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기야, 비 와."
― ... 뭐? 비? 야 안 돼, 나 지금 데리러 못 가. 무슨, 잠시만.
알바를 끝내고 나오자마자 나를 맞이하는 건 초저녁의 푸르스름함이 아니라 차가운 빗방울이었다. 아침에 분명 맑다고 해서 우산은 쳐다도 안 보고 빈손으로 나왔는데.
통화하다가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내 말에 윤기는 당황했는지 말이 빨라졌다. 윤기의 작업실엔 창문이 없으니까 잠시만이라고 말하고 바깥 날씨를 확인하러 갔겠지.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움직이는 소리에 아무 말 없이 있다가 그가 다시 어 얘기해, 라 했을 때 나는 다시 입을 뗐다.
"아니, 데리러 오라는 건 아니었고 그냥 빗방울이 보이길래 한 말이야."
― 진짜 많이도 온다. 우산 가방에 넣고 다니라고 한 건 듣지도 않지.
"이럴 줄 알았나... 택시 타면 되니까 괜찮아!"
― ... 택시?
"응, 오래 안 걸리니까 요금 많이 안 나와~"
― 그럼 더 늦기 전에 서둘러. 밖에 오래 있으면 감기 걸리니까.
무심한 말투이기는 해도 나 걱정해 주는 사람은 역시 민윤기밖에 없다니까. 알겠어, 집 가서 다시 연락할게! 꼭 서둘러서 들어가라는 윤기의 말을 깊게 새기고는
전화를 끊고 택시를 부르려고 지갑을 뒤지는데... 지갑이 없다? 아, 나 알바할 때 지갑 안 가지고 다니지. 순간 머리에 혼란이 찾아왔다.
다시 알바를 하러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 어떡해. 어떡해. 머릿속으로 어떡해라는 말만 반복하는 사이 빗방울은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진짜 어떡해... 김탄소 정신 나갔지."
더 고민할수록 바람만 많이 맞고 달라질 건 없다. 그러니까 눈감고 딱 15분만 전속력으로 뛰자. 하나, 둘...
셋하고 편의점에서 빠져나온 순간 머리 위로 그늘이 드리웠다. 이거 먹구름인가.
"정신 나갔네, 이 비를 다 맞고 가려고 한 거면."
"... 너 못 온다며?"
"니가 알바 나갈 때 지갑 들고 나가는 거 봤냐? 전화로 택시 얘기 꺼냈을 때부터 오고 있었어."
어째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있는 기분에 괜히 좋아져 배시시 웃으니 윤기는 뭐가 좋냐고 타박을 주며 고개를 돌렸다. 자기도 좋으면서...
"빨리 가자, 밖에 오래 못 있어."
"응? 으응......"
민윤기는 그렇게 말하면서 내 어깨를 팔로 감싸왔다. 비 많이 맞으면 괜히 감기 걸리고 또 아프다고 오라고 할 거잖아. 하여튼 민윤기 츤데레는.
집 가는 내내 많은 얘기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여러 생각이 들었다. 종종 우산을 챙기지 않고 나와야겠다, 가끔은 이런 것도 괜찮은 것 같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하는 걸 들키면 혼나겠지만. 그렇게 걷다가 우리 집 앞에 거의 도착했을 때, 윤기는 시계를 확인하더니 나에게 우산을 건넸다.
"얼른 가 봐야 하니까 그거 쓰고 끝까지 들어가. 미안해, 지금은 정말 좀 상황이 그래."
"알겠네요, 이것도 이해 못 할까봐... 얼른 가. 와 줘서 고마워 윤기야. 근데 너는 우산 어떻게 하게."
"나 간다."
뭐, 야! 민윤기! 우산을 들고 있지 않은 한쪽 손을 뻗어 민윤기를 몇 번이나 불렀지만 손만 흔들고는 빠르게 빗속으로 사라졌다.
저렇게 갈 정도로 급한데 내가 비 맞을까 봐 왔다니, 우산 챙기지 말아야겠다는 말 취소. 두 개씩 가방에 넣고 다녀야겠다.
그가 쥐고 있던 우산의 손잡이의 온기가 손을 타고 전해져오는 느낌에 괜히 만지작거리다가, 나도 집으로 들어갔다.
