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수는 맞지?' '누나!' '그래, 그래. 보기 좋다.' '이게 뭐야. 남자들끼리 우정 반지 맞추는 거 봤어?' '반지는 여자들만 끼고 다니는 거래? 괜찮아. 보기 좋아.' '야, 남우현 너도 반지만 쳐다보지 말고 빨리 반박해!'
반짝 빛나는 은반지를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몇 번 돌려보던 녀석은 아마 이렇게 말했었지.
'나름 괜찮네.' '뭐?' '의미는 다르지만.' '뭔 소리야?'
혼자 중얼거림이었는지 녀석은 검지가 아닌 약지에 반지를 끼며 들어 보였다.
'야 우정 반지는 약지가 아니라 검지에 끼는 것도 몰라? 바보야.' '내 맘이지.' '약지는 다른 의미잖아.' '무슨 의미인데?'
능글맞게 웃어 보이는 녀석에게 난 아마 병신 쪼다라고 놀렸었던 것 같았다.
'그거야.' '…….'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반지를 끼는 자리잖아!' '그럼 너랑 나랑 사랑하면 되겠다.'
그때의 남우현은 이상한 소리를 했었던 것 같았다. 사랑이라니.
'야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라. 생판 모르는 사람이 보면 진짜 이상하게 생각하겠다.' '상관없어.' '엉?' '다른 사람 시선 따윈 알게 뭐야.' '아.' '약지가 편해.' '…뭐야 그게.' '그리고 검지에 안 들어가. 약지에 딱 맞아.'
라고 말하며 내 얼굴 앞으로 손을 가져다 반지를 낀 손을 들어 휙휙 저어 보이며 녀석은 다시 한 번 의미 모를 말을 중얼거렸었다.
'다른 의미지만.'
***
"누나, 내 반지 못 봤어?"
벌써 30분째 온 방을 뒤지고 들춰봤지만, 사막에서 바늘 찾는 것처럼 동그란 조그마한 반지는 보이지 않았다. 내 기억 속에는 분명 한 번도 반지를 빼놓은 적이 없었다. 남우현과 10년을 친구로 보내오고 그 중 4년 동안 녀석과 나는 고등학교 때 여자아이들 사이에서나 하는 '우정 반지'라는 것을 맞추었다. 그것도 내 누나에 의해서 말이다. 창피하게 여자도 아니고 남자 놈들 끼리 오글거리게 그게 뭐냐고 싫다며 거부를 해왔지만 10년이나 친구 했으면 당연히 있어야 한다는 누나의 억지스러움이 우리에게 선물한 우정 반지를 강제로 끼고 다녔었다. 남우현은 좋은지 안 좋은지 긴가민가한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누나가 선물한 반지를 군말 없이 끼고 다녔다.
소파에 발 뻗고 누운 채 책을 읽고 있던 누나는 열심히 물건을 들춰보는 나를 한번 힐끔 바라보더니 책을 푹 소리 나게 덮고 일어났다.
"잃어버렸어?" "손에서 뺀 적이 없는데." "내가 너 언젠가 한 번 이런 날 올 줄 알았다." "어제저녁까지만 해도 분명히 있었어." "너 어제 술 먹다가 어디다가 빼고 두고 온 거 아니야?"
눈을 댕그르르 굴려 기억을 되듬어 보아도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제 술을 좀 과하게 마시기는 했어도 필름이 끊길 정도까지 마시지 않았었다. 물론 정신은 멀쩡하지 않았지만. 선배들이 주는 술을 주는 대로 받아먹다가 후배 명수가 취기 때문에 비틀거리는 나를 부추겨 집 앞까지 안전하게 데려다 준 기억이 전부였다. 그 뒤로 뻗어 잠들고 오늘 아침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눈이 부셔 손을 얼굴에 가져다 대었을 때 손가락의 허전함에 잠시 꼼지락대면 쥐었다 폈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뒤늦게 깨달았다. 그 '우정'반지라는 것을 말이다.
"아 몰라."
잠시 아무 생각 없이 허공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귀 옆으로 들려오는 전화벨 소리에 소스라치게 깜짝 놀랐다. 아씨, 진짜 깜짝이야. 까만 바탕에 둥둥 떠다니는 남우현의 이름을 바라보며 짧은 고민을 했다. 어차피 녀석에게 잃어버렸다고 말은 해야 하니깐.
"여보세요." -잠깐 보자.
녀석의 건조한 낮은 목소리에 잠시 머리를 갸우뚱했다. 기분 탓인가?
"아, 나도 할 말……," -김성규.
