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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연비 전체글ll조회 1709


 

 

 

 

 

「그게 다예요? 나랑 헤어지겠다면서 할 얘기라는게 고작 그거뿐이냐구요!」
「…그래, 그게 다야. 알아들었으면 이제 그만하자.」

 

3년간의 오랜 사귐이었지만 끝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그동안 준면의 모든 것을 보았고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생각했는데, 준면은 처음 보는 눈으로 처음 듣는 목소리로 그렇게 이별을 통보했다. 이유도 지나치게 심플해서 할 말조차 없었다. 지겨워질 때가 되었어. 라고. 3년의 시간을 단 한 문장으로 마무리짓는 그에게 납득할 수 있을리가 없었고, 그 당시의 난 다음에 얘기하자며 자리를 박차고 나왔었다. 그 때의 감정은 분노. 그 다음날 준면이 온데간데 없이 종적을 감추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당황, 그리고 일주일― 한 달이 지나도록 그를 찾을 수 없었을 때는 절망, 그 날부터 8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지금은 아마도 아련함 정도일거다. 모든 일엔 세월이 약이라고 했던가. 준면이 사라진 이후 며칠동안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을 벼리는 것 같던 준면의 표정도, 귓가를 왕왕 울리던 단호한 목소리도 모두 사진에 색이 바래듯 추억처럼 변해 있다. 이제는 그를 만나더라도 웃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그래도 이런 만남을 기대했던 건 아니었다.

 

 

 

뭐든지 잘 풀리는 날이었다. 깐깐한 정 교수님께서 웬일로 아침부터 기분이 좋아 칭찬세례를 내리셨고, 일찍 돌아가도 좋다는 허락까지 받은 데다가, 여자친구가 마침 딱 일이 끝났다며 학교 앞에서 만날 약속을 잡았다. 그 약속시간까지 생긴 약간의 텀을 죽이기 위해 나와서 앉은 벤치엔 늦은 오후의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이미 수업은 끝난지 오래라 인문관 앞은 오가는 인적이 드물어 조용했고, 가족 단위로 나들이라도 나온 것인지 저 멀리서 다가오는 부부와 한 아이가 행인의 전부였다. 잔잔한 수면같던 공기를 가르듯이 조그만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기가 아빠 공부하던 데야?"
"응. 아빠가 대학생일 때 공부하던 학교야."

 

그리고 공기가 쨍하고 부서져 내린다. 갑자기 모든 바람이 내려앉기라도 한 듯이 몸이 짓눌리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은 고개를 돌릴 때까지만 해도, 그저 목소리가 비슷한 다른 사람이겠거니 하는 기대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이 목소리에 이 얼굴은 한 사람 뿐이다. 그걸 내 자신은 이미 알고 있었다.


차라리 변했더라면, 새로운 추억의 사진의 찍는 기분으로 가볍게 넘어갔을 텐데― 조금도 변하지 않은 그 모습때문에, 가슴 속에 묻었다 생각했던 옛 사진이 억지로 채색되어 간다. 준면은 잔인하게도 여전히 해사했고 청량했으며 어딘지 아련했다. 8년 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옆엔 상냥한 여자와 영리해보이는 아들을 데리고 이 곳에 와 있었다. 언젠가는 준면을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생각하긴 했지만, 절대 이런 모습을 상상했던 건 아니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배신감이 순간 몸을 휩싸고 돌았다. 그럴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충격를 받는 나 자신이 더욱 충격적이었다.


아빠가 공부하던 곳이라는 얘기에 신이 난 사내아이가 구를듯이 인문관 안으로 쏙 들어가고, '어어, 그러다 다쳐!'라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내며 여자가 뒤따라 들어간다. 그리고 그들의 뒤에서 하얗게 웃는 준면이 이윽고 건물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준면이 인문관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시선으로 쫓다가 문득 헛웃음이 나왔다.