[나 혼자 갈게]
김태형에게 이렇게 딱딱하게 문자를 보내는 것도 오랜만의 일이었다. 한동안 잠잠하다 했어. 꼭 이렇게 싸워야 하는 이유가 대체 뭐냐고.
내 얘기를 조금만 더 들어줬어도 오해라는 걸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내가 다른 남자랑 둘이 도서관을 왜 가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했다.
그가 교실을 비운 사이 일방적으로 문자를 보내고는 학교 현관을 나왔다. 아무도 보기 싫었다. 특히 김태형을 보면 눈물이라도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몇 걸음 걷지 못하고 나는 발걸음을 멈춰야만 했다.
"아, 비......"
날씨도 나를 안 돕는다. 어제까지 비 온다고 해서 딱 어제까지만 가지고 다니다가 오늘 놓고 왔는데 이렇게 비가 오는 건 무슨 경우람.
안 그래도 우울해 죽겠는데 더 서러워서 눈물이 나왔다. 흐으...... 흐느끼는 소리는 나는데 비에 가려져서 우는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잘됐지 뭐.
"아 몰라 그냥 갈 거야..."
감기에 걸리든 말든. 핸드폰을 주머니에 찔러넣고는 그대로 걷기 시작했다. 머리부터 시작해서 교복과 가방이 순식간에 젖어들어갔다.
몸에 달라붙는 젖은 느낌이 소름돋았지만 그것보다는 지금 내 기분이 너무 복잡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평소대로라면 김태형한테 전화나 문자를 해서
데리러 오라고 했겠지만... 알게 뭐야. 내가 우산을 챙겼는지 안 챙겼는지도 모르겠지.
그렇게 몇 분을 더 걸었지만 집은 가까워지지 않고 웅덩이진 길만 계속해서 보일 뿐이었다. 허탈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다.
더 걸을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결국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다시 서럽게 울며 결국 내 본심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김태형 왜 안 오는데! 진짜 싫어... 흐엉..."
"야, 김탄소. 누가 안 와?"
"짜증 나 진짜 김...... 너, 흐으,"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무의식적으로 대답했는데, 진짜 김태형이 익숙한 까만 우산을 들고 화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화를 내기 전에 제 마이를 내게 입혀 주고는 말없이, 내 얼굴에 맺힌 언제 그쳤는지도 모를 빗물 섞인 눈물을 닦아 주었다.
"핸드폰은 왜 안 보는데. 우산 없으면 없다고 말을 하든지."
"...... 핸드폰 못 꺼내."
"오해해서 미안해, 다음부터는 다른 사람 말 안 듣고 네 말만 들을 거야. 그러니까 빨리 집 가자 못생긴 애 감기까지 걸리면 큰일이잖아."
아무리 애교있다고 해도 자존심 세기로 유명한 김태형이 이렇게 말할 정도면 충분히 미안하다는 뜻이겠지.
"나도... 미안해. 네가 말 안 들어줘서..."
"알겠어. 내가 나쁜놈이야, 와 김태형 진짜 못됐다 그지? 누구 남친인지 진짜."
어느새 짓궂은 표정으로 나를 웃게 만들어 준 김태형은 갈 때까지 내 손을 꽉 잡고는 놓지 않고 우리 집까지 걸었다.
이렇게 금방 풀릴 거면서 서로 왜 그렇게 자존심을 세웠던 건지. 그래도 비 아니었으면 꽤 오래 갈 뻔했는데, 차라리 비가 와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들어가. 감기 걸려서 오면 주욱는다."
"알겠어. 마이 가지고 가."
"아 맞다. 나 간다~ 자기 전에 전화하는 거 잊지 말고."
그렇게 인사하고는 엘리베이터를 타 핸드폰을 확인했다. 부재중이 5통이나 와 있었고 문자가 3통 와 있었는데,
[너 우산 없잖아 아침에 올 때 다 봤어]
[아 그새를 못 참고 갔냐 진짜 어딘데]
[미안해 울지 마]
마지막 문자 보고 울 뻔했다는 건 비밀이다. 물론 다른 의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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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는 연속 두번이나 나왔네요 그리고 태형아 안울게 8ㅅ8
저번에 댓글 달아주신 한 독자분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근데 이건 뭔가 자기만족 같아 ㅎ... 다음에는 남준이를 쓰고 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