈을 감았다. 어차피 도착하려면 한참인데
잠이나 자야겠다.
***
"야아...야...김여주...일어나..."
"으음..."
"일어나라니까아..."
한참 꿀잠을 자고 있는데 갑자기 김종대가 나를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잠을 깼다. 김종대도 나를 깨울거면 확 깨우든가 저렇게 살살 건들면 사람이 쉽게 일어나겠나, 참. 몸을 일으켜 벌써 도착했나 싶어 창밖을 보는데 휴게소다.
"아직 한시간 더 가야되긴 하는데, 너 계속 잠만 자면 불편할것 같아서"
"...그래, 고맙네"
"뭐야 그 반응은?"
"나 화장실 간다"
차에서 내려서는 같이 걷다가 화장실이 가고싶어서 김종대를 놔두고 먼저 화장실로 갔다. 볼일 보고 거울로 머리 정리 좀 하다가 밖으로 나왔는데 김종대가 한 손에 소프트콘을 들고 있는게 보였다.
"웬 아이스크림? 너 먹게?"
"...아니거든, 나 안먹어"
"그럼 누가 먹어?"
"너"
"응?"
"너가 먹는다고"
"..."
"너 이거 좋아했잖아"
"아...고마워"
뭔가 묘한 기분이 들어 김종대에게 아이스크림을 받아 들어서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에게 아이스크림을 내미는 스물여덟살의 김종대와 열여덟살의 김종대가 교차되는 느낌이었다. 나만 이런 묘한 느낌이 드는게 아닌지 김종대도 주머니에 손을 넣고는 아무 말이 없었다.
차에 타서도 김종대는 내가 아이스크림 먹는걸 빤히 쳐다보기만 할 뿐 출발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덕분에 나는 아이스크림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차라리 빨리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급하게 먹고 있는데 갑자기 김종대가 내 손목을 잡아챘다.
"...왜?"
"그렇게 입에 뭍이고 먹는 심리는 뭐야?"
"응?"
"유혹하는건가, 아니면"
"..."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봐서 그런가"
김종대의 말에 당황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렇게 멍하니 김종대를 쳐다보고 있는데 김종대가 내 입가에 뭍은 아이스크림을 손가락으로 쓸더니 그 손가락을 할짝이는게 보였다. 헐 미친???
"야 미친!! 그걸 왜 먹어!!!"
내가 깜짝 놀라 김종대를 바라보자 김종대는 그런 내 반응이 웃긴지 실실 웃기만 했다. 왜 저래 진짜!! 너무 당황스러워 한참을 아무 말도 못했다.
"됐어, 잠이나 잘거야"
민망해진 나는 잠이나 자겠다며 몸을 창쪽으로 틀고 잠을 청했지만 한참동안 두근거리는 마음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
"김여주, 이번엔 진짜 도착이야. 일어나"
"으아, 싫어-"
"풉, 다 왔다니까?"
한참을 찡얼대다 일어났는데 그런 나를 보고 김종대가 작게 웃는것이 보였다. 내가 원래 원체 잠이 많아 잠이 덜 깨면 술취한것 마냥 제정신이 아닌데 잠에서 완전히 깨고 나서는 굉장히 후회했다. 김종대한테 찡찡댔다니...말도 안돼...
민망해서는 갑자기 걸음을 빨리해서 김종대보다 먼저 걸었고 김종대는 그런 나를 보고 뒤에서 크게 웃었다.
"뭐야, 김여주. 길은 알고 먼저 가는거야?"
"...응? 아..."
"같이 가야지"
어느새 김종대와 나란히 걷고 있는 나였다. 김종대와 나란히 걷고 있는데 왠지 웃음이 나왔다. 고개를 올려 김종대를 보자 김종대도 미소를 짓고 있는것이 보였다. 지금 이 감정을 나만 느끼는게 아니구나 싶어 괜히 더 행복해졌다.
김종대가 손목을 들어 시간을 보더니 말했다.
"오늘 여기 매장 들려서 해외 관광객 수요 조사만 하면 돼"
"아..."
"솔직히 별로 할 일은 많이 없는데 2박 3일이나 되네"
"그럼 오늘은 그것만 끝나면 바로 쉬는거야?"
"응, 호텔가야...아..."
김종대가 스케쥴 끝나면 호텔가야된다고 말하다 갑자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굴이 빨개져서는 입을 꾹 다물었다. 와-, 쟤 음란마귀가 아주그냥
"...김종대, 너 변태같은 생각했지"
"아니거든..."
"너 나 상대로 그런 생각하냐?"
"아니야!!"
"어휴-, 알겠어!"
"아니라니깐..."
김종대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아니라고 계속 변명했고 나는 그런 김종대를 놀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결국 김종대는 말을 돌리려는지 일 얘기를 꺼냈다.