기분 탓이 아니다.
-지금 기분 장난 아니니깐. "……어?" -가만히 있어. "야, 남우현 너 무슨 일,"
녀석이 나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집 앞이니깐 나와.
***
집 앞이라는 말은 거짓말이 아닌 것을 보여주며 현관문을 열자 벽에 기대고 있던 녀석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조용히 녀석에게 다가가니 기척을 느꼈는지 감고 있던 눈을 뜨며 어쩐지 평소랑 다른 매서운 눈동자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쭉 훑어보는 녀석의 시선이 느껴졌다.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벽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전화부터 지금 모습까지 녀석은 분노인지 뭣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기분이 상당히 좋지는 않아 보여 손을 뻗어 녀석의 어깨에 손을 가져다 대려고 할 때였다.
뻗은 손은 목적지에 도달하기도 전에 녀석에 손에 턱 잡혔다.
"너." "어?" "반지 어디 있어."
전혀 예상도 못 한 녀석에 말에 어색하게 웃고 있던 입가가 바르르 떨려왔다. 그 사이에 손을 본 걸까. 녀석의 표정이 잔뜩 찌푸려지며 손에 힘을 주며 내 손가락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심각해지는 녀석의 표정에 잡힌 손을 내빼려고 해보았지만, 손힘이 얼마나 장사인지 빠지기는커녕 더욱더 억센 힘에 잡혔을 뿐이었다. 손에 땀이 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잠시 아무말도 없는 남우현을 어색하게 바라보았다. 아, 지금 전혀 내가 알 던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녀석과 나는 잠시 아무말 없이 어색한 분위기 속에 잠시 침묵을 유지하더니 녀석은 곧 긴 한숨을 내쉬며 굉장히 심기가 불편한 것처럼 미간을 꾹 짚었다.
"김성규." "응." "왜 반지가 김명수한테 있어?" "어?"
김명수? 과후배 김명수? 녀석은 화가 난 목소리를 억누르며 물었다.
"너 지금 손가락에 반지 말하잖아." "야, 근데 왜 자꾸 아까부터 화내고 그래?"
녀석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지는 것이 느껴지자 괜히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김명수한테 왜 있는지도 전혀 모르는 일인데. 자꾸만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나를 다그치는 녀석에 조금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녀석은 바라던 대답이 아닌 다른 말을 내뱉으니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 넘겼기며 말하였다.
"지금 화 안 나게 생겼어?"
누가 보면 꼭 연인 사이끼리 맞추는 커플링을 잃어버려서 싸우는 걸로 착각할 정도로 녀석의 표정과 목소리는 일 년에 한 번 들을까 말 까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만큼 남우현이 화를 잘 내지 않았다는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연인들 사이에서 끼는 커플링도 아니고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덮인 반지때문에(그것도 여자도 아닌 남자들끼리) 그 볼까 말까 하는 모습을 보여주니 하려던 말을 제대로 할 수 없게끔 시선을 압도하였다. 녀석에게 '우정'반지라는 것이 꽤 대단한 존재였나 보다.
"하, 야. 나도 왜 김명수한테 그 반지가 있는지 의문스럽다. 어?"
녀석은 가만히 나를 보았다. 어디 계속 해보란 식으로. 입이 거칠어지기 시작한다.
"근데 왜 자꾸 짜증이야." "더 따발거려봐." "아 나도 모른다니깐?!" "……." "어제 술 먹고 잠깐 김명수한테 맡겼나 보지 뭐!" "……." "나도 없어진 거 알고 얼마나 찾고 다녔는데. 진짜!" "……." "나도 짜증 나 죽겠는데 왜 너까지 나한테 화내고 그래!" "……." "안 믿어? 어?"
꼭 내가 바람 피다가 애인에게 걸린 나쁜 놈인 된 것 같은 상황인 것 같았다. 내가 왜 녀석에게 변명 같은 소리를(사실이지만) 해대고 있어야 하는지 억울해 죽겠다. 지금 녀석에 태도에 서운함을 느껴 괜히 더 씩씩거리니 녀석은 팔짱을 낀 채 가만히 듣기만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아니꼽게 보여 무심코 홧김에 뱉은 말에 난,
"그래! 씨발 김명수랑 친해지고 싶어서 껴보라고 줬다!"
곧바로 후회하고 말았다.
"왜 난 친구라고는 너랑 이성열밖에 없는데 김명수랑도 친해지고 싶어서 그랬는데."
