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정의 수평선 01
일단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전정국과 박지민 둘은 청소년과 어른의 경계, 그 어딘가 즈음인 열여덟. 같은 반인데도 불구하고, 인사하는 것이 손가락에 꼽을 만큼 좋지 못해. 표면상으로 비춰진 둘은 서로에게 어색하고 이질적이며, 두 사람이 같이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다 민망해 할 정도로 나쁜 사이였어. 둘 다 착하게 생겨서 안 그럴 것 같지만, 사실 둘은 교내 치정극의 중심인물들이었거든. 이렇게 누가 봐도 접점이나 교집합이 없어보이던 둘. 하지만 사실 처음부터 둘의 사이가 이런 건 아니었어. 어쩌면 친해질 수도 있었었지. 지민이는 학기 초엔 정국이와 친해지고 싶어 했으니까.
1)
3월 초, 2학년이 되고 이과를 선택한 친구들과 다르게 홀로 문과를 택한 지민이. 사교성과 사회성이 뛰어난 둥글한 성격이라고 칭찬 받았지만, 아무도 모르는 반에서 적응하는 것은 쉽지 않으리란 생각이 들어서 남들보다 조금 더 빨리 등교를 했어. 가서 자리를 맡아놔야 근처에 앉을 아이들과 친해질 수 있다고 판단했거든.
나름 빨리 준비한다고 했기 때문에 당연히 1등이겠거니, 하고 문을 열었는데 막상 마주한 현실은 상상과는 조금 달랐어. 자기보다 빨리 온 애가 있는 거야. 문을 열자 보이던 하얀 얼굴은 바로 정국이였어. 학교에서 거의 완벽하다고 칭해질 만큼 모범생에다가, 여자아이들의 입에 오르고 내릴 만큼 잘생긴 얼굴로 이미 유명인사였어. 그렇기 때문에 지민이는 정국이와 친하진 않았지만 얼굴과 이름은 알고 있는 상태였고. 평소 구김살 없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친근한 성격이었던 지민이는 이참에 잘생긴 친구 한 번 만들어나 보자, 하는 생각으로 엎드린 채로 자신을 바라보는 정국이한테 웃으면서 인사를 해.
-안녕
하지만 정국이는 받아주지도 않고 그렇다고 '왜 친한척해?'라고 틱틱 거리지도 않아. 그저 지민이 얼굴을 뚫어져라 눈에 담기만 해. 거기서 지민이는 민망함을 느껴서 아무 자리나 잡고 빨리 앉아. 일부러 시선이 부딪히는 것을 피하기위해 핸드폰이나 만지작거리고. 이렇게 숨이 막힐 듯 어색했던 첫 만남이었지만, 이 날 이후로 정국이랑 지민이는 별 다른 부딪힘 없이 지내.
지민이는 엄청나게 평범한, 자기와 비슷한 성향을 가진 남자아이들과 같이 다녔고 정국이는 이리저리 학교에서 '좀 시끄럽다'라는 평을 받는 아이들이랑 같이 다녔으니까. 그래서인지 그 당시의 지민이에게 정국이는 그냥 '잘생긴 값 하는 친해지기 힘든 애'정도의 인상이었어. 이따금씩 정국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모를 표정으로 지민이를 빤히 보긴 했지만 그 외에 말 거는 것도 없었고. 같이 다니는 무리도 다르고, 부활동도 다르니 별다른 접점이 없는 채로 4월까지 지냈어.
2)
그러던 어느 날, 지민이에게 좋아하는 애가 생겼었어. 학교에서 좀 기가 센 여자아이들이랑 친한 여자아이였는데, 언젠가 말을 한 번 섞어본 것을 계기로 ‘친구’라는 사이로 남게 된 아이었어. 얼굴도 예쁘장한 애가 자기 친구들하고 다르게 말도 사근사근하고 여성스럽고, 무엇보다도 지민이 이야기에 ‘공감’과 ‘수긍’을 해주는 탓에 지민이가 반한거지.
