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아빠가 딸 주려고 컵케이크 사 왔는데.
…….
…… 왜일까. 가장 비참할 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떠오르는 것은. 아마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음을 내가 제일 잘 알기 때문일까. 숨이 약간 차다. 하늘은 검고. 자기연민만큼 비참한 짓이 없다는 소리를 들은 이후로 내 자신에게 동정심을 갖지 않으려고 부던히도 노력했건만 이렇게 땅바닥에 드러눕게 되니 깊은 곳에서 나를 향한 동정심이 일렁인다. 하늘이 구정물처럼 탁하다. 진눈깨비가 내린다. 자그마하게 하늘에서 쏟아지는 허연색 애매한 물질은 볼에 닿아 녹을 뿐, 나처럼 아무 의미 없는 존재다. 동정심을 내리눌렀다. 그러기 위해선 쑤셔오는 옆구리와 허벅지, 입 안쪽 살을 잊어야 했다. 명상을 하면 고통이 잊혀진다던데. 머릿속으로 화한 녹지를 떠올렸다. 숲들, 나무들, 파란 하늘. 어느 순간 눈을 감았다. 잠이 들 것 같았다. 진눈깨비가 내리는 밤 가로등 아래서. 터진 안쪽 볼에선 계속 피가 흘러 목구멍으로 넘어가고 있었지만. 슬몃 다시 눈을 떴다. 가로등 불을 누가 가린 것이 느껴진 탓이다. 내게 길게 내린 그림자. 시야에 잡힌 형태가 가물가물했다. 남자였다.
머리카락이 노랗게 물든, 교복을 입은,
권순영, 아.
위로 죽 째져 가늘게 뜨인 눈이 나를 내려본다.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는 나는 그 시선을 받아낸다. 주말인데 교복차림이다. 마이까지만 걸친 옷차림이 추워보인다. 귀가 발갛다. 눈을 깜빡였다. 여전히 가물가물했다. 혹여 내 상상인듯이. 권순영이 슬로우모션처럼 천천히 쭈그려 앉았다. 권순영의 차고 큰 손이 내 볼을 슬쩍 매만졌다. 이게 내 상상인지 현실인지 모르겠어서 몸을 휙 뒤집고 싶었는데, 불가능했다. 계속 눈만 깜빡였다. 찰나였다. 가로등불이 내 눈에 가득 들이찼다가, 다시 나간 순간. 아주 오랜만에 말을 내뱉는 듯 잠긴 권순영의 목소리가 툭 내려앉았다.
"우리 집."
"……."
"갈래."
끝이 올라가지 않는 물음이 고개를 끄덕이도록 종용했다. 불가항력이었다. 눈이 다시 감겼다. 정신을 잃었다. 암전이었다.
모두가 권순영의 불친절함을 싫어했다. 거친 말씨를 싫어했다. 수업시간에 문을 쾅쾅 열고 들어오는 무례함을 싫어했다. 그리고, 묘한 다정함을 싫어했다.
애초에 거의 백발처럼 색을 뺀 노란머리부터 학교엔 맞지 않는 애였다. 선생들은 권순영을 그 귀여운 어감의 이름보단 또렷한 형체없는 중얼거림이나 욕지거리로 불렀다. 그에 일일히 반응하는 녀석도 아니었다. 학기 초반부터, 아니, 입학할 때부터 유지하던 흰 혹은 검은 티셔츠 위에 다 풀어헤친 교복 와이셔츠 패션은 걸리고 걸려도 끊임없이 유지되었고, 뿌리가 자라 정수리가 검던 녀석의 머리는 금방금방 다시 노랗게 염색되었다. 늘 주변에 여자애들이 있었다. 정액 냄새, 라는 걸 그 애한테서 처음 맡아봤다. 야. 너한테서 그 냄새 나. 뭔 냄새. 밤꽃. 정액? 응. 떡치고 왔으니까 그렇지. 쉽게 쉽게 큰 목소리로 내뱉어지던 대화들은 정상이 아니었다. 나는 가만 문제집에 시선을 박았을 뿐이다. 저런 새끼랑은 엮이지 말아야지, 하면서.
권순영에게선 살내음 섞인 집냄새가 났다. 섬유유연제 냄새.
쓰러져있다가 깼음에도 깬 기척을 내지 않았다. 권순영의 손이 받치고 있는 다리가 연신 달랑거렸고, 권순영의 어깨에 파묻힌 볼은 침이 잔뜩 묻어있었으니까. 쓰러지면 침을 흘리나보다. 고개를 들고 침을 닦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일어난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권순영에게 업혀 있다는 걸 안다고 들키고 싶지 않았다. 밤이 추웠다. 턱이 덜덜 떨렸다. 근데 나를 바투 업는 손짓이 뭔가 다정해서, 울컥 울 뻔했다. 그 권순영인데. 그 양아치 권순영인데.