 

추억은 무슨 추억. 망할―

 

빛 바랬다고 믿은 사진들이 이젠 총천연색이다. 아빠의 모습으로, 한 여자의 남자로 등장할 줄이야. 단 몇 초동안의 만남 때문에 8년의 노력이 허송세월 되었다는 게 기가 막히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고.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나 지금이나 준면은 참 잔인했다. 정말로 우스운데 시선이 인문관에 박혀 떨어지질 않는다.
그 때, 카카오톡이 날카롭게 수신을 알렸다. 여자친구였다. 다 왔는데 어디냐―는 카카오톡의 내용보다, 여자친구의 프로필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여자친구는 며칠 전 함께 갔던 공원에서 내가 찍어주었던 자신의 사진을 프로필에 걸어놓은 채였다. 멍하니 그 익숙한 사진을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씨발… 하고 거친 욕설이 터져 나왔다. 모든 일은 세월이 약?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 그래. 여태까지 단 한번도 느낀 적 없는 일이었는데, 준면을 다시 만난 지금은 확실히 알 수 있다.

여자친구는 준면을 너무나도 많이 닮아 있었다.

진짜 대단하다, 김준면. 너무나도 우스워서 조용한 인문관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웃어 버렸다. 이제는 다 잊었다느니 어쩌고저쩌고 잘난듯이 얘기하더니, 아직도 그 추억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오로지 김준면만을 찾고 있었다는 사실이 자조적이었다. 눈에 눈물이 맺히도록 숨넘어가게 웃다가 간신히 끅끅소리까지 내며 호흡을 정돈했다. 여자친구에게 「지금 정문으로 갈게.」라고 답장했다.

8년 전이었다면, 어쩌면 당장 달려가 준면의 손목을 부여잡고 뛰쳐나오는― 뭐 그런 영화 한 편을 찍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젠 그도, 나도, 우리를 둘러싼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 그림처럼 행복해 보이던 가족을 망설임없이 파토낼 정도로 대책 없을 나이가 아니었다. 오늘 나에게 「사실은 네게서 다른 사람을 보고 있었어.」 라는 말로 갑작스럽게 차일 여자친구에게 참 많이 미안해지겠고, 이미 총천연색으로 돌아와 버린 옛 사진들이 다시 빛 바랠 때까지 또 8년, 아니 아마 그 이상으로 아프게 되겠지만―


준면이 웃고 있었다. 나와 사귀던 그 4년동안의 모습과 다르지 않게, 아주 뽀얗게 웃고 있었다.

그거면, 8년에 플러스 8년 더― 울어주지 못 할 것 없겠지.

 

"장하다, 오세훈."

 

스스로를 어깨를 두드려 칭찬하며 학교 정문으로 씩씩하게 발을 옮긴다. 목 끝까지 차오르는 오열과, 납덩이같은 발걸음은 모조리 무시했다.

 

 

 

 

 

***

 

 

 

 

 


"교수님, 오랜만에 뵙네요."

 

준면은 실로 오랜만에 찾은 은사에게 밝은 얼굴로 인사했다. 정 교수는 자신을 유달리 아껴주던 사람이었다. 뜬금없이 유학얘기를 꺼내 당황했을 때에도 이내 준면을 응원해주고 격려해주면서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 정 교수였다. 그렇게 귀이 여기던 제자가 8년만에 방문하겠다고 했으니, 아침부터 기분이 좋던 정 교수는 반갑게 준면을 맞았다.

 

"결혼했다더니, 이 아이가 자네 아들인건가?"
"안녕하세여!"
"허, 그 놈 좀 보게. 또랑또랑한게 아빠를 꼭 닮았군."

 

아기새마냥 입을 짝짝 벌려 인사하는 아이가 귀여운지 정 교수의 얼굴엔 흐뭇함이 어린다.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려는 듯이 아예 쭈그려 앉아 다정히 말을 걸었다.