누군가를 좋아한 적이 살면서 많이 없던터라, 지민이는 그 여자아이를 좋아하는 걸 정말 티를 많이 내. 어느 정도냐면 반 친구들도 다 알고, 선생님들까지 알다 못해 짝사랑의 당사자와 그의 측근들도 알 정도야. 한 마디로 전교생이 안다는 거지. 오죽하면 친하지도 않던 정국이 친구들까지 지민이를 밀어준답시고 장난을 쳐올 정도니까. 그렇게 주변 사람들의 열렬한 지지 속에서 지민이는 조금씩 이유 모를 자신감을 얻어. 그 자신감이 가득 차오르던 어느 날, 여자아이에게 고백하기위해 준비를 하기 시작했고.
반에서 제일 친한 친구 석진에게만 '다음 주 월요일 날 고백할 거야'라고 수줍게 이야기했는데 석진이가 장난이랍시고 '다음 주 월요일 날 박지민이 고백을 한답니다!'하고 엄청 크게 공고했어. 어차피 아이들이 다 아는 사실이고, 다른 애들 도움 좀 받자 싶어서였지. 그러자 애들이 다 일동 박수쳐주고 휘파람 불어줘. 밀어준다고 난리 치는 애들도 있었어.
그 난리 속에서 지민이는 이유 모를 창피함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상태로 정국이랑 눈이 마주쳤어. 정국인 평소에도 자길 자주 쳐다봤으니까 지민인 시선을 피하지 않았는데, 그날따라 정국이가 먼저 시선을 피하곤 책상에 엎드려. 평소완 다른 모습이었지. 묘하게 우울해보이고, 상처받은 것 같아 보이기도 한 모습이었어.
3)
그렇게 목요일이, 금요일이 차례로 눈 깜빡할 새 지나가고 휴일이 와. 당장 결전의 날인 월요일을 앞둔 상태인 터라 지민이의 텐션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상태였어. 그동안 자신에게 진심으로 잘해주고, 이해해준 연주에게 좋은 친구이자 남자로 보이고 싶어 진심을 담은 편지를 쓰고 있었어. 그렇게 지우고 다시 쓰고, 또 지우기를 반복하던 중에 갑자기 이과를 가 헤어지게 된 친한 친구 호석이에게서 카톡이 와.
[야, 빡찌!!!!!!대박이야!!!!!!!!!!1]
[니가 좋아하는 여자애 있잖아. 연주인가? 현주인가?]
[연주야 연주]
[아무튼 연주가 왜??]
[그 여자애 전정국이랑 사귐]
[걔 너한테 여지주고 난리도 아니였잖아;;;]
갑작스러운 소식에 지민이는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당황하기 시작했어. 그렇게나 자신이 연주를 좋아하고 있다고 아이들의 입방아에 오르고 내려졌는데, 그걸 정국이가 모를 리가 없었거든. 그래서 혹시나 호석이의 장난이 아닐까 하는 마음에 연주에게 사실을 묻기위해 연주의 이름이 적힌 프로필을 눌렀는데, 연주의 단독 사진이 있어야 하는 곳에 정국이의 뒷모습이 자리하고 있었어.
상메는 'ㅈㅈㄱ♥'. 누가 봐도 전정국이의 초성었지. 열심히 적어 내려가던 편지가 쓸모 없게 느껴지고, 자기 자신이 바보라고 느껴지던 순간이었어. 한참이나 잘 되가고 있던 둘 사이에서 아무 것도 모르고 눈치 없이 행동한 것 같아 창피하기도 했어. 그래서 쓰던 편지도 구기고 책상에 엎드려. 눈물이 나오기 시작했거든. 눈물의 의미는 창피함이기도, 원망이기도, 또 이유 모를 화이기도 했어. 짝사랑 하는 동안엔 말 한 마디 거는 것도 좋은 나날들의 연속이었는데, 짝사랑이 무참히 깨지고 나자 그 파편에 마음이 크게 다친 것 같았어.
4)
연주와 정국이의 연애 소식을 듣고 나서, 그렇게나 오지 말라고 그렇게나 기도한 월요일이 오게 되었어. 교실로 향하는 길이 지옥으로 향하는 황천길인양 교실로 향하는 발걸음은 맥아리가 없었어. 교실 문을 아주 천천히 열고 들어가니 정국이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와.