옥탑방 계단을 밟아 올라가는 몸짓엔 거침이 없었다. 무겁지도 않은지 힘든 기색도 없었다. 한 손으로 나를 받치고 살짝 몸을 굽혀 집 문을 여는 손짓도 자연스러웠다. 이렇게 모른 척 들어가도 되는 걸까. 잠시 망설여졌지만 어차피 갈 곳도 없는 몸이었다. 처맞고 쫓겨났는데 어딘들. 권순영의 등에 업혀 맞은 새까만 집은 익숙한 느낌이 났다. 꼭 우리 집 같았다. 내가 학교 끝나고 돌아오면 늘 이 꼴이다. 새까맣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불을 켰다. 집이 더러웠다. 하지만 깔려있는 이불에 나를 눕히는 손짓은 너무도 조심스러워서, 꼭 깨끗이 소독된 병원 시트에 눕혀지는 기분이었다. 눈을 감았다. 자는 척을 했다. 권순영이 옆에 앉아 잠시 나를 보는 게 느껴졌다.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권순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무엇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금방, 또 까무룩 정신을 놓은 듯이 잠이 들었다. 하루 종일 정신없이 맞은 탓이었다.
날 때리는 주범은 아빠다.
아빠가 다정했던 시절은 이제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엄마가 도망간 이후로, 나는 늘 맞았다. 뺨을 맞았고 배를 차였고, 몽둥이로 내리쳐지기도 했다. 아파서 울 때마다 아빠는 집안에 굴러다니던 쓰레기 같은 것들을 내 입 안에 처넣었다. 역한 냄새가 났던 것일 때도 있고, 그저 휴지조각일 때도 있었다. 눈물이 줄줄 나는데 입은 막혀서, 그런 기억들은 끔찍하다. 안 우는 것에 적응하게 된 것도 그 탓이다.
생각보다 선잠이었던 듯, 어디선가 담배냄새가 짙게 풍겨왔다. 권순영이라고 알 수 있었다. 눈을 감고 있어도, 옆에 기척이 느껴지니까. 아빠 때문에 늘상 맡아왔던 냄새임에도 뭔가 색달랐다. 나와 동갑의 어린 애가 피우는 담배는 다른가. 웃긴 일이다. 등에 닿는 이불이 푹신했다. 안 빨아서 먼지 냄새가 심하긴 하지만, 그것마저 포근함을 줬다. 권순영의 집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 나와 접점없는 애의 집에 내가 지금 누워있고, 자고 있다니.
"너 안 자지."
아, 갈라지는 목소리에 눈이 번쩍 뜨인다. 권순영이다. 눈 앞이 짙게 연기로 가려져 있다. 콜록대며 손을 휘 저었다. 무의식적으로 들린 팔이 아팠다. 아, 하고 짧은 탄성을 뱉었다. 쯧, 하는 소리가 옆에서 들린다.
"좆만한 게 누구한테 처맞아가지곤."
권순영의 예의 그 툭툭 뱉는 말투였다. 고개를 약간 돌려 권순영을 쳐다보았다. 뻐끔대며 연기를 뱉었다가, 쭉 빨아들였다가. 담배 끝만 붉게 타들어간다. 작은 방이었다. 벽에 등을 기대 나를 내려보는 눈빛이 꼭 동류를 보는 어떤, 어떤 동질감의 눈빛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눈빛은 비에 젖은 비닐 마냥 가난해보였다. 금방 닳아 꺼지려고 깜박거리는 형광등같기도 했다. 아니라면 가난한 집의, 화장실 주황등이라던지. 뭐라 말하려 했는데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몇 번 콜록였다. 아. 아. 그제서야 목소리가 나왔다.
"너 나 알아?"
담배 피는 권순영마냥 다 갈라지는 목소리였다. 정말 순수한 호기심에서 우러나온 질문이었다. 길가에 엎어져있는 나를 데려와, 친근하게 저리 묻는 게 이해가 안 가서. 권순영이 나를 모를 거라 생각해서 말이다.
입가에 담배를 가져다대며 나를 잠시 쳐다본 권순영이 연기를 뱉으며 살짝 웃었다. 연기에 너울너울 가려진 얼굴이 앳되면서도 남자의 분위기를 풍겼다. 꼭 성인 남자 같았다. 끝에서 여전히 담배연기가 새는 입가가, 그 눈빛이.