 

"그래, 이름이 뭐냐?"
"하나유치원 사슴반 김세훈이에여! 다서쌀이에여!"
"세훈이란 말이지? 좋은 이름이구나."

 

나이를 표현하기 위해 쫙 펴 보인 고사리같은 손에 딸기사탕을 하나 쥐어주자, 세훈의 얼굴에는 이미 함박웃음이 가득 내어 걸렸다. 원래는 어린 아이들은 물론이거니와 제자들에게조차 살가운 티를 잘 내지 않는 분이셨는데, 그새 나이를 많이 드셨구나. 잔잔하게 웃으며 그 모습을 바라보던 준면이 시선을 돌려 정 교수의 연구실을 돌아 보았다. 언제나 익숙한 환경을 선호하는 정 교수답게 그 오랜 세월에도 연구실의 가구배치가 거의 변하지 않아, 옛날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준면은 유학을 핑계로 학교를 그만 두었던 그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도 정 교수를 찾아오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는 학교에 오기가 힘들었다. 준면에게 대학교란 오세훈에 대한 추억이 너무 선명해서 지금도 너무나 아픈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아이는 '세훈'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아들의 이름을 굳이 세훈으로 고집하는 자신 때문에, 아내와 예상치 못 한 말다툼을 한두 번 한 것이 아니었다. 여태까지 아내와의 노골적인 갈등은 모두 피해왔던 준면이지만 이것만은 그리해야 했다. 8년이 흘렀는데도 참 구질구질하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비웃은 적도 많았지만 그래도 준면은 단 한번도 아들의 이름을 '세훈'이라 지은 것에 후회하지 않았다. 아들이 태어난 이후 준면은 하루에도 수백 번씩 세훈아 세훈아 이름을 부를 때마다 통증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눈물이 나도록 생생하게 그를 떠올릴 수가 있었다. '세훈아, 사랑해.'라고 입 밖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이 지금 준면의 헤어진 마음을 덮는 가장 좋은 약이었다. 그는 아마 듣지 못 할 것이다. 알지도 못 하겠지만, 그래서 다행이었다. 이제는 자신을 모두 다 잊고 아름다운 누군가와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을 세훈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딸기사탕을 조그만 입에 가득 물고 좋아하는 세훈의 작은 손을 잡은 정 교수가 나가서 저녁식사를 같이 하자며 연구실의 문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라고 인사했니, 세훈아?'라며 아내가 먼저 연구실을 빠져 나갔고, 뒤늦게 '감사합니다!'라고 이야기하는 아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준면이 떨어지지 않는 시선을 애써 거두고 연구실의 불을 껐다. 쿵 하고 묵직하게 닫힌 연구실의 열린 창문으로 늦은 오후의 바람이 불어 들었다.

 

 

 

 

 

 

 

 

 

 

 

* 준면이 왜 갑작스럽게 이별을 통보했는지는 미스테리 미스테리.... 하지만 아마도 세훈을 위한 일이었을 겁니다.

 

* 8년동안이나 학교에 오지 않던 준면을 정 교수가 억지로 불러낸 것은, 자신의 퇴임 후에 준면을 추천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자리를 준면이 받아들이면, 정 교수의 연구실에 있던 세훈과 페이스 투 페이스하게 되겠지요. 결국은 가정 파탄의 길로~(-_-)~.......... 가 아니고, 해피엔딩으로ㅠㅠㅋㅋㅋㅋㅋ

 

* 사랑했던 사람을 잊지 못 해서 무려 아들에게 그 사람의 이름을 붙인 준면씨..... 대다나다. 내가 그 아내였으면 뭐 이런 천하의 나쁜자식이! 이랬겠지만, 난 세준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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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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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아련하네요 ㅠㅠㅠ뭔가 절절한 사랑이 느껴집니다..!
12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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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2
아련해요 잘읽고갑니다ㅠㅠㅠㅠ
12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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