정국이를 둘러싼 친구들은 '너 오늘부터 김연주랑 데이트 하겠네?','새끼 좀 쳐주라'하고 농담하고 있었어. 지민이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서인지, 지민이가 있는 것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들이었지. 자신이 불청객으로 느껴지게 만드는 그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싫었던 지민이는 조심스럽게 들어가려고 했어. 그냥 안 좋았던 기억으로 치고 넘어가고 싶었거든. 어린 날의 치부, 딱 이정도로 남기고 싶어서. 그래서 지민이는 눈을 내리깐 채로 자리로 가. 그런데 어쩐일인지, 평소엔 대화 한번 제대로 해본 적 없던 정국이가 지민이를 빤히 보면서 입을 열어.
"박지민, 이제 내 여자 친구한테 신경 꺼."
그 말에 반은 침묵에 젖어 들어가. 완벽한 영역표시였어. 자신의 여자 친구에 대한 소유욕 비스무리 한 거라고 머리론 이해가지만, 고백도 하지 못하고 차인 상태인 지민이는 공개적으로 당한 망신에 이를 악물어야했어. 곧 눈물이 떨어질 것처럼 고여 왔었어. 지민이는 눈물을 단 채로 간신히 말을 뱉어.
“그래, 존나 축하한다. 씨발 새끼야.”
일촉측발의 상황이라고 생각한 석진이와, 실장인 남준이는 지민이의 어깨를 잡고 교실 밖으로 향하게 만들어. 그렇지만 지민이의 눈은 여전히 정국이를 바라보고 있었어. 아주 원망스럽다는 듯이. 그렇지만 지민이를 보는 정국이의 눈엔 별 다른 감정이 없어보였어. 지민이는 친구들에게 이끌려 복도로 나가면서도 계속해서 자신을 바라보는 정국이와 눈을 맞춰.
5)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정국이와 지민이의 관계를 잇던 희미한 끈에 칼을 내리꽂은 격이었어. ‘전정국’과 관련된 이야기 하나라도 들으면, 해사하게 웃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렸으니까. 이렇게 학기 초부터 꼬여버린 둘의 사이. 그렇기만 기름을 부은 사건은 따로 있었어. 정국이가 연주와 사귄지 얼마지나지 않아, 홀로 마음을 정리하지 못하고 미약하게 남은 감정을 앓고있던 지민이에게 열한시쯤에 연락이 온 거야. 그것도 제가 그렇게나 홀로 좋아하던 연주에게서.
전화를 받으니,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엔 물기가 먹먹하게 깔려있었어. 울고 있었다는 것을 눈치 챈 지민이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니 자신이 처한 상황을 서럽다는 듯이 이야기했어. 이야기를 들어보니, 정국이가 중학교 시절 알고 지내던 친한 형들 하고 술 마시고 있는 데, 형들이 장난친다고 '전정국이 여자 친구 좀 볼까?'하고 연주를 불러냈다는 거야.
아이들 이야기에 따르면, 둘은 고백은 정국이가 했지만 연주가 정국이를 더 많이 좋아하는 불공평한 관계였었어. 감정적인 을의 위치였던 연주는 자기 남자 친구의 사람들과 친해질 수 있으면 더 나은 관계로 발전할 수 있을 거라는 판단에 연락받고 바로 나간 거고. 가면 정국이가 반겨주지 않을까, 란 미약한 기대심리도 어느 정도 자리하고 있었어. 밤이지만 최대한 깔끔하게, 또 단정하게 꾸미고 간 연주를 가게 뒤편으로 데려간 정국이가 처음 뱉은 말은,
-왜 온 거야. 형들 장난이라고 내가 오지 말라고 연락 했잖아,
-·······아, 그게 난.
-집에 가. 빨리.
라는 단호한 말들이었어. 마치 연주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피곤하게 느껴지는 것 같은 모습이기도 했어. 사람들이 많은 자리이지만 그곳에 발을 들여 보지도 못하고 근처에 혼자 쭈그리고 앉아 계속해서 서러움에 우는 수밖에 없었어. 이런 연주의 이야기에 지민이는 화가 나 입술을 깨물어. 애정 관계를 떠나서 사람을 짐짝 취급하는 정국이에게 화가 나. 그래서 ‘거기로 금방 갈 게, 전정국이 그 새끼 잡아놔. 뭐라고 한 마디 해주게.’라는 말을 뱉곤 바로 그곳으로 가.