"3시에 지점으로 가야돼"
"그래? 지금 몇신데?"
"한시, 이동하는 시간 감안해도 아직 조금 시간 있어"
"그럼 우리 좀 구경하자"
"뭘?"
"그냥, 여기 거리"
"볼게 뭐있다고..."
"나 그래도 아직 한국 온지 두달 정도밖에 안됐거든?"
"솔직히 십년 나가 살았는데 아직 한국온지 두 달밖에 안됐으면 그냥 외국인 아니야?"
"그럼 너가 가이드 해주든가"
"네, 손님-"
장난스럽게 받아치는 김종대에 웃었더니 김종대도 나를 보고 웃었다. 아-, 행복하다. 지금 이렇게 너와 보내는 시간이 말이다.
***
"마케팅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 중 하나를 꼽으라면, STP전략인거 아시죠?"
"특히 이렇게 해외 관광객들이 많이 방문하는 지점같은 경우에는 물건 배치 하나하나에 유의해야 해요."
"통계 보니까 일본인 고객이 53퍼센트고 중국인 고객이 31퍼센트이던데 둘 다 그냥 해외 고객이라고만 생각하지 말고 자세히 분석해서 서비스를 다르게 해드려야하구요"
진짜 기본적인 내용 간결하게 얘기하는건데도 김종대가 괜히 멋져보였다. 역시 남자는 일하는 남자가...내가 미쳤나보다. 김종대를 보고 멋있다고 생각하다니...솔직히 그런데 지금 김종대가 이렇게 일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고 멋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나만이 아닌지 이 매장의 다른 여자들의 시선도 다 김종대에게 향해 있었다.
하긴, 김종대 정도 되는 얼굴에 수트입고 일에 집중하고 있으면...그래, 멋있기는 하겠다. 그런데 기분이 뭔가 이상했다. 김종대가 뭐라뭐라 지점장님과 얘기하는데 나는 어느 순간부터 쩌리가 되어 옆에 짜져있었다.
처음 자료조사까지는 같이 했는데, 나도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지점장님과 심도깊은? 대화를 나누는 순간부터는 나도 모르게 지루함에 하품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대로 정신줄을 놓고 옆에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내 기억으로 분명히 나는 졸기만 했는데...그 이후로는 정말 기절한 듯 기억이 없었다.
***
"어떻게 그렇게 잘자?"
"완전 잠보네, 김여주"
내가 눈을 뜬건 김종대의 차 안이었다. ???????? 분명히 내 기억은 김종대하고 지점장님하고 얘기하고 있었는데??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려다 차 천장에 머리를 박고는 정신을 차렸다. 끙끙대다 김종대를 바라보니 김종대가 빵터져서는 웃고 있는게 보였다.
"야, 내가 왜 여깄어?"
"왜긴 왜야, 너 중간에 잠들었잖아"
"...어?"
"아무리 깨워도 안 일어나길래 내가 내 차로 데려왔지"
"헐...미안..."
"니가 미안할게 뭐 있어"
"그래도..."
"됐어, 어차피 해도 졌고 그냥 밥먹고 체크인이나 하러 가자"
김종대는 부드럽게 차를 몰았고 어느새 식당 앞이었다. 김종대는 나를 돌아보며 회 좋아하지? 하고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김종대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밥을 먹다가 김종대에게 술 마실거냐고 물어봤다.
"술 마실거야?"
"마시고싶음 마셔. 나는 운전해야되잖아"
"아...그럼 됐어"
"괜찮은데, 마셔"
"됐다니까"
술을 혼자마시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생각해보니 김종대는 어차피 운전해야돼서 못마시는데 혼자 마시는것도 딱히 끌리지 않아 그만뒀다.
"나중에 가서 마시자"
"가서?"
"어차피 호텔 앞에 바다야. 산책하면서 마시자"
"...그래"
다 먹고는 김종대의 차에 올라탔다. 마침 호텔은 멀지 않아 곧 도착했고 김종대와 나는 체크인을 하기 위해 홀로 들어갔다.
"...에? 네???"
아니, 이게 무슨 드라마같은 상황인지 모르겠는데,
"방이 하나밖에 예약이 안돼있다구요???"
"그런데 다른 방은 다 찼다구요????"
아이고 두야...내가 어이가 없어 직원에게 몇 번을 되묻자 직원이 당황한 표정으로 그렇다고 했다. 김종대도 분명 짜증낼거라는 생각에 김종대를 돌아봤는데 김종대는 생각보다 담담하다.
"원래 김종인대리하고 백현씨하고 오는거였잖아, 그래서 회사에서 방 하나만 잡았나봐"
"...그래?"
한숨을 쉬다 고민했는데, 아까 오면서 보니까 해변이라 게스트하우스가 많았다는걸 기억해냈다. 김종대보고 나가라고 할 수는 없고, 내가 나가서 자야겠다.
