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사의 저글링 01 |
괴로움이 잔뜩 울려퍼졌다. 대부분의 기억은 흐려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모든 기억이 옅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너와 나의 기억이 그래야만 했다. 너는 기억할까, 우리의 옛날을. 영원해야만 했던 우리의 시간들. 결국 너는 잊었고 우리 둘이 만들었던 시간 속에 홀로 남은 나는 쓸쓸히 감내할 뿐이다. 나는 참을성이 별로 없는 사람이다. 내가 너에게 각인시키는 첫번째 기억. 기억해, 도경수.
나는 기다림을 모르는 사람이다.
마술사의 저글링 written by. B&D
01
경수는 문득 지루함을 느꼈다. 일상의 단조로움. 흔히들 느끼는 권태로움이라 여길지도 모르지만 경수에게는 다른 의미였다. 경수는 언제나 밝기만 하던 긍정적인 아이였다. 심각한 정도의 감정의 단순화는 부모의 걱정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경수는 웃었다. 저는 한 번도 이게 나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어요. 헤실헤실거리며 웃는 아들의 말에 부모는 걱정을 접어두기로 결정했다. 여보, 우리가 자식 교육은 정말 잘 했나봐요. 짜증하나 부리지 않아 걱정했던 아들의 감정을 자신의 잘남으로 승화시킨 부모는 하하호호 웃으며 흐려졌다.
사실 경수의 말대로 감정의 일방통행은 경수에게 해를 끼친 적은 없었다. 오히려 득을 봤다면 봤을 일이었다. 항상 웃는 사람에게 적대감을 내보일 사람은 얼마 없음이 분명한 사실이었다. 경수가 그것의 좋은 예였다. 경수의 미소 곁에는 언제나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했다. 경수는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었으며 주변 사람들 역시 만족스러운 대인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믿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경수는 참 착해. 착해빠진 경수는 그말에 다시 한 번 웃을 뿐이었다.
“변백현이야, 잘 부탁해.”
그리고 경수의 미소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미세한 균열은 깊은 곳에서 살금살금 생겨났기에 겉으로 티난다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전학생은 날카롭게 투시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올라가는 한쪽 입꼬리는 경수에게 새로운 감정을 주었다. 그동안 느껴왔던 긍정적인 감정의 집합 내에서 보지 못했던 집합 A의 여집합. 경수는 지루함을 처음 느꼈던 그날, 여집합의 정의역을 만났다.
전학생이 온 날이 때마침 자리를 바꾸는 날이라 아침부터 아이들은 소란이었다. 새롭게 바뀐 자리에 울상 짓는 아이도, 환호 하는 아이도 있었다. 아마 경수는 웃었을 것이다. 항상 웃는 경수니까. 경수의 자리는 2분단 넷째줄 오른쪽 자리였다. 자리에 앉아 평소에 친했던 새로운 짝과 몇 마디 얘기를 주고 받았다. 그러다 전학생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경수야, 전학생 어때? 볼이 발그레해진 여학생은 경수와 맞추던 시선을 어딘가로 돌렸다. 경수 역시 그 시선의 도착점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선의 끝에는 3분단 셋째줄 왼쪽 자리에 앉은 전학생이었다.
“그냥, 그렇지 뭐.” “전학생 너무 잘생긴 것 같아.” “그러게.” “경수 네가 잘 챙겨 줘. 알았지?”
글쎄. 경수는 속으로 삼켰다. 조그마한 적대감일지라도 경수의 지인에게는 무시무시한 적대감으로 느껴질 것이다. 경수는 대답했다. 그래야지. 유들유들한 경수의 목소리에 여학생은 또다시 볼을 붉혔다.
자리를 바꾸고 소란스러움이 진정된 뒤 조례를 짤막하게 마치자 전학생과 얘기를 나눌 새도 없이 수업이 시작되었다. 전학생은 우려와는 달리 금세 짝지와 교과서를 같이 보며 히히덕 거리고 있었다. 경수는 그 시점부터 전학생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1교시가 자신이 좋아하는 문학수업임을 망각한 채로 50분의 시간동안 전학생의 뒷모습만 관찰했다. 교실의 반은 수면의 쾌락으로 넘어간 지 오래였다. 선생님은 교실을 돌아다니며 하나 둘 아이들을 직접 깨우기 시작했다. 조금의 소란이 일었다. 그리고 전학생이 고개를 돌렸다.
전학생과 마주한 시선은 생각보다, 불쾌했다.
“네가 도경수?” 평화롭던 점심시간이었다. 오늘은 수요일, 경수가 좋아하는 잡채까지 나온 오늘의 식단은 꽤나 만족스러운 편이었다. 맞은 편에 앉은 전학생만 뺀다면. “응. 안녕, 전학생.” 경수는 남들보다 천천히 꼭꼭 음식을 씹어먹었다. 그래서 친구들과 같이 밥을 먹기엔 서로에게 조금씩 불편함을 갖고 있었다. 어차피 경수는 혼자 있는게 편하기도 하고 여유롭게 먹고 싶어서 언젠가부터 혼자 먹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없었다. 경수는 여유롭게 밥을 먹었다. 그런데 근 3개월 간 혼자 먹던 식사에 불청객이 끼어들었다. 자연스레 수저는 멈추었다. 전학생은 씹던 음식을 삼키고 물었다. 전학생의 오른손에 들려있던 수저 역시 잠시 멈추었다. “안 먹어? 잡채 나왔는데.” “무슨 뜻이야?” “아무것도.” 어릴 적부터 편식이 심했고 군것질 마저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성장은 늘 뒤쳐졌고 더디었다. 부모는 항상 뭘 먹고싶냐며 경수에게 물어왔다. 하지만 나오는 대답은 없었다. 아무거나요. 그렇게 뱉어놓고서 실상 입에 들어가던 것은 몇 가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친구의 생일이었다. 그 친구는 친구의 엄마가 해주신 잡채를 먹었다, 정말 맛있게. 어찌나 맛있게 먹던지 지켜보던 다른 이의 식욕까지 잔뜩 돋우는 먹성이었다. 경수는 긴장하며 젓가락을 들었고 잡채를 집어 먹었다. 그리고 경수는 그날 집에 들어가 저녁을 하는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잡채 먹고 싶어요. “맛있게 먹어.” “더 안 먹고?” “배불러서.” “그럴리가.” 정곡을 찔린 느낌에 전학생을 노려봤지만 전학생은 능청맞게 왼손을 들어 젓가락을 놀리고 있었다. 처음 잡채를 맛 본 경수에게는 이상한 버릇이 생겼었다. 잡채가 나오는 식사는 꼭 모든 음식을 남김없이 먹고는 했다. 그래서 어떤 친구는 잡채가 나오는 날마다 제 식판에 콩이며 팥이며 나물이며 여태 경수가 편식했던 음식을 덜어주곤 했다. 그러고보니 처음 잡채를 맛보게 해준 친구와 식판에 나물을 덜어주던 친구가 동일인물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누구였지? “먼저 갈게. 맛있게 먹고 와.” “교실에서 봐.” 잔반을 버리고 교실로 올라가는 발걸음이 무겁다. 누구였지? 찝찝한 마음이 가득했다. 잡채를 버린 것보다 그 친구를 기억하지 못하는 게 더 찝찝했다. 누구였더라. 경수는 집에 가서 졸업 앨범을 뒤져 볼까 생각해보며 마저 계단을 올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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