다홍색의 불빛이 은은하게 새어나오는 가게 앞으로 도착했을 때엔, 지민이 모습은 엉망이었어. 봄인데도 저녁이라 추운 편인데, 연주가 얼마나 걱정되었으면 반팔만 입고 온 상태였어. 늘 정갈하던 앞머리 다 헤집어져있었고. 통화 내용이 사실이라는 걸 알려주듯 가게 앞에 멍하니 앉아있던 연주는, 지민이 얼굴보자마자 다시 눈물을 터뜨려. 정국이가 나 안 좋아하나봐, 라는 말과 함께 흐느끼는 연주를 착잡한 심정으로 달래줘.
그렇게 한참을 옆에서 달래주고 있었는데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어. 사람으로서의 직감, 같은 걸로 조금 찝찝한 느낌이 나는 곳을 보니 그곳엔 정국이가 자리하고 있었어. 정국이는 아무런 표정 없이 지민이랑 연주가 같이 있는 걸 눈에 담고 있었어. 자기 여자 친구가 다른 남자랑 있음에도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를 행동만 취하고 있었지. 그런 뻔뻔한 얼굴에 화가 난 지민이가 연주에게 ‘내가 뭐라고 할 게, 집에 가. 추워’라고 달래서 보낸 뒤, 정국이에게 다가가. 지민이가 앞에 서자 정국이가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떠보여. 지민이는 그러거나 말거나 멱살을 잡아채.
-너 뭐하는 새끼야.
-·······남의 여자 친구가 운다고 이 늦은 시간에 나오는 놈한테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화를 내었지만, 정국인 표정하나 바뀌지 않고 되받아쳐. 오히려 이 상황이 잘 되었다는 것 같은 행동이기도 했어. 답답함에 인상이 더 찌푸려지는데, 갑자기 정국이가 손을 들어올려. 지민인 자기 때리거나 똑같이 멱살을 잡는 줄 알고, 몸에 작게 힘을 주었는데 거센 손길은 느껴지지 않아. 오히려 세심하게 앞머리를 정리해주는 손길이 느껴져.
-뭐하는 거야, 나랑 장난 하냐.
그 말에 정국이의 입매가 호선을 그려.
-너, 김연주 아직도 좋아하잖아.
-·······
-그럼 멋있게 하고 나왔어야지, 꼬라지 하고는. 너 지금 존나 추해.
내가 봐도 추한데, 김연주는 어땠을까, 하고 웃는 목소리에 정국이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풀려. 정국이는 적선한다는 태도로 지민이에게 가게에 배치 된 담요를 내밀어. ‘여기 주인이 아는 형이라 너 하나 준다.’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야. 담요는 따뜻해 보였어. 하지만 지민이는 차가운 몸을 하고도 받지 않으려고 밀어내.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거든.
그러나 어거지로 지민이의 품에 담요를 안겨준 정국이는 ‘그거 너 가져. 빨리 집에 들어가. 내 여자 친구 문제는 내가 해결할 거니까, 따라가지 말고.’라고 이야기하곤 가게 안으로 들어가. 담요를 든 지민이는 정국이의 뒷모습을 원망스럽게 볼 뿐이야. 안그래도 충분히 거슬리는 놈이었는데, 자신을 동정하는 행동을 하니 더 밉게만 보였어.
6)
사실 이 날 이후로 지민이는 연주가 정국이를 안 좋아할 가라고 생각했어. 그만큼 상처를 준 놈이니까. 서럽게 울던 연주가 정국이를 받아주는 것이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지. 하지만 연주는 정국이와의 일을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지민이에게, 해맑은 얼굴로 정국이와 화해했고 여전히 자신은 정국이를 좋아하고 있다고 이야기해. 그 이야기는 정국이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확인 시켜줌과 동시에 지민이에게 보이지 않는 선을 긋고 있었어. 그 미소에 지민이는 어색하게 웃어보여. 당장이라도 무너져내릴 것 같았지만 괜찮은 척하려고 노력했어. 그 순간부터 전정국은 박지민에게 어떻게 해봐도 넘을 수 없는 벽이 되어버렸어.
/ 수정완료.. 한 줄 알았으나 이번에 다시 수정...ㅜㅜ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최신 글
위/아래글
공지사항
없음


인스티즈앱