"야 김종대"
"왜"
"아까 오는데 보니까 게스트하우스 많던데 그냥 거기서 잘게"
"..."
"나 간다"
돌아서 가려는 나를 김종대가 급하게 잡았다. 왜 그러냐는 듯 쳐다보자 김종대가 짐짓 화난 표정으로 말했다.
"말이 되냐? 위험해"
"뭐래, 게스트하우스에서 자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래도, 안돼"
"아니 그럼 어쩌라고?"
"뭐 어쩌긴 어째, 나랑 같이 가야지"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너도 불편하고 나도 불편하거든?"
"됐어, 빨리 가자"
김종대는 내 말을 싹 무시하고는 나를 질질 끌고 엘레베이터로 향했다. 처음에는 김종대한테서 떨어지려고 온갖 난리를 쳤지만 꼴에 남자라고 나를 단숨에 힘으로 제압하는 김종대였다. 반항할수록 나만 손해인것 같아 조용해지자 김종대가 만족스러웠는지 말 잘 듣네-하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침대 하나밖에 없네"
"..."
"니가 팀장님이니까 니가 자든가, 알아서 해"
사실 방에 하나밖에 없는 침대를 보고는 더 당황했다. 김종대도 당황했는지 걸음을 뚝 멈췄다.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척 하며 김종대를 지나쳤고 김종대는 한참을 그 앞에서 얼어붙어있었다. 그러다 김종대는 내가 그를 쿡쿡 찌르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고 나의 먼저 씻으라는 말에 김종대는 얼굴을 붉히며 화장실에 들어갔다.
잠시후 김종대가 씻고 나오자 나도 씻고 나왔는데, 내가 씻는 사이에 김종대가 술을 사왔는지 내 앞에 맥주캔이 든 봉지를 흔들며 서있었다. 결국 김종대와 바닷가에서 산책하면서 마시기로 하고 바닷가로 나왔다.
김종대와 맥주를 홀짝거리면서 바닷가를 걷는데, 사람도 너무 없지도 않고 너무 많지도 않고 딱 좋았다. 다만 겨울이니만큼 무지막지하게 추웠다는게 흠이었지만...내가 원래 술에 엄청 약한데 역시 오늘도 금방 취했는지 점점 눈이 풀리는게 느껴졌다.
"으아아-, 기분좋~타아!!"
"벌써 취했어?"
"아니거든~ 안 취했거든~"
"취했네"
그런 나를 보더니 김종대가 피식 웃었다. 그러다 가만 멈추어 주위를 둘러보는데 다 커플이다. 시발!! 솔로천국이다 개자식들아!!
"에이!!! 솔로천국!!"
"...응? 뭐? ㅋㅋㅋㅋㅋ"
"나쁜놈들...막...다 손잡고 다니고...힝..."
"너도 나랑 잡으면 되지"
김종대가 내 손을 잡아왔다. 차가웠던 내 손이 따뜻한 김종대의 손 덕분에 점점 녹는것이 느껴졌다. 좋은 느낌에 김종대를 보고 바보같이 헤헤 웃자 김종대도 그런 나를 보고 웃어보였다. 맥주 한 캔을 다 비워가자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김종대! 나 니꺼도 먹을래"
나는 김종대가 손에 들고 있던 김종대의 맥주도 뺏어서 마셨고 김종대는 당황한듯 내게 손을 뻣었다. 그러다 그는 곧 비틀거리는 내 허리를 꽉 잡아주었다.
"조심해야지"
"괜찮아, 너가 지금처럼 잡아줄텐데 뭐"
"...나를 너무 믿는거 아니야?"
"헤헤"
그러다 김종대의 맥주 캔에서 입을 떼고는 김종대를 바라보았다. 김종대가 뭘 보냐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야, 김종대"
"응?"
"방금 너랑 나랑 간접키스했다-"
내 말에 김종대는 굳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취한 나에게 그런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김종대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작게 웃자 김종대가 한숨을 쉬는것이 느껴졌다.
"종대야, 나 안에 들어가서 더 마실래"
"...그러든가"
"그래도 돼?"
"...나만 보니까 괜찮아"
김종대는 내 재촉에 못이겨 다시 편의점으로 들어가 소주를 몇 병 사가지고 나왔고 우리는 그대로 우리의 방으로 향했다. 김종대도 나도 계속해서 술을 마셨고, 김종대는 술이 어찌나 쎈지 나는 거의 정신줄을 놓았는데 김종대는 그 때까지도 멀쩡했다. 그리고, 나의 기억도 거기까지였다.
***
"김여주, 자냐?"
한참 나에게 술을 마시며 꼬인 발음으로 신세한탄을 하던 김여주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뭔가 싶어 김여주 앞으로 다가가 톡톡 치며 깨우는데 김여주가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김종대 나쁜새끼..."
"응?"