녀석의 표정이 무섭게 가라앉는 게 보여 지금 내 마음속은 김성규 그만해, 그만해 병신아. 라고 외치고 있지만 한번 터진 입은 깨진 유리 사이로 넘치는 물처럼 멈출 수가 없었다.
"너 나 좋아하냐?" "김성규." "고작 그 반지 하나 가지고 어?" "입 다물어."
응, 남우현 나도 지금 그러고 싶다. 내 맘속에 또 다른 김성규가 자꾸 하지 말라는데 이놈의 입방정이 자꾸.
"싫어. 김명수랑도 친……,"
쉬지도 않고 떠벌리던 내 입이 녀석의 손에 의해서 다물어지게 되었다.
"입 다물라고 했지." "……." "김명수랑 친해지겠다더니 어쩌겠다는 그런 소리 다시 한 번 해봐."
녀석이 경고하는 듯한 눈빛으로 으르렁거렸다.
"너, 나." "……" "친구고 뭐고 다 깨버릴 테니깐." "……."
아. 김성규 이놈의 주둥아리.
"씨발, 여태 참은 게 어딘데."
남우현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냥 녀석이 하는 소리만 가만히 듣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누구 좋으라고." "……."
녀석의 분노가 담긴 눈동자를 더는 가만히 응시하다가 이대로 몸이 타들어 갈 것 같았다. 머릿속이 복잡하여 입을 막고 있던 녀석의 팔목을 살며시 잡아 내렸다. 당장 미안하다고 말해. 김성규. 내가 녀석을 잘못 건드린 것 같았다. 어긋나게 초첨이 나가버린 녀석의 모습이 낯설었다. 우현아 미안해. 라는 말이 입안에서 맴돌았지만, 그놈의 자존심이 뭐라고 쉽게 입 밖으로 꺼내기 여간 쉬운 게 아니었다.
"김명수랑 가까이하지 마. 좋은 새끼 아니니깐." "걘 그냥 친한 후배야." "왜 자꾸 어긋나는 거야?"
입안에서 맴도는 '미안.' 대신 녀석의 말처럼 자꾸 어긋나려는 나는 나 자신이 답답했다. 입과 생각이 아주 따로 노니.
"내가 누구랑 어울리던 내 마음이야. 이런 것까지 네가 이래라저래라 관련할 일이 아니라고." "아 좀, 내 말 좀 들어!" "싫어."
대화가 점점 산 넘어 산으로 넘어가며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냥 미안해, 남우현 네 말대로 할게! 라고 하면 되는데 말이다!
"김성규!" "뭐! 씨발 너랑 친구 해먹기 이렇게 힘들었냐?"
아, 또. 전혀 마음에도 없는 말실수에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남우현은 착 가라앉은 표정을 여전히 유지하며 그대로 내 어깨를 벽으로 퍽 밀쳤다. 아, 아파.
"다시 말해 봐." "너랑 친구 해먹기 힘들다고!"
녀석이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내 눈을 바라보았다.
"김성규." "뭐." "진짜 친구 하지 말까?"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지 그냥 해보는 소리인지 의도를 구분할 수 없었다. 당연히 대답은 '아니.'였다.
"진짜 하지 마?"
녀석의 질문에 어떠한 행동도 대답 하지 않았다. 설마 녀석도 내가 홧김에 하는 말인 거 알면서 진심으로 받아들이지는 않겠지. 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녀석, 남우현은 진지하게 물어왔다.
"대답 안 해?" "……." "성규야. 대답해 봐." "야, 너 뭘 이렇게 진지하고 그래." "해, 안 해?"
당연히 아닌거 알면서 집요하게 물어오는 녀석의 질문이 조금 어이가 없기도 하였고 이 새끼가 정말 나랑 친구 하기 싫어서 이러는 건가 라는 의문도 들기도 하였다. 반지, 김명수에 이어 친구 할까 말까 어이없는 상황까지 나오니 말이다. 녀석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눈빛으로 아닌 거 알잖아! 눈빛을 쏘았지만, 그 눈빛이 안 먹혔는지 어깨에 올린 손힘을 더욱 꽉 잡으며 내 대답을 기다리던 녀석이 입을 열었다.
"난 안 해."
뭐?
"이제 못 해."
어? 이게 아닌데.
"김성규 잘 들어." "야, 나, 남우현. 진정하고 내 말 좀 들어 봐! 그냥 해 본……,"
그냥 해 본 소리잖아!
"지금 이 순간부터." "야! 개새끼야. 남우현!"
아, 이게 아닌데.
"절교야."
녀석이, 남우현이 나에게 절교 선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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