"어."
"……."
"알지."
우리 같은 반이잖아.
씨익 입꼬리가 올라가게 웃은 권순영이 재떨이에 담배를 지져 껐다. 살아있는 것처럼 붉게 빛나던 불이 차가운 유리 재떨이에 처참하게 뭉개졌다. 재떨이는 갈아치운지 한참 된 듯 꽁초가 가득이었다. 멍청하게 쳐다보기만 했다. 순간, 움직임은 빨랐고 또한 찰나였다. 내 위를 점령한 권순영의 여전히 찬 손이 내 볼 위를 덮고, 다른 쪽 손은 내 얼굴 오른편 바닥을 짚은 것이 말이다. 얼굴을 거의 덮어버릴 듯이 손이 컸다.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게, 내가 절대 거부할 수가 없을 것만 같았다. 숨을 멈췄다. 볼을 어루만진다.
"너도 나 알지."
정통으로 마주친 눈이 버겁다. 입술끝을 매만지던 엄지손가락이 입술 사이를 가르고 내 입속으로 불쑥 들어왔다. 무슨 상황이지.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이미 나와있는 답이었다. 멍청히 입이 벌려졌다. 급작스런 상황 전개에 머리 굴릴 시간조차 없었다.
"나 어떤 새낀지."
권순영이 큭큭 웃는다. 싸이코 같았다. 무서워서 눈을 감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벌려진 입 사이로 들어온 권순영의 엄지손가락이 혓바닥을 꾸욱 눌렀다. 침이 삼켜지지 않고 목 뒤로 넘어갔다. 터진 볼에서 흐르는 피도 함께였다. 목에 걸려 기침이 나올 법도 한데, 아무 일도 없었다. 권순영의 엄지가 안쪽 살에서 흐른 피를 혓바닥에 느릿하게 펴발랐다. 이상하고, 비정상적인 감각이었다. 결국 눈을 꾹 감았다. 엄지에서 담배냄새와 은근한 섬유유연제 향이 났다. 어울리지 않게 따스한 향이. 계속 혓바닥에서 동그랗게 움직이던 손가락이 슬쩍 떨어진다. 대신 얼굴이 가까이 다가와, 권순영의 혓바닥이 내 코 끝을 느릿하게 핥았다. 이번엔 담배냄새만이 짙게 났다.
눈을 꼭 감고 이불을 꼭 쥐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얼굴에서 한 1센티 쯤 위에 권순영의 얼굴이 위치해있다고 눈을 뜨지 않아도 알 수 있었으므로. 권순영의 느릿하고 따스한 숨이 내 입술과 코 끝에 그대로 느껴졌다. 파스스, 약간 불규칙한 숨이었다. 감겨진 눈이 파들파들 떨렸다. 금방 그 몸이 튕기듯 멀어졌다. 그제서야 숨을 파하 뱉으며 눈을 떴다. 천장이 보였다. 모기 시체같은 것이 더럽게 붙어있는 천장. 그리고,
"씨발."
뜬금없는 권순영의 욕지거리.
몸을 일으켜 벽에 붙었다. 어떤 상황이었는지 이제서야 인식한 머리통이 자동으로 행한 행동이었다. 움직이자 마자 옆구리가 칼에 쑤셔지는 것처럼 아파서 붙잡고 몸을 숙였다. 아아아……. 멍청한 신음소리도 함께였다. 순간 앞에서 나를 쳐다보던 권순영이 벌떡 일어났다.
"쳐 자."
큰 보폭으로 뛰쳐나간다. 방에서 한 다섯 걸음이면 금방 현관에 도달하는 작은 집이었다. 암만 해도, 권순영이 또라이라더니. 저정도였구나. 불 켜진 권순영의 집 안에 고독하게 남겨진 나는 방금 전 상황에 잠시 멍했다. 그러다 그냥 누웠다. 이렇게 있다가 권순영과 자고 자살하는 시나리오를 잠시 머릿속에 그리다가 지워버렸다. 여전히 담배냄새가 났다. 눈을 감았다. 세 번째로 혼절하듯이 자고 싶었지만, 오래도록 잠은 오지 않았다. 천장에 붙어있는 모기의 시체를 셌다. 야광별의 찌꺼기 모양을 따라 야광별이 붙어있었을 때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리고 그걸 붙일 권순영의 모습까지. 그러다 잠이 들었나. 일어났을 땐 드디어 아침이었고, 옆엔 약이 있었다. 온갖 복합적인 약이었다. 그리고 권순영은,
권순영은.
옆에 누워 있었다. 새근새근 숨을 내뱉으며, 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