"민하씨랑만 맨날 놀구..."
"...싫었어?"
"그런데 민하씨는 막...예쁜데..."
"...너가 더 예쁘거든"
"몸매도 좋구...완벽하던데..."
"너가 있는데 그런게 보이겠냐"
나도 취했는지 나도 모르게 뇌의 필터링 없이 모든 말이 술술 입에서 나왔다. 뒤늦게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하며 내 볼을 톡톡 쳤지만 풀린 눈에는 계속 힘이 들어가지를 않았다.
사실, 김종인 대리하고 김여주하고 출장간다는 말을 들었을 때 충동적으로 김종인 대리 대신 내가 가겠다고 했다. 김여주와 함께 출장을 가게되었다는 말을 들은 김민석은 내게 진지하게 말했다.
"좀 솔직해져보라고, 둘다"
"뭐가?"
"아, 이 놈들 다 알면서 모른척이네"
"..."
"너 솔직히 여주랑 같이 있고 싶잖아. 같이 있으면 좋잖아"
"..."
"급한거 안 바래, 조금만 솔직해져 보라고"
"..."
"너무 계산하지 말고, 그냥 감정대로 행동해봐"
사실. 비행기를 안타고 오래걸리는 부산을 차를 타고 간것도 다 내 욕심이었다. 김여주와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싶은, 나의 작은 욕심이었다. 휴게소에서 김여주에게 아이스크림을 주는 순간 긴가민가 했던것이 확실해졌다.
나는 아직 김여주를 좋아한다. 그것도 꽤 많이 말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 나는 자연히 김여주에 부드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내가 김여주도 싫지 않은듯 했다. 김여주와 눈을 마주치며 웃는 순간, 바보같은 생각을 했다. 김여주가 나만 보고 웃었으면 좋겠다.
솔직히, 우리 둘 사이가 그냥 단순한 남녀사이가 아니라는건 내가 더 잘안다. 그리고 우리 둘 사이에 풀어야 할 과제도 말이다. 그런데 그런것과는 별개로, 김여주와 같이 있으면 기분이 좋단 말이다. 김민석 말대로, 조금만 솔직해져보기로 했다. 딱히 복잡한 문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김여주와 행복하게. 내 작은 욕심이었다. 설사 김여주가 다시 나를 갖고 노는것일지라도 말이다.
"종대야아-..."
김여주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다시 정신이 퍼뜩 들었다. 정신을 차리니 김여주가 고개를 푹 숙이고는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왜? 속 안 좋아?"
키를 낮추고는 김여주에게 물었다. 갑자기 김여주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확 들어서는 나를 끌어당겼다.
...어?
"...여주야. 읍-"
김여주와 내 입술이 맞닿았다. 평소같았음 억지로라도 밀어냈을 텐데, 술에 취해서인지 김여주를 잡은 나의 손에는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내 입술과 맞닿아있던 김여주의 입술이 점점 내 귓가로 향했다. 아, 안되는데-
"으, 야...김여주..."
"종대야..."
내 귓가에 대고 내 이름을 부르는 김여주에 동시에 이성의 끈을 놓은듯 했다. 사실, 80퍼센트는 술기운이라 봐도 무방했다. 아니, 술기운을 가장한 나의 진심이었을 지도 모른다.
의자에 앉아있는 김여주에게 급하게 입을 맞췄다. 밀어낼 줄 알았던 김여주도 내 목에 팔을 둘렀다. 그런 김여주에 더 달아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김여주의 허리를 쓰다듬으며 자연스럽게 침대로 향했고, 김여주의 목에 입술을 묻었다.
"...김여주"
"으응?"
"지금 기분 어때"
"...좋은것 같아..."
"...그래?"
기분이 좋은것 같다고 얼굴을 붉히며 말하는 김여주가 너무 예뻐 다시 입을 맞췄다. 급하게 몰아붙이는 나 때문에 김여주는 힘들었는지 숨을 몰아쉬는것이 느껴졌고, 나는 자연스럽게 김여주의 팔을 내 어깨에 올려주었다. 그런데, 잠시후 김여주의 팔이 내 어깨에서 힘없이 추락했다. ....설마
"...야, 자?"
"..."
"진짜 자? 김여주?"
"..."
"김여주!! 너 혼자 이래놓고 자면 어떡해?"
침대에 얌전히 누워있는 김여주를 보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니, 이래놓고 자면 어쩌자는거야...김여주를 한참 원망스럽게 바라보다 베란다로 나갔다. 찬바람이나 좀 쐬야겠다. 그리고 나는...쇼파에서 자야지...김여주와 같이 침대에서 자다간 내 자신이 통제가 되지 않을것 같았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의 김여주는,
"김종대 너 왜이렇게 피곤해보여?"
어젯밤 일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듯 했다. 그래, 차라리 다행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씁쓸한 미소